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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비밀한 사건(예레미야 33장 1절~9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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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비밀한 사건(예레미야 3319)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다시 임하니라. 가라사대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라. 무리가 이 성읍의 가옥과 유다 왕궁을 헐어서 갈대아인의 흉벽과 칼을 막아 싸우려 하였으나 내가 나의 노와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 시체로 이 성에 채우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의 모든 악을 인하여 나의 얼굴을 가리워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 라.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내게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나의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나의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강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

 

한 어린 소년이 아버지께 질문을 했습니다. "아빠, 전쟁은 무서운데 어른들은 왜 전쟁을 시작하나요?" 아버지는 현명한 대답을 하고 싶어 잠시 생각하다가 "얘야, 네가 알아듣기는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다. 그러나, 한가지 예를 들면, 1914년에 일어났던 세계전쟁은 독일이 벨지움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단다"라고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는 "여보, 아이에게 가르치려면 진실 되게 바로 알려야죠. 그 전쟁은 처음에 누군가가 살해되어 복수하고 또 복수하다가 시작된 거죠"하며 남편의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화가 난 남편은 아이에게 적절하게 전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아내는 반대하여, 서로 언성을 높이다가 아내가 먼저 문을 꽝 닫고 나가 버렸습니다. 이 광경을 본 아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전쟁이 왜 시작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고 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전쟁은 왜 있는 것입니까? 알고 보면 무식하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얼마나 무섭고 그 결과가 얼마나 비참하다는 것을 진정 모르기 때문에 겁없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전쟁을 통해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어버립니까? 잃어버리는 것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실 때에 "검을 가진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26:52)고 경고하셨습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고 폭력을 쓰는 자는 폭력으로 망합니다.

이 진리를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 때문에 전쟁이 있고, 이 진리를 믿지 않는 불신앙적인 사람들 때문에 전쟁이 있습니다. 물론 전쟁의 이유는 정치적인 것, 경제적인 것, 문화적인 것, 그리고 민족적인 것의 복잡한 문제가 뒤섞여 있겠습니다만, 저 깊은 곳에는 하나님의 비밀한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복잡하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전쟁은 죄와 부도덕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말씀합니다. 사람들의 죄와 포악과 교만과 정욕 때문에 전쟁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이 겪은 625전쟁을 다시 상기하면서, 전쟁에 대해 성경이 교훈하고 있는 바를 생각하려 합니다. 특히 선지자들이 외치고 설파한 메시지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전쟁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죄악 중에 빠져서 부도덕하고 포악하며 교만한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사람들에게 집행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전쟁입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이끄실 때, 여호수아로 하여금 여리고 성을 함락하게 하셨습니다. 얼핏보기에는 여리고 성을 점령했다고 단순하게 보겠지만 여기에는 신학적인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성을 점령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들어가서 남녀노소는 물론 짐승까지도 다 죽이고 모두 불태워 하나도 남기지 말라고 엄하게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토록 잔인하신 것입니까? 분명히 다 쓸어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쟁에 강합니다. 이스라엘의 5백만 명이 3억 인구를 대상으로 해서 싸워도 끄떡없이 견딜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전쟁에 대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사람들입니다. 전쟁이란 하나님이 섭리하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집행하게 하신다는 전쟁 신학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 "전쟁은 하나님의 훈련 과정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요 징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는 자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특별 프로그램입니다. 들려주고 보여줘도 안 될 때에는 비상수단이라는 훈련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적인 안목에서 보면, 전쟁이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려운 전쟁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시는가, 혹 주무시지나 않는가 하고 어리석은 자문들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질문들을 용납치 않습니다. "내가 저 땅을 너희에게 주었다. 하나님이 네 손에 붙였다. 이 전쟁을 이기게 했다"고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그의 능력과 경륜과 주권 안에서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무엘상 17:47에 보면, 어린 다윗도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라고 외치며 골리앗을 향하여 용감하게 달려가지 않습니까? 이제 영적인 안목으로 전쟁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625를 통해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습니까? 흔히 우리들은 625를 겪었다 또는 경험했다고 말합니다만 듣는 것과 보는 것과 경험하는 것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전쟁을 몸소 경험하신 분이 얼마나 됩니까? 바로 머리 위에서 총알이 날아다니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시체와 피비린내를 직접 맡아본 사람은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가를 알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가 전쟁을 경험한 세대와 경험하지 못한 세대와의 갈등입니다. 오래전에 어느 대학 영문과에서 625에 대한 경험을 영어로써 보는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 대학생들이 625 당시에는 국민학교 학생 시절이니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몇몇 학생들이 기억을 더듬어 겨우 쓴 내용인즉, 공부하지 않고 트럭을 타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밀려가던 일이 마치 피크닉 가는 기분이었다고 술회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니 다소 낭만까지 있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철없는 생각인지 모릅니다. 전쟁을 경험한 자와 구경한 자 사이에는 이토록 큰 간격이 있습니다. 그러면 625를 겪은 뒤에 온 손실은 무엇입니까? 각종 시설물의 파괴와 생명의 손실은 물론이거니와 일반적인 도덕률까지도 파괴되었습니다. 또한 전쟁 후에는 어느 역사를 보아도 유행병이 돌게 됩니다. 기록에 의하면, 전쟁으로 죽은 사람보다 유행병으로 죽은 사람이 훨씬 많다는 통계입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후유증으로 정신적인 파괴를 들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부지런하게 쌓아올린 재산, 지위, 명예가 일시에 무너집니다. 그렇게 되면, 성실하고 부지런해야 할 이유가 상실되어 가치관까지 뒤범벅이 되고 맙니다. 한편으로 약삭빠른 사람들은 전쟁을 이용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게 됩니다. 여기서 사행심과 도박이 생기며, 사치와 방탕이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흐려놓는 것입니다. 또한 기지촌의 문화도 생깁니다. 드디어는 인간성이 파괴되고 향락주의, 찰나주의, 한탕주의로 온 사회가 몸살을 앓게 되는 것입니다. 이 후유증은 전쟁이 끝난 40년 이후인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니 얼마나 큰 영향력입니까? 물론 전쟁으로 인하여 얻어지는 것도 있습니다. 기술을 얻고, 어느 한편에서는 새로운 가치관도 생깁니다. 돈과 재산은 아무리 있어도 전쟁이 나면 소용없고, 배우는 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교육열이 바로 전쟁을 통해서 얻어진 소득입니다. 또한 전쟁 속에서 새로운 인도주의도 생겨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리라"고 전쟁을 허용하고 계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총소리가 귓가에서 맴도는 전쟁터 한가운데서 부르짖는 기도만큼 절실하고 참된 기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여, 내 생명을 살려 주옵소서" 라는 이 순간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믿음의 자세입니다. 19432차대전 때에 연합군 군함 3천 척과 군인 8만 명이 지중해 말타 항구를 떠나 시실리 섬으로 쳐들어 갈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많은 장비와 군인들이 일시에 떠나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아이젠하워 장군은 차렷자세로 정중하게 거수경례를 했습니다. 옆에 있던 다른 참모들도 모두 함께 경례를 했습니다. 이어서 장군은 하나님께 "하나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기술과 노력을 다 동원하여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제, 지금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깁니다"라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가능한 수고와 노력은 하지만,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전적으로 위탁하는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 기도를 원하시어 하나님은 엄청난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 기도하게 하는 비상수단이 바로 이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의 귀한 풍속도 바로 전쟁으로 인해 시작된 것입니다. 진실을 되찾은 것이 전쟁으로 인해 얻은 최고의 가치입니다. 허세와 교만이 깨어지고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그 역사는 전쟁으로 이루어지는 소득입니다.

본문은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전쟁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포로 되게도 하시고 포로에서 돌아오게도 하시어 강하게 단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십니다. "내가 죄를 사하리라. 내가 치료하리라. 찬송과 영광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나님의 선교적인 역사가 이루어짐을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많은 청년들이 포로 신세가 되어 비참한 역사가 이뤄지는 것 같았으나, 그 포로 속에는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포로 되어서도 바벨론 정부의 요직에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전쟁으로 인하여 선교사를 파송하는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포로 되어 가는 일은 비참한 사건입니다만, 이것을 통하여 선교가 이루어짐을 주시해야 합니다. 몇 년 전에 저는 30권으로 된 월드북이라는 백과사전을 샀습니다. 책을 사자마자 한국에 대한 기사가 궁금해서 찾아보니 3면 정도의 적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4면을 할애했으니, 세계 사람들이한국하면 전쟁으로 찌들린 나라로 인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전후 4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의 사정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어딜 가나 올림픽이 톱 뉴스입니다. 이제한국하면 올림픽이 열리는 나라로까지 변해왔단 말입니다. , 겸손한 마음으로 생각해 보십시다. 625없이 올림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전쟁 속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훈련시키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그러면, 어떤 목적으로 훈련시키신 것입니까? 이 백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교적인 큰 역사를 이루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코벤트리(Coventry)라는 도시에 큰 교회가 있었는데 2차대전 때다 타 버리고 교회 한쪽 벽만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습니다. 그 벽은 그대로 보존되면서 "하나님 아버지, 용서하십시오"라는 큰 팻말이 붙어 있습니다. 많은 관광객들로 하여금 이 현장을 그대로 보게 하여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일본의 히로시마에는 원자탄이 떨어졌던 곳에 박물관을 짓고 전쟁의 흔적을 그대로 보관하여 후세인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독일의 베를린에도 대단히 큰 카이제르 기념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 교회 역시 모두 불타서 종탑만 우뚝 서 있습니다. 후에 교회를 다시 지을 때에도 그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바로 옆에다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625 흔적은 어디로 갔습니까? 유감스럽게도 아픔을 볼 수 있는 산 증거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경험과 아픔은 점점 잊혀지고 있습니다. 증거 없이 아무리 전한들 설득력이 없습니다.

아니, 시간이 점점 지남에 따라 마치 전쟁은 없었던 것처럼 무감각해져 정신이 해이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625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가 오늘 우리에게 있다면 다시 625는 재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원인이 생기면 다시 전쟁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 독수리는 모입니다. 독수리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전쟁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특별 프로그램이 오늘 이 땅에 재현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아닌지, 우리들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 새로운 안목과 새로운 청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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