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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와 사닥다리(요한복음 1 : 43 - 51)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단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D묭뭆TXT6* 천사와 사닥다리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은 4복음 모두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 기록된 내용은 공관복음에 기록된 것과는 달리 보충 설명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 같은데서는 예수님께서 바닷가를 지나시다가 베드로, 요한, 안드레, 야고보 등이런 사람들이 그물을 씻는 것을 보시고는 그저 "나를 따르라"는 한 마디를 하시자 그대로 일어나 곧장 따르는 것으로 간단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마는 요한복음에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에 만난 바가 있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 중 대표적인 다섯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로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증거할 때에 그 증거를 받아들이고 믿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증거를 따랐습니다. 그런 점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역시 훌륭한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한 그런 증거를 줄 때에 "참으로 그렇겠습니다"하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분이 메시야다 할 때에 "예! 그렇습니까?"하면서 행동적으로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첫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요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을 맨 처음 따른 제자로서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요한과 안드레가 먼저 따르고, 그에 이어 안드레가 자기 형님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인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예수님을 만난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을 인도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요한복음 1장에는 다섯 제자를 부르시고 다섯 제자를 삼으시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가지 알고 지나갈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렇게 돌발적인 결단으로 따랐다기보다는 이미 세례 요한을 통하여 가르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을 통하여 메시야가 오리라는 것을 알았으며 그리고 세례 요한이 이 분이 바로 그 분이다 하고 확실하게 증거 할 때에 그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증거를 따름으로써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다섯 제자 중 맨 마지막에 부름 받은 제자가 나다나엘 입니다. 이 나다나엘은 본 비유와 연결되는 인물이기에 본문에 나타난 그 개인의 정도를 잠깐 생각해 봅시다. 본문에 의하면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메시야를 만났다고 할 때에 기록에는 없으나 분명 고향을 물었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대답으로 나사렛 사람이다라고 하자 "나사렛에서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사렛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알고 있는데 그 보잘 것 없는 작은 동네에서 무슨 그렇게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며 일단 부정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경험과 선입관에 비추어 상식 밖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나다나엘은 일단 부정은 하지만 부정을 하는 그 자리에 머물지를 않습니다. 이점은 우리가 배워야 할 나다나엘의 훌륭한 점입니다.
어떤 경우에고 나의 가진바 상식으로 판단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을 고정관념으로 묶어두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 고정관념을 일단 넘어서는 믿음과, 순종과 그리고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나다나엘 은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될 자격이 있습니다. 일단 부정을 하면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도 그는 빌립을 따라서 예수님께로 나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훌륭한 점이요 적극적이고도 긍정적인 면이며 그리고 또한 창조적인 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나다나엘이 나오는 것을 보시자 마자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며 칭찬을 하시게 됩니다. 저는 그 장면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은 의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의심을 갖지 않는 신앙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앙이 아닙니다. 의심은 의심대로 있으나 그 의심을 극복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의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는 믿음이 있기에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하여 전혀 의심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은 어떤 대학에 가서 특강을 하고 나오는데 한 똑똑한 청년이 저에게 하는 말이"목사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매우 확신이 있으시고 또한 자신이 있으신 데 간혹 의심이 나시는 것은 없으십니까?"하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의심이 더 많지요"하고 대답을 하였더니 "그러면 그 의심이 있는데 어떻게 믿습니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대답하기를"의심과 믿음은 별개의 것이며 믿는다고 하여 의심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의심은 극복하는 것이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의심은 죽을 때까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성이 살아있고 생각이 있는동안은 항상 있습니다. 만약 의심이 조금도 없는 사람이 있다면 모르기는 하지만 그 사람은 오히려 정신이 좀 온전치 못한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생각이 있다면야 어떻게 의심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 의심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그 보다 더 크고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회에 대해서도 이런 저런 의심이 많고 비판도 많이 하지만 그러나 이렇게 조용한 것은 더 큰 것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나다나엘이 자기가 생각한 그것만을 고집한다면 예수님 앞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더 큰 세계, 더 위대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기에 의심을 하면서도 예수님께로 나옵니다. 이러한 나다나엘을 예수님께서는 극구 칭찬을 하십니다. 아마도 이것은 최고의 칭찬이 아닌가 싶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누구에게라도 이만하면 최고의 칭찬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예수 믿는 사람을 보고 칭찬할 수 있는 좋은 말이 무엇이냐고 한다면 "그 사람 참 진실해"라고 하는 말이 최고의 칭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 그 사람 기도 많이 해 혹은 헌금 많이 해, 아니면 전도, 봉사 많이 해하는 것들은 그렇게 큰 칭찬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 재주가 많아"하게 되면 그것은 좀 곤란한 것이며 게다가 예수 믿는 사람보고 "그 사람 똑똑해"하고 나오면 그것은 인색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빤질빤질"하다는 것도 곤란하고 더욱이 "바늘로 찔러도피 한 방울도 안 나오겠다"고 하면 그것은 그야말로 끝난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그보다는 차라리 멍청하다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리하여"약간 바보스러울 정도로 사람이 진실하다"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이 최고의 칭찬이요 정말 듣고싶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다나엘에게는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는 말의 헬라원문의 뜻은 섞이지 않았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물질이 섞이지 아니 하였으니 깨끗한 그대로 순수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의 칭찬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칭찬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예수님을 의심했던 나다나엘로서는 예수님의 이러한 칭찬에 마음이 좀 민망해졌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하는 말이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며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한가지 궁금한 것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무엇을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많은 해석가들의 공통적인 견해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명상기도를 했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루에 세 번씩, 그것도 밤이나 새벽에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우리와는 달리 낮에 기도하는 것을 관습으로 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 기도 시간에 나다나엘이 기도하는 모습을 예수님께서 멀리서 보신 것 같습니다.
아무튼 나다나엘은 예수님께로부터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고 하는 말씀을 듣자 크게 감동이 되어 지금까지 닫혔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는 무릎을 꿇어 예수님 앞에 엎드리게 됩니다. 본문에 의하면 그는 말하기를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조금 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고 했던 말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완전히 예수님 앞에 굴복을 당한 채 마음 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는 네가 더 큰 일을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네가 지금 그렇게 기쁘고 좋으냐? 하지만 이 정도가 아니라 더 큰 것을 보게될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는 결론을 내려주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허락인 동시에 약속의 말씀입니다. 내가 친히 그것을 보여주마! 지금 내가 너를 꿰뚫어 보는 희한한 생각의 그 정도가 아니라 더 큰것, 곧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그런 엄청난 것을 네게 보여줄 터이니 네가 그것을 보게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다나엘은 자그마치 이러한 약속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나다나엘에게도 식사시간이 있고 쉬는 시간이 있으며 잠을 잘 때도 있었을 터인데 만약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그 아무곳에 있는 술집에 앉아 있을 때에 보았노라" 하신다거나 아니면 "그 아무개와 열심히 싸울때에 보았노라"고 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랬다면 도리없이 꼼짝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나다나엘은 가장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예수님께 보이게 됩니다. 다른 것은 비록 다 부족하다 하더라도 시간을 정하여 기도하면서 경건하게 살아보려는 모습! 요즈음 우리 교회의 상황으로 말하자면 "네가 새벽 기도에 나오느라고 헐레벌떡 뛰어나오는 모습을 내가 보았노라"고 하신다면 그것이야말로 좋을 것입니다. 인천에서 목회를 하던 어느날 새벽 기도회에 나오던 여집사님 한 분이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어 크게 상처를 입고는 깁스를 잔득한 채 누워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염려되는 마음으로 심방을 하게 되었는데 그 많은 상처를 입고 부자유하게 누워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싱글벙글 웃으면서 얼마나 명랑한지 오히려 심방을 간 우리들을 위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가 있다가 "뭐가 그렇게 좋으십니까?"하고 물어보았더니 그 집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차 사고라는 것은 언제나 날 수가 있습니다. 죄 지으러 가다가 날수도 있고 장사하러 가다가 날 수도 있고 밤에 날 수도 있고 낮에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새벽기도하러 오다가 차 사고가 났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만약 그 자리에서 죽었더라면 그저 천당으로 직행하는건데!"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사고란 언제나 날 수 있는 것이라면 기왕에 교회로 오다가 나야지 못된 곳으로 가다가 나게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의 가장 경건한 순간이 주님의 인정함을 받을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기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고마움과 기쁨으로 나다나엘은 예수님 앞에 완전히 굴복을 당합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을 단숨에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더 큰 일을 보리라는 말씀에 이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늘이 열린다"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또 하나의 본문을 대조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27:61이나 마가복음 15:38, 그리고 누가복음 23:45에 보면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는 순간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전 휘장이 찢어진 것에는 매우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성전의 구조를 놓고 생각할 때 휘장을 사이로 하여 지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의 상징이요 이쪽 성소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사람과 하나님,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 무겁게 내려져 있는 그 휘장이 찌익하고 완전히 찢어졌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순간과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하늘이 열린다는 말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하늘이 열렸다고 할 때의 이 하늘이란 하나님의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 하나님의 세계와 우리 죄인의 세계가 열렸다는 것이며 이는 곧 우리가 직접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그 자격을 허락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예수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꼭 한가지 알고 넘어 가야할 것은 오늘 본문 속에서 만나고 있는 나다나엘과 예수님과의 사이에 이 말씀이 매우 적중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나다나엘의 진실이 하나님께 상달 되고 또한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의 진실을 인정해 주심으로 마음과 마음이 확 통하는 순간입니다. 그렇게 되자 나다나엘은 어쩌면 그렇게 내 마음, 내 사정을 잘 알아 주실까 하는 감격과 기쁨으로 그 동안에 가졌던 모든 문제와 의심이 깨끗이 풀리면서 마음 문이 활짝 열리게 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나 어떤 객관적인 상황과는 관계가 없는 주관적인 체험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늘이 열리고"하는 것은 객관적인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주관적인 신비 체험과 객관적인 구속의 역사가 함께 만나게 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 혼자서 꿈꾸고 환상을 보며 이런저런 체험을 다했다 하더라도 그것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이 열려야합니다. 내가 체험하고 내가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고백이 하나님께 상달되면서 하늘이 열려야 합니다.
이제 다시 한번 뒤로 돌아가 나다나엘의 마음속에 있던 문제가 해결되면서 나다나엘의 마음이 열리는 장면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의 말씀을 대하는 순간 지금까지의 편견이나 의심, 고정관념이 다 없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나 사이에 마음과 마음의 통함이 있고 보니 그것으로 마음 문이 활짝 열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열리고 보니 다시는물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합리적인 이론이나, 다른 증거가 필요치 않습니다. 지적으로도 충분하고 감정적으로도 충분하며 의지적으로도 충분합니다. 이리하여 신비적인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종교적인 경험이요 영적인 경험입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소위 절정의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경험의 순간이 성경에 여러 번 나타나고 있는데 특별히 변화산에서의 베드로의 감격은 우습기조차 합니다. 거기에서 보면 영광스럽게 변화되신 예수님의 모습과 모세나 엘리야의 모습을 보는 순간베드로는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초막 셋을 짓겠다며 흥분해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살겠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장가를 가서 처자식이 있는 베드로가 그 말을 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입니까? 그런가 하면 초막을 셋만 짓겠다고 하니 그렇게 되면 자기들은 어디에서 자겠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그런 것 따위를 생각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다만 변화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뵙는 것이 너무 좋아서 이대로 그냥 살고 말자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스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는 천당에 가서도 천당 못온 사람 때문에 걱정을 하거나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 베드로는 그 상태를 만족해하고 감격해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다나엘 역시 그 마음속에 굉장한 절정적 경험을 하면서 만족해 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2에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각각 그 구하는 바가 있습니다마는 이제는 표적이고 지혜이고 간에 상관이 없습니다. 이는 십자가 안에서 다 이루어지기 때문이며 만족하게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러한 경험을 해보셨습니까? 이를 위해서 무슨 굉장한 체험, 즉 병 고침을 받은 체험이라든가 환상을 보는 등의 그런 체험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튼 나에게 개인적인 경험이 주어질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진실을 알아주시며, 나를 개별적으로 택하셨다는 것을 아는 순간 더 다른 어떤 이론이 필요치 않습니다. 이제는 다시 물을 것도 의심할 것도 없으며 과거도 미래도 상관없이 그 속에서다 해결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서 나다나엘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네가 마음 문이 열린 것은 좋지만 그런 주관적인 경험에서 끝날 일이 아니라 정말로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제자로 있으면서 하늘이 열리는 장면을 수없이 많이 보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많은 것들을 어떻게 다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저 몇 가지만 말씀드린다면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실 때에 축사하시고 떼어 줄 때에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4천명을 먹이실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내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하는 기도를 드리신 후에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한마디 한마디의 사역이 그대로 하나님과 직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계속적으로 점점 강하게 하늘이 열리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전 휘장이 찢어질 때는 물론, 보다 명확하게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에 하늘이 환히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단지 그러한 사실을 미리 말씀하시는 것뿐입니다.
너희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여기에서 보면 앞서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말하고 있는데 비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인자라는 지칭은 예수님께서 가장 즐겨 쓰시는 자기표현으로 이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이 바로 여기입니다. 그러니까 인자가 말씀하시기를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는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나다나엘은 이 말씀을 믿고 이 장면을 보기 위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여기에서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한다는 말씀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창세기 28장에 있는 야곱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는 말씀입니다. 거기에 보면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동생 야곱이 그 사실이 드러나자 형의 분노를 피하여 멀리 화란으로 가게 됩니다. 야곱은 별 수 없이 혼자서 어려운 광야의 길을 가는 중에 해가 지자 한 곳에서 밤을 지내게됩니다. 이 때에 야곱은 어두운 광야의 한 지점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게다가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맹수의 울음소리와 차갑기 만한 밤 기온이 안겨주는 공포와 쓸쓸함으로 인해 참으로 착잡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어쩌면 오늘밤 이대로 죽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공포가 더 컸을 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런 상황 속에서 그는 돌 베개를 하고 누워 잠을 자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가지 생각할 것은 이 시간에 야곱이 밤새워 기도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하여 하고 안하고를 함부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일단 성경에는 야곱이 기도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아마도 이대로 죽는가 보다하고서는 돌 베개하고 잠을 자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꿈을 보여 주십니다. 그 꿈은 사닥다리가 땅에서부터 세워져 하늘에 닿아있는 것이었습니다. 기억할 것은 사닥다리가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야곱의 일생을 놓고 생각해 본다면 이 야곱은 그의 평생이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분명 동생임에도 형의 위치에까지 올라간 그야말로 무섭도록 계속 올라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다리라는 것은 위에서 걸쳐지는 힘 닫는 곳이 없고서는 서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꿈에 보인 사닥다리는 땅으로부터 세워져 하늘에 닿아있는 것으로 그 위를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야곱의 수호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야곱 자신을 말해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네가 하늘로 올라오느라고 사다리를 놓고 무던히도 애를 쓰는구나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 누운 땅은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두가 다 하늘이 열린 것이며 그리고 아무 걱정하지 말고 하늘로 올라오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러한 환상과 음성을 들은 야곱은 너무나 좋아서 여기에 나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몰랐었다는 두려움과 감격 속에 베개 했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어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됩니다.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의 약속과 허락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제 이 장면을 놓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인간들이 언제나 사다리를 하늘을 향해 세워 놓고 올라가겠다며 애를 씁니다마는 하늘이 열려지지를 않고 붙들어주지를 않아서 사다리가 그냥 쓰러지고 맙니다. 한 두 계단 올라갔다가는 쓰러지고, 제법 몇 계단 올랐는가 했다가도 그냥 쓰러지고 마니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사다리는 어느 순간에라도 위에서 붙들어주지 않으면 제 기능을 다할 수가 없습니다. 위에서 열어주고 붙들어 주어야만 그 모든 수고와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에서부터 사닥다리를 놓아 하늘에 닿았다는 것은 신앙적인 생활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천사가 오르락 하는 것은 기도를 말하는 것이며 내리락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천사는 우리의 기도를 받들어 하나님께 올리는가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이는 천사장 가브리엘을 비롯하여 모든 천사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오르락 내리락, 즉 기도와 말씀, 말씀과 기도는 항상 같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기도를 한다하더라도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해 주시지 않으면 나는 갈 바를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나다나엘에게 허락하신 소중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가지 생각할 것은 그냥 다리라고 하는 것은 평지에서 이쪽과 저쪽의 두 사이를 연결하는 수단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 사닥다리는 아래 위를 연결하는 수직적인 기구입니다. 마찬가지로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해자로 역사 하십니다. 에베소2:13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신 화해자가 되심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사닥다리가 되십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 위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 내리락하는 엄청난 사건을 체험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 앞에 사닥다리가 놓여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닥다리가 하늘에 닿게 되어 우리의 기도가 천사의 손에 들리어 하나님께 상달되고 하나님의 말씀 또한 이 길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소통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있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러한 역사가 이루어지고, 그를 중보로 하여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서 이 일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의사건과 사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며,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놓으신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역사가 오늘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빛, 생명, 길, 말씀 혹은 그리스도, 주, 인자, 하나님의 어린 양 둥으로 표현한 이 모두가 다 예수님이 사다리 되심을 우리에게 증거 하는 것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일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가장 중요한 결론이 무엇인가 할 때 그것은 네가 더 큰 일을 보리라! 그리하여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비단 나다나엘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오늘 우리 또한 경건한 자세로 살면서 주님 앞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하는 고백을 하게 될 때에 하늘이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고. 이로 인해 하나님과 소통하는 신앙의 높은 체험을 쌓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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