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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의 질량(누가복음 16장 10절~13절)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 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 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흑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 하니라"하시는 10절 말씀이 오늘 공부할 잠언입니다. 충성에 대해서는 양적으로가 아니라 질적으로 묻고 계십니다. 큰 충성, 작은 충성 --- 우리는 대체로 큰 충성을 충성으로 여기고 작은 충성에 대해서는 대수롭잖게 여기는 경향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큰 것에 충성하는 것이나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이나, 충성으로서는 같게 보시고 계십니다. 다만 큰 것에 충성하건 작은 것에 충성하건 얼마나 참되게 충성하느냐를 문제삼으십니다.
'충성'으로 번역된 헬라말 '피스티스'는 '충성'뿐만 아니라 '믿음'이나 '신실(信實)'로도 번역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자세는 곧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사람을 보실 때에는 그 자세가 곧 '충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믿으실 수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복 주실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충성'의 문제는 구원의 문제는 아닙니다. '충성'의 문제는 은사의 문제요 사명의 문제입니다. 은혜의 문제라기보다 은사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충성이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주님과 나란히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는 그 언제 충성해볼 시간이나 있었나요? 그저 막 숨넘어가기 직전의 한 순간에 주님을 향하여 회개하고 신앙을 고백한 것뿐입니다. 그 잠깐동안에 그 강도는 전도하는 모습을 보인 셈이요 신앙간증 하는 모습을 보인 셈입니다. 비록 찰나의 시각이었지만 그는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았던 것입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 : 43)"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 강도, 사람으로서는 맨 처음으로 주님과 함께 천국에 들어간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충성해본 일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 강도에게 이렇다하게 '점수를 줄만한' 일이 맡겨진 적 없습니다. 그에게 돈이 맡겨진 적도 없고 시간이 주어진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사명이 맡겨진 적이 없습니다. 충성할 기회가 주어진 적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여 은사는 없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렇듯, 충성의 문제는 구원의 문제와는 별개입니다.
문제는 사명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아야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의 문제는 은혜의 문제입니다. 은사의 문제는 별개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서 오는 은혜의 선물 곧 은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이를 가리켜 우리는 복(福)이라고 합니다. 복이란 은사요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은사(恩師)로써 우리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할 수 있도록 기회가 주어집니다. 물론 일을 하면서 기쁨도 얻고 행복도 얻고 더 큰 축복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같은 의미에서 충성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와는 별개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충성이 무엇인가 -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충성은 은사로 주어진 것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주어진 것에 대하여 내가 얼마나 신실한가, 얼마나 성실하게 충성을 다하는가, 이에 따라 더 큰 주어짐의 은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주어진 것을 신실하게, 충성 되이 잘 감당 하느라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더 주십니다. 무릇 있는 자에게 더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 진리입니다. 있는 자에게 더 주는 것이 충성에 대한 논리입니다. 우리의 생각 같아서는 있는 자에게서는 뺏고 없는 자에게는 더 주어야 고를 것 같은데, 충성의 논리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있는 자에게는 더 주고, 없는 자에게서는 조금 남아 있는 것까지도 빼앗아서 있는 자에게 줍니다. 이것이 충성에 대한 논리입니다. 이 점은 우리가 주님의 저 달란트 비유에서도 익히 알고 있는 바 아닙니까? 한 달란트를 그대로 가져온 사람에게서 그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서 다섯 달란트로 다섯 달란트를 더 남기어 가져온 자에게 주지 않습니까?
오늘도 보면 충성된 자에게 더 주고 더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를 더 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도 있고 재주도 있고 돈도 있고 무엇도 있고-너무 많이 가졌다 싶을 만큼 여러 모로 넉넉한데, 어떤 사람은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 지지리도 없습니다. 이를 보고 흔히들 '세상 참 공평치 못하구나' 하지만 그실 충성의 질로 볼 때에는 이야말로 공평한 것입니다. 공부 잘하는 학생이 우등생 되고 공부 안 하는 학생이 낙제하는 것-이것이 '공평' 아닙니까? 공부 잘하는 학생에게도 100점주고 공부 못하는 학생에게도 똑같이 1O0점을 주어야 공평한 것입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거저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것을 주셔서 우리가 그것을 잘 감당하면 더 주셔서 더 감당하라고 하십니다. 지금은 연세가 높은 어느 장로님이 웬만한 사람들은 그 이름을 다 아는 재벌입니다. 말이 많지 않은 분으로, 교회에 충성을 다하는 분입니다. 그분에게는 제가 특별히 칭찬하고 싶은 점이 있습니다. 이분, 퇴근 때에는 반드시 교회를 한바퀴 돌아보는 것입니다. 교회의 장로 된 자신의 본분이라고 생각해서 늦은 밤이라도 회사에서 곧장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교회를 한바퀴 둘러보고 기도한 다음에야 귀가합니다. 한번은 그날도 늦은 저녁 시간에 그렇게 하고 있는 그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저녁에 교회에는 웬일로 오셨습니까?"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본시 퇴근을 이렇게 합니다." 그분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평생을 그렇게 해오는 것입니다. 참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이 예배당을 언제나 내 집같이, 아니, 내 집보다도 더 소중히 여기는 그 모습이 참으로 장해 보였습니다. "돌아보시니 어떻습디까?"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난로 불을 끄지 않은 채 돌아갔더군요. 전등도 끄지 않은 데가 있고요"--'충성'입니다. 이런 분인지라 사업을 하는 데도 충성스럽습니다. 그분의 사업이 어렵다거나 실패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남대문시장에서 조그마한 장사를 하다가 재벌이 된 분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기에 사업을 그리도 잘하십니까?"하고, 한번은 점심을 같이하면서 물어보았더니 "저요? 제가 너무 소심해서 그래요"라고 대답합니다. 사업 하나를 하게 될 때에는 천하없는 박사나 기술자가 확실하게 권한다 해도 내 경험에 없는 것을 자신만만하다 해서 바로 투자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이건 틀림없다'---스스로 이렇게 확신이 서야 조그마하게 시험을 해보고, 필요하다 싶은 기간 동안 인내하고 기다려보아서, 과연 잘되면 그 때에야 서서히 확장시킨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을 쓸 때에도 그렇답니다. 제아무리 확실하다 싶은 사람이라 해도 곧바로 중요한 일을 맡기는 법이 없답니다. 밑바닥에서부터 일본 새를 살펴보면서 한걸음 한걸음 또박또박 거치게 하여 비로소 제자리에 갖다 앉힌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작은 일부터 맡기십니다. 그 작은 일에 내가 충성을 다하면 그 다음 단계의 일을 맡기십니다. 그 일에도 충성에 합격이 되면 또다시 더 큰 일을 맡겨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일을 하십니다. 그렇거늘 내가 맡은 일에 불평이나 하면서 충성을 게을리 합니다. 이런 일에는 충성하기 싫다, 이건 하찮은 일이 아닌가, 큰 일이면 충성하겠다--합당치 않은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논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에는 이런 태도가 용납되지 않습니다. 분명히 알아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는데, 그 일이 틀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빼앗으시는 것 같습니다. 충성치 못했기 때문입니다. 빼앗기는 것 같습니다. 충성치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맨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충성의 계단을 한 단 한 단 다시금 착실히 밟아 올라가야 합니다. 그리하여야 은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 시간이며 건강이며 지식이며 지혜며 물질이며 지위가 다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건강을 위해서 애를 씁니다.
음식도 조정합니다. 절제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에 앞서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성실히 생각해야 할 문제가 하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내게 주신 건강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께 얼마나 충성을 하였는가, 주신 이 건강을 가지고 내가 얼마나 충실하게, 꽉 차게 일을 했는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더욱 더 건강을 주실 만큼 충성을 하였는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으로 하여금 너 건강 주었더니 시원치 않구나, 네게서 건강을 빼앗느니만 못하구나 하시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시간에 충성하고 건강에 충성하고 지식에 충성하고 지혜에 충성하고, 특별히 물질에 대하여 깊이 충성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이제 재물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충성의 척도로 재물을 드십니다. 상징적이요 비유적이면서 대표적인 척도입니다. 충성 가운데서 물질에 대한 충성이 가장 가시적(可視的)이고 가장 정확합니다. 무릇 사람의 사람됨을 알려면 그 사람에게 돈을 주어보면 안 다고도 하지 않습니까?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라고 1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합니다. 바야흐로 재물이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도전하고 있습니다.
보아하니 재물의 위력이 참 대단도 합디다. 그 옛날, 가난하고 돈 없었을 때에는 부인네들이 고분고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새, 돈이 넉넉해지니까 부인네들이 남편 말 안 듣는다고 합니다. 얼마 전 일본에 갔다가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본의 여자들은 남편들 앞에서 아주 꼼짝 못한다고 합니다. 남편들은 아내들을 마구 무시한다고 합니다. 아내보고 '자네''너'하고 비대(卑對)하는 것이 예사라고 합니다. 그래 '아하, 이 사람들이 이 모양이구나' 생각했는데, 며칠 전에 다시 한번 일본에 가서 보니 그 때에 듣던 것과는 딴판입니다. 세상이 바뀌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여자들이 돈을 가졌고 보니 이제는 남편이 언성만 조금 높여도 살림 팽개치고 나가버립니다. 이렇게 가출해버리는 여인네가 일년에 줄잡아 3만여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아이들 다 두고 나가버리는 것입니다. 여자는 어딜 가나 쉬 취직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자들이야 답답할 게 없는지 몰라도 남편들은 아이들 떠 안고 어떻게 한다는 말입니까?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남편들은 이제 아내가 한 지붕 밑에서 무사하게 살아주는 것만도 고맙다 여기게쯤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 앞에서 설설 기는 세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어떻게 되는 이야기입니까? 여자들은 그 동안 돈이 없어서 남편한테 빌붙어 살아왔다는 이야기가 됩니까?
여러분, 남편이건 아내건 경제적으로 자립할 능력이 충분히 있으면서 사랑해야 그게 '진짜' 사랑입니다. 효도도 그렇습니다. 경제적으로 충분히 자립 자유 하여 스스로의 능력으로 성가(成家)하면서 효도하는 것이라야 그게 '진짜' 효도지 '나는 아버지 재산을 물려받아야 아버지를 효성으로 모실 수 있다' 하면서 유산 받기 위한 수단으로 삼아 효도를 할 것이라면 제아무리 깍듯하게 모신다 해도 그런 효도는 효도가 될 수 없습니다. 요새는 참 심한 이야기도 많이 듣습니다. 정초나 추석 같은 명절 때가 되면 민족대이동인가 싶을 정도로 귀성 인파가 넘쳐나 소동을 겪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부모네의 재산을 한푼 어치라도 놓칠까봐 귀성(歸省)에 유난을 떠는 사람들이 개중에는 많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땅, 그거 좀 얻어내어야 되겠으니, '이놈은 명절이 되어도 애비 애미 찾을 줄도 모르는구나'하고 부모한테 '찍혀버려'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되겠다고 여겨, 그래서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한다는 것입니다.
재물이라는 것이 그렇듯 무서운 것입니다. 효도도 재물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한다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돈주머니를 꽉 쥐고 앉아 있어야 아비 대접받고 어미 대접받는다" - 어른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어느 아버지가 큼지막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있습니다. 출가한 딸이 와서 "그거, 돌아가신 다음에는 저 주세요"하고 부탁합니다. 아버지는 "오냐, 그러마" 대답합니다. 이번에는 며느리가 시아버지보고 "돌아가시게 되면 그 반지 저 주세요"하고 부탁합니다. 역시 "오냐, 그러마"하고 '약속'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 죽을 때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그것 준다는 말없이 그 반지를 그대로 끼고 있다가 죽었습니다. 반지 덕분에 그 동안 효도 잘 받고 말입니다. 그 반지 하나 얻어 가지려고 딸과 며느리는 아버지(시아버지) 생전에 열심히 잘해드렸던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 확인해보았더니 그 다이아반지는 가짜더랍니다.
돈이 하나님의 위치로까지 올라가고 있습니다. 돈 가지고 인격 시험할 수 있고, 돈 가지고 신앙 가늠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아무리 잘 믿는다 해도 돈에 대한 애착으로 제대로의 처신을 못했다면 헛믿는 것입니다. 아직 멀고멀었습니다. 돈에 노예가 되어 있는데 어떻게 바른 신앙이 되겠습니까? 재물과 나와의 관계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돈을 어떻게 버느냐, 어떻게 간직하느냐, 어떻게 지키느냐, 어떻게 쓰느냐, 돈의 가치를 어떻게 인정하고 있느냐, 돈을 '프라이버시 넘버 원(Privacy number one)'으로 여기는가 아닌가---나에게 최우선의 것은 무엇이냐를 확실히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에 대한 자세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 시금석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에서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10절)" "너희가 만일 불의 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11절)"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12절)"하고, 작은 것, 불의 한 재물, 남의 것 - 이렇게 세 갈래로 재물을 표현하시고 계십니다. 재물에 대한 이 세 갈래의 시각에서 사람의 충성됨을 시험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 작은 것 - 푼돈을 어떻게 쓰느냐입니다. 큰돈이 아니라 작은 돈, 작은 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10절 말씀의 '작은 것'은 헬라말로 '엘라키스토스'인데, 이는 '작다(미크로스)'의 최상급, 곧 가장 작다는 뜻이 됩니다. 'The least'입니다. 사람이 보기에 지극히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보기에 대수롭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관심 둘만한 가치가 없는, 아주 작 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것에 대하여 충성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람의 인격부터가 작은 돈을 바로 쓰느냐 허투루 쓰느냐로 가늠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저도 실은,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아닌 탓도 있지만, 돈을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넣었다 꺼냈다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수년 전의 일입니다. 제가 서로 알고지내는 분으로 아주 부자가 한 분 있습니다. 이분이 단돈 천 원 짜리를 꺼내는데 보니 지갑을 열고는 소중히 여기는 태도로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가했는데, 또 다른 지갑 하나를 신중하게 꺼내더니 이번에는 거기서 동전을 필요한 만큼 집어내어 알뜰히 세어보더니 거듭거듭 확인한 다음에야 천 원 짜리와 합쳐서 쓰는 것입니다. '아, 재벌은 저렇구나'---저는 자못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그분뿐만이 아니라, 돈 많은 사람으로 이렇듯 작은 것에 충성스러운 분을 저는 그밖에도 여럿 보아왔습니다. 돈을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는 법이 없다고, 그분들은 말합디다. 그래서 '아하, 내가 오늘 참 중요한 것을 배웠습니다. 나도 앞으로는 그렇게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혹시 압니까? 나도 재벌이 될는지……"하고 농담 비슷하게 말하면서 그 자리에서는 웃었습니다만 그후로 저 역시 그런 태도를 실천에 옮겨오고 있습니다. 구겨진 돈이 있으면 아무리 작은 돈일지라도 반듯하게 펴 가지고 고이 간직해 다닙니다. 여러분, 아무쪼록 돈을 함부로 구기지 마십시다. 돈을 휴지조각처럼 다루기로 천시하면 나라살림에도 지장이 옵니다.
작은 돈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큰돈 가질 자격이 있습니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알 때에 충성된 자가 됩니다. 음식도 그렇습니다.
요새는 TV에서도 자주 문제삼고 있습니다만, 저는 음식 찌꺼지 마구 버리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워요. 모름지기 음식은 먹을 만큼 준비하고, 깨끗이 처리할 것입니다. 음식상을 요란하게 벌이는 것, 능사가 아닙니다. 알맞게 차려서 알맞게 먹을 것입니다. 서양사람들은 꼭 사람 숫자대로만 하더군요. 사람 수에 딱 맞게 만들어놓고, 모자라면 빵 하나 더 주면서 먹으라고 합니다. 절대로 남기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네는 이게 안돼요. 그 사람들 식사하는 것 보면 생선가시 하나 버리지 않아요.
썰어서 먹고, 샌드위치 해 먹고, 뼈다귀는 푹 끓여서 수프 해 먹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버립니다. 이것은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없어서 절약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주신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나라살림이 안되니까 그러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니까 충성하는 것입니다. 모자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라살림까지 걱정할 것 없어요. 낭비는 그대로가 죄입니다.
작은 것에 충성할 때에 큰 것을 주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두쇠, 자린고비가 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일에서 작은 일에도 충성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미미한 일에도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대체로 보면 충성되지 못한 사람은 큰 일만 생각해요. 큰 일이면 하겠다, 작은 일은 안 한다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큰 일이 맡겨지지도 않을 뿐더러 맡겨도 감당을 못합니다. 작은 일에 충성한 사람이라야 큰 일도 합니다.
일찍이 할아버지께서 제게 이야기해주신 것이 있습니다. 듣고도 또 듣고 싶어서 이야기해달라고 자꾸 조르면 말씀해주시곤 했던, 아마도 수백 번은 들은 이야기입니다. 동네에서 유명하게 소문난 부자인데 지독히도 인색한 할아버지가 있었대요. 이분이 환갑이 됐어요. 그 때로서는 이제 다 살았다고 여기던 나이, 환갑이 되고 보니까 이 할아버지가 모처럼 크게 마음을 써서 자기 집에 부리는 종들을 수고했다면서 이제는 내보내려고 생각했습니다. 머슴들에게 자유를 주겠다는 뜻이었지요. 그래서 미리 선언을 했습니다. 머슴들은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노인 환갑날만 되면 이젠 자유의 몸이 된다고 저마다 잔뜩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환갑 며칠 전부터 음식을 만드느라고 지지고 볶고 야단났습니다. 마침내 환갑 전날이 되자 할아버지는 밤중에 종들을 다 불러놓고 "자네들, 안 됐네마는 급하게 쓸데가 있어 그러니 오늘밤에 새끼를 좀 꼬게"하고 짚을 갖다주면서 "꼬되 될 수 있는 대로 가늘게 꼬게들." 이렇게 일렀습니다. 그래서 머슴들이 새끼를 꼬기 시작하는데, 저마다 한마디씩 투덜거립니다.
"영감쟁이가 본전생각이 나나? 밤새껏 새끼를 꼬라니, 그 무슨 심술인고?" 그러면서 대충대충 굵직굵직하게 되는대로 꼬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사람만은 "쓸데가 있으니 그러시겠지"하고 밤새껏 정성을 다해서 가늘게 가늘게 꼬았습니다. 이윽고 아침이 되었습니다. "다들 꼬았느냐?"하고 주인영감이 나타나 머슴들을 광으로 데려갑니다. 광에는 엽전이 그득하게 있었습니다. 노인은 머슴들을 보고 말합니다. "각자 자기가 꼰 새끼줄에다 엽전을 꿸 수 있는 데까지 꿰어서 가져라." 이래서 정성 들여 가늘게 꼰 사람이 제일 많은 엽전을 꿰어 가질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충성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말씀이든 저런 말씀이든, 작은 일에 신실한 것이 충성입니다. 특별히 물질에 대하여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작은 물질에 충성하면 큰 물질을 맡기십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지 않는다면 큰 일에 충성하지 않을 것으로 아십니다. 충성의 질량은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같습니다. 작은 일 큰 일이 따로가 아닙니다. 충성의 잣대로서는 같은 것입니다. 큰 일에 불충했다고 벌이 많고 작은 일에 불충했다고 '봐주는' 법 없습니다. 도둑질이 그렇지 않습니까? 큰돈 도둑질하나 작은 돈 도둑질하나 도둑질은 똑같은 도둑질이지 차이가 있겠느냐, 그것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은 큰 일에도 충성할 것으로 보겠다, 작은 일에 불충한 것을 보면 큰 일에도 불 충성할 것으로 알 것이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불의한 재물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불의한 재물'이라는 말은 조금 앞의 구절에도 나옵니다. 헬라어로 '아디코스 마모나'라고 하는 이 말은 도덕적으로 불의한 재물이라기보다 '곧 없어질 재물'이라는 뜻입니다. 적당치 않은 재물이요, 쓰이지 않는 재물이요. 곧 없어질 재물입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조금 있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잠깐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재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 보면 충성하려 하다가도 '에이, 이제 살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남은 시간 되는대로 살고 말지 뭐' 합니다만 그것은 불충성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거슬러 1절로부터 죽 보면 '지혜로운 청지기'가 비록 과거의 행동은 나빴지만 주인이 네 권리를 셈하라, 오늘 네 권리를 빼앗겠노라 했을 때에 남아 있는 그 짧은 시간, 자투리 시간을 지혜롭게 이용합니다. 그 마지막 권리, 마지막 시간을 잘 이용합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지혜롭다고 칭찬을 듣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재물, 이것은 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곧 떠날 것입니다. 시간도 잠깐입니다. 능력도 이젠 한계가 보입니다. 그 남은 시간에 어떻게 할 것이냐, 이것입니다. 그 시간을 충성되이 써야 합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도 그렇답니다. 대개 공부 잘 못하는 아이들은 '무드' 찾다가 맙니다. 오늘은 분위기가 나빠서 오늘은 머리가 아파서, 오늘은 옆집이 시끄러워서, 오늘은 뭐가 어떠해서…… 그러다가 말기 일쑤랍니다. 반면에 공부 잘하는 사람들 보면 자투리 시간을 잘 이용합니다. 가면서 오면서, 기차 타고 있는 시간에 지하철 타고 있는 시간에, 화장실에 앉아 있는 시간에, 잠깐 잠깐의 시간들을 잘 이용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잘하는 것입니다. 충성도 마1찬가집니다.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지금 내게 맡겨지는 것은 무슨 일이든지 좋아야 합니다. 우리 교인들이 시간 하나 잘 지키는 것도 참 중요한 일입니다. 저는 강단에서 시작하는 시간을 될 수 있는 대로 초(秒)까지 지키려고 합니다. 그것이 충성이니까 그렇습니다. 불의한 재물, 없어질 것입니다. 잠깐 남아 있는 것일 뿐입니다. 잠깐의 시간을 잘 써야 합니다.
그 다음에 '남의 것'이라 하십니다. 재물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남의 것입니다.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어디까지나 위탁받은 것입니다. 한 인색한 아버지가 아들보고 "얘야, 옆집에 가서 망치 빌려오너라"하고 심부름시켰는데 그 아들녀석이 갔다오더니 "망치 안 빌려주던데요"합니다.
"있기는 있든?" "있는데 안 빌려줍디다. 망치 닳는다고 안 빌려줍디다." 그러니까 아버지 왈 "그래? 그렇다면 닳는 대로 우리 것 쓰고 말자" 하더랍니다. 여러분, 내 것이 있고, 빌린 것이 있습니다. 어느 것이 더 소중합니까? 여기서 인간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성실한 사람은 남의 것이 소중합니다. 남의 것이기 때문에 다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못된 사람은 내 것은 소중히 하고 남의 것은 아무렇게나 씁니다. 자동차도 다치겠으면 내 차 좀 다치는 것은 괜찮아요. 남의 차 다치는 것은 문제입니다. 남의 차를 내 차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주차할 때도 보면 자기 나오기는 좋게 하고 남 나오기는 불편하게 합니다. 내가 좀 불편하더라도 저 사람 좀 편하게 해주자 --- 이것이 충성입니다.
남의 것을 대하여 충성하는 것, 남의 인격 소중히 여기는 것, 남의 물건 소중히 여기는 것, 이것이 충성입니다. 빌린 물건은 짐이 됩니다.
좋거나 나쁘거나 이건 어찌할 수 없으니까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돈을 꾸었습니까? 그 꾼 돈 갚을 때까지 나는 죄인입니다. 돈을 꾸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사치할 수 없습니다. 내가 빚을 지고 있는 처지에서는 갚기 전에야 결코 자유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빚진 돈 가지고 사치하고 흥청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탈입니다. 정신없는 사람들입니다. 충성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 절대로 잘살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남의 것에 대하여 충성하라 하십니다. 남의 것에 대하여 성실 하라 하십니다. 그리하면 '너희 것을 너희에게 주리라' 하십니다. 영원한 것을 주리라 하십니다. 정말로 네 것을 만들어주리라 하십니다. 남의 것에 대하여 내가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 중요한 문제입니다. 충성은 질량이 문제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할 때에 큰 것을 주십니다. 참된 것을 소중히 여길 때에 가치 있는 것을 주십니다. 남의 것에 대하여 충성을 다할 때에 이제는 정말로 내 것을 주십니다. 모세는 40년 동안이나 장인 집 양떼를 쳤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양들을 충성 되이 지켰습니다. 아버지의 양떼를 몰던 다윗이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가 된 것입니다. 충성은 주님께서 평가하십니다. 내가 이러고저러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평가하십니다. 그 평가대로 주십니다. 충성된 자에게 더 주시고 충성이 없는 자의 것은 낮추십니다. 이것이 주님 하시는 일의 원리입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서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재산도, 물질도, 지혜도, 건강도 주실 것입니다 마는 내가 주님께 내놓아야 할 것은 오직 하나, 충성입니다. 충성에는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나를 충성 되이 여겨 직분을 맡기심이니, 작은 일에 충성할 때 큰 일을 맡기시리라 --- 이것이 축복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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