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사도행전 녹취 8

by 【고동엽】 2022. 4. 17.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독점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대다수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실패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비슷한 사고를 많이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라는 확신은 분명한데 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는가, 왜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는가, 여기에서 나라고 하는 존재를 뛰어넘지 못합니다. 이것을 뛰어넘은 사람이 누구냐면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이런 질문을 했겠습니까. 왜 하나님이 나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나를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는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선택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여기서 바울은 이런 대답 못하겠죠. 하나님이 왜 나를 선택하셨는가, 나를 사랑하시니까 이런 얘기 못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지금까지 했던 모든 행동은 죄인 중의 괴수 같은 행동을 한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고 그들을 박해하고 죽이는 일에 앞장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셨다 라고 말할 수 없는 겁니다. 바울은 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깨달은 것이 뭐냐면 이런 겁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저쪽에 흑암의 권세 가운데 있는 이방인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흑암의 권세 가운데 있는 이방인들을 당신의 백성 삼고 싶어 하십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누군가가 이 흑암의 권세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애끓는 사랑과 자비를 전달해줘야 합니다. 매개자가 필요한 겁니다. 그 매개자로 바울이라고 하는 자신이 선택되었다고 바울은 깨닫게 된 겁니다. 즉 하나님과 흑암의 권세 가운데 있는 이방 백성들의 중간 매개자로 자기가 선택되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만약 하나님이 흑암의 권세 가운데 있는 이방인들에 대한 애끓는 사랑과 자비하심이 없었다면 자기가 선택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 바울은 이들에게 내가 구원의 빚을 지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이 만약 1~3차 전도 여행을 하고 나서 하나님께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저 할 만큼 했습니다, 나 이제 못해”라고 하면서 바울이 안 하겠다고 빠지면 이 흑암의 권세 가운데 있는 자들을 당신의 백성 삼고자 하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좌절되나요? 만약 바울이 안 하겠다고 하면 하나님이 바울에게 끊임없이 물어보시겠죠. “야 바울 너 정말 안 할 거야?” 그때 바울이 “저 이제 힘들어서 못하겠어요”, 그래서 바울이 정말 안 하게 되면 하나님은 바울이 떠난 그 자리에 새로운 사람을 세워 놓으시겠죠. 그러면 이 사람도 결국 흑암의 권세 가운데 있는 이들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게 되는 겁니다. 바울이 내가 이것을 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임한다는 것은 뭐냐면 자기가 이것을 그만두게 되면 결국 이 사람들 때문에 자기가 선택을 받게 된 것인데 이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된 것인데 자기가 거기서 빠지게 되면 결국 자기의 구원만 상실할 뿐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손상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만 손해를 보는 겁니다. 이것을 바울은 뭐라고 얘기합니까? “자기에게 화가 임한다”라고 한겁니다. 그런 화가 임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에 열과 성을 다했던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래서 이 9장의 다메섹 사건을 통해서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를 선택하신 이유와 목적, 그 때와 시기에 대한 깊은 고민들을 시작하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는가, 나는 누구에게 구원의 빚을 지고 있는가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크리스천들도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여기에서만 끝날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 구원의 빚을 지고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들, 그리고 그 구원의 빚을 갚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는 신앙으로 도약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9장 후반부에 보시면 사도 바울은 회심했는데 바울이 회심한 이후에 유대교는 바울을 배신자로 낙인찍고 바울을 죽이려고 안달합니다. 문제는 뭐냐면 초대 교회 안에서도 사도 바울의 회심을 두 팔 벌려 환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과거 전력 때문입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뭐 했던 사람입니까. 초대 교인들을 잡아 가두고 핍박하고 죽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울이 “나 예수 만났어, 회심했어, 나도 이제 크리스천이야” 이렇게 얘기했을 때 “환영합니다”라고 하면서 두 팔 벌려 바울의 회심을 환영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이 사람이 예수 제대로 만난거 맞나, 바울의 회심을 검증하는 시간이 초대 교인들에게도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회심했다고 말하고 나서 초대 교회 모임에 들어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 지역 저 지역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여기에서 모이는구나, 이런 사람들이 모이는구나, 이런 정보들을 취합한 다음에 갑자기 어느 날 바울이 이 모두를 일망타진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초대 교인들도 바울의 회심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겁니다. 참 감사한 것은 사도 바울이 유대교로부터도 죽음의 위협 가운데 시달리고 초대 교회도 회심한 바울을 두 팔 벌려 환영하지 않았던 이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 바울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에 신실하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 아름답고 감사한 일인 겁니다. 이때 외로운 섬처럼 혼자 있었던 사도 바울을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연결시켜 준 중요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가 바나바입니다.

 

10장은 베드로의 세계관이 전환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게 뭐죠?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는 겁니다. 세계 만민을 찾아가서 주의 복음을 전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열두 사도와 주의 제자들이 극복해야 되는 굉장히 중요한 난관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였냐면 열두 사도와 주의 제자들 대부분이 정통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교 신앙에 철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유대교 신앙 가운데 하나가 뭐냐면 정결법입니다. 정결법 가운데 하나가 뭡니까? 정결한 자들은 부정한 자들과 어울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정결한 자와 부정한 자가 어울리면 부정한 자의 안 좋은 기운이 정결한 자를 오염시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소위 구약의 거룩의 핵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구약의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연약한 거룩입니다. 힘이 없는 거룩입니다. 나의 거룩함이 부정한 것을 거룩하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거룩함과 누군가의 부정함이 섞이게 되면 그 부정함에 내가 압도당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거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의 거룩함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겁니까? 부정한 모든 것들과 거리를 두어야 되는 단절과 분리 이것이 소위 구약이 말하고 있는 거룩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남아 있던 당신의 제자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게 뭡니까? 모든 민족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라는 겁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맡기신 이 사명을 제자들이 감당하려면 이방 땅에 가야 합니다. 이방인들을 만나야 합니다. 여기에서 그들의 발목을 잡는 난관이 뭐죠? 바로 정결법입니다. 어떻게 정결한 유대인이 부정한 이방인들과 만날 수 있는가, 그들과 교제할 수 있는가, 어떻게 정결한 유대인이 부정한 이방 땅을 밟을 수 있는가,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예수님이 맡기신 사명을 초대 교회가 신실하게 감당하기 쉽지 않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초대 교인들의 신학적인 한계를 뛰어넘게 하기 위해서 열두 사도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에게 세계관을 전환 시켜주는 사건을 허락하신 겁니다. 그게 바로 사도행전 10장에 나와 있습니다. 먼저 환상 가운데 부정한 음식이 담긴 보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잡아 먹으라.”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에 근거해보면 음식 정결법에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먹을 수 있는 짐승과 먹어서는 안 될 짐승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부정한 짐승을 먹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심지어 베드로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이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바꿔 얘기하자면 정결법을 철저하게 지켰다는 겁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베드로는 정통 바리새인이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대해 너무 해박하고 정결법을 철저하게 지킨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 하십니까. “내가 정결하다고 한 것을 왜 너는 부정하다고 하냐.” 이 환상이 끝난 다음에 고넬료라고 하는 이방인이 보낸 사람이 베드로를 만나러 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계시 가운데 고넬료가 당신을 초대한다, 우리에게 와서 주의 복음을 증거해달라, 하면서 베드로를 초대합니다. 그 초대에 응하여 베드로가 부정한 이방인의 집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 집에서 고넬료 집안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게 뭐죠?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인 고넬료와 그의 집사람과 친구들에게 그들이 예수에 대한 믿음과 신앙을 고백하게 되는 순간 열두 사도와 초대 교회가 동일하게 경험했던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 겁니다. 이때 베드로의 고정관념에 깨집니다.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할례를 받고 음식 정결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구약의 제의법을 철저하게 준수하는 유대 기독교인들에게만 성령이 임한 것이 아니라 할례를 받지 않고 음식 정결법을 지키지 않은 이방인이지만 그들이 예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게 되었을 때 초대 교회가 받았던 동일한 성령이 이방인들에게도 임하는 것을 베드로는 경험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뭘 고백합니까? 하나님은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지 아니하신다, 유대인이냐 아니냐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음식 정결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 이런 겉모습이 아니라 그가 예수를 구원자로 고백하고 있는가, 예수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 고백하고 있는가 이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그동안 갖고 있었던 세계관이 깨집니다. 붕괴 됩니다. 새로운 인식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행전 9장이 바울의 회심 사건이라면 사도행전 10장은 베드로의 회심 사건이라고 할 수 있고 이 사건 이후에 베드로는 이제 이방인들과의 만남에 있어서 그전에 자기를 옭아매었던 그 장애물로부터 좀 더 자유하게 되고 이것이 결국 베드로로 하여금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밀려나게 만드는 사건이 됩니다. 이것을 다음 주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9장과 10장에 중요한 회심과 관련된 내용을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내가 옛날에 알고 있던 신앙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매시대마다 새롭게 하나님의 말씀과 대면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의 발전, 이것들을 또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아름다운 회심이 우리의 일상에서도 아름답게 구현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번 한 주간도 승리하시는 하루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주제별 설교〓 > 설교.자료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행전 녹취 10  (0) 2022.04.17
사도행전 녹취 9  (0) 2022.04.17
사도행전 녹취 7  (0) 2022.04.17
사도행전 녹취 6  (0) 2022.04.17
제1장 해 아래서의 수고(1:1~18)  (0) 2022.04.1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