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음에 7장에는 스데반의 반 성전 설교와 최초의 순교자로서의 스데반의 순교 이야기가 나옵니다. 7장을 보시면 구약 성경의 중요한 내용들이 다 압축되어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구약 성경을 읽고 싶은데 시간은 없고 구약은 두껍고 이런 분들에게 제가 중요한 팁을 하나 드리면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설교를 두 세 번 자세하게 읽으시면 구약을 일독한 효과가 있습니다. 그만큼 스데반의 설교는 구약을 관통하고 있는 중요한 내용들을 다 압축하고 있는 명설교입니다. 스데반이라는 사람은 구약을 너무나 많이 읽어서 토라와 예언서에 나와 있는 모든 이야기들을 압축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스데반의 설교가 끝나고 나서 유대인들은 분노합니다. 흥분합니다. 그리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입니다. 왜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게 된 거냐면 스데반의 설교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성전이라는 건물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성전이라는 건물 안에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 이것을 압축시켜 뭐라고 이야기 할 수 있냐면 반 성전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메시지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 7장 48절입니다. 7장 48절을 보시면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신다” 이것이 스데반 설교의 핵심입니다. 이 설교 때문에 유대인들이 흥분하고 분노합니다. 결국 스데반을 돌로 쳐 죽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당시 모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성전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면 예루살렘 성전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뭘 이야기하고 있냐면 성전에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는 겁니다. 오늘날에도 한국 교인들이 이런 얘기를 들으면 조금 충격받을 수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교회 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고 모이고 있는 교회당 여기가 마치 하나님의 집이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교회당에 가야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2천년 전에 스데반이 무슨 얘기를 한 거냐면 이 건물로서의 교회당이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교회당이라는 건물 안에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는 겁니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만약 성전이라는 건물 안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다면 여러분 하나님이 더 크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성전이 더 큰 것입니까? 성전이 더 큰거죠. 성전은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거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이 뭐냐면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나서 열왕기상 8장에 보면 성전 봉헌 기도를 드립니다. 거기 열왕기상 8장 27절에서 솔로몬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지었지만 이 성전 안에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고 합니다. 왜요? 우리 하나님은 성전보다 크신 분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뭘 간구합니까? 하나님을 여기 모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만이라도 내가 건축한 이 성전에 허락해 달라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에 의지하여 우리가 성전에서 기도하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솔로몬이 주장했던 내용입니다. 그 솔로몬의 내용을 그대로 반복한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솔로몬이 했던 열왕기상 8장 27절을 그대로 반복한 결과 성전에 대한 모독죄로 죽임을 당한 겁니다. 어떤 일이 벌어진 거죠?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스데반까지 약 천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성전 신학이 강조되기 시작한 겁니다. 어떤 겁니까?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성전에 가야 된다, 이런 식의 성전 신학이 강조되기 시작한 겁니다. 참 안타깝게도 스데반은 솔로몬이 한 이야기를 그대로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으로부터 천 년이 지난 이후에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성전 신학이 강화되면서 결국 스데반은 성전을 모욕했다는 미명 가운데 돌로 쳐 죽임을 당하는 그래서 초대 교인들 가운데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이 스데반을 죽였던 재판을 주관한 사람이 누구냐면 7장 58절에 보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7장에서 자세하게 스데반의 설교와 죽음에 대한 기록을 한 이유는 사도 바울이라는 인물을 소개하기 위한 하나의 복선으로 깔려있는 겁니다. 스데반을 죽였던 재판의 주관자가 누구냐, 바로 사도 바울이고 이 스데반의 죽음으로 인하여서 특별히 초대 교회 안에서 디아스포라 유대 기독교인들은 성전에 대해서, 율법에 대해서 굉장히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것으로 인해서 유대교로부터 디아스포라 유대 기독교인들은 핍박을 받게 되고 8장에 보시면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서 다양한 지역으로 도피하게 되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8장을 보시면 예루살렘 유대교의 박해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흩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뭐냐면 박해를 받아 흩어지게 되었는데 그 흩어짐을 통하여 주의 복음이 다양한 지역으로 확장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주의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주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을 때 사도들은 어떤 것을 기대했겠습니까?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기만 하면 처음에는 예루살렘 그다음은 유대, 그다음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까지 주의 복음이 확장되는 대다수 초대 교인들은 아마 개선 장군식 승승장구의 걸음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기대한 방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기대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어떤 겁니까? 유대교의 박해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 기독교인들이 도피할 수밖에 없던 겁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도망친 그곳이 선교지가 된 겁니다. 거기서 만난 사람들이 선교 대상이 된 겁니다. 그래서 그 땅에 복음이 선포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주의 복음이 점점 더 확장된 겁니다.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은 뭔가 오늘은 서울, 내일은 한반도 그리고 모레는 전세계를 이런 식으로 점점 마치 도장을 깨는 것처럼 확장되는 것을 기대했지만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은 도피자의 모습으로 도망친 그곳이 선교지가 되어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그 땅에 하나님의 공동체가 세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사도행전 8장 말씀입니다. 여기 8장 3절에 사울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8장 3절 보시면 “사울이 교회를 진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다”는 말씀인 나옵니다. 여러분, 이제 사도행전 후반부에 계속 사도 바울을 볼 텐데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의 인생 전체를 한 단어로 설명하자면 열정과 헌신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인생에 굉장히 중요한 전환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메섹 도상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 이전에도 다메섹 도상 이후에도 열정과 헌신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뭡니까? 다메섹 도상 이전에는 열정과 헌신이 있었지만 분별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다메섹 도상 이전에는 분별없는 열심이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사도 바울은 분별을 갖춘 자가 되었고 그 이후 바울의 모든 행적은 분별 있는 열심이었습니다. 열심과 헌신 이전에 정말 중요한 것이 뭐냐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한 분별을 갖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처럼 열정과 헌신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분별없는 열심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도 아프게 만들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열정과 헌신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한 제대로 된 분별을 갖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한 분별을 갖추기 위함 아닙니까? 우리의 열정과 헌신이 분별이라는 토대 위에서 아름답게 꽃 피우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8장에 보시면 빌립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사마리아 땅에 복음이 전파되고 그리고 에티오피아의 내시를 통해서 아프리카 땅에 복음이 선포되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보게 되는데 빌립이라는 사람이 왜 사마리아로 도망쳤겠습니까? 당시 정통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땅을 굉장히 부정한 땅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유대인들이 쉽게 들어올 수 없는 마치 도피성으로 도망친 것과 같은 겁니다. 사마리아 땅에 들어가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파하고 그 가운데 마술사 시몬이라는 사람이 돈을 주고 성령을 사려고 한 것 때문에 사도들에게 책망받는 이야기가 8장에 나옵니다. 여러번 강조했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목적은 말씀을 깨닫게 하고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도록 당신의 백성을 돕게 하기 위해서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마술사 시몬이라는 사람은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 돈을 주고서라도 성령을 사려고 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사도들에게 책망을 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다음에 26절부터 40절을 보면 빌립을 통해서 에티오피아 내시가 주의 복음을 듣고 세례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티오피아 내시가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지내고 본국으로 돌아가던 길에 빌립을 만나게 됩니다. 어떻게 이 에티오피아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제사를 지내게 되었을까. 여기서 성경에 나오지는 않지만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중요한 전설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메넬리크 전설입니다. 열왕기상을 보면 솔로몬이 스바 여왕을 만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메넬리크 전설에 따르면, 솔로몬과 스바 여왕이 만났을 때 둘은 하룻밤 잠자리를 갖게 되었고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아이를 잉태한 가운데 자기 나라로 갔다, 그리고 아이를 낳았다, 그 태어난 아이의 이름이 메넬리크라는 아이였고 이 메넬리크가 장성한 다음에 자기 아버지를 찾아 이스라엘 땅에 와서 솔로몬을 만나게 되었다, 솔로몬과의 만남을 통해서 야훼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본국으로 돌아갈 때 언약궤를 가지고 돌아갔다, 메넬리크가 이후에 에티오피아를 다스리게 되었을 때 야훼 신앙을 국교로 선포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에티오피아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야훼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라는 내용입니다. 에티오피아의 내시는 국가의 고위 관료입니다. 재정을 담당하는 사람입니다. 메넬리크 전설에 의하면 이 사람이 야훼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낮설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뭐냐면 유대교 신앙 안에 머물러 있던 이 사람이 빌립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된 겁니다. 유대교에서 초대 교회로 개종하게 된 겁니다. 세례 받게 된 겁니다. 예수를 믿는 자로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된 겁니다. 이 사람이 고국으로 돌아간 후에 여전히 유대교 신앙 안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가 왔다고 전파했을 것이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참 놀라운 것이 뭐냐면 에티오피아가 세계 역사 가운데 두 번째로 빨리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나라입니다. AD 301년에 아르메니아가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나라이고 에티오피아가 AD 331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국교가 된 때가 AD 392년입니다. 로마보다도 60년 앞서 에티오피아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는데 그 첫 기독교인이 누구냐, 여기 사도행전 8장에 나와 있는 에티오피아의 내시, 재정을 담당하고 있던 고위 관료, 빌립을 통해서 이 사람이 주의 복음을 듣고 나서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여전히 유대교 신앙 안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을 초대 교인으로 전도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저희가 초대 교회의 가장 위대한 인물인 사도 바울의 회심부터 시작해서 9장 이하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한 주간도 하나님과 신실하게 동행하시면서 승리하는 나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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