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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자료실 종합모음

제4장 네 종류의 사람(4:1∼16)

by 【고동엽】 2022. 4. 17.

제4장 네 종류의 사람(4:1∼16)

 

 

< 개 요 >
1. 4:1∼3 학대받는 인생
2. 4:4∼6 경쟁심에 사로잡힌 인생
3. 4:7∼12 남과 어울릴 줄 모르는 인생
4. 4:13∼16 세상 권력에 집착하는 인생

지금까지 우리는 매주 전도서의 말씀을 한 장씩 읽어가면서 의미를 생각해왔습니다.
오늘은 4장의 말씀을 살펴볼 텐데 먼저 그 동안의 말씀을 복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솔로몬이 전도서 1장에서 말씀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해 아래에서는 인생이 아무리 수고를 해도 그 수고가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해 아래의 수고, 다시 말해서 육신을 위한 수고에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수고는 해보았자 헛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수고를 주 안에서의 수고로 바꾸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한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전도서 2장에서 말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인생의 행복이 과연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인생의 행복을 찾기 위해서 쾌락의 나라에도 가보았고, 지혜의 나라에도 가보았고, 재물의 나라에도 가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뒤에 솔로몬은 행복이 멀리 있지 않고 언제나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심령에 낙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것을 솔로몬은 2장에서 우리에게 일깨워주었습니다.
전도서 3장에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었습니까? 천하에 범사가, 모든 일에는 다 정한 때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때를 정해놓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때를 어떻게 정하셨습니까? 사람들을 골탕먹이기 위해서, 괴롭히기 위해서 정해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모든 때를 아름답게 정하셨습니다. 적절하게 정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장래 일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때를 정하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선하게 인도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일을 맡겨주셨든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깊은 경륜에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가장 적합한 일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쁨을 누리면서 최선을 다해서 그 일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분복입니다. 타고난 복입니다.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누리고 즐겨야 할 복입니다.
오늘은 4장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전도서 4장에서 솔로몬은 네 종류의 사람을 논하고 있습니다. 이 네 종류의 인생들은 다 불행합니다. 심령에 낙이 없습니다. 말씀을 읽어가면서 혹시 나는 그 가운데 해당하는 사람이 아닌지 반성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래서 그 동안 마음에 평안이 없었구나! 내가 이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행복하게 살지 못했구나!" 이것을 깨닫고 잘못된 것은 즉시 고치시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이제 남은 생애는 주님 안에서 심령에 낙을 누리면서 행복하게 사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한 절씩 읽어가면서 말씀의 의미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학대받는 인생
솔로몬이 1∼3절에서 논하고 있는 인생은 학대받는 인생입니다. 학대를 받으며 사니까 무슨 심령에 낙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첫번째 종류의 인생입니다.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모든 학대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해 아래 인생이 있는 곳에는 학대가 있기 마련입니다.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사람을 착취합니다. 배운 사람은 못 배운 사람을 무시합니다. 힘있는 사람은 힘없는 사람을 억누릅니다. 이처럼 어디에나 다 학대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학대받는 사람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솔로몬이 계속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는데, 문제는 학대받는 사람에게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다시 한번 그것을 반복하면서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학대하는 사람의 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래서 학대받는 사람을 마음껏 학대합니다. 그러나 학대받는 자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두 눈에서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눈물을 닦아줄 위로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비참한 현실입니까? 솔로몬은 위로 받지 못하는 사람, 학대받는 사람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살아 있는 산 자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를 복되다 하였으며."
무슨 말씀입니까? 위로 받지 못하고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솔로몬은 3절에서 심지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둘보다도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악을 보지 못한 자가 더욱 낫다 하였노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에서 자행되는 악은 아예 보지도 않았을 것이니까 그것이 더 낫지 않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해 아래 인생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악이 있고, 학대가 있고, 그에 따른 인생의 무거운 짐이 다 있기 마련입니다. 여러분은 힘든 일을 당할 때, 어렵고 억울하고 슬픈 일을 당할 때 어디에서 위로를 찾으십니까? 해 아래 인생은 어느 누구도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욥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욥이 어려운 곤경에 처했습니다. 세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위로해주기 위해서 온갖 말을 다 해주었지만 욥이 세 친구에게서 과연 위로를 받았습니까? 오히려 마음이 더 아팠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믿은 사람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게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해 아래 인생은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참된 위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우리가 어디에서 위로를 찾을 수 있습니까?
시 121편에서 어느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러분도 힘들고 어려울 때 해 아래 인생들에게서 위로를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눈을 들어 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위에 계신 분,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된 위로, 진정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선지자 엘리야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엘리야가 사악한 여인 이세벨의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멀리 하나님의 산 호렙 산으로 피신을 가야만 했습니다. 광야 길이기 때문에 길이 험했습니다.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워서 엘리야는 어느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갈구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기도를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엘리야를 죽도록 내버려두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마실 것도 주셨습니다. 말씀으로 위로해주셨습니다. 엘리야에게 새 힘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모든 어려운 곤경을 극복해냈습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에게 어려운 곤경이 임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던지 욥기 3장에 보면 욥이 자기의 생일까지 저주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내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을 텐데. 차라리 어머니 뱃속에서 죽었더라면 더 나았을 텐데."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렇게 탄식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욥을 그대로 내버려두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말씀으로 그의 무지를 깨우쳐주셨습니다. 위로해주셨습니다. 모든 곤경을 다 돌이키시고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갑절의 복을 주셨습니다. 욥이 자기 친구들로부터는 아무런 위로도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진정한 위로자가 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 어떠한 환난을 당하든지 간에 모든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능히 위로하실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위로가 이 시간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경쟁심에 사로잡힌 인생

두번째 종류의 인생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4∼6절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종류의 인생은 그의 마음속에 시기심, 다른 사람에 대한 경쟁심으로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의 심령에 무슨 낙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 사람들이 가진 특징이 두 가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첫째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아주 열심히 일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또 두번째 특징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교묘한 일로 인하여."
재주가 좋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절대로 실패하는 일이 없습니다. 항상 성공합니다.
여기까지는 참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이 열심히 수고해서 성공한 동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우리말 성경은 번역이 조금 잘못되어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성공한 결과로 이웃 사람들의 시기를 받는 것으로 번역되었는데 그것은 문맥에 적합하지 못한 번역입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성공했는데 다른 사람이 시기한다면 그것은 시기하는 사람의 잘못이지 내 잘못은 아니지요?
원문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열심히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아서 성공을 했는데, 그 동기가 이웃에 대한 시기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동기가 불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바른 동기에서 열심히 일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이 두번째 인생은 옳지 않은 동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이웃 사람에 대한 시기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웃이 잘되는 꼴이 보기 싫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짓밟기 위해서 무리하게 경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동기가 옳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성공한들 결과가 무엇입니까?
"이것도 헛되어."
하나님이 그런 성공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인정해주시겠습니까? 그러니 헛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여러분, 지나가는 바람을 손으로 잡아보십시오. 잡힙니까? 잡아도 잡아도 손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나보다 나은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사람과 경쟁해서 이겼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납니까? 나보다도 나은 사람이 또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또 그 사람과 경쟁해야 합니다. 그러니 그 일이 끝이 없습니다. 잡히지 않는 바람을 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경쟁이라는 것도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반대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어떤 삶입니까?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매자는 손을 거두고 자기 살을 먹느니라."
남과 다투기 싫다고, 경쟁하기 싫다고 손을 거두어 버리고 아예 일하지 않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그런 사람을 가리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우매자"라고 했습니다. 바보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살을 먹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을 하지도 않는데 누가 먹을 것을 줍니까? 자기 살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굶어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파멸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양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다 잘못입니다. 언제나 균형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6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사람은 그래도 한 손에는 가득하지 않습니까? 우매자처럼 손을 거두고 굶어죽는 사람은 아닙니다. 필요하면 열심히 일합니다. 그래서 한 손은 가득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과 과도한 경쟁을 하지도 않습니다. 뼈빠지게 일하고, 스트레스 받고, 긴장이 쌓이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평온함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사람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두 손에 가득하면서도 만족할 줄 모르고 잡히지도 않는 바람을 잡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죽도록 고생만 하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인 우리 인생의 삶의 본분은 무엇입니까?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전 10:31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가 수고하고, 사업을 하고,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웃 잘되는 꼴이 보기 싫어서, 또는 내가 이웃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내가 이 일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까?" 이것이 늘 우리 마음에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보다 잘되면 안돼. 어떻게 하든지 저 사람을 이겨야 해." 그런 마음에서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늘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평강, 우리 하나님만이 주시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주지 못하는 평온함이 비로소 우리 마음에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수평적인 관계, 즉 나와 너와의 관계를 생각하기에 앞서서 수직적인 관계, 즉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로 될 수 있도록 늘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남과 어울릴 줄 모르는 인생

세번째 종류의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7∼12절에 나오는 인생입니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줄을 모릅니다. 너무 독립심이 강합니다. 자기가 제일인 줄 압니다. 뭐든지 자기 혼자만 해야 합니다. 그러니 어찌 그 마음에 평안이 있겠습니까? 그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어울릴 줄도 알고, 협력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또 돌이켜 해 아래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수고해도 다 헛되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런지 8절 이하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가족이 없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가족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 마음의 문을 넓게 열면 이웃 사촌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가족처럼 여기면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아무도 없이 홀로 있으나"라고 했습니다. 철저하게 혼자입니다. 아내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동업해서 일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철저하게 혼자입니다.
"수고하기를 마지아니하며."
그저 혼자서만 수고를 계속합니다. 다른 사람을 불러서 같이 협력해서 일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그 이유가 나옵니다.
"부를 눈에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도."
벌어놓은 부를 자기 혼자 다 독차지해도 양이 차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동업해서 일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벌어놓은 부를 나누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것을 나누기 싫어서, 자기 혼자 다 독차지하려고, 모든 영광을 다 혼자 차지하려고 그렇게 독립심이 강해서 혼자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마음에 양이 차겠습니까? 결국은 허전한 마음이 되어서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 수고하고 내 심령으로 낙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고."
뼈빠지게 고생해봤자 누구를 위한 수고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누구를 위해서 수고한 것입니까? nobody입니다. 아무도 유익을 얻는 사람이 없습니다. 죽어서 자기가 재산을 가지고 가는 것도 아닙니다. 또 그렇다고 재산을 물려줄 아들이나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죽은 후 재산을 관리해 줄 친구라든지 동업자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사람에게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의 수고를 통해서 유익을 받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 결과가 8절 끝 부분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도 헛되어 무익한 노고로다."
아무도 유익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솔로몬은 9절 이하에서 협력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한 사람이 독자적으로 일하는 것보다 두 사람이 같이 일하면 더 좋은 결과가 온다는 것입니다.  
협력할 때 얻게 되는 좋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솔로몬은 한 가지 예를 들고 있습니다. 광야 길을 여행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광야 길은 아스팔트처럼 좋은 길이 아닙니다. 울퉁불퉁하고, 군데군데 웅덩이가 파져 있습니다. 그런 험한 길을 더군다나 밤중에 여행하게 되면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10절 말씀을 보세요.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밤중에 여행을 하다가 한 사람이 웅덩이에 빠졌습니다. 잘못해서 발을 삐었습니다.
그래도 함께 여행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그를 붙들어 일으켜서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 여행한다고 생각해보세요.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아주 결정적으로 화를 초래할 수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위험합니까?
밤이 되었습니다. 광야는 일교차가 심합니다. 낮에는 아주 덥고, 밤에는 아주 춥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11절 말씀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혼자이면 아무리 두꺼운 옷을 껴입어도 그 추위를 혼자서 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라서 등을 대고, 또는 끌어안고 잔다면 체온이 서로 통하기 때문에 그만큼 더 따뜻합니다.
또 광야에는 강도가 나타날 위험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비유 가운데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당했습니다. 있는 것을 다 빼앗기고 실컷 얻어맞고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이처럼 광야 길을 혼자 여행하는 것은 아주 위험합니다. 그것이 12절 말씀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안전합니다. 뭉치면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질 위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이 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머니(money)가 최고다." 무슨 말입니까? 뭐니뭐니해도 돈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그저 물질이 제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릅니다.
우리는 물질 제일주의가 아니라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물질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이웃이 더 소중합니다. 우리는 물질에 집착하지 말고 이웃의 소중함을 알고 함께 협력하면서 더불어서 인생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가 있습니다. 그해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창고를 새로 지었습니다. 그 창고에 곡식을 가득가득 쌓아놓았습니다. 주변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텐데 그것을 나누어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잔뜩 쌓아놓고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날 밤에 그 영혼을 불러가 버리셨습니다.
물질에 목적을 두지 마세요. 물질에 목적을 두었을 때, 돈을 많이 벌기는 벌어도 쓰지 않고 채워놓기만 하면 인생의 목적이 달성된 것이지 않습니까? "됐어? 너 이리와."
하나님이 불러가십니다. 목적을 달성했으니까 다 산 것입니다.
우리가 안심하고 이 땅에서 오래 살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형편이 되시는 대로 인삼도 드시고, 녹용도 드시고, 보약도 드세요. 그러나 그것보다 확실한 비결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질을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게 이웃을 위해서 많이 쓰는 것입니다. 그 일은 끝이 없습니다. 해도해도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자꾸 주십니다. 주시는 대로 값있게 쓰면 됩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오래 삽니다. 이웃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모든 교우님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세상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

마지막 네번째 종류의 인생이 있습니다. 네번째 종류의 인생은 13∼16절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세상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들입니다.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13절을 우리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소년은 늙고 둔하여 간함을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여기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서로 비교해봅니다. 우선 왼편에 있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오른편에 있는 사람은 왕입니다. 신분이 서로 다릅니다. 아울러 왼편에 있는 사람은 소년입니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립니다. 오른편에 있는 왕은 늙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습니다. 이 두 가지 요소만 살펴보면 누가 더 낫습니까? 오른편에 있는 사람이 월등히 낫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결정적으로 바꿔놓는 제 3의 요소가 있습니다. 지혜입니다. 왼편에 있는 사람은 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른편에 있는 사람은 둔하다고 했습니다. 지혜가 없습니다. 그 예를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간함을 받을 줄 모른다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그런 분이 안 계신 줄 압니다만 사람이 나이가 들면 고집만 세어집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이 고정되어 있어서, 분명히 자기가 틀렸는데도 옳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그 점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두 사람의 위치를 바꾸어 버렸습니다. 왼편에 있는 사람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런지 1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저는 그 나라에서 나면서 가난한 자로서 옥에서 나와서 왕이 되었음이니라."
"저는"은 왼편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가난하게 태어났습니다. 심지어는 옥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감옥에까지 갔었습니다. 어려운 역경에 있었지만 그 모든 역경을 지혜로 극복하고 나중에 왕이 되었습니다. 권력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니 왼편에 있는 사람이 더 나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15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본즉 해 아래서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버금으로 대신하여 일어난 소년과 함께 있으매."
소년이 왕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소년이고, 가난하지만 지혜로워서 좋았는데 왕이 되니까 지혜로웠던 소년도 또 둔해집니다. 간함을 받을 줄 모르는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소년도 그 이전의 왕과 똑같은 모습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면서 백성들의 마음도 제3의 또 다른 새롭게 일어난 소년에게 쏠리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권력이라는 것도 일시적이고 덧없지만, 인기와 명성도 다 그렇습니다.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됩니까? 제3의 소년이 왕이 됩니다. 그것으로 끝납니까? 권력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결과가 뻔하지 않습니까?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희 치리를 받는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백성들의 마음은 제4의, 제5의 소년에게로 자꾸 가게 됩니다. 그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인생의 권력, 인기, 명성 등은 다 헛된 것입니다. 일시적인 것입니다.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런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것에 우리가 어찌 우리의 인생을 걸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영원한 소망으로 삼고, 그 한 분만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인생이 헛되지 않고 의미 있는 삶, 가치 있고 보람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솔로몬은 오늘 전도서 4장에서 세상 사람들이 왜 심령에 낙을 누리지 못하는지를 일깨워주었습니다.
첫째로, 세상 사람들에게는 위로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져 주시고, 우리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둘째로, 세상 사람들은 시기심에 사로잡혀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평강이 우리 마음속에 있게 됩니다.
세번째로, 세상 사람들은 물질 제일주의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갑니다. 물질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이웃이 더 소중합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네번째로, 세상 사람들은 덧없는 일시적인 것에 집착하면서 살아갑니다. 권력에 집착하고, 인기에 집착하고, 명예에 집착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으로 삼고, 그분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심령의 낙을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여러분의 여생이 주님 안에서 더욱더 행복하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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