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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행복의 비결(6:1∼12)

by 【고동엽】 2022. 4. 17.

제6장 행복의 비결(6:1∼12)

 

 

< 개 요 >
1. 6:1∼2 인생의 첫번째 폐단
2. 6:3∼6 인생의 두번째 폐단
3. 6:7∼9 인생의 세번째 폐단
4. 6:10∼12 인생살이에 폐단이 생기는 이유와 그 해결책

오늘은 전도서 6장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함께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6장에서 해 아래 인생들, 특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생들이 겪어야 하는 세 가지의 대표적인 폐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폐단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들이 당하는 불행, 고통스러운 일을 말합니다.
첫번째 폐단이 1∼2절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부요와 재물과 존귀를 받기는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폐단입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고생해서 먹고살 만하게 되니까 그만 병들어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폐단이지요.
두번째 폐단이 3∼6절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많은 자녀를 두었습니다.
일백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만큼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또 장수했습니다. 그런데 심령에 낙이 없습니다. 아무리 오래 산들 죽지 못해 억지로, 마지못해 살아간다면 그것이 무슨 행복이겠습니까? 불행한 일입니다. 또 아무리 자녀가 많아도 자기가 죽었을 때 장사지내 줄 자식이 없다면 일백 자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역시 불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나온 줄 압니다.
세번째 폐단이 7∼9절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수고하고 애써도 그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폐단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뛰다 보면 걷고 싶고, 걸으면 서고 싶고,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입니다. 그 한이 없는 욕구를 무슨 수로 충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왜 해 아래 인생들이 이와 같은 폐단을 당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솔로몬은 오늘 본문의 결론 부분인 10∼12절에서 그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인생의 무지와 무능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무지하기 때문에 무엇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지 알지 못합니다. 또 우리는 무능합니다. 그래서 행복을 목표로 삼고 아무리 그것을 잡으려고 애를 써도 결코 잡히지 않습니다. 솔로몬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바로 행복의 비결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전도서 6장의 줄거리입니다.
이제 한 절씩 본문의 말씀을 읽어가면서 구체적으로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1. 인생의 첫번째 폐단

첫번째 폐단이 1∼2절에 나옵니다. 1절 말씀입니다.
"내가 해 아래서 한 가지 폐단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에게 중한 것이라."
솔로몬이 본 첫번째 폐단은 해 아래 인생들에게 중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폐단을 겪으면서, 이 불행을 당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폐단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입니까? 2절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얼마나 놀라운 복입니까?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넉넉하게 받았습니다. 마음에 더 이상 부러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폐단입니까? 문제가 그 다음에 나오고 있습니다.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불행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많이 받았다 해도 그것을 누리려면 건강해야 합니다. 병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장수해야 합니다.
오래 살아야 합니다. 일찍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설상가상으로 이 사람을 더욱더 불행하게 만든 요인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자기와는 전혀 관계없는 엉뚱한 사람, 알지 못하는 제삼자가 그것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그 사람 입장에서 보면 헛수고만 한 것입니다. 헛고생한 것입니다. 또 얼마나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병폐입니까?
솔로몬의 부친이었던 다윗 왕 때에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사울 임금에게 쫓겨다닐 때였습니다. 그때 다윗은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광야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때마침 그 근처에 살고 있는 나발이라는 부자의 집에서 양털을 깎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양털을 깎을 때는 으레 주인이 일꾼들을 위해서 큰 잔치를 열기 마련이었습니다. 다윗은 자기 수하의 부하 열 사람을 그에게 보냈습니다. 먹을 것과 쓸 것을 나누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발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윗의 부하들 앞에서 이런 말로, 저런 말로 다윗을 심하게 모욕을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다윗이 전해 듣고 분개했습니다. 그래서 부하 400명을 이끌고 나발을 죽이기 위해서 올라왔습니다. 그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이 그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비가일은 대단히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부랴부랴 떡과 포도주와 고기를 충분히 준비해서 다윗을 맞이하러 왔습니다. 그것을 주면서 아비가일은 남편 나발 대신 다윗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제야 다윗의 마음이 누그러졌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받고 오던 길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다음날 나발은 아비가일을 통해서 다윗이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 400명을 이끌고 왔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겁에 질려서 나발이 부들부들 사시나무 떨 듯이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열흘동안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 이유를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고 했습니다(삼상 25:28). 하나님이 그를 치셨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너에게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주었지만 너는 그것들을 누릴 자격이 없어. 이리와."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불러가 버리신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비가일은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발이 가지고 있던 그 많은 재물과 부요와 존귀가 다 다윗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다윗이 대신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복을 여러분이 능히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나발처럼 움켜쥐고만 있으면 안됩니다. 필요할 때는 손을 펼 줄 알아야 합니다. 베풀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복을 여러분이 누리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물론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울러 그것을 능히 누릴 수 있는 복도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인생이 두번째 폐단

그 다음에 두번째 폐단이 3∼6절에 나옵니다.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비록 일백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이 사람은 2절에 언급된 사람이 받지 못한 복을 다 받았습니다. 일백 자녀를 두었습니다. 자녀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만큼 건강했을 것입니다. 또 장수의 복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 다음에 나옵니다.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고."
아무리 오래 산들 마음속에 평안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입니다.
또 "그 몸이 매장되지 못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자녀들에게서 공경을 받고 효도를 받아야지요. 죽었는데 그 몸 하나 제대로 거두어서 장사지내 줄 자녀가 없다면 일백 자녀를 두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소용없습니다.
솔로몬은 그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3절 마지막 부분을 보세요.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저보다 낫다 하노니."
오히려 낙태된 자보다 더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낙태된 자가 얼마나 불행합니까? 솔로몬은 4∼5절에서 낙태된 자의 불행을 다섯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4절 말씀을 보니까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라고 했습니다. 낙태된 자가 이 세상에 와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소유해보았겠습니까? 무엇을 누려보았겠습니까? 헛되이 왔을 수밖에 없습니다.
두번째는 "어두운 중에 가매"입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다가 그대로 어두운 땅속에 파묻혀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그 이름이 어두움에 덮이니"입니다. 사람들이 그의 존재조차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립니다. 즉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네번째 5절 말씀에 보니까 "햇빛을 보지 못하고"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어야 햇빛을 볼 수 있지요. 하루라도 살았어야 햇빛을 보지요.
다섯번째, "알지 못하나"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되어 가는 일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태된 자가 더 나은 이유가 있습니다. 5절 하반부입니다.
"이가 저보다 평안함이라."
왜냐하면 해 아래서 인생들이 겪어야 하는 폐단, 당해야 하는 불행을 낙태된 자는 겪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낙태된 자가 더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솔로몬은 6절에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낙을 누리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천 년의 갑절은 얼마입니까? 2천 년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제일 오래 산 사람이 므두셀라였습니다. 그는 969년을 살았습니다. 2천 년은 므두셀라가 산 것의 두 배가 넘는 기간입니다. 그처럼 오래 산다고 한들 낙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2천 년이 아니라 3천 년을 살아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결국은 무덤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니 오래 산다는 것이 고생만 실컷 더 하다가 가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죄만 더 많이 짓다가 가는 셈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서 받을 형벌만 더 쌓는 결과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건강의 복을 주시기 원합니다. 장수의 복을 주시기 원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에 더해서 평강의 복을 주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평강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자녀의 복을 주시기 원합니다. 아울러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에게 효도하고 여러분을 공경하는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부모님을 공경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정이 주님 안에서 더욱더 복되고 아름다운 가정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3. 인생의 세번째 폐단

마지막 세번째 폐단이 7∼9절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차지 아니하느니라."
먹어야 삽니다. 살기 위해서는 누구나 먹어야 합니다. 지혜자도 먹어야 하고, 우매자도 먹어야 합니다. 부자도 먹어야 하고, 가난한 사람도 먹어야 하고, 누구나 다 먹어야 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먹어도 식욕은 차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늘 잔뜩 먹었다고 내일부터 안 먹고 살 수 있습니까? 내일이면 또 먹어야 합니다. 인간의 욕구는 식욕뿐이 아닙니다. 다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무슨 수로 그 욕구를 채울 수 있겠습니까?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뇨."
지혜자도 먹어야 살고, 우매자도 먹어야 삽니다.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혜자나 우매자나 아무리 수고해도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지혜자라고 해서 더 나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8절 하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인생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가난한 자는 무엇이 유익한고."
이 사람은 비록 가난하지만 인생 앞에서 행할 줄 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지혜롭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혜자가 아무리 자기의 지혜를 다 짜내고 아무리 고생하고 수고해서 원하는 것을 손에 쥔들 그것이 무엇이 그리 유익하냐는 것입니다. 또다시 다른 욕구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시면 좀더 쉽게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소유해서 손에 쥐고 눈으로 보는 것이 없어서 심령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낫기는 낫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입니다. 또 다른 욕구가 생기게 됩니다.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해봅니다. 사글세방에 사는 사람은 마음에 소원이 있습니다. "전세방이라도 하나 있으면 좋겠는데." 전세방을 가지기 전에는 마음에 만족이 없습니다. 손에 쥐지 못했기 때문에 늘 마음에 전세방을 그리면서 공상을 합니다. 수고하고, 고생합니다. 그렇게 해서 전세방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행복합니까? 만족도 잠시입니다. 또 다시 마음에 새로운 공상이 생깁니다. "열세 평 짜리 아파트라도 좋다, 내 것이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또 고생합니다. 또 수고합니다.
그것을 얻기까지는 행복이 없습니다. 드디어 열세 평 짜리 아파트가 손에 쥐어졌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합니까? "좀더 큰 평수, 화장실 두 개 짜리 아파트!" 그렇지 않습니까?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낫지만 이것도 헛되다고 했습니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바람은 아무리 쥐려고 해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욕구도 아무리 애쓰고 충족하려고 해도 차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떡을 삶의 목표로 삼지 마세요. 행복 그 자체를 삶의 목표로 삼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비참해집니다.
예수님이 요 4:34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예수님의 삶의 목표였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속에 비로소 참된 만족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길이 바로 내 삶의 목표를 하나님의 영광에 두는 것입니다.

4. 인생살이에 폐단이 생기는 이유와 그 해결책

이제 우리는 결론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왜 해 아래 인생들이 이와 같은 폐단을 겪으면서 살아야 하는가? 그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해 아래서 좀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이것을 솔로몬이 결론 부분에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10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미 있는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 이름이 칭한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이미 있는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 이름이 칭한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누구에 의해서 칭한 바 된 것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부터였습니까? 오래 전부터, 천지가 창조된 때부터였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첫째 날에 무엇을 창조하셨습니까?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빛을 무엇이라고 칭하셨습니까? 낮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둠은 밤이라고 칭하셨습니다. 그때부터 빛은 낮입니다. 어둠이 될 수가 없습니다. 어둠은 밤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이기 때문에 이것은 누가 바꿀 수 없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 이름을 칭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만드시고 난 뒤에 사람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칭하셨습니까? 아담이라고 칭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흙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아담이라는 이름의 뜻이 흙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자기의 본질이 무엇인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흙에서 왔으니까 흙으로 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만큼 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10절 중반부에 보면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니 어찌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 창조주 하나님과 감히 다툴 수 있겠습니까? "자기보다 강한 자와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는데 감히 우리가 어찌 하나님과 다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해 아래 인생들 가운데는 어리석게도 하나님과 다투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1절 말씀을 보세요.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이 있나니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해서 무엇이 그리 유익하겠습니까? 되는 일이 무엇입니까? 다 헛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러면서 생명나무 실과를 비롯해서 각종 나무의 실과를 다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했습니까? 먹으면 하나님같이 될 것이라는 뱀의 유혹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행복해졌습니까? 오히려 불행해졌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오른쪽으로 가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오른쪽으로 가는 것이 바로 행복의 비결입니다. 그 길이 비록 좁은 길이고 힘들고 고통스러워 보이지만 그 길로 가는 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왼쪽으로 가면 행복해질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농사가 잘되어 창고를 새로 짓고 잔뜩 쌓아놓았습니다. 일시적으로 행복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날이 그에게는 가장 불행한 날이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각으로는 일순간 행복해 보일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인생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마지막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알며 그 신후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솔로몬은 인간의 생명은 헛되다고 표현했습니다. 일평생의 모든 날을 그림자같이 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덧없는, 잠시 잠깐 있다가 지나가 버리는 생명입니다.
그러니 이와 같이 무지하고 무능한 우리 인생이 행복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무엇이 행복을 가져다줄지 우리 인생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따라가는 것이 바로 행복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 신후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장래에 대해서 누가 능히 고할 수 있겠습니까? 점쟁이가 알려주겠습니까? 역술가가 알려주겠습니까?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한치 눈앞도 내다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따르는 것이, 그 뜻을 따라 사는 삶이 행복한 삶입니다.
사랑하는 승동의 교우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주님 안에서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18세기 초의 영국의 유명한 문필가였던 조셉 애디슨(Joseph Addison)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The grand essentials to happiness in this life are something to do, someone to love, and something to hope for." 무슨 말입니까? 인생에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something to do," 뭔가 해야 할 일이 있고, 두번째로, "someone to love," 누군가 사랑해야 할 사람이 있고, 세번째로, "something to hope for," 뭔가 바라는, 기대할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 가지 요소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합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해야 할 대상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할 존재입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해 아래 이 세계에 집착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해 위의 세계, 영원한 세계를 소망 가운데서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바로 주님 안에서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을 목표로 삼지 마십시오. 그러면 절대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참해집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부귀와 영화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건강하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장수한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자녀가 많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행복을 잡겠다고 내가 애를 써도 행복은 잡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야 합니다. 신앙 제일주의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의 비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자동적으로 행복이 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따라오게 만들어야 합니다. 내가 잡으려고 하면 절대로 잡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셔서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주님 안에서 복되고 아름답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마음의 평강, 심령의 낙을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이 평안하고, 자녀들로부터 효도 받고, 공경 받는 화목한 가정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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