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지혜를 얻는 길(7:1∼29)
< 개 요 >
1. 7:1∼14 지혜의 소중함 2. 7:15∼22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항 3. 7:23∼29 지혜를 얻는 길 오늘은 전도서 7장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여러분, 혹시 몇 해 전에 상영되었던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를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유대인들이 포로수용소에서 겪었던 참혹한 생활을 적나라하게 잘 묘사한 영화입니다. 그 영화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독일군 장교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기지개를 켜면서 창가에 가서 창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저 멀리 아래쪽에서 유대인 여자 한 사람이 짐을 운반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독일군 장교는 돌아가서 장총을 가지고 나오더니 그 여인을 향하여 겨냥했습니다. 그리고는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심심풀이로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런 참혹한 수용소 생활 속에서 하루는 작은 사건이 하나 발생했습니다. 독일군이 키우고 있던 닭 한 마리가 갑자기 없어진 것입니다. 독일군은 범인을 색출하겠다고 유대인들을 다 불러모았습니다. 그리고 본보기로 맨 앞에 있는 유대인을 총으로 쏴 죽였습니다. 그리고 고함을 칩니다. "닭을 들고 다니는데 못 보았을 리가 없어. 누구야? 빨리 불어! 안 그러면 나올 때까지 차례로 한 사람씩 죽이겠다." 그러나 모두가 공포에 질려서 고개만 푹 숙이고 있습니다. "아무도 못 보았단 말이지?" 그러면서 독일군 병사는 두번째 사람을 향해서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때 나이 어린 소년 하나가 한 발자국 앞으로 자기 몸을 내밀었습니다.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너냐? 네가 닭을 훔쳤어?"라고 독일군 병사가 호통을 쳤습니다. "아닙니다." "그러면 누가 훔쳤는지 알고 있어?" "예, 알고 있습니다." "누구야?" 그때 소년은 겁에 질렸으면서도 분명한 목소리로 한 사람을 가리키면서 "바로 저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소년이 누구를 가리켰겠습니까? 총에 맞아서 이미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죽은 사람이야 이미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지혜로운 답변입니까? 여러분, 전 7:12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지혜는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함이니라." 나이 어린 유대인 소년의 지혜는 자기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또한 다른 유대인들의 생명도 구했습니다. 솔로몬은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전도서 7장에서 지혜에 대해서 여러 가지 귀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크게 세 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 대지는 1∼1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지혜가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소중한지를 네 가지로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두번째 대지는 15∼2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역시 인간입니다. 어쩔 수 없이 연약한 인간입니다. 여러분, 솔로몬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지혜로웠습니까? 그 지혜로웠던 솔로몬도 이방 여인들의 꾀임에 빠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했습니다. 이방신을 섬기는 죄의 길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선 줄로 생각하지 말고 늘 넘어질까 조심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세번째 대지는 23∼29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지혜를 얻는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능력으로는 지혜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솔로몬의 결론은 자명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이상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전도서 7장의 줄거리입니다. 한 절씩 읽어가면서 좀더 자세하게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지혜의 소중함 첫째로, 1∼14절 말씀에서 솔로몬은 지혜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네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왜 지혜가 아름답습니까? (1) 지혜는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 마지막 날을 예비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이름은 영원하지만 보배로운 기름은 일시적이기 때문입니다. 베다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해서 옥합을 깨트렸습니다. 그 옥합 속에서 흘러내리는 보배로운 기름, 거기서 풍겨 나오는 향유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그 향기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며칠 지나면서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베다니 마리아가 남겨 놓은 아름다운 이름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더 나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기억되는 아름다운 이름이 죽는 날 결정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출생하는 날 결정되는 것입니까? 가룟 유다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유다라는 이름은 "praise, 찬양"이라는 뜻입니다. 태어날 때는 얼마나 좋은 이름을 가지고 태어났습니까? 그러나 죽을 때 잘 죽지 못했기 때문에 악취 나는 이름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름다운 이름은 출생하는 날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일평생을 다 살고 난 뒤에 죽는 날 결정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도 더 의미가 있고, 소중한 것입니다. 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초상집에 가면 아무래도 마음이 진지해지지 않습니까? "나도 결국은 이와 같이 죽겠구나. 내 생명이 끝나는 날이 있겠구나. 사는 동안 잘 살아야지. 아름다운 이름을 남겨야지." 이런 마음이 절로 들지 않습니까? 그러니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는 것입니다. 또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초상집의 그 숙연한 슬픔이 잔칫집의 웃고 떠드는 헤픈 웃음보다도 더 낫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여러분, 잔칫집에 가 보세요. 마음이 헤퍼집니다. 느슨해집니다. 죄 짓기 쉽지 않습니까? 술 마시고 떠들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죄 짓기 쉽습니다. 그러나 초상집에 가면 "내가 앞으로는 이렇게 살아야겠구나. 아 내가 잘못 살았구나"하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다지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슬픔이 웃음보다도 더 낫다는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사람과 우매자의 차이입니다. 지혜자는 자기의 죽음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마지막 날을 예비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매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육신을 즐기는 일에 마음이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 9:28에서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지혜로운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이 땅에서는 베다니 마리아처럼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칭찬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귀한 상급을 다 받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지혜는 우리의 발걸음을 옳은 길로 인도해 줍니다. 5∼7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사람이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지혜로운 사람은 아첨하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 정말로 자기를 위해서 진정으로 책망하고 충고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더 좋아합니다. 여러분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첨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시고, 책망하고 충고해주는 소리를 귀담아 듣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가 6절 말씀에 나옵니다.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탈 때 뿌지직뿌지직 하고 소리가 요란합니다. 그러나 실속이 없습니다. 장작불처럼 오래 가지도 못하고, 화력도 시원찮습니다. 가시나무는 금방 타 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니 무슨 실속이 있습니까? 아첨하는 소리가 그와 같습니다.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을 뿐입니다. 7절 말씀을 보십시다. "탐학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케 하느니라." 그러니까 사람은 누구든지 다른 사람의 책망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탐욕 때문에, 뇌물 때문에 잘못된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의 책망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저희 어머님이 제게 쓴 약을 주시면서 늘 인용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양약(良藥)이 고구(苦口)이나 이어병(利於病)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좋은 약이 입에는 쓰지만 병에는 좋으니 참고 먹으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충고와 책망이 얼른 듣기에는 귀에 거슬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우리의 발걸음을 올바르게 인도해줍니다. 아첨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진정으로 나를 아끼고 사랑하며, 책망하며, 충고하는 목소리를 더 좋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지혜는 최후의 승리를 우리에게 가져다줍니다. 최후의 승리가 진정한 승리입니다. 끝을 봐야 아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모릅니다. 8∼1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8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끝이 시작보다 더 나아야 합니다. 여러분, 탕자를 생각해 보세요. 탕자가 시작할 때는 얼마나 기고만장했습니까? 좋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형편없었습니다. 빈털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거렁뱅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끝이 시작보다 못한 경우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달랐습니다. 애굽에 내려갈 때 종의 신분으로 내려갔습니다. 노예로 팔려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모든 시련을 다 이겨내고, 거기서 총리가 되었습니다. 기근에 허덕이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끝이 시작보다 더 나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일의 끝이 시작보다 더 낫게 만들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8절 하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일의 끝을 바라보면서 시련이 있더라도 참고,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참고 또 참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참는 마음을 가지면 일의 끝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교만한 마음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낮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우매자는 급한 마음을 가집니다. 쉽게 노를 발합니다. 그것이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것뿐입니까? 10절 말씀을 보세요.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 어리석은 사람이 즐겨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래뵈도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 이런 말은 다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옛날이 오늘보다 낫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는 갈수록 못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만큼 성실하게 최선을 다한 삶을 살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의 끝을 바라보면서 참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교만한 마음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마세요. 진정한 승리는 최후의 승리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매일의 삶에 묵묵히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틀림없이 내일은 오늘보다도 더 나을 것입니다. 최후의 승리가 여러분의 손에 안겨지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4)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도록 만들어줍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과 다툴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우매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지혜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서 그 뜻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가게 만들어줍니다. 11∼1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1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혜는 유업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하도다." 지혜나, 부모님에게서 상속받은 유업이나 똑같이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해 아래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다 유익합니다. 어떤 면에서 유익합니까? 12절 말씀입니다.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다른 사람들에게 속지 않으려면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또 물질도 있어야 합니다. 물질이 없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기 쉽습니다.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혜와 물질, 이 두 가지 가운데 무엇이 더 소중합니까?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지혜가 더 소중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혜는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함이니라." 그렇지 않습니까? 지혜는 없고 물질만 있으면, 타락하기가 쉽습니다. 오히려 생명을 잃는 길로 나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혜는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혜가 물질보다도 더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가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어떻게 보존합니까? 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시는지 그 일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따라갑니다.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사람은 하나님과 능히 다툴 수가 없습니다. 1934년에 유명한 신학자 라이홀트 니버(Reinhold Niebuhr)라는 사람이 "The Serenity Prayer"라고 하는 유명한 기도문을 작성했습니다. 전세계 사람들이 많이 인용하는 기도문입니다. 여러분도 그 내용을 들으시면 이미 알고 있는 기도문일 것입니다. "O God, give us Serenity to accept what cannot be changed, Courage to change what should be changed, And wisdom to distinguish the one from the other." 그는 이 기도문에서 세 가지를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첫째로, 바꿀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주시옵소서."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은 그대로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고 순응할 수 있는 침착함을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두번째, 바뀌어야 할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비겁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세번째, 그리고 바꿔야 할 것과 바꿀 수 없는 이 두 가지를 분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이것이 바로 솔로몬이 오늘 13절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1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하나님은 우리에게 형통한 날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아울러 곤고한 날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양손에 충분한 복을 주십니다. 그것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등에 충분하게 무거운 짐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교만하게 살지 말고, 겸손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자기 능력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라고 하나님은 우리의 손에는 복을 주시고, 아울러서 우리 등에는 충분하게 무거운 짐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형통한 날이 왔을 때 자만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줄 압니다. 아울러서 곤고한 날을 당했다 할지라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미국에 살던 어떤 사람이 실직을 당했습니다. 직장에서 쫓겨났습니다. 할 일이 없습니다. 부인이 삯바느질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아내가 일하는 모습을 가만히 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집에서 놀면서 아내가 삯바느질을 하는데 도와줄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든 것이 재봉틀입니다. 그 유명한 싱거 재봉틀입니다. 싱거라는 사람은 자기가 당한 시련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습니다. 여러분도 곤고한 날을 당했을 때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낙심하지 마시고,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솔로몬은 지혜의 소중함에 대해서 네 가지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2.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항 두번째 대지는, 15∼2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나그네 인생길을 걸어오면서 해 아래 모든 일어나는 일들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놀라운 일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일입니까? 15절 중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의인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형통해야 하는데 오히려 멸망하는 의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또 악인은 하나님의 벌을 받아서 잘못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악인이 형통한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솔로몬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민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시편 73편에서 아삽이 느꼈던 고민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솔로몬이 이 문제를 놓고 깊이 고심을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깨달은 것을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16절 말씀을 보세요.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를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내가 지혜롭고 경건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마땅히 제게 복을 주셔야 하지, 왜 제게 이와 같은 어려운 고난을 주십니까?" 원망하기 쉽지 않습니까?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패망케 되는 일이지 않습니까? "하나님, 저는 부족합니다. 제가 죄인입니다. 제가 잘못한 것이 없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이와 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반대로 1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죄를 짓고 악하게 살아도 얼마든지 형통하던데 뭐. 될 대로 되라." 그런 식으로 죄악에 자기 몸을 내맡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까불다가 정말로 하나님께 벌받아서 기한 전에 일찍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양극단을 다 피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솔로몬은 18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너는 이것을 잡으며," 16절 말씀도 명심하고,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17절 말씀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 양극단에서 피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만이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고 바른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의를 감히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사람이 어찌 감히 죄악 가운데 자기 몸을 내맡길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의인이 고난 당하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해 위의 영원한 세계를 바라볼 때에 해 아래의 일시적인 것은 얼마든지 포기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순교자의 신앙이 그렇게 해서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매일 매일 여러분의 구원을 이루어나가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혜가 지혜자로 성읍 가운데 열 유사보다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 유사는 통치자, 방백을 말합니다. 지혜의 능력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지혜가 있는 한 사람은 열 사람의 통치자의 힘을 뭉친 것보다도 더 강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도 역시 죄인은 죄인입니다. 어쩔 수 없이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것이 20절 말씀입니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100% 선만 행하고, 0% 죄를 전혀 범치 않는 사람이 이 세상에 누가 있겠습니까? 솔로몬이 구체적인 예를 들고 있습니다. 21∼22절 말씀입니다. "무릇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지 말라 염려컨대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들으리라." 남 안 보는 데서 남 험담하지 않고, 또 남을 저주하지 않고 욕하지 않는 사람이 이 세상에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도 스스로 한번 생각해 보세요. 22절입니다.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한 것을 네 마음이 아느니라." 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TV 부흥사 가운데 짐 베이커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잘못해서 제 7계명을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을 제일 신랄하게 공격하고 비판한 사람이 또 다른 TV 부흥사 지미 스와가트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결국 그 사람도 똑같은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뭐라고 했습니까? 선 줄로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 언제나 넘어질까 조심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지혜로웠던 솔로몬도 이방 여인들의 꾀임이 빠지지 않았습니까? 사람은 다 불완전합니다. 그러니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심정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지혜를 얻는 길 마지막 결론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소중한 지혜를 얻을 수가 있습니까? 23∼29절에서 그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2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도다." 솔로몬은 자기가 지금까지 말한 이 모든 것을 지혜로 다 시험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도 틀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사실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솔로몬의 지혜가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고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도다." 솔로몬은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기 능력으로는 지혜를 얻을 수 없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왜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서 자기의 힘으로는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까? 24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무릇 된 것이 멀고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해 아래 되어진 모든 것은 우리 인간의 머리로 통달하기에는 너무나도 멀고, 너무나 도 깊다는 것입니다. 이 작은 인간의 머리로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통달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우리에게 확실하게 말하고 싶은 것이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25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궁구하여 악한 것이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하였더니." 지혜와 명철은 유익한 것이었습니다.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혜의 반대가 되는 어리석은 것, 우매한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악한 것이요, 미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알고자 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어리석음은 인생에게 해를 준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26절에서 그것을 비유적으로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깨달은즉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자라." 솔로몬이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이방 여인들이 꾀임에 빠졌습니다. 이방 여인들이 호호 웃는 유혹의 웃음은 그에게 올무와 그물 같았습니다. 여인의 보드라운 손길은 포승같이, 오랏줄같이 그를 꽁꽁 옭아매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이방 여인들 때문에 사망보다도 더 독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우매가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음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사망보다도 독한 여자와 같은 것이 어리석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매함은 그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여인과 다름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매함을 피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까? 26절 하반부에 그 비결을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저를 피하려니와 죄인은 저에게 잡히리로다." 죄를 기뻐하고, 죄를 즐기는 사람은 유혹에 쉽게 빠져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다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은 마음에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솔로몬이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모든 우매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2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전도자가 가로되 내가 낱낱이 살펴 그 이치를 궁구하여 이것을 깨달았노라." 솔로몬이 깊이 궁구하는 가운데 또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28절 말씀입니다.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남자가 여자보다 더 낫다는 말입니까? 지금 솔로몬이 남성 우월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남자 일천 명 가운데 한 사람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더 낫다는 말입니까? 그런 말이 아닙니다. 지금 솔로몬은 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숫자대구법을 이용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딱 드는 사람, "이 사람은 참 훌륭한 사람이구나, 이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구나, 정직하게 사는 사람이구나"라고 할만큼 마음에 드는 사람은 남자든지 여자든지 일천 명에 한 사람을 찾을까 말까 할 정도로 귀하다는 것입니다. 못 찾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잘못 만드셨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29절 말씀을 보세요.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살기만 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금하셨으면 아무리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워 보여도 따먹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꾀를 내고 따먹으니까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닙니까? 쉽게 풀릴 수 있는 문제가 왜 자꾸 어려워집니까? 왜 복잡해집니까? 얄팍한 수를 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꾀를 부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세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살아보세요. 왜 문제가 됩니까? 문제 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이 자꾸 얕은 수를 부리고, 꾀를 피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아가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로운 삶입니다. 약 1:5 말씀을 제가 읽고 마치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지혜는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지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리면서 무엇을 구했습니까? 지혜를 구했습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풍성한 지혜를 주셨습니다. 지혜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하늘의 풍성한 지혜를 여러분 모두에게 내려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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