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소유에 집착 말라(5:1∼20) |
< 개 요 >
1. 5:1∼7 왜 수고의 낙을 누리지 못하는가? 하나님이 우매자에게는 복을 주시지 않기 때문
2. 5:8∼9 왜 수고의 낙을 누리지 못하는가? 사회구조의 부조리 때문
3. 5:10∼17 왜 소유에 집착하는가? 부에 대한 잘못된 믿음 때문
4. 5:18∼20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해 아래 인생들은 소유에 집착하면서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소유가 많아지면 그만큼 삶이 만족스럽고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긁어모으기 위해서, 소유를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서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우리가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전도서 5장에서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를 잘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편의상 세 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대지는 1∼7절의 말씀입니다. 해 아래 인생이 아무리 수고를 해도 하나님이 복을 주지 않으면 인생은 그 수고의 열매를 제대로 누릴 수 없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는데 인생이 아무리 수고한들 그 수고의 열매를 어찌 누릴 수 있겠습니까? 소용이 없을 뿐입니다.
두번째 대지는 8∼9절의 말씀입니다. 해 아래 인생이 아무리 수고해도 그 열매를 누리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사회구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해 아래 인생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학대가 있고 착취가 있습니다. 착취를 당하기 때문에 인생이 수고해도 그 열매를 제대로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번째 대지는 10∼17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인생들이 그토록 소유에 집착해서 살아갑니까? 잘못된 믿음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가 있으면 만족을 누릴 수 있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고, 마음에 평안도 누릴 수 있고,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 모든 것이 잘못된 생각임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솔로몬은 결론적으로 18∼20절에서 소유에 집착하지 말고,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다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서 그것을 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선한 일이요, 아름다운 일이요,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분복임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전도서 5장의 말씀을 한 절씩 읽어가면서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우매자는 수고의 낙을 누리지 못함
첫번째 대지입니다. 1∼7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매자에게는 복을 안 주십니다. 그래서 우매자는 아무리 수고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열매를 누릴 수 없습니다.
우매자가 어떠한 자인지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는 자는 발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은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호렙 산의 불붙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의 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곳이므로 그 발을 삼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전에서 발을 삼가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의미입니까? 솔로몬은 세 가지 면에서 이것을 설명해주었습니다. 제사와 기도와 서원입니다. 먼저 제사 드리는 것을 보세요. 1절 하반부입니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물론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그러나 그것보다도 앞세워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른쪽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는데, 자기 고집대로 왼쪽으로 자꾸 간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매자는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니 어리석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고 자기 열심에 따라서 자기 방식대로 아무리 믿어본들 어떻게 복을 받겠습니까? 그러니 우매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때로는 마르다의 봉사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다보다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리아는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일, 봉사하는 일도 소중하지만 언제나 그것보다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안 그러면 우매자입니다. 우매자는 아무리 수고해도 그 열매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성전에 올라올 때 언제나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일에 최우선을 두시기 바랍니다.
두번째로는 기도입니다. 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기도할 때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고 했습니다.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한 마디 한 마디 하나님 앞에 아뢸 때 아주 신중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하늘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반면에 우리는 지극히 낮은, 땅에 있는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하늘과 땅 차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한 마디 한 마디 사려 깊게 아뢰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여러분이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과 면담을 하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세요. 그러면 조심 없이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그 앞에서 조심하겠습니까? 대통령 앞에서 말 한 마디라도 얼마나 신중하게 골라서 하겠습니까?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매우 조심스럽게 말할 것입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우리가 말하기보다는 대통령이 하는 말에 공손하게 귀를 기울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하나님 전에 올라와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대면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함부로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말을 적게 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일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일이 많으면 이런저런 걱정 때문에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꿈이 생기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말이 많으면 자기도 모르게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조심이 없으니까 헛된 소리가 나타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길이가, 말이 많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중요하고, 깊이가 중요합니다.
특별히 대표로 기도하시는 분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래도 기도가 길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나옵니다. 대표기도할 때는 준비를 많이 해서 짧게, 꼭 필요한 것만 한 마디 한 마디 잘 골라서 해야 합니다. 아무래도 기도가 길어지면 듣는 사람도 지루하게 되고, 예배 분위기를 해치기 쉽습니다. 대표기도는 길게 하면 안됩니다. 짧게 해야 합니다.
세번째가 서원입니다.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제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그 보답으로 이러이러한 것을 드리겠습니다. 이것을 하겠습니다." 이렇게 약속하는 것이 서원입니다. 사람은 사람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지키지 않으면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사기꾼입니다. 벌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 전에 올라와서 하나님께 약속하고 지키지 않고서도 무사하겠거니, 일 없겠거니 생각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 사람이 바로 우매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서원한 것은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지키지 못할 서원을 하는 것보다는 애당초 서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했습니다. 서원은 의무가 아닙니다. 자발적인 것입니다. 지키지 못할 서원을 하느니 서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서원을 했으면 반드시 지켜야지요.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서원을 하고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변명한다고 통합니까?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예컨대 어떤 사람이 이런 서원을 했다고 합시다. "하나님, 제게 아들을 꼭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게 아들만 주시면 제가 이 집을 팔아서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사람에게 아들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자를 그에게 보냈습니다. 서원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을 보내실 수도 있고, 또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 사람을 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집을 팔려고 하니까 도저히 안되겠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변명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때는 너무나 아들이 필요해서 급한 마음에 지키지도 못할 서원을 하고 말았습니다. 실수였습니다. 없던 것으로 해주십시오." 그렇게 변명한다고 해서 그것이 용납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변명에 진노하십니다. 그에게 주었던 복을 도로 앗아가 버리십니다. 그러므로 서원을 했으면 지켜야 하고, 지키지 못할 서원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사사 시대 입다의 이야기를 잘 아시지요? 입다가 사사로 있을 때 암몬 족속이 쳐들어왔습니다. 그때 입다가 백성들을 이끌고 전쟁터에 나가면서 하나님께 서원을 했습니다. "하나님, 만일 하나님께서 암몬 족속을 제 손에 붙여 주신다면 돌아올 때 저의 집 문 앞에서 제일 먼저 저를 영접하는 자를 그가 누구든지 간에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습니다." 무서운 서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승리를 안겨주셨습니다. 입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 그의 집에서 누가 그를 제일 먼저 영접했습니까? 입다의 하나밖에 없는 무남독녀 외동딸이 소고 치며 춤추며 나와 그를 영접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 한 서원이기 때문에 입다는 그대로 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원하면 그대로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지키지도 못할 서원을 함부로 합니까?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하나님 앞에서 말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말을 아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하면 그런 잘못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7절 하반부를 보십시오.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성전에서는 말을 삼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보다 자기 열심에 자기 마음대로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니까 함부로 하나님 앞에서 입을 열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니까 지키지도 못할 서원을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말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안 그러면 우매자가 됩니다. 우매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복을 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매자는 아무리 수고해도 그 열매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여러분의 수고에 따라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고 그 열매를 여러분이 충분히 누리면서 살아가는 복된 모습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사회구조의 부조리
두번째 대지는 8∼9절의 말씀입니다. 해 아래 인생이 수고해도 그 열매를 누릴 수 없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해 아래 인생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학대가 있고, 불의가 있고, 부정이 있고, 착취가 있기 때문입니다.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는 어느 도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공의를 박멸하는 것을 볼지라도."
여기서의 도는 행정구역을 말합니다. 경상도라든지 경기도와 같은 도를 말합니다. 거기에는 백성들을 위해서 일하는 관리가 있습니다. 관리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빈민을 잘 보살펴주고, 공의를 세워서 백성들이 마음 편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그들이 하는 일은 어떻다는 것입니까? 빈민을 학대하고, 공의를 박멸한다고 했습니다. 정반대의 일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솔로몬은 그것을 볼지라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8절 하반부에 나옵니다.
"높은 자보다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이 있음이니라."
밑의 사람은 위의 사람에게 잘 보여야 합니다. 안 그러면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밑의 사람을 착취해서라도 윗사람에게 상납을 해야 합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상납을 받은 사람은 그것을 또 자기 위의 사람에게 상납을 해야 합니다. 먹이사슬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회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일 꼭대기에 왕까지 올라갑니다.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땅의 이익은 뭇 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왕도 밭의 소산을 받느니라."
내가 수고해서 얻은 이익이라고 해서 나 혼자 독차지할 생각은 처음부터 아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땅의 이익은 뭇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관리들도 내 땅에서 나오는 소산을 먹고살아야 합니다.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많이 빼앗기느냐 적게 빼앗기느냐 정도의 차이지, 다른 사람과 나누면서 살아갈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 땅은 좀과 동록이 해하기 마련이라고 했습니다. 도적이 구멍을 뚫기 마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너희는 이 땅에서 소유에 집착해서 너희 보물을 땅에 쌓아두려고 하지 말고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안전한 곳 저 하늘 나라 창고에 너희 보물을 쌓아두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안전하지 못합니다. 해 아래 인생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학대가 있고, 착취가 있기 마련입니다. 소유에 너무 집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소유에 집착하는 이유
세번째 대지는 10∼17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소유에 왜 그렇게 집착합니까? 그것은 부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네 가지로 그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편견입니다. "Wealth brings satisfaction." 부가 우리에게 만족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예컨대 제가 목이 말라서 바닷물을 떠다가 마셨습니다. 갈증이 해소가 됩니까? 바닷물은 아무리 마셔도 갈증을 해소할 수 없습니다. 더 목이 탑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욕심도 한이 없기 때문에 재물로는 절대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재물을 가지고, 부를 가지고 만족을 누리겠다는 생각 자체가 애당초 잘못된 것입니다.
두번째 편견입니다. "Wealth solves every problem." 세상 사람들은 물질이 있으면 그것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착각입니다. 1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나니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재물이 더해 가면 먹는 자도 더해 간다고 했습니다. 재물이 많아질수록 이전에 없던 문제가 자꾸 생겨납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물질이 없으면 세금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도적이 와서 구멍을 뚫을까봐 염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 자식들에게 유산을 어떻게 배분해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걱정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재산이 많아지면 이런 저런 문제가 생겨납니다.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한다고 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이 자꾸 찾아와서 손을 내밉니다. 있는 대로 다 나가 버리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소유주는 잠시 자기 눈으로 재물을 보는 것밖에 없습니다. 순식간에 다 나가 버리니까 실속이 없습니다.
세번째 편견입니다. "Wealth brings peace of mind." 재물이 마음에 평안을 주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1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
노동자는 가난해서 먹는 것이 시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돈이 많아서 잘 먹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가운데 누가 잠을 더 잘 자겠습니까? 부자가 잠을 더 깊이 잡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노동자가 오히려 잠을 더 깊이 잡니다. 걱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잠을 제대로 못 잡니다. 이 걱정 저 걱정을 하느라고 마음에 평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에 절대로 평안을 줄 수 없습니다.
마지막 네번째 편견입니다. "Wealth provides security." 부는 안전을 제공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 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
사람이 재물 때문에 안전해지기보다는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누가 훔쳐가지는 않을까? 늘 걱정해야 되지요. 거기다가 강도를 만나서 물질 때문에 자기 생명을 잃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물질이 안전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를 끼치기 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들이 왜 자꾸 재물을 지키려고 합니까? 자기 자식들에게 더 많은 것을 유산으로 물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뜻대로 됩니까? 14절 말씀을 보세요.
"그 재물이 재난을 인하여 패하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것도 없느니라."
한번 재난이 임하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이 재물입니다. 화재를 당한다든지, 부도를 만난다든지 하면 자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어도 물려줄 것이 없습니다.
또 설사 재난을 당하지 않아서 재물을 잘 지켰다고 해도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세상에 올 때 여러분이 세상에 더해 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빈손으로 왔습니다.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갈 때도 그냥 가야지 세상에 있는 것을 여러분이 수고했다고 가지고 갈 수 있습니까?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공평한 삶입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재물을 지키기 위해서 아등바등하는 것은 잡히지 않는 바람을 잡기 위해서 애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헛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16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도 폐단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소유에 집착하면 절대로 우리의 삶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불행해집니다. 그것이 17절 말씀입니다.
"일평생을 어두운 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
세상 사람들은 부가 만족을 주고, 문제를 해결해주고, 마음에 평안을 주고, 안전을 보장해준다고 생각하지만 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정반대입니다. 소유에 집착하면 일평생을 어두운 데서 먹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불행해진다는 것입니다. 번뇌가 생긴다고 했습니다. 이런저런 걱정거리가 생깁니다. 병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마음의 병도 생기고, 육신의 병도 생깁니다. 마음에 평화가 사라지므로 분노가 생기게 됩니다.
여러분, 록펠러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지요? 당대 세계 제일 가는 갑부였습니다. 53세에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돈을 벌었냐 하면 매주 그 당시 돈으로 1백만 달러를 벌었습니다. 엄청난 돈입니다. 그렇게 돈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마치 세상의 모든 돈을 자기가 다 가져야겠다는 식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이미 세계에서 제일 가는 갑부인데 돈을 얼마나 벌면 만족하겠습니까?" 그때마다 록펠러는 똑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Just a little more." 무슨 말입니까? "조금만 더!" 이미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되었는데도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늘 조금 더 벌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그렇게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불면증에 걸렸습니다. 몸이 바짝 말라들어갑니다. 돈이 많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루에 겨우 우유 한 잔, 비스킷 몇 조각밖에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록펠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 가운데 자기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소유에 대한 집착을 다 버렸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을 떨쳐버렸습니다. "지금까지는 버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번 것을 값있게 쓰자."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만든 것이 그 유명한 록펠러 재단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페니실린 주사도 록펠러 재단에서 연구비를 지원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가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니까, 그때부터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입맛이 돌아왔습니다. 잃어버렸던 잠도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53세에 불면증에 걸려 죽을 때만 기다리던 사람이 98세까지 장수했습니다.
소유에 집착하게 되면 절대로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손을 놓으세요. 그래야 우리 마음속에 평강이 찾아옵니다.
4. 은혜를 받은 자의 모습
솔로몬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18절 말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가진 것이 없다고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즐거운 마음으로 낙을 누리면서 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인 줄 알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것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인생의 분복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누려야 할 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그 복을 어떻게 누릴 수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수고하면 그 열매를 자기가 다 누릴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19절 말씀을 보세요.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에게 재물과 부요를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지만, 그것을 누리게 하시며, 즐거워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복을 내려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수고해도 하나님께서 다 빼앗아가 버리시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솔로몬은 마지막 20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의 모습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생명의 날을 깊이 관념치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저의 마음의 기뻐하는 것으로 응하심이라."
부유하든지, 또 부유하지 못하든지 상관없습니다. 관념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그런 것에는 관념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그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아울러 사도 바울을 생각해보세요. 그는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안다고 했습니다. 그는 어떠한 형편에서도 자족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이는 하나님이 저의 마음의 기뻐하는 것으로 응하심이라."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기쁨을 주시고, 평강을 주시고, 만족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유에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물질의 노예가 되면 안됩니다.
물질을 따라가보세요. 물질이 잡힙니까? 절대로 잡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질이 우리 뒤를 따라오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물질을 뒤따라가면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물질이 우리 뒤를 따라오도록 만들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그 비결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생에게 복을 주셔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질이 자동적으로 우리 뒤를 따라오도록 만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물질을 따라가면 절대로 못 잡습니다. 물질이 우리 뒤를 따라오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앞에 모시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여러분이 수고한 열매를 여러분이 다 누리면서, 주님으로 인해서 하루하루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5:1∼7 왜 수고의 낙을 누리지 못하는가? 하나님이 우매자에게는 복을 주시지 않기 때문
2. 5:8∼9 왜 수고의 낙을 누리지 못하는가? 사회구조의 부조리 때문
3. 5:10∼17 왜 소유에 집착하는가? 부에 대한 잘못된 믿음 때문
4. 5:18∼20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해 아래 인생들은 소유에 집착하면서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소유가 많아지면 그만큼 삶이 만족스럽고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긁어모으기 위해서, 소유를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서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우리가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전도서 5장에서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를 잘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편의상 세 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대지는 1∼7절의 말씀입니다. 해 아래 인생이 아무리 수고를 해도 하나님이 복을 주지 않으면 인생은 그 수고의 열매를 제대로 누릴 수 없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는데 인생이 아무리 수고한들 그 수고의 열매를 어찌 누릴 수 있겠습니까? 소용이 없을 뿐입니다.
두번째 대지는 8∼9절의 말씀입니다. 해 아래 인생이 아무리 수고해도 그 열매를 누리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사회구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해 아래 인생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학대가 있고 착취가 있습니다. 착취를 당하기 때문에 인생이 수고해도 그 열매를 제대로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번째 대지는 10∼17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인생들이 그토록 소유에 집착해서 살아갑니까? 잘못된 믿음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가 있으면 만족을 누릴 수 있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고, 마음에 평안도 누릴 수 있고,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 모든 것이 잘못된 생각임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솔로몬은 결론적으로 18∼20절에서 소유에 집착하지 말고,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다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서 그것을 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선한 일이요, 아름다운 일이요,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분복임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전도서 5장의 말씀을 한 절씩 읽어가면서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우매자는 수고의 낙을 누리지 못함
첫번째 대지입니다. 1∼7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매자에게는 복을 안 주십니다. 그래서 우매자는 아무리 수고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열매를 누릴 수 없습니다.
우매자가 어떠한 자인지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는 자는 발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은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호렙 산의 불붙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의 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곳이므로 그 발을 삼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전에서 발을 삼가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의미입니까? 솔로몬은 세 가지 면에서 이것을 설명해주었습니다. 제사와 기도와 서원입니다. 먼저 제사 드리는 것을 보세요. 1절 하반부입니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물론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그러나 그것보다도 앞세워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른쪽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는데, 자기 고집대로 왼쪽으로 자꾸 간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매자는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니 어리석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고 자기 열심에 따라서 자기 방식대로 아무리 믿어본들 어떻게 복을 받겠습니까? 그러니 우매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때로는 마르다의 봉사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다보다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리아는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일, 봉사하는 일도 소중하지만 언제나 그것보다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안 그러면 우매자입니다. 우매자는 아무리 수고해도 그 열매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성전에 올라올 때 언제나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일에 최우선을 두시기 바랍니다.
두번째로는 기도입니다. 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기도할 때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고 했습니다.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한 마디 한 마디 하나님 앞에 아뢸 때 아주 신중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하늘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반면에 우리는 지극히 낮은, 땅에 있는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하늘과 땅 차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한 마디 한 마디 사려 깊게 아뢰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여러분이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과 면담을 하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세요. 그러면 조심 없이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그 앞에서 조심하겠습니까? 대통령 앞에서 말 한 마디라도 얼마나 신중하게 골라서 하겠습니까?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매우 조심스럽게 말할 것입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우리가 말하기보다는 대통령이 하는 말에 공손하게 귀를 기울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하나님 전에 올라와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대면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함부로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말을 적게 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일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일이 많으면 이런저런 걱정 때문에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꿈이 생기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말이 많으면 자기도 모르게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조심이 없으니까 헛된 소리가 나타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길이가, 말이 많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중요하고, 깊이가 중요합니다.
특별히 대표로 기도하시는 분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래도 기도가 길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나옵니다. 대표기도할 때는 준비를 많이 해서 짧게, 꼭 필요한 것만 한 마디 한 마디 잘 골라서 해야 합니다. 아무래도 기도가 길어지면 듣는 사람도 지루하게 되고, 예배 분위기를 해치기 쉽습니다. 대표기도는 길게 하면 안됩니다. 짧게 해야 합니다.
세번째가 서원입니다.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제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그 보답으로 이러이러한 것을 드리겠습니다. 이것을 하겠습니다." 이렇게 약속하는 것이 서원입니다. 사람은 사람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지키지 않으면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사기꾼입니다. 벌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 전에 올라와서 하나님께 약속하고 지키지 않고서도 무사하겠거니, 일 없겠거니 생각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 사람이 바로 우매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서원한 것은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지키지 못할 서원을 하는 것보다는 애당초 서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했습니다. 서원은 의무가 아닙니다. 자발적인 것입니다. 지키지 못할 서원을 하느니 서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서원을 했으면 반드시 지켜야지요.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서원을 하고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변명한다고 통합니까?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예컨대 어떤 사람이 이런 서원을 했다고 합시다. "하나님, 제게 아들을 꼭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게 아들만 주시면 제가 이 집을 팔아서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사람에게 아들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자를 그에게 보냈습니다. 서원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을 보내실 수도 있고, 또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 사람을 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집을 팔려고 하니까 도저히 안되겠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변명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때는 너무나 아들이 필요해서 급한 마음에 지키지도 못할 서원을 하고 말았습니다. 실수였습니다. 없던 것으로 해주십시오." 그렇게 변명한다고 해서 그것이 용납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변명에 진노하십니다. 그에게 주었던 복을 도로 앗아가 버리십니다. 그러므로 서원을 했으면 지켜야 하고, 지키지 못할 서원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사사 시대 입다의 이야기를 잘 아시지요? 입다가 사사로 있을 때 암몬 족속이 쳐들어왔습니다. 그때 입다가 백성들을 이끌고 전쟁터에 나가면서 하나님께 서원을 했습니다. "하나님, 만일 하나님께서 암몬 족속을 제 손에 붙여 주신다면 돌아올 때 저의 집 문 앞에서 제일 먼저 저를 영접하는 자를 그가 누구든지 간에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습니다." 무서운 서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승리를 안겨주셨습니다. 입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 그의 집에서 누가 그를 제일 먼저 영접했습니까? 입다의 하나밖에 없는 무남독녀 외동딸이 소고 치며 춤추며 나와 그를 영접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 한 서원이기 때문에 입다는 그대로 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원하면 그대로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지키지도 못할 서원을 함부로 합니까?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하나님 앞에서 말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말을 아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하면 그런 잘못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7절 하반부를 보십시오.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성전에서는 말을 삼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보다 자기 열심에 자기 마음대로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니까 함부로 하나님 앞에서 입을 열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니까 지키지도 못할 서원을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말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안 그러면 우매자가 됩니다. 우매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복을 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매자는 아무리 수고해도 그 열매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여러분의 수고에 따라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고 그 열매를 여러분이 충분히 누리면서 살아가는 복된 모습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사회구조의 부조리
두번째 대지는 8∼9절의 말씀입니다. 해 아래 인생이 수고해도 그 열매를 누릴 수 없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해 아래 인생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학대가 있고, 불의가 있고, 부정이 있고, 착취가 있기 때문입니다.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는 어느 도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공의를 박멸하는 것을 볼지라도."
여기서의 도는 행정구역을 말합니다. 경상도라든지 경기도와 같은 도를 말합니다. 거기에는 백성들을 위해서 일하는 관리가 있습니다. 관리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빈민을 잘 보살펴주고, 공의를 세워서 백성들이 마음 편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그들이 하는 일은 어떻다는 것입니까? 빈민을 학대하고, 공의를 박멸한다고 했습니다. 정반대의 일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솔로몬은 그것을 볼지라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8절 하반부에 나옵니다.
"높은 자보다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이 있음이니라."
밑의 사람은 위의 사람에게 잘 보여야 합니다. 안 그러면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밑의 사람을 착취해서라도 윗사람에게 상납을 해야 합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상납을 받은 사람은 그것을 또 자기 위의 사람에게 상납을 해야 합니다. 먹이사슬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회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일 꼭대기에 왕까지 올라갑니다.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땅의 이익은 뭇 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왕도 밭의 소산을 받느니라."
내가 수고해서 얻은 이익이라고 해서 나 혼자 독차지할 생각은 처음부터 아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땅의 이익은 뭇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관리들도 내 땅에서 나오는 소산을 먹고살아야 합니다.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많이 빼앗기느냐 적게 빼앗기느냐 정도의 차이지, 다른 사람과 나누면서 살아갈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 땅은 좀과 동록이 해하기 마련이라고 했습니다. 도적이 구멍을 뚫기 마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너희는 이 땅에서 소유에 집착해서 너희 보물을 땅에 쌓아두려고 하지 말고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안전한 곳 저 하늘 나라 창고에 너희 보물을 쌓아두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안전하지 못합니다. 해 아래 인생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학대가 있고, 착취가 있기 마련입니다. 소유에 너무 집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소유에 집착하는 이유
세번째 대지는 10∼17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소유에 왜 그렇게 집착합니까? 그것은 부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네 가지로 그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편견입니다. "Wealth brings satisfaction." 부가 우리에게 만족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예컨대 제가 목이 말라서 바닷물을 떠다가 마셨습니다. 갈증이 해소가 됩니까? 바닷물은 아무리 마셔도 갈증을 해소할 수 없습니다. 더 목이 탑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욕심도 한이 없기 때문에 재물로는 절대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재물을 가지고, 부를 가지고 만족을 누리겠다는 생각 자체가 애당초 잘못된 것입니다.
두번째 편견입니다. "Wealth solves every problem." 세상 사람들은 물질이 있으면 그것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착각입니다. 1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나니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재물이 더해 가면 먹는 자도 더해 간다고 했습니다. 재물이 많아질수록 이전에 없던 문제가 자꾸 생겨납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물질이 없으면 세금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도적이 와서 구멍을 뚫을까봐 염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 자식들에게 유산을 어떻게 배분해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걱정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재산이 많아지면 이런 저런 문제가 생겨납니다.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한다고 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이 자꾸 찾아와서 손을 내밉니다. 있는 대로 다 나가 버리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소유주는 잠시 자기 눈으로 재물을 보는 것밖에 없습니다. 순식간에 다 나가 버리니까 실속이 없습니다.
세번째 편견입니다. "Wealth brings peace of mind." 재물이 마음에 평안을 주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1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
노동자는 가난해서 먹는 것이 시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돈이 많아서 잘 먹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가운데 누가 잠을 더 잘 자겠습니까? 부자가 잠을 더 깊이 잡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노동자가 오히려 잠을 더 깊이 잡니다. 걱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잠을 제대로 못 잡니다. 이 걱정 저 걱정을 하느라고 마음에 평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에 절대로 평안을 줄 수 없습니다.
마지막 네번째 편견입니다. "Wealth provides security." 부는 안전을 제공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 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
사람이 재물 때문에 안전해지기보다는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누가 훔쳐가지는 않을까? 늘 걱정해야 되지요. 거기다가 강도를 만나서 물질 때문에 자기 생명을 잃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물질이 안전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를 끼치기 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들이 왜 자꾸 재물을 지키려고 합니까? 자기 자식들에게 더 많은 것을 유산으로 물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뜻대로 됩니까? 14절 말씀을 보세요.
"그 재물이 재난을 인하여 패하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것도 없느니라."
한번 재난이 임하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이 재물입니다. 화재를 당한다든지, 부도를 만난다든지 하면 자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어도 물려줄 것이 없습니다.
또 설사 재난을 당하지 않아서 재물을 잘 지켰다고 해도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세상에 올 때 여러분이 세상에 더해 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빈손으로 왔습니다.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갈 때도 그냥 가야지 세상에 있는 것을 여러분이 수고했다고 가지고 갈 수 있습니까?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공평한 삶입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재물을 지키기 위해서 아등바등하는 것은 잡히지 않는 바람을 잡기 위해서 애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헛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16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도 폐단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소유에 집착하면 절대로 우리의 삶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불행해집니다. 그것이 17절 말씀입니다.
"일평생을 어두운 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
세상 사람들은 부가 만족을 주고, 문제를 해결해주고, 마음에 평안을 주고, 안전을 보장해준다고 생각하지만 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정반대입니다. 소유에 집착하면 일평생을 어두운 데서 먹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불행해진다는 것입니다. 번뇌가 생긴다고 했습니다. 이런저런 걱정거리가 생깁니다. 병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마음의 병도 생기고, 육신의 병도 생깁니다. 마음에 평화가 사라지므로 분노가 생기게 됩니다.
여러분, 록펠러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지요? 당대 세계 제일 가는 갑부였습니다. 53세에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돈을 벌었냐 하면 매주 그 당시 돈으로 1백만 달러를 벌었습니다. 엄청난 돈입니다. 그렇게 돈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마치 세상의 모든 돈을 자기가 다 가져야겠다는 식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이미 세계에서 제일 가는 갑부인데 돈을 얼마나 벌면 만족하겠습니까?" 그때마다 록펠러는 똑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Just a little more." 무슨 말입니까? "조금만 더!" 이미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되었는데도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늘 조금 더 벌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그렇게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불면증에 걸렸습니다. 몸이 바짝 말라들어갑니다. 돈이 많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루에 겨우 우유 한 잔, 비스킷 몇 조각밖에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록펠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 가운데 자기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소유에 대한 집착을 다 버렸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을 떨쳐버렸습니다. "지금까지는 버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번 것을 값있게 쓰자."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만든 것이 그 유명한 록펠러 재단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페니실린 주사도 록펠러 재단에서 연구비를 지원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가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니까, 그때부터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입맛이 돌아왔습니다. 잃어버렸던 잠도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53세에 불면증에 걸려 죽을 때만 기다리던 사람이 98세까지 장수했습니다.
소유에 집착하게 되면 절대로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손을 놓으세요. 그래야 우리 마음속에 평강이 찾아옵니다.
4. 은혜를 받은 자의 모습
솔로몬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18절 말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가진 것이 없다고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즐거운 마음으로 낙을 누리면서 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인 줄 알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것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인생의 분복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누려야 할 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그 복을 어떻게 누릴 수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수고하면 그 열매를 자기가 다 누릴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19절 말씀을 보세요.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에게 재물과 부요를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지만, 그것을 누리게 하시며, 즐거워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복을 내려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수고해도 하나님께서 다 빼앗아가 버리시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솔로몬은 마지막 20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의 모습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생명의 날을 깊이 관념치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저의 마음의 기뻐하는 것으로 응하심이라."
부유하든지, 또 부유하지 못하든지 상관없습니다. 관념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그런 것에는 관념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그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아울러 사도 바울을 생각해보세요. 그는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안다고 했습니다. 그는 어떠한 형편에서도 자족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이는 하나님이 저의 마음의 기뻐하는 것으로 응하심이라."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기쁨을 주시고, 평강을 주시고, 만족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유에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물질의 노예가 되면 안됩니다.
물질을 따라가보세요. 물질이 잡힙니까? 절대로 잡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질이 우리 뒤를 따라오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물질을 뒤따라가면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물질이 우리 뒤를 따라오도록 만들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그 비결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생에게 복을 주셔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질이 자동적으로 우리 뒤를 따라오도록 만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물질을 따라가면 절대로 못 잡습니다. 물질이 우리 뒤를 따라오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앞에 모시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여러분이 수고한 열매를 여러분이 다 누리면서, 주님으로 인해서 하루하루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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