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인생의 두 전제(9:1∼18)
< 개 요 >
1. 9:1∼2 인생의 대 전제
2. 9:3∼10 죽음은 피할 수 없다
3. 9:11∼18 인생은 예측할 수 없다
오늘은 전도서 9장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2절의 말씀은 전도서 9장 전체의 서론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솔로몬은 여기서 인생의 대 전제가 되는 두 가지 변할 수 없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첫번째 전제는 인생은 아무도 자신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Life is unpredictable." 1절에서 그것을 요약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두번째 전제는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Death is unavoidable."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공통입니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2절 말씀에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솔로몬은 3∼18절에서 이 두 가지 인생의 대 전제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인생의 대 전제(大前提)
1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솔로몬이 마음을 다해서 진지하게 해 아래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을 자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두 가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 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장래 일에 대해서 예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게 될지 미움을 받게 될지, 앞길이 형통하게 될지 곤고하게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의인도 하나님의 손에 있고, 지혜자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또 인생의 모든 행하는 일이 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의롭게 산다고 해서, 지혜롭게 처신한다고 해서 당연히 나의 앞길은 형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욥이 얼마나 의로운 사람이었습니까? 욥 1:1에 보면 욥을 가리켜 순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정직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악에서 떠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또 이 욥이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까? 그에게는 아들이 일곱, 딸이 셋 있었습니다. 자녀들은 그중 하나가 생일을 맞으면 자기 집에 온가족을 초청하여 성대하게 잔치를 베풀고 함께 먹고 마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날 욥은 잊지 않고 자녀들을 다 불러모았습니다. 그리고 그 명수대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면서 자기 자녀들을 성결케 하였습니다. 먹고 마시는 가운데 자신들도 모르게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욥의 하는 일이 그렇게 지혜로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의 앞날이 늘 형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엄청난 시련이 욥에게 임했습니다. 그 많던 육축이 다 노략질 당했습니다. 그리고 일곱 아들과 딸 셋은 사고로 한꺼번에 죽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욥 자신의 몸에는 심한 악창이 생겼습니다. 욥이 그토록 의롭고 지혜로웠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니까 시련이 임하게 된 것이지 않습니까?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욥이 비록 시련을 당했지만 누구의 손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까?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욥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욥 1:21에 보면 그 극심한 환난 속에서도 욥이 무엇이라고 노래했습니까?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고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데 행여 어떤 시련이 닥쳐왔습니까?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더 귀하게, 더 크게 쓰시기 위해서 정금과 같이 단련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용기를 잃지 마세요. 여러분도 욥처럼 틀림없이 갑절의 복을 받게 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생의 두번째 전제가 있습니다. 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악인은 악인대로 고통을 당하지만, 의인도 의인대로 고통을 당합니다. 욥도 고통을 당했습니다. 바울도 고통을 당했습니다. 베드로도 고통을 당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에게도 고난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의인이든지 악인이든지 모두에게 골고루 똑같이 햇빛을 비추어주십니다. 단비를 골고루 내려주십니다. 마찬가지로 의인은 의인대로 형통할 때가 있지만 악인은 악인대로 번창할 때가 있고, 형통할 때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인 가운데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2절 말씀을 계속 보겠습니다.
"의인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지 않은 자며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이며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이렇게 살든지 저렇게 살든지 사람의 결국은 일반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결국이 무엇입니까? 인생이 자기의 삶에 종지부를 찍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경건하게 살든지, 되는 대로 살든지 죽는 것은 일반입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Death is unavoidable."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공통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대 전제, 즉 사람은 자기 앞날을 예측할 수 없고,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이라는 대 전제에 대해서 솔로몬은 3절 이하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2. 죽음은 피할 수 없다(Death is unavoidable).
솔로몬은 3절 이하에서 죽음을 앞두고 살아가는 우리 인생들이 과연 어떠한 자세로 사는 것이 마땅한지를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먼저 솔로몬은 두 가지 잘못된 태도를 이야기하고 있고, 그런 다음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죽음을 앞두고 살아가면서 어떠한 태도로 살아야 마땅한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첫번째 잘못된 견해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되는 대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죽음을 악한 것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음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나 버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이렇게 살아도 죽고, 저렇게 살아도 죽고, 죽는 것은 매일반인데 구태여 힘들게 의롭게 살아갈 필요가 무엇인가?" 이렇게 악한 마음을 품고 미친 듯이 살다가 허무하게 죽는 인생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이 사람들이 잊고 사는 것이 있습니다. 히 9:27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죽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삶은 다릅니다. 공통이 아닙니다.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고 되는 대로 악하게 마음대로 살다가 허무하게 죽는 사람은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잘못된 견해입니다.
그 다음에 또 잘못된 견해가 있습니다. "그래도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낫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참으면서 인생을 소극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4∼6절 말씀입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산 자 중에 참예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설마 산 입에 거미줄치랴. 살아가다 보면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겠지."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현실의 어려움을 꾹 참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생을 소극적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이 즐겨 인용하는 속담이 하나 있습니다. 4절 하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
성경에 보면 개는 토한 것을 먹는다고 했습니다. 부정한 동물입니다. 경멸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사자는 용맹스럽습니다. 동물의 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사자보다 산 개가 더 나은 이유가 있습니다. "살아 있어야 더 나아지지 않을까?" 이런 기대감이라도 가질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 의하면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나은 이유가 또 있습니다.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살아 있는 사람은 그래도 의식이 남아 있지만 죽은 사람은 의식이 전혀 없습니다. 또 있습니다.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죽은 사람에게 상을 줘보세요. 기쁨을 느낄 수 없지 않습니까?
뿐만 아닙니다. 6절 말씀입니다.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지 오래니."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습니다.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
살아 있어야 무엇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요. 죽었는데 무엇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기회가 다시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낫다고 하면서 지겨운 인생이지만 마지못해서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도 잘못된 견해입니다. 무조건 오래 사는 것이 최선이 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분에게 나이 든 아버님이 계셨습니다. 사람이 나이 들면 이런 저런 병이 들게 마련입니다. 신경통이 생깁니다. 당뇨도 생깁니다. 관절염도 생기지요. 이분의 아버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심장병으로 늘 고생했습니다. 이분은 믿음이 좋았습니다. 아버지의 건강을 위해서 하루도 빠짐없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루는 병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입니다. 병원에 쫓아갔습니다. 아버지는 의식을 잃은 채 산소호흡기에 의지해서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병원 곁에 있는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의식을 다시금 회복할 수 있게 해달라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는 며칠 뒤에 운명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셔서, 아버지와 아들이 말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하게 그냥 그대로 데려가 버리셨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살아나 보았자 또 이런저런 병에 시달리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역시 고통 당하기는 매일반이지 않습니까? 그럴 바에야 아예 고생이 없는 곳, 고통 당하지 않는 곳, 질병이 없는 곳으로 하나님께서 데리고 가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오래 산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죄악 가운데 무조건 오래 살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받을 형벌만 더 많아지지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주 안에서 죽는 것이 더 복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순교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죽음을 앞두고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솔로몬은 7∼10절에서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는 가서."
"가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적극적인 삶을 살 것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어차피 죽을 인생이니까!"라고 하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지 마세요. 또 가만히 앉아서 소극적으로 살려고 하지도 마세요.
그러면 과연 적극적으로 사는 인생이 어떠한 것인지 솔로몬은 우리에게 네 가지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1) "Enjoy your meals." 음식을 맛있게 먹으라는 것입니다.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음식을 먹으면서 투정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음식을 먹으면서 잔소리하는 사람은 아주 못된 사람입니다.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는 언제나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먹고 마시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사람이 아무리 수고하고 애써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인간은 자기 수고의 낙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셨다는 사실은 벌써 우리의 수고를 기쁘게 받으시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먹을 수 있는 건강 주셨지요, 그것을 느낄 수 있은 입맛도 주셨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음식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는 이와 같이 언제나 즐거운 식탁만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2) "Enjoy your life." 삶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즐겁게 살라는 것입니다.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옛날 유대인들은 결혼식과 같은 축제 때에는 흰옷을 입었습니다. 멋을 부리는 것입니다.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
평소에는 올리브 기름을 발랐지만 축제 때에는 머리에 향기름, 향수를 뿌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솔로몬은 본문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축제 때만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
언제나 축제 때의 기분으로 활력 있게 즐겁게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언제 보아도 멋있고, 향기 나고, 활력 있는 즐거운 삶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Enjoy your family life." 가정생활도 즐겁게 해야 합니다.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우리가 덧없는 인생길을 살아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덧없는 인생길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 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부부가 서로 사랑하면서 함께 즐겁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생의 즐거움을 자기의 가정 밖에서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남편에게서,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인생의 즐거움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네가 일 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내 남편은, 내 아내는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분복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누리라고 주신 복입니다. 일평생동안 서로 사랑하면서 함께 즐겁게 살라고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배필입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즐겁게 사시기 바랍니다. 결혼하지 않으신 분들은 일평생 동안 함께 사랑하면서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 "Enjoy your work." 일하는 것도 즐겁게 해야 합니다. 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무슨 일이 주어지든지 간에 기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그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어둔 밤 쉴 때가 곧 닥쳐옵니다. 그때는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습니다. 그때는 하나님 앞에서 셈하는 일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슨 일을 맡겨주시든지 간에 그 일에 땀흘리면서 최선을 다해서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가정의 일도 열심히 하고, 직장 일도 열심히 하고, 교회 일도 땀흘리면서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주님 앞에서 셈할 때 잘했다 칭찬 받고,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솔로몬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은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라는 것입니까? 어차피 죽을 인생이니 되는 대로 살라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소극적으로 살지 말고,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해서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이니 더욱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야지요. 즐겁게 살아야지요.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즐거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솔로몬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교훈입니다. 먹는 것도 즐겁게 먹고, 사는 것도 즐겁게 살고, 부부생활도 즐겁게 하고, 일하는 것도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마음자세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인생은 예측할 수 없다(Life is unpredictable).
솔로몬은 11∼18절에서 인생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는 대 전제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더 잘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능력이 성공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11절에서 다섯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합니다. 토끼가 꼭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거북이가 이길 수도 있습니다.
둘째로,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다윗과 골리앗이 싸웠습니다. 덩치로 보면 골리앗이 훨씬 더 큽니다. 그런데 골리앗이 졌습니다.
인간의 육체의 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머리의 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번째, 네번째, 다섯번째는 지력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머리 좋다고 해서 잘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이라고 해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생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11절 끝 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아무리 능력 많은 사람이라도 때를 잘못 만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많은 사람이라도 뜻밖의 사고를 만나보세요.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능력이 좀 부족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때를 잘 만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습니다. 또 우연도 그렇습니다. 우연이 사람의 편에서 보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일이지만,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섭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형통한 길을 주시면 능력이 부족해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시기와 우연이 인생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또 인생이 시기와 우연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 12절 말씀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전혀 알 수 없습니다. 한치 앞에 되어질 일도 모르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뜻밖의 사고가 우연히 일어나면 앉아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렇게 인생이 무력하다는 것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이 싸울 때를 생각해 보세요. 다윗이 물매로 던진 작은 돌멩이 하나가 골리앗의 머리에 정통으로 박히게 될지 골리앗이 꿈엔들 생각했겠습니까? 그러나 덩치 크고 힘있는 골리앗이었지만 시기와 우연이 그에게 나쁘게 임할 때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은 계속해서 13절 이하에서 때와 시기가 우리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지 하나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또 해 아래서 지혜를 보고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니."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때를 잘못 만나니까 소용이 없다는 것을 솔로몬은 보게 되었습니다. 크게 깨달았습니다. 14절 말씀입니다.
"곧 어떤 작고 인구가 많지 않은 성읍에 큰 임금이 와서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하나의 작은 성읍이 있었습니다. 그 성읍 안에는 사는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큰 임금이 쳐들어 왔습니다. 수많은 군사를 끌고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 주위에 큰 흉벽을 쌓았습니다. 이 작은 성읍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게 되었습니다. 힘으로는 싸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앞에서도 말했지만 유력자라고 해서 반드시 전쟁에 승리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작은 성읍이었지만 이 성읍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성읍 가운데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
그 성에는 지혜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지혜자는 비록 육체의 힘은 없었지만 그 성을 구할 수 있는 계략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는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고 하여 이미 건진 것처럼 번역이 되었습니다만 번역이 조금 잘못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지혜자의 말을 듣기만 하면 얼마든지 그 성읍은 건져질 수 있었습니다. 가능성이 있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라"고 번역이 되어야 문맥에 맞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이 지혜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입니다. 지혜자가 때를 잘못 만난 것입니다. 15절 하반부를 보세요.
"그러나 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지혜자가 가난했습니다. 볼품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외모로 그를 판단해 버렸습니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솔로몬이 16절에서 이렇게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낫다마는."
힘 가지고 싸워서는 그 큰 임금을 이길 수 없습니다. 지혜자의 말을 듣고 그 지혜로 이겨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 말이 신청되지 아니한다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지혜자가 때를 못 만난 것입니다. 시기를 잘못 만난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17절 말씀입니다.
"종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이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지혜자가 비록 큰소리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그 지혜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만 했더라면 죽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그 성읍의 두령이 아무리 큰소리로 호령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힘을 가지고 싸워서는 안될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18절 말씀을 계속 읽겠습니다.
"지혜가 병기보다 나으니라."
병기로 싸워서는 그 작은 성읍이 큰 임금을 이길 수 없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혜자가 시기를 잘못 만났습니다. 때를 잘못 만났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러나 한 죄인이 많은 선을 패궤케 하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죄인은 앞에 나오는 성읍의 두령, 우매자의 어른을 말합니다. 성읍을 몰락시킨 장본인입니다. 사람들이 지혜로운 자의 말을 듣기만 했더라면 다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누릴 수 있던 많은 선이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시기와 우연이라는 것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지금 솔로몬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에게 능력이 있느냐? 자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기와 우연이 나쁘게 임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없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복 주시면 시기와 기회가 얼마든지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오늘 본문에서 인생의 두 전제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인생은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인생은 자기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는 전제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어차피 죽을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인데 되는 대로 살지 뭐. 그럭저럭 살다가 가지 뭐." 솔로몬의 의도가 그것입니까? 아닙니다. 대학 입시를 앞 둔 수험생이 "붙을지 안 붙을지도 모르는데,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하고 공부 안하고 손을 놔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입니까? 앞날을 알지 못하니까 더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해야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앞날을 알지 못합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인생이니까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더욱 최선을 다해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누리면서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솔로몬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교훈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에 우리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틀림없이 우리를 의의 길로, 좋은 길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아마도 이런 글을 읽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오늘 하늘은 맑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는지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니
지금 하십시오.
친절한 말 한 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말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안 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미소를 짓고 싶거든 지금 웃어주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떠나기 전에
장미가 피고 가슴이 설레일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주십시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해가 저물면 노래 부르기엔
너무나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찰스 스펄전 목사님의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이 바로 솔로몬이 오늘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삶의 바른 자세입니다.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총 속에 즐겁게 살아가시는 여러분의 귀한 삶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9:1∼2 인생의 대 전제
2. 9:3∼10 죽음은 피할 수 없다
3. 9:11∼18 인생은 예측할 수 없다
오늘은 전도서 9장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2절의 말씀은 전도서 9장 전체의 서론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솔로몬은 여기서 인생의 대 전제가 되는 두 가지 변할 수 없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첫번째 전제는 인생은 아무도 자신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Life is unpredictable." 1절에서 그것을 요약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두번째 전제는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Death is unavoidable."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공통입니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2절 말씀에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솔로몬은 3∼18절에서 이 두 가지 인생의 대 전제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인생의 대 전제(大前提)
1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솔로몬이 마음을 다해서 진지하게 해 아래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을 자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두 가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 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장래 일에 대해서 예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게 될지 미움을 받게 될지, 앞길이 형통하게 될지 곤고하게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의인도 하나님의 손에 있고, 지혜자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또 인생의 모든 행하는 일이 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의롭게 산다고 해서, 지혜롭게 처신한다고 해서 당연히 나의 앞길은 형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욥이 얼마나 의로운 사람이었습니까? 욥 1:1에 보면 욥을 가리켜 순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정직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악에서 떠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또 이 욥이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까? 그에게는 아들이 일곱, 딸이 셋 있었습니다. 자녀들은 그중 하나가 생일을 맞으면 자기 집에 온가족을 초청하여 성대하게 잔치를 베풀고 함께 먹고 마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날 욥은 잊지 않고 자녀들을 다 불러모았습니다. 그리고 그 명수대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면서 자기 자녀들을 성결케 하였습니다. 먹고 마시는 가운데 자신들도 모르게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욥의 하는 일이 그렇게 지혜로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의 앞날이 늘 형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엄청난 시련이 욥에게 임했습니다. 그 많던 육축이 다 노략질 당했습니다. 그리고 일곱 아들과 딸 셋은 사고로 한꺼번에 죽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욥 자신의 몸에는 심한 악창이 생겼습니다. 욥이 그토록 의롭고 지혜로웠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니까 시련이 임하게 된 것이지 않습니까?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욥이 비록 시련을 당했지만 누구의 손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까?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욥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욥 1:21에 보면 그 극심한 환난 속에서도 욥이 무엇이라고 노래했습니까?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고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데 행여 어떤 시련이 닥쳐왔습니까?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더 귀하게, 더 크게 쓰시기 위해서 정금과 같이 단련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용기를 잃지 마세요. 여러분도 욥처럼 틀림없이 갑절의 복을 받게 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생의 두번째 전제가 있습니다. 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악인은 악인대로 고통을 당하지만, 의인도 의인대로 고통을 당합니다. 욥도 고통을 당했습니다. 바울도 고통을 당했습니다. 베드로도 고통을 당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에게도 고난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의인이든지 악인이든지 모두에게 골고루 똑같이 햇빛을 비추어주십니다. 단비를 골고루 내려주십니다. 마찬가지로 의인은 의인대로 형통할 때가 있지만 악인은 악인대로 번창할 때가 있고, 형통할 때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인 가운데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2절 말씀을 계속 보겠습니다.
"의인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지 않은 자며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이며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이렇게 살든지 저렇게 살든지 사람의 결국은 일반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결국이 무엇입니까? 인생이 자기의 삶에 종지부를 찍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경건하게 살든지, 되는 대로 살든지 죽는 것은 일반입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Death is unavoidable."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공통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대 전제, 즉 사람은 자기 앞날을 예측할 수 없고,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이라는 대 전제에 대해서 솔로몬은 3절 이하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2. 죽음은 피할 수 없다(Death is unavoidable).
솔로몬은 3절 이하에서 죽음을 앞두고 살아가는 우리 인생들이 과연 어떠한 자세로 사는 것이 마땅한지를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먼저 솔로몬은 두 가지 잘못된 태도를 이야기하고 있고, 그런 다음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죽음을 앞두고 살아가면서 어떠한 태도로 살아야 마땅한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첫번째 잘못된 견해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되는 대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죽음을 악한 것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음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나 버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이렇게 살아도 죽고, 저렇게 살아도 죽고, 죽는 것은 매일반인데 구태여 힘들게 의롭게 살아갈 필요가 무엇인가?" 이렇게 악한 마음을 품고 미친 듯이 살다가 허무하게 죽는 인생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이 사람들이 잊고 사는 것이 있습니다. 히 9:27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죽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삶은 다릅니다. 공통이 아닙니다.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고 되는 대로 악하게 마음대로 살다가 허무하게 죽는 사람은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잘못된 견해입니다.
그 다음에 또 잘못된 견해가 있습니다. "그래도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낫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참으면서 인생을 소극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4∼6절 말씀입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산 자 중에 참예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설마 산 입에 거미줄치랴. 살아가다 보면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겠지."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현실의 어려움을 꾹 참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생을 소극적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이 즐겨 인용하는 속담이 하나 있습니다. 4절 하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
성경에 보면 개는 토한 것을 먹는다고 했습니다. 부정한 동물입니다. 경멸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사자는 용맹스럽습니다. 동물의 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사자보다 산 개가 더 나은 이유가 있습니다. "살아 있어야 더 나아지지 않을까?" 이런 기대감이라도 가질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 의하면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나은 이유가 또 있습니다.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살아 있는 사람은 그래도 의식이 남아 있지만 죽은 사람은 의식이 전혀 없습니다. 또 있습니다.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죽은 사람에게 상을 줘보세요. 기쁨을 느낄 수 없지 않습니까?
뿐만 아닙니다. 6절 말씀입니다.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지 오래니."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습니다.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
살아 있어야 무엇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요. 죽었는데 무엇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기회가 다시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낫다고 하면서 지겨운 인생이지만 마지못해서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도 잘못된 견해입니다. 무조건 오래 사는 것이 최선이 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분에게 나이 든 아버님이 계셨습니다. 사람이 나이 들면 이런 저런 병이 들게 마련입니다. 신경통이 생깁니다. 당뇨도 생깁니다. 관절염도 생기지요. 이분의 아버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심장병으로 늘 고생했습니다. 이분은 믿음이 좋았습니다. 아버지의 건강을 위해서 하루도 빠짐없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루는 병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입니다. 병원에 쫓아갔습니다. 아버지는 의식을 잃은 채 산소호흡기에 의지해서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병원 곁에 있는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의식을 다시금 회복할 수 있게 해달라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는 며칠 뒤에 운명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셔서, 아버지와 아들이 말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하게 그냥 그대로 데려가 버리셨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살아나 보았자 또 이런저런 병에 시달리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역시 고통 당하기는 매일반이지 않습니까? 그럴 바에야 아예 고생이 없는 곳, 고통 당하지 않는 곳, 질병이 없는 곳으로 하나님께서 데리고 가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오래 산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죄악 가운데 무조건 오래 살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받을 형벌만 더 많아지지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주 안에서 죽는 것이 더 복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순교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죽음을 앞두고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솔로몬은 7∼10절에서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는 가서."
"가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적극적인 삶을 살 것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어차피 죽을 인생이니까!"라고 하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지 마세요. 또 가만히 앉아서 소극적으로 살려고 하지도 마세요.
그러면 과연 적극적으로 사는 인생이 어떠한 것인지 솔로몬은 우리에게 네 가지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1) "Enjoy your meals." 음식을 맛있게 먹으라는 것입니다.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음식을 먹으면서 투정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음식을 먹으면서 잔소리하는 사람은 아주 못된 사람입니다.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는 언제나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먹고 마시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사람이 아무리 수고하고 애써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인간은 자기 수고의 낙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셨다는 사실은 벌써 우리의 수고를 기쁘게 받으시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먹을 수 있는 건강 주셨지요, 그것을 느낄 수 있은 입맛도 주셨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음식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는 이와 같이 언제나 즐거운 식탁만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2) "Enjoy your life." 삶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즐겁게 살라는 것입니다.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옛날 유대인들은 결혼식과 같은 축제 때에는 흰옷을 입었습니다. 멋을 부리는 것입니다.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
평소에는 올리브 기름을 발랐지만 축제 때에는 머리에 향기름, 향수를 뿌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솔로몬은 본문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축제 때만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
언제나 축제 때의 기분으로 활력 있게 즐겁게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언제 보아도 멋있고, 향기 나고, 활력 있는 즐거운 삶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Enjoy your family life." 가정생활도 즐겁게 해야 합니다.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우리가 덧없는 인생길을 살아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덧없는 인생길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 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부부가 서로 사랑하면서 함께 즐겁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생의 즐거움을 자기의 가정 밖에서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남편에게서,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인생의 즐거움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네가 일 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내 남편은, 내 아내는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분복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누리라고 주신 복입니다. 일평생동안 서로 사랑하면서 함께 즐겁게 살라고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배필입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즐겁게 사시기 바랍니다. 결혼하지 않으신 분들은 일평생 동안 함께 사랑하면서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 "Enjoy your work." 일하는 것도 즐겁게 해야 합니다. 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무슨 일이 주어지든지 간에 기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그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어둔 밤 쉴 때가 곧 닥쳐옵니다. 그때는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습니다. 그때는 하나님 앞에서 셈하는 일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슨 일을 맡겨주시든지 간에 그 일에 땀흘리면서 최선을 다해서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가정의 일도 열심히 하고, 직장 일도 열심히 하고, 교회 일도 땀흘리면서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주님 앞에서 셈할 때 잘했다 칭찬 받고,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솔로몬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은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라는 것입니까? 어차피 죽을 인생이니 되는 대로 살라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소극적으로 살지 말고,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해서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이니 더욱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야지요. 즐겁게 살아야지요.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즐거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솔로몬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교훈입니다. 먹는 것도 즐겁게 먹고, 사는 것도 즐겁게 살고, 부부생활도 즐겁게 하고, 일하는 것도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마음자세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인생은 예측할 수 없다(Life is unpredictable).
솔로몬은 11∼18절에서 인생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는 대 전제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더 잘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능력이 성공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11절에서 다섯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합니다. 토끼가 꼭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거북이가 이길 수도 있습니다.
둘째로,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다윗과 골리앗이 싸웠습니다. 덩치로 보면 골리앗이 훨씬 더 큽니다. 그런데 골리앗이 졌습니다.
인간의 육체의 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머리의 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번째, 네번째, 다섯번째는 지력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머리 좋다고 해서 잘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이라고 해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생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11절 끝 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아무리 능력 많은 사람이라도 때를 잘못 만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많은 사람이라도 뜻밖의 사고를 만나보세요.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능력이 좀 부족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때를 잘 만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습니다. 또 우연도 그렇습니다. 우연이 사람의 편에서 보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일이지만,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섭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형통한 길을 주시면 능력이 부족해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시기와 우연이 인생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또 인생이 시기와 우연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 12절 말씀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전혀 알 수 없습니다. 한치 앞에 되어질 일도 모르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뜻밖의 사고가 우연히 일어나면 앉아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렇게 인생이 무력하다는 것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이 싸울 때를 생각해 보세요. 다윗이 물매로 던진 작은 돌멩이 하나가 골리앗의 머리에 정통으로 박히게 될지 골리앗이 꿈엔들 생각했겠습니까? 그러나 덩치 크고 힘있는 골리앗이었지만 시기와 우연이 그에게 나쁘게 임할 때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은 계속해서 13절 이하에서 때와 시기가 우리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지 하나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또 해 아래서 지혜를 보고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니."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때를 잘못 만나니까 소용이 없다는 것을 솔로몬은 보게 되었습니다. 크게 깨달았습니다. 14절 말씀입니다.
"곧 어떤 작고 인구가 많지 않은 성읍에 큰 임금이 와서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하나의 작은 성읍이 있었습니다. 그 성읍 안에는 사는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큰 임금이 쳐들어 왔습니다. 수많은 군사를 끌고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 주위에 큰 흉벽을 쌓았습니다. 이 작은 성읍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게 되었습니다. 힘으로는 싸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앞에서도 말했지만 유력자라고 해서 반드시 전쟁에 승리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작은 성읍이었지만 이 성읍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성읍 가운데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
그 성에는 지혜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지혜자는 비록 육체의 힘은 없었지만 그 성을 구할 수 있는 계략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는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고 하여 이미 건진 것처럼 번역이 되었습니다만 번역이 조금 잘못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지혜자의 말을 듣기만 하면 얼마든지 그 성읍은 건져질 수 있었습니다. 가능성이 있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라"고 번역이 되어야 문맥에 맞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이 지혜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입니다. 지혜자가 때를 잘못 만난 것입니다. 15절 하반부를 보세요.
"그러나 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지혜자가 가난했습니다. 볼품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외모로 그를 판단해 버렸습니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솔로몬이 16절에서 이렇게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낫다마는."
힘 가지고 싸워서는 그 큰 임금을 이길 수 없습니다. 지혜자의 말을 듣고 그 지혜로 이겨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 말이 신청되지 아니한다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지혜자가 때를 못 만난 것입니다. 시기를 잘못 만난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17절 말씀입니다.
"종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이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지혜자가 비록 큰소리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그 지혜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만 했더라면 죽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그 성읍의 두령이 아무리 큰소리로 호령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힘을 가지고 싸워서는 안될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18절 말씀을 계속 읽겠습니다.
"지혜가 병기보다 나으니라."
병기로 싸워서는 그 작은 성읍이 큰 임금을 이길 수 없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혜자가 시기를 잘못 만났습니다. 때를 잘못 만났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러나 한 죄인이 많은 선을 패궤케 하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죄인은 앞에 나오는 성읍의 두령, 우매자의 어른을 말합니다. 성읍을 몰락시킨 장본인입니다. 사람들이 지혜로운 자의 말을 듣기만 했더라면 다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누릴 수 있던 많은 선이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시기와 우연이라는 것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지금 솔로몬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에게 능력이 있느냐? 자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기와 우연이 나쁘게 임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없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복 주시면 시기와 기회가 얼마든지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오늘 본문에서 인생의 두 전제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인생은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인생은 자기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는 전제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어차피 죽을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인데 되는 대로 살지 뭐. 그럭저럭 살다가 가지 뭐." 솔로몬의 의도가 그것입니까? 아닙니다. 대학 입시를 앞 둔 수험생이 "붙을지 안 붙을지도 모르는데,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하고 공부 안하고 손을 놔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입니까? 앞날을 알지 못하니까 더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해야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앞날을 알지 못합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인생이니까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더욱 최선을 다해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누리면서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솔로몬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교훈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에 우리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틀림없이 우리를 의의 길로, 좋은 길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아마도 이런 글을 읽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오늘 하늘은 맑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는지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니
지금 하십시오.
친절한 말 한 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말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안 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미소를 짓고 싶거든 지금 웃어주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떠나기 전에
장미가 피고 가슴이 설레일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주십시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해가 저물면 노래 부르기엔
너무나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찰스 스펄전 목사님의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이 바로 솔로몬이 오늘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삶의 바른 자세입니다.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총 속에 즐겁게 살아가시는 여러분의 귀한 삶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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