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인생의 행복(2:1∼26)
< 개 요 >
1. 2:1∼11 쾌락의 나라
2. 2:12∼17 지혜의 나라
3. 2:18∼23 재물의 나라
4. 2:24∼26 솔로몬이 깨달은 행복
여러분, 혹시 벨기에의 작가 메테를링크(M. Maeterlinck, 1862∼1949)라는 사람이 쓴 동화 "파랑새"를 읽어보셨습니까? 내용은 간단합니다. 두 어린아이가 꿈속에서 행복을 가져다주는 파랑새를 찾아서 먼길을 떠났습니다. 아이들은 사람들이 일러주는 대로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파랑새를 찾았습니다. 부지런히 파랑새를 찾아다녔지만 그 어디에서도 원하던 파랑새를 찾지 못했습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두 아이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자기들이 새장에 기르고 있던 산비둘기의 깃털이 그날따라 유난히도 파랗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파랑새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동화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멀리 있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우리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솔로몬이 전도서 2장에서 일깨워주는 바가 바로 이 점입니다. 솔로몬은 행복을 찾기 위해 여러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행복이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모든 곳을 두루 다니면서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솔로몬이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쾌락이라는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에는 값비싼 술도 있었고, 웅장한 저택도 있었고, 멋진 정원도 있었습니다. 수많은 노래하는 남녀들도 있었고, 아름다운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처음에 솔로몬은 자기가 찾던 파랑새를 거기에서 찾은 줄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날아다니는 새를 잡아서 손에 쥐고 보니까 파랑새가 아니었습니다. 엉뚱한 색깔의 새였습니다. 솔로몬은 쾌락 속에서 인생의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1∼11절의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 솔로몬은 지혜의 나라를 찾아갔습니다. 과연 그곳에는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새가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과연 내가 바라던 새를 잡았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솔로몬은 그 새를 잡아 새장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서 그 새는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또 헛수고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12∼17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솔로몬은 재물의 나라를 찾아갔습니다. 그곳은 모든 것이 풍요로웠습니다.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풍성한 물질의 나라 그 어디에서도 행복의 파랑새를 찾지 못하고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왔습니다. 18∼23절의 말씀입니다.
그제야 솔로몬은 아주 소중한 진리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바로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고, 무엇을 하든지 간에 마음에 즐거움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것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행복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심령의 낙을 주시는 분이 누구시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솔로몬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몸도 창조하셨지만 마음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심령에 하나님께서 낙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면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깊은 평강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24∼26절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확실하게 행복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매일의 일상 생활 속에서 행복을 누리시는 복된 모습들이 다 되시기를 먼저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쾌락의 나라
그러면 이제 본문의 말씀을 한 절씩 읽어가면서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전 2:1입니
다.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솔로몬이 시험적으로 제일 먼저 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자기의 육신을 즐겁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쾌락에 몸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인생의 참된 의미, 인생의 참된 만족을 찾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행복의 파랑새를 쾌락의 나라에서 찾아보려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마지막으로 내린 결론은 무엇입니까?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육신의 쾌락 속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쾌락의 나라에서 쾌락을 누리면서 웃고 떠들고 희희낙락하던 그 모든 것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지내고 보니까 그 모든 것이 다 쓸데없는 미친 짓거리였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는 유익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추구했던 쾌락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설명해주었습니다. 3절을 보시겠습니다.
"내 마음에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솔로몬이 쾌락에 몸을 담았지만 쾌락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쾌락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깨달아보려고 그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쾌락에 몸을 던졌지만 정신만큼은 잃지 않았습니다. 지혜로 마음을 다스려가면서 그렇게 했습니다. 목적의식을 분명히 가지고 쾌락의 나라를 탐구한 것입니다.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술을 마셔보았습니다. 취해보았습니다. 제정신 가지고 할 수 없는 어리석은 일들을 술 취한 김에, 술의 힘을 빌려서 해보았습니다. 물론 그렇게 한 것이 쾌락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짧은 인생길을 가면서 과연 어떠한 것이 진정한 낙을 누릴 수 있는 길인지를 발견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술로는 인생의 의미를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인생의 참된 만족을 술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솔로몬이 그 다음에 한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솔로몬은 왕이었습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업을 크게 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어떤 식으로 사업을 크게 했습니까?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솔로몬은 자신을 위해서, 육신을 위해서 집들을 지었습니다. 왕상 7:1에 보면 솔로몬이 자기 왕궁을 완성하는 데 무려 13년이 걸렸습니다. 그가 예루살렘 성전을 짓는 데는 7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13년에 걸쳐 자기가 사는 집을 지었으니 그 집이 얼마나 웅장하고 호화스러웠겠습니까? 육신을 즐기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멋진 정원을 여기저기에 만들어놓았습니다. 거기에다가 각종 과목을 심었습니다. 마치 에덴동산처럼 아름답게 꾸몄다는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 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이스라엘 땅에는 겨울철에 비가 내립니다. 여름철에는 비가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겨울에 내리는 비를 모아서 비가 오지 않는 여름철에 나무에 물을 주기 위해서 여러 못들을 팠습니다. 그러니 그 사업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사업을 크게 하기 위해서는 인력도 많이 동원되어야겠지요. 그 많은 인력을 어떻게 충당했습니까? 7절 말씀을 보세요.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그 많은 인원을 먹이기 위해서 식량도 많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엄청나게 많은 가축을 길렀습니다. 가축만 많았던 것이 아닙니다. 8절 말씀을 보세요.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창고에는 금은보화가 가득했습니다. 주변의 여러 왕들과 여러 도의 방백들이 보내온 보배들, 예컨대 상아, 모피, 값비싼 향료 등등이 금고에 가득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8절 하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소위 말하는 왕의 기쁨조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기쁨조가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처가 700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첩도 300명이라고 했습니다. 일천 명의 여자를 혼자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인생의 쾌락으로 따진다면 이 세상에 솔로몬만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솔로몬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그러나 솔로몬이 쾌락에 몸을 던졌던 것은 쾌락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시험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쾌락 속에서 찾아보려고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9절 끝 부분에 보면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라고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솔로몬은 언제나 지혜로 자기 마음을 잘 다스렸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했습니까? 10절입니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쾌락의 나라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모든 것을 다 누려보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10절 끝 부분을 보시겠습니다.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처음에는 쾌락의 나라 가운데서 자기가 바라던 파랑새를 찾은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 새를 찾고 보니 전혀 다른 색의 새였습니다. 파란색의 새가 아니었습니다. 엉뚱한 색이었습니다. 그것이 1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여러분, 솔로몬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겪은 이 실패를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만큼은 반복하지 마세요!"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인생의 행복을 육신의 쾌락 속에서 찾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쾌락에 몸을 내맡기지 마세요. 행복을 찾을 수도 없거니와 몸과 마음이 다 병들고 맙니다. 여러분의 영혼 속에 깊은 허무감만 남을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좇아 살지 말고 성령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우리의 모든 행실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날마다 나타내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지혜의 나라
솔로몬이 두번째 찾아갔던 나라는 지혜의 나라였습니다.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쾌락의 나라에서 솔로몬은 바라던 행복의 파랑새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제 방향을 바꿔 지혜의 나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지혜에 대해서 깊이 탐구했습니다. 지혜를 좀더 잘 깨닫기 위해서 지혜의 정반대가 되는 망령됨과 어리석음도 보았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지혜의 나라를 탐구했던지 그는 12절 하반부에서 이런 말로 자기가 지혜의 나라를 세밀하게 조사해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왕의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꼬 행한 지 오랜 일일 뿐이리라."
내 뒤에 누가 와서 이 지혜의 나라를 탐구한다 할지라도 내가 시도한 이상으로는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지혜의 나라를 살펴보았습니다. 솔로몬이 느낀 소감이 무엇이었습니까?
13절 말씀입니다.
"내가 보건대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두움보다 뛰어남 같도다."
빛이 어두움보다 확실히 나은 것처럼 지혜가 우매보다 좋다는 것입니다. 뛰어난 것은 확실합니다.
계속해서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혜자는 눈이 밝고 우매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확실히 지혜가 좋은 점이 있습니다. "과연 내가 바라던 행복의 파랑새를 드디어 찾았구나"라고 하면서 솔로몬은 그 새를 잡아서 새장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서 새는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니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솔로몬은 그것을 14절 하반부 이하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당하는 일이 일반인 줄을 내가 깨닫고."
지혜자나 우매자나 결국에 가서는 그 당하는 일이 모두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솔로몬은 마음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15절 말씀입니다.
"심중에 이르기를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어찌하여 지혜가 더하였던고 이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지혜로운 나도 결국에 가서는 우매자가 당하는 일을 당하는데 무엇을 하려고 애쓰고 수고하고 노력하면서 지혜를 더하려고 발버둥쳤던가?" 지내 놓고 보니까 다 헛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자와 우매자가 똑같이 당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16절에서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우매자는 죽습니다. 그러면 지혜자는 영원히 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혜자도 똑같이 결국에는 죽습니다. 죽고 나면 지혜자나 우매자나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집니다.
죽는 것도 일반이요, 사람들이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것도 일반입니다.
솔로몬은 지혜의 나라에서도 원하던 행복을 찾지 못했습니다. 지혜의 나라를 떠나면서 솔로몬은 결론으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17절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한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서는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남달리 지혜를 가진 솔로몬 임금이 내린 결론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우리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것이 못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난 것과 같이 공부 잘하면 그만큼 좋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학업성적이 우리 자녀들에게 행복을 안겨주지 못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공부가 소중합니다. 그러나 공부 자체가 행복을 결정짓는 것은 아닙니다. 집 팔아 족집게 과외 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행복을 살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해보았자 결국은 대학에 떨어져서 재수하고 있다고 방송에 나오지 않던가요?
하나님 제일주의를 심어주어야 합니다.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공부가 소중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을 자녀들에게 일깨워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자녀가 후회하지 않는 삶, 실패하지 않는 삶,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재물의 나라
마지막 세번째로 솔로몬은 재물의 나라를 찾아갔습니다. 그곳은 모든 것이 풍요로웠습니다.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 어디에서도 자기가 바라던 행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1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해 아래서 나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자에게 끼치게 됨이라."
사람이 해 아래서 땀흘리고 수고해서 많은 재물을 쌓은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결국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다 다른 사람들에게 남기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속담 가운데 이런 유명한 속담이 있습니다. "There are no pockets in shrouds(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왜 그렇습니까? 가지고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더 기가 막힌 일이 있습니다. 1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서 내 지혜를 나타내어 수고한 모든 결과를 저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
내가 남긴 재물을 지혜로운 사람이 맡아서 관리하면 다행이지요. 그러나 후손이 어리석어서 내가 남겨놓은 재물을 다 탕진해버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속이 상합니까? 솔로몬 사후에 이렇게 우려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를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친 솔로몬만큼 똑똑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라가 두 동강이 나버렸습니다.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로 갈라졌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열 지파를 빼앗겼습니다. 겨우 두 지파만 가지고 명맥을 유지하는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이 죽을 때 르호보암의 나이가 41세였습니다. 르호보암이 41세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은 자기 아들 르호보암의 인물 됨됨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죽고 난 뒤에 일어날 일을 미리 다 예견이나 한 듯이 솔로몬은 20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서 수고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도리어 마음으로 실망케 하였도다."
자기가 쌓아올린 업적이 아들 대에 가서 다 사라질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실망이 컸겠습니까? 그뿐 아닙니다. 더 기가 막힌 일이 있습니다. 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수고하였어도 그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업으로 끼치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라 큰 해로다."
버는 사람이 따로 있고, 쓰는 사람이 따로 있더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불공평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22절 말씀입니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자기가 누리지도 못하고, 자기가 벌어놓고도 갈 때 가지고 가지도 못하고, 자기 뒤에 오는 사람이 어리석으면 그대로 다 탕진해버릴 것인데 수고해서 모아놓은들 남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남는 것이라고는 23절의 말씀대로입니다.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수고하며 재물을 모아놓았다 해도 남는 것은 슬픔과 근심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낮에만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재물 때문에 밤낮 쉬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고생해 보았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물질의 주인이 아닙니다. 물질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잠시 맡겨주신 것에 불과합니다.
돌아갈 때는 남김없이, 깨끗하게, 하나도 빠짐없이 다 반납해야 합니다. 하나라도 가지고 가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을 맡기신 하나님께 나아가서 셈해야 합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내게 얼마를 맡기셨느냐가 아닙니다. 내가 이 땅에서 수고해서 얼마나 많은 재물을 쌓아놓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많이 맡았든 적게 맡았든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즐겁게 그것을 누리면서 선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값있게 하나님의 재물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질의 선한 청지기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솔로몬이 깨달은 행복
솔로몬은 행복을 찾기 위해 쾌락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지혜의 문도 두드렸습니다.
재물의 문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 어디에서도 원하던 행복을 찾지 못하고 원점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제야 솔로몬은 아주 소중한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2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은 사람의 일상생활입니다. 지극히 평범한 일입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도 얼마든지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솔로몬은 엉뚱한 곳을 돌아다니면서 행복을 찾으려고 했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최고의 삶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먹고 마시든지,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면 그것이 최고의 삶이요, 그것이 바로 행복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에 낙을 주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인생의 행복은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 합니다.
내가 해 아래서 수고한다고 해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심령의 낙을 주실 때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먹고 마시든지, 우리 마음속에 깊은 평강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한 삶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가 합 3:17∼18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내 마음에 심령의 낙을 주시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고 사업을 크게 한다 할지라도 마음에 평안이 없으니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해 아래서의 수고로 인생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솔로몬만한 인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2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먹고 즐거워하는 일에 누가 나보다 승하랴."
그러나 솔로몬은 쾌락 속에서도, 지혜 속에서도, 재물 속에서도 행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26절 말씀을 다 같이 한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고 사랑하시는 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에게는 무엇을 주십니까? 지혜도 주시고, 지식도 주시고, 희락도 주시고, 심령에 낙도 주시고 모든 것을 다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죄인에게는 무엇을 주십니까? 노고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심령에 낙이 없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 죄인은 아무리 수고해서 재물을 쌓아놓아도 낙을 누리지 못합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또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라고 했습니다. 죄인이 땀흘려 이 땅에서 수고해서 재물을 많이 쌓아놓았습니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죄인이 수고해서 쌓아놓은 모든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에게 다 주십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땀흘리고 물질을 모으고 아등바등하면서 재물을 쌓아놓은들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행복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쾌락은 우리에게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뛰어난 인간의 지혜와 지식도 우리에게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물질도 우리에게 참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나그네와 같은 짧은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심령이 낙을 주실 때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주님으로 인해서 즐거워하고 주님으로 인해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요 14:27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쾌락도 줄 수 없고, 지혜와 지식도 줄 수 없고, 재물도 줄 수 없는, 우리 예수님만이 줄 수 있는 참된 평안이 이 시간 여러분 마음에 충만하게 넘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여러분이 사는 여생 동안 주님으로 인해서 매일 행복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행복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2:1∼11 쾌락의 나라
2. 2:12∼17 지혜의 나라
3. 2:18∼23 재물의 나라
4. 2:24∼26 솔로몬이 깨달은 행복
여러분, 혹시 벨기에의 작가 메테를링크(M. Maeterlinck, 1862∼1949)라는 사람이 쓴 동화 "파랑새"를 읽어보셨습니까? 내용은 간단합니다. 두 어린아이가 꿈속에서 행복을 가져다주는 파랑새를 찾아서 먼길을 떠났습니다. 아이들은 사람들이 일러주는 대로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파랑새를 찾았습니다. 부지런히 파랑새를 찾아다녔지만 그 어디에서도 원하던 파랑새를 찾지 못했습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두 아이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자기들이 새장에 기르고 있던 산비둘기의 깃털이 그날따라 유난히도 파랗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파랑새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동화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멀리 있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우리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솔로몬이 전도서 2장에서 일깨워주는 바가 바로 이 점입니다. 솔로몬은 행복을 찾기 위해 여러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행복이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모든 곳을 두루 다니면서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솔로몬이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쾌락이라는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에는 값비싼 술도 있었고, 웅장한 저택도 있었고, 멋진 정원도 있었습니다. 수많은 노래하는 남녀들도 있었고, 아름다운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처음에 솔로몬은 자기가 찾던 파랑새를 거기에서 찾은 줄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날아다니는 새를 잡아서 손에 쥐고 보니까 파랑새가 아니었습니다. 엉뚱한 색깔의 새였습니다. 솔로몬은 쾌락 속에서 인생의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1∼11절의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 솔로몬은 지혜의 나라를 찾아갔습니다. 과연 그곳에는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새가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과연 내가 바라던 새를 잡았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솔로몬은 그 새를 잡아 새장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서 그 새는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또 헛수고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12∼17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솔로몬은 재물의 나라를 찾아갔습니다. 그곳은 모든 것이 풍요로웠습니다.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풍성한 물질의 나라 그 어디에서도 행복의 파랑새를 찾지 못하고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왔습니다. 18∼23절의 말씀입니다.
그제야 솔로몬은 아주 소중한 진리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바로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고, 무엇을 하든지 간에 마음에 즐거움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것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행복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심령의 낙을 주시는 분이 누구시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솔로몬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몸도 창조하셨지만 마음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심령에 하나님께서 낙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면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깊은 평강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24∼26절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확실하게 행복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매일의 일상 생활 속에서 행복을 누리시는 복된 모습들이 다 되시기를 먼저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쾌락의 나라
그러면 이제 본문의 말씀을 한 절씩 읽어가면서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전 2:1입니
다.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솔로몬이 시험적으로 제일 먼저 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자기의 육신을 즐겁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쾌락에 몸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인생의 참된 의미, 인생의 참된 만족을 찾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행복의 파랑새를 쾌락의 나라에서 찾아보려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마지막으로 내린 결론은 무엇입니까?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육신의 쾌락 속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쾌락의 나라에서 쾌락을 누리면서 웃고 떠들고 희희낙락하던 그 모든 것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지내고 보니까 그 모든 것이 다 쓸데없는 미친 짓거리였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는 유익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추구했던 쾌락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설명해주었습니다. 3절을 보시겠습니다.
"내 마음에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솔로몬이 쾌락에 몸을 담았지만 쾌락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쾌락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깨달아보려고 그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쾌락에 몸을 던졌지만 정신만큼은 잃지 않았습니다. 지혜로 마음을 다스려가면서 그렇게 했습니다. 목적의식을 분명히 가지고 쾌락의 나라를 탐구한 것입니다.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술을 마셔보았습니다. 취해보았습니다. 제정신 가지고 할 수 없는 어리석은 일들을 술 취한 김에, 술의 힘을 빌려서 해보았습니다. 물론 그렇게 한 것이 쾌락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짧은 인생길을 가면서 과연 어떠한 것이 진정한 낙을 누릴 수 있는 길인지를 발견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술로는 인생의 의미를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인생의 참된 만족을 술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솔로몬이 그 다음에 한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솔로몬은 왕이었습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업을 크게 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어떤 식으로 사업을 크게 했습니까?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솔로몬은 자신을 위해서, 육신을 위해서 집들을 지었습니다. 왕상 7:1에 보면 솔로몬이 자기 왕궁을 완성하는 데 무려 13년이 걸렸습니다. 그가 예루살렘 성전을 짓는 데는 7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13년에 걸쳐 자기가 사는 집을 지었으니 그 집이 얼마나 웅장하고 호화스러웠겠습니까? 육신을 즐기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멋진 정원을 여기저기에 만들어놓았습니다. 거기에다가 각종 과목을 심었습니다. 마치 에덴동산처럼 아름답게 꾸몄다는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 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이스라엘 땅에는 겨울철에 비가 내립니다. 여름철에는 비가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겨울에 내리는 비를 모아서 비가 오지 않는 여름철에 나무에 물을 주기 위해서 여러 못들을 팠습니다. 그러니 그 사업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사업을 크게 하기 위해서는 인력도 많이 동원되어야겠지요. 그 많은 인력을 어떻게 충당했습니까? 7절 말씀을 보세요.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그 많은 인원을 먹이기 위해서 식량도 많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엄청나게 많은 가축을 길렀습니다. 가축만 많았던 것이 아닙니다. 8절 말씀을 보세요.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창고에는 금은보화가 가득했습니다. 주변의 여러 왕들과 여러 도의 방백들이 보내온 보배들, 예컨대 상아, 모피, 값비싼 향료 등등이 금고에 가득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8절 하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소위 말하는 왕의 기쁨조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기쁨조가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처가 700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첩도 300명이라고 했습니다. 일천 명의 여자를 혼자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인생의 쾌락으로 따진다면 이 세상에 솔로몬만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솔로몬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그러나 솔로몬이 쾌락에 몸을 던졌던 것은 쾌락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시험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쾌락 속에서 찾아보려고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9절 끝 부분에 보면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라고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솔로몬은 언제나 지혜로 자기 마음을 잘 다스렸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했습니까? 10절입니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쾌락의 나라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모든 것을 다 누려보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10절 끝 부분을 보시겠습니다.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처음에는 쾌락의 나라 가운데서 자기가 바라던 파랑새를 찾은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 새를 찾고 보니 전혀 다른 색의 새였습니다. 파란색의 새가 아니었습니다. 엉뚱한 색이었습니다. 그것이 1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여러분, 솔로몬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겪은 이 실패를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만큼은 반복하지 마세요!"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인생의 행복을 육신의 쾌락 속에서 찾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쾌락에 몸을 내맡기지 마세요. 행복을 찾을 수도 없거니와 몸과 마음이 다 병들고 맙니다. 여러분의 영혼 속에 깊은 허무감만 남을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좇아 살지 말고 성령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우리의 모든 행실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날마다 나타내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지혜의 나라
솔로몬이 두번째 찾아갔던 나라는 지혜의 나라였습니다.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쾌락의 나라에서 솔로몬은 바라던 행복의 파랑새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제 방향을 바꿔 지혜의 나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지혜에 대해서 깊이 탐구했습니다. 지혜를 좀더 잘 깨닫기 위해서 지혜의 정반대가 되는 망령됨과 어리석음도 보았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지혜의 나라를 탐구했던지 그는 12절 하반부에서 이런 말로 자기가 지혜의 나라를 세밀하게 조사해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왕의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꼬 행한 지 오랜 일일 뿐이리라."
내 뒤에 누가 와서 이 지혜의 나라를 탐구한다 할지라도 내가 시도한 이상으로는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지혜의 나라를 살펴보았습니다. 솔로몬이 느낀 소감이 무엇이었습니까?
13절 말씀입니다.
"내가 보건대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두움보다 뛰어남 같도다."
빛이 어두움보다 확실히 나은 것처럼 지혜가 우매보다 좋다는 것입니다. 뛰어난 것은 확실합니다.
계속해서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혜자는 눈이 밝고 우매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확실히 지혜가 좋은 점이 있습니다. "과연 내가 바라던 행복의 파랑새를 드디어 찾았구나"라고 하면서 솔로몬은 그 새를 잡아서 새장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서 새는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니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솔로몬은 그것을 14절 하반부 이하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당하는 일이 일반인 줄을 내가 깨닫고."
지혜자나 우매자나 결국에 가서는 그 당하는 일이 모두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솔로몬은 마음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15절 말씀입니다.
"심중에 이르기를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어찌하여 지혜가 더하였던고 이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지혜로운 나도 결국에 가서는 우매자가 당하는 일을 당하는데 무엇을 하려고 애쓰고 수고하고 노력하면서 지혜를 더하려고 발버둥쳤던가?" 지내 놓고 보니까 다 헛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자와 우매자가 똑같이 당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16절에서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우매자는 죽습니다. 그러면 지혜자는 영원히 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혜자도 똑같이 결국에는 죽습니다. 죽고 나면 지혜자나 우매자나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집니다.
죽는 것도 일반이요, 사람들이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것도 일반입니다.
솔로몬은 지혜의 나라에서도 원하던 행복을 찾지 못했습니다. 지혜의 나라를 떠나면서 솔로몬은 결론으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17절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한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서는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남달리 지혜를 가진 솔로몬 임금이 내린 결론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우리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것이 못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난 것과 같이 공부 잘하면 그만큼 좋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학업성적이 우리 자녀들에게 행복을 안겨주지 못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공부가 소중합니다. 그러나 공부 자체가 행복을 결정짓는 것은 아닙니다. 집 팔아 족집게 과외 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행복을 살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해보았자 결국은 대학에 떨어져서 재수하고 있다고 방송에 나오지 않던가요?
하나님 제일주의를 심어주어야 합니다.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공부가 소중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을 자녀들에게 일깨워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자녀가 후회하지 않는 삶, 실패하지 않는 삶,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재물의 나라
마지막 세번째로 솔로몬은 재물의 나라를 찾아갔습니다. 그곳은 모든 것이 풍요로웠습니다.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 어디에서도 자기가 바라던 행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1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해 아래서 나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자에게 끼치게 됨이라."
사람이 해 아래서 땀흘리고 수고해서 많은 재물을 쌓은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결국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다 다른 사람들에게 남기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속담 가운데 이런 유명한 속담이 있습니다. "There are no pockets in shrouds(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왜 그렇습니까? 가지고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더 기가 막힌 일이 있습니다. 1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서 내 지혜를 나타내어 수고한 모든 결과를 저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
내가 남긴 재물을 지혜로운 사람이 맡아서 관리하면 다행이지요. 그러나 후손이 어리석어서 내가 남겨놓은 재물을 다 탕진해버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속이 상합니까? 솔로몬 사후에 이렇게 우려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를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친 솔로몬만큼 똑똑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라가 두 동강이 나버렸습니다.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로 갈라졌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열 지파를 빼앗겼습니다. 겨우 두 지파만 가지고 명맥을 유지하는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이 죽을 때 르호보암의 나이가 41세였습니다. 르호보암이 41세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은 자기 아들 르호보암의 인물 됨됨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죽고 난 뒤에 일어날 일을 미리 다 예견이나 한 듯이 솔로몬은 20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서 수고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도리어 마음으로 실망케 하였도다."
자기가 쌓아올린 업적이 아들 대에 가서 다 사라질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실망이 컸겠습니까? 그뿐 아닙니다. 더 기가 막힌 일이 있습니다. 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수고하였어도 그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업으로 끼치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라 큰 해로다."
버는 사람이 따로 있고, 쓰는 사람이 따로 있더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불공평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22절 말씀입니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자기가 누리지도 못하고, 자기가 벌어놓고도 갈 때 가지고 가지도 못하고, 자기 뒤에 오는 사람이 어리석으면 그대로 다 탕진해버릴 것인데 수고해서 모아놓은들 남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남는 것이라고는 23절의 말씀대로입니다.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수고하며 재물을 모아놓았다 해도 남는 것은 슬픔과 근심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낮에만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재물 때문에 밤낮 쉬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고생해 보았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물질의 주인이 아닙니다. 물질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잠시 맡겨주신 것에 불과합니다.
돌아갈 때는 남김없이, 깨끗하게, 하나도 빠짐없이 다 반납해야 합니다. 하나라도 가지고 가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을 맡기신 하나님께 나아가서 셈해야 합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내게 얼마를 맡기셨느냐가 아닙니다. 내가 이 땅에서 수고해서 얼마나 많은 재물을 쌓아놓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많이 맡았든 적게 맡았든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즐겁게 그것을 누리면서 선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값있게 하나님의 재물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질의 선한 청지기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솔로몬이 깨달은 행복
솔로몬은 행복을 찾기 위해 쾌락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지혜의 문도 두드렸습니다.
재물의 문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 어디에서도 원하던 행복을 찾지 못하고 원점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제야 솔로몬은 아주 소중한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2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은 사람의 일상생활입니다. 지극히 평범한 일입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도 얼마든지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솔로몬은 엉뚱한 곳을 돌아다니면서 행복을 찾으려고 했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최고의 삶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먹고 마시든지,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면 그것이 최고의 삶이요, 그것이 바로 행복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에 낙을 주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인생의 행복은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 합니다.
내가 해 아래서 수고한다고 해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심령의 낙을 주실 때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먹고 마시든지, 우리 마음속에 깊은 평강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한 삶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가 합 3:17∼18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내 마음에 심령의 낙을 주시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고 사업을 크게 한다 할지라도 마음에 평안이 없으니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해 아래서의 수고로 인생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솔로몬만한 인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2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먹고 즐거워하는 일에 누가 나보다 승하랴."
그러나 솔로몬은 쾌락 속에서도, 지혜 속에서도, 재물 속에서도 행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26절 말씀을 다 같이 한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고 사랑하시는 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에게는 무엇을 주십니까? 지혜도 주시고, 지식도 주시고, 희락도 주시고, 심령에 낙도 주시고 모든 것을 다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죄인에게는 무엇을 주십니까? 노고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심령에 낙이 없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 죄인은 아무리 수고해서 재물을 쌓아놓아도 낙을 누리지 못합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또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라고 했습니다. 죄인이 땀흘려 이 땅에서 수고해서 재물을 많이 쌓아놓았습니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죄인이 수고해서 쌓아놓은 모든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에게 다 주십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땀흘리고 물질을 모으고 아등바등하면서 재물을 쌓아놓은들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행복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쾌락은 우리에게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뛰어난 인간의 지혜와 지식도 우리에게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물질도 우리에게 참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나그네와 같은 짧은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심령이 낙을 주실 때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주님으로 인해서 즐거워하고 주님으로 인해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요 14:27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쾌락도 줄 수 없고, 지혜와 지식도 줄 수 없고, 재물도 줄 수 없는, 우리 예수님만이 줄 수 있는 참된 평안이 이 시간 여러분 마음에 충만하게 넘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여러분이 사는 여생 동안 주님으로 인해서 매일 행복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행복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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