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해 아래서의 수고(1:1~18)
< 개 요 >
1. 1:1 저자에 대한 설명
2. 1:2∼3 전도서의 주제
3. 1:4∼18 해 아래서의 수고가 무익한 이유
(1) 1:4∼7 과학적으로 본 이유
(2) 1:8∼11 역사적으로 본 인유
(3) 1:12∼18 철학적으로 본 이유
오늘부터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대로 전도서의 말씀을 매주 한 장씩 차례대로 읽어가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매주일 오실 때 전도서의 말씀을 미리미리 읽어오시면 더욱더 많은 은혜가 될 줄 압니다.
전도서는 우리들에게 "후회 없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도서의 말씀을 잘 살펴보면 그만큼 우리 삶에서 실수가 줄어들고, 또 실패가 없는 성공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전도서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의 남은 생애가 더욱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복된 삶이 되기를 먼저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전도서의 저자
이제 본문의 말씀을 한 절씩 읽어가면서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 1:1 말씀입니다. 1절 말씀은 전도서의 저자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다윗의 아들 가운데 예루살렘에서 왕이 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솔로몬입니다.
그러니까 이 전도서는 솔로몬에 의해서 기록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솔로몬은 성경 가운데 세 권을 기록했습니다. 잠언, 전도서, 아가서입니다. 이 세 권 가운데 아가서가 제일 먼저 기록되었고, 그 다음에 잠언이 기록되었고, 전도서는 제일 나중에 기록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아가서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아가서는 솔로몬이 젊었을 때 술람미라는 여자와 나누었던 뜨거운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한편 잠언은 솔로몬이 나이 지긋한 중년이 되었을 때 그의 원숙한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지혜로운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어떻습니까? 솔로몬이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자기가 걸어온 인생 길의 발자취를 돌아보면서 잘못한 것들을 뉘우치는 심정으로 기록한 것이 전도서입니다. 그러니까 아가서는 솔로몬이 젊었을 때, 잠언은 그의 나이가 중년이었을 때, 그리고 전도서는 그가 노년이 되었을 때 기록한 것입니다. 아가서가 제일 먼저, 그 다음에 잠언, 그 다음에 전도서가 기록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솔로몬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까? "전도자"라고 했습니다. 도를 전하는 자,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쓴 잠 1:1을 보면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자기의 이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아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1:1에 "솔로몬의 아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독 전도서만큼은 아무리 살펴보아도 솔로몬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자기 이름을 나타내는 것을 꺼렸겠습니까? 그 이유를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큰 지혜를 받았습니다. 권력도 받았습니다. 남보다 엄청난 부귀와 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육신이 너무 편해지니까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솔로몬은 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육신의 쾌락에 젖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여자들 가운데는 이방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급기야 솔로몬은 이방 여인들의 꾐에 빠져서 거룩한 땅 이스라엘에 이방의 헛된 우상을 들여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가만히 내버려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솔로몬을 징계하셨습니다. 솔로몬의 노년에 사방에서 솔로몬을 대적하는 무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나라에 환난이 생겼습니다. 평화가 깨져 버렸습니다. 그제야 솔로몬은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쳤습니다. 그렇게 하여 참회하는 심정으로 쓴 것이 바로 전도서입니다.
여러분, 솔로몬이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샬롬"이라는 말과 같은 어원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평화"라는 뜻입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범죄하고 자기가 타락해서 자신의 잘못으로 나라에 환난이 생기고 평화가 사라졌기 때문에, 전도서에서는 평화라는 뜻을 가진 "솔로몬"이라는 자기 이름을 떳떳하게 밝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자기를 낮추고 뉘우치는 심정으로 자신의 이름을 전혀 기록하지 않고 전도서에서는 언제나 자신을 전도자라고 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솔로몬의 모든 실수와 실패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인생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주고 있는 인생 교과서입니다. 인생체험서입니다. 전도서의 말씀을 잘 살펴보면 솔로몬이 밟았던 인생 실패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인생에서 실수가 줄어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그런 은혜가 있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전도서의 주제
2∼3절의 말씀은 전도서의 주제입니다.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솔로몬이 자기의 인생을 다 살고 난 뒤에 무엇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까? 모든 것이 다 헛되더라는 것입니다. 남다르게 엄청난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을 생각하면 참으로 놀라운 결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솔로몬은 이렇게 말해야 했을 것 같습니다. "내 인생은 정말 멋있었도다. 아름다웠도다. 신났었도다!" 그러나 솔로몬은 자기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게 느껴졌으면, 이 짧은 구절 속에서 헛되다는 말을 다섯 번이나 사용했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젊은 사람들보다는 나이 드신 분들이 솔로몬의 말에 더 깊이 공감하실 것입니다. 솔로몬은 똑같은 내용을 3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해 아래서"는 이 땅에서를 말합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해 아래서, 이 땅에서 많은 수고를 했지만 결국 자기에게 아무 유익이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솔로몬에게만 해당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 잘 아시지요? 어떤 노인이 돛단배를 타고 홀로 먼 바다로 나가서 낚시로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매일 허탕만 쳤습니다. 84일 동안이나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드디어 85일 째 되던 날 노인은 큰 고기를 한 마리 잡았습니다. 돛새치라고 하는 고기였습니다. 어제 신문에 보니까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 돛새치는 그 주둥이가 뾰족합니다. 이 돛새치가 배 위에 뛰어올라서 낚시하는 사람의 배를 찔러서 중상을 입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돛새치는 엄청나게 큰 고기입니다. 너무 커서 고기가 낚시에 잘 딸려 오지 않습니다. 노인은 며칠 동안 그 고기와 씨름을 했습니다. 줄을 풀었다가 당겼다가 하면서 필사의 싸움을 했습니다. 드디어 사흘 째 되던 날 고기가 바다에 떠올랐습니다. 노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작살로 고기의 옆구리를 찔러 죽였습니다.
축 쳐진 고기를 배 옆에 끼고 노인은 육지로 돌아옵니다. 노인은 모처럼 오랜만에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습니다. 피 냄새를 맡은 상어 떼가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노인은 또 상어와 필사의 싸움을 해야만 했습니다. 가까스로 육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미 고기의 살점은 다 떨어져 나가고 앙상하게 뼈만 남았습니다.
노인은 허탈한 심정으로 침대에 누워서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맙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입니다. 해 아래서의 수고는 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수고해도 남는 것이 없으니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3. 해 아래서의 수고는 왜 무익한가?
솔로몬은 좀더 구체적으로 4절 이하에서 해 아래서의 수고가 왜 유익하지 못한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측면에서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과학적인 시각으로 본 이유입니다. 해 아래 이 세상 만물이 돌아가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세상 만물이 부산하게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데 실상은 똑같은 일을 지겹도록 반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해 아래서 그 수고가 아무리 크다 한들 무슨 의미가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그것이 4∼7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역사적인 접근입니다. 인간의 역사라는 것도 반복될 뿐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새 것을 창조할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새 것을 만드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테두리 속에서 맴돌 뿐입니다. 해 아래서는 새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해 아래서 인간이 땀흘리면서 아무리 수고해봤자 별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8∼1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세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철학적으로 접근하여 본 것입니다.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깊은 사색을 통해서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해보고자 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뛰어난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서도 인생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지혜를 다 짜내도 인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해 아래서의 수고가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그것이 12∼18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1) 과학적으로 본 이유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까? 야단법석을 떨면서 수고하고, 죽도록 고생을 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똑같은 일이 반복될 뿐입니다. 한 세대가 와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다 끝내고 나면 그 세대는 갑니다. 또 그 다음 세대가 와서 그 일을 이어갑니다. 이것이 계속 반복되어질 뿐입니다. 연극을 보면 무대 위에 배우가 나와서 자기의 배역을 하고 나면 무대 뒤로 사라지지 않습니까? 또 다른 배우가 와서 자기가 맡은 배역을 연기합니다. 말하자면 땅이라고 하는 지상 무대는 그대로 있고, 한 세대가 와서 살다가 사라지고, 또 그 다음 세대가 오고, 그 세대가 사라지면 그 다음 세대가 또 옵니다. 이것이 되풀이될 뿐입니다.
인간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연만물이 다 그렇습니다. 솔로몬은 그 예로 세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해와 바람과 강물입니다.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아침이 되면 동쪽 하늘에 해가 떠오릅니다. 해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쉬지 않고 서쪽을 향해서 달리고 또 달려갑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서쪽으로 해가 집니다. 그것으로 끝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해는 밤새도록 떴던 곳 동쪽을 향해서 또 계속해서 달립니다. 해가 쉬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지만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또다시 동쪽으로 움직이는 일을 반복합니다. 그러니 그 수고가 뭐 그리 대단히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바람도 마찬가지입니다. 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해를 말할 때는 동쪽과 서쪽을 말했습니다. 이번에 바람을 말할 때는 나머지 두 방향, 곧 남쪽과 북쪽을 대표적으로 언급하였습니다. 바람이 남쪽으로 불기도 하고, 북쪽으로 불기도 합니다. 이리 돌고 저리 돌지만 따지고 보면 그 바람이 그 바람입니다. 결국은 왔다갔다 하는 일만 반복합니다. 똑같은 일만 지겹도록 반복할 뿐입니다.
강물도 마찬가지입니다. 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강물이 쉼 없이 바다로 흘러들어 갑니다. 그러나 강물은 바다를 다 채우지 못합니다.
강물은 수증기가 되어서 위로 올라가 구름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비가 되어 땅에 떨어져 강물이 됩니다. 이것이 다시 바다로 흘러들어 갑니다. 계속해서 그 일만 반복할 뿐입니다.
지금 솔로몬이 자연의 이치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 만물은 결국 다 원점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입니다. 해는 떴다가 지는데 결국은 그 떴던 곳으로, 원점으로 되돌아갑니다. 바람이 이리 돌고, 저리 돌지만 결국은 원점, 그 불던 곳으로 되돌아갑니다. 강물이 끊임없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지만 결국은 그 원점인 강물로 되돌아갑니다.
우리의 인생도 예외가 아닙니다. 해 아래서 이모저모로 고생하고 수고하지만 결국은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그 원점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흙에서 왔으므로 흙으로 돌아갑니다. 결국은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인생인데 해 아래서 땀흘리며 수고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2) 역사적으로 본 이유
그 다음에 해 아래서의 수고가 유익하지 못한 두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역사적인 접근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결국은 되풀이될 뿐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이므로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없습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습니다. 새 것도 만들지 못하는데 해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의미가 그리 있겠습니까?
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여기서 말하는 만물은 앞에서 솔로몬이 언급했던 세대, 해, 바람, 강물 등을 말합니다. 그런 것들이 아무리 끊임없이 계속해서 움직인다 해도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만물의 피곤함은 사람이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만물의 피곤함"이라는 말은 모든 일이 반복될 뿐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눈이 아무리 보아도 족함이 없습니다. 새 것이 있어야 족함이 있지요. 우리 귀도 아무리 들어도 차지 않습니다. 늘 똑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말에는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마음에 차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해 아래를 쳐다보지 마십시오. 해 위의 세계를 바라보세요. 영원한 세계, 하나님이 계신 곳을 바라볼 때 우리 인간은 참된 만족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울러 인간의 말에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우리 영혼에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충만할 때 비로소 우리 마음에 참된 평안과 만족이 임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인간의 역사는 돌고 돌고 되풀이될 뿐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은 이미 우리 선조들이 다 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장래에 우리 후손들이 또 다 행할 것입니다. 해 아래는 새 것이 없습니다.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창조주가 아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세요.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이것은 새 것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사실은 어떻습니까? 10절 마지막 부분에 보니까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해서 그런 것뿐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유명한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My inventions are only bringing out the secretes of nature and applying them for the happiness of mankind(내가 발명한 것은 단지 자연 속에 감추어진 비밀을 들추어내서 그것을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적용했을 뿐이다)." 자기가 발명한 것 중에 새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해 놓으신 자연 속에 있는 원리, 비밀을 드러내서 그것을 이용했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새 것이 있는 것처럼 자꾸 착각을 합니까? 그 이유가 11절 말씀에 있습니다.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인간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쉽게 잊어 버립니다. 예컨대 우리가 할머니, 할아버지 이름까지는 잘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위의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고조할머니 이름은 쉽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과거의 일을 곧 망각해버립니다.
지금 솔로몬이 역사의 이치를 통해서 말하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역사에도 새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 되풀이될 뿐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범위 안에서 똑같은 일을 되풀이할 뿐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해 아래서 수고한다 해도 새 것도 만들어내지 못하는데 무슨 대단한 의미를 찾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새 것을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고후 5:17에서 말씀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새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 23:1에서 다윗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부족함이 없는, 만족을 누릴 수 있는 삶은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께 내 모든 삶을 다 맡기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 마음에 참된 만족이 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앙망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 마음속에 비로소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안과 만족이 찾아오게 됩니다.
(3) 철학적으로 본 이유
솔로몬은 해 아래서 인간이 하는 수고가 유익하지 못한 이유를 세번째로 철학적인 접근을 통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솔로몬은 자기가 이스라엘의 왕임을 이미 1절에서 밝혔는데 여기서 다시 한번 밝히고 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앞으로 자기가 하는 말에 더욱 권위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같은 말이라도 동사무소 직원이 하는 것과 동장이 하는 것은 다릅니다. 같은 내용이라도 대통령이 말하면 더욱 권위가 있습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하는 말에 권위를 주기 위해서 자기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밝혔습니다.
지금 솔로몬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며."
진지한 태도로 했습니다. 대충한 것이 아닙니다.
"지혜를 써서."
솔로몬의 지혜가 얼마나 대단했습니까? 문자 그대로 "summa cum laude"였습니다.
최고의 지혜였습니다. 지혜를 써서 어떻게 했습니까?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를 깊이 있게 공부했습니다. 폭넓게 다각적으로 다 살펴보았습니다.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내린 결론은 무엇이었습니까?
"이는 괴로운 것이니."
인간의 지혜를 아무리 다 짜내어도 그것 가지고는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괴로울 수밖에 없지요. 솔로몬만 그렇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역사상 많은 철학자들이 다 똑같은 질문으로 괴로워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가? 왜 사는가? 그러나 아무도 속시원한 해답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괴로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솔로몬은 똑같은 내용을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생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해 아래서의 모든 수고를 다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러분, 손으로 바람을 잡을 수 있습니까? 손으로 한번 움켜쥐어 보세요. 손에 남는 것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그렇습니다. 솔로몬은 인간의 지혜가 얼마나 무능하고 무력한지를 다시 한번 일깨워주기 위해서 15절에서 하나의 속담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
이지러졌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이지러진 달 조각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까? 꽉 차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보름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꽉 차지 않은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셀 수도 없습니다. 아울러 이 세상에 구부러진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두 개가 아닙니다.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그렇게 많은 구부러진 것들을 어떻게 펼 수 있겠습니까? 이지러진 것을 어떻게 채울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 오늘날 얼마나 발달했습니까? 그렇다고 세상의 구부러진 것이 다 펴졌습니까? 오히려 범죄가 얼마나 더 많아졌습니까? 더 살기 어렵고 더 구부러진 세상이 되지 않았습니까? 모르면 차라리 마음이 편할 것입니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부족한 것이 더 많이 느껴집니다. 옛날에 다 없이 살았을 때는 오히려 마음은 편했습니다. 요즘에 먹고살기 어려운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상대적인 빈곤감 때문에, 이것저것을 아니까 자살하는 사람이 오히려 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지혜로써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솔로몬 만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솔로몬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16절에서 솔로몬은 자기 자신을 이렇게 평하고 있습니다.
"내가 마음 가운데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였나니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밤에 꿈 가운데 솔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게 구하라 내가 무엇을 줄꼬." 그때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의 간구대로 그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왕상 4:32에 보면 솔로몬이 잠언을 3,000개를 말했고, 노래를 1,005개나 지었다고 했습니다. 그 지혜가 얼마나 대단하던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듣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천부적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솔로몬은 노력도 많이 했습니다. 17절을 보세요.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솔로몬은 지혜에 대해서 깊이 연구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지혜의 반대가 되는 미친 것, 미련한 것, 어리석음에 대해서도 깊이 탐구했습니다. 인생의 밝은 면, 어두운 면, 긍정적인 측면, 부정적인 측면을 두루두루 깊이 조사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깨닫기 위함이었습니다. 인생의 어려운 문제들을 지혜로 풀어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그러면서 솔로몬이 마지막 18절에서 무엇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까?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인간의 지혜가 많다고 해서, 지식이 더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번뇌가 많아지고, 근심이 더해집니다. 아담과 하와 때부터 그랬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행복해졌습니까?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과 멀어지고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 발달했습니다. 과학 문명이 극도로 발달했습니다. 인공위성이 지금도 수없이 하늘에 떠다니고 있습니다. 사람이 달나라에 가서 달 표면을 밟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발달한 지혜와 지식은 무서운 원자폭탄을 만들었습니다. 수소폭탄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불안에 떨면서, 더 큰 공포와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지혜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인간의 지식이라는 것이 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지혜와 지식에 너무 의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솔로몬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해 아래서의 수고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말씀해주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연 만물을 자세히 관찰하고, 인간의 역사를 주도면밀하게 살펴보고, 지혜를 다 짜내어 생각해보아도 해 아래서의 수고는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해 아래의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러다가는 여러분도 생을 다 살고 나서 솔로몬처럼 인생을 헛살았구나 하고 탄식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너무나도 잘 깨달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해 아래 것들을 다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그리고 눈을 들어 해 위의 세계, 영원한 세계, 하나님 계신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땅의 것, 해 아래 것을 사모하지 않고, 위의 것, 신령한 것을 바라보면서 사모하면서 살았습니다.
해 아래의 수고는 다 헛되고 무익할 뿐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부활장에서 말한 것처럼 주 안에서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모든 것을 다 바쳐 주를 위해서 충성하며 헌신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자기 일생을 다 보내고 난 뒤에 무엇이라고 고백했습니까?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도다."
해 아래서의 수고, 육신의 수고는 헛되지만 주 안에서의 수고는 우리를 영광스러운 길로 인도해줍니다. 해 아래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고 눈을 들어 해 위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의미 있고, 가치 있고 보람있는 복된 삶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1:1 저자에 대한 설명
2. 1:2∼3 전도서의 주제
3. 1:4∼18 해 아래서의 수고가 무익한 이유
(1) 1:4∼7 과학적으로 본 이유
(2) 1:8∼11 역사적으로 본 인유
(3) 1:12∼18 철학적으로 본 이유
오늘부터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대로 전도서의 말씀을 매주 한 장씩 차례대로 읽어가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매주일 오실 때 전도서의 말씀을 미리미리 읽어오시면 더욱더 많은 은혜가 될 줄 압니다.
전도서는 우리들에게 "후회 없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도서의 말씀을 잘 살펴보면 그만큼 우리 삶에서 실수가 줄어들고, 또 실패가 없는 성공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전도서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의 남은 생애가 더욱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복된 삶이 되기를 먼저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전도서의 저자
이제 본문의 말씀을 한 절씩 읽어가면서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 1:1 말씀입니다. 1절 말씀은 전도서의 저자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다윗의 아들 가운데 예루살렘에서 왕이 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솔로몬입니다.
그러니까 이 전도서는 솔로몬에 의해서 기록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솔로몬은 성경 가운데 세 권을 기록했습니다. 잠언, 전도서, 아가서입니다. 이 세 권 가운데 아가서가 제일 먼저 기록되었고, 그 다음에 잠언이 기록되었고, 전도서는 제일 나중에 기록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아가서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아가서는 솔로몬이 젊었을 때 술람미라는 여자와 나누었던 뜨거운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한편 잠언은 솔로몬이 나이 지긋한 중년이 되었을 때 그의 원숙한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지혜로운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어떻습니까? 솔로몬이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자기가 걸어온 인생 길의 발자취를 돌아보면서 잘못한 것들을 뉘우치는 심정으로 기록한 것이 전도서입니다. 그러니까 아가서는 솔로몬이 젊었을 때, 잠언은 그의 나이가 중년이었을 때, 그리고 전도서는 그가 노년이 되었을 때 기록한 것입니다. 아가서가 제일 먼저, 그 다음에 잠언, 그 다음에 전도서가 기록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솔로몬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까? "전도자"라고 했습니다. 도를 전하는 자,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쓴 잠 1:1을 보면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자기의 이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아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1:1에 "솔로몬의 아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독 전도서만큼은 아무리 살펴보아도 솔로몬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자기 이름을 나타내는 것을 꺼렸겠습니까? 그 이유를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큰 지혜를 받았습니다. 권력도 받았습니다. 남보다 엄청난 부귀와 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육신이 너무 편해지니까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솔로몬은 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육신의 쾌락에 젖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여자들 가운데는 이방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급기야 솔로몬은 이방 여인들의 꾐에 빠져서 거룩한 땅 이스라엘에 이방의 헛된 우상을 들여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가만히 내버려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솔로몬을 징계하셨습니다. 솔로몬의 노년에 사방에서 솔로몬을 대적하는 무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나라에 환난이 생겼습니다. 평화가 깨져 버렸습니다. 그제야 솔로몬은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쳤습니다. 그렇게 하여 참회하는 심정으로 쓴 것이 바로 전도서입니다.
여러분, 솔로몬이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샬롬"이라는 말과 같은 어원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평화"라는 뜻입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범죄하고 자기가 타락해서 자신의 잘못으로 나라에 환난이 생기고 평화가 사라졌기 때문에, 전도서에서는 평화라는 뜻을 가진 "솔로몬"이라는 자기 이름을 떳떳하게 밝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자기를 낮추고 뉘우치는 심정으로 자신의 이름을 전혀 기록하지 않고 전도서에서는 언제나 자신을 전도자라고 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솔로몬의 모든 실수와 실패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인생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주고 있는 인생 교과서입니다. 인생체험서입니다. 전도서의 말씀을 잘 살펴보면 솔로몬이 밟았던 인생 실패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인생에서 실수가 줄어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그런 은혜가 있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전도서의 주제
2∼3절의 말씀은 전도서의 주제입니다.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솔로몬이 자기의 인생을 다 살고 난 뒤에 무엇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까? 모든 것이 다 헛되더라는 것입니다. 남다르게 엄청난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을 생각하면 참으로 놀라운 결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솔로몬은 이렇게 말해야 했을 것 같습니다. "내 인생은 정말 멋있었도다. 아름다웠도다. 신났었도다!" 그러나 솔로몬은 자기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게 느껴졌으면, 이 짧은 구절 속에서 헛되다는 말을 다섯 번이나 사용했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젊은 사람들보다는 나이 드신 분들이 솔로몬의 말에 더 깊이 공감하실 것입니다. 솔로몬은 똑같은 내용을 3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해 아래서"는 이 땅에서를 말합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해 아래서, 이 땅에서 많은 수고를 했지만 결국 자기에게 아무 유익이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솔로몬에게만 해당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 잘 아시지요? 어떤 노인이 돛단배를 타고 홀로 먼 바다로 나가서 낚시로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매일 허탕만 쳤습니다. 84일 동안이나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드디어 85일 째 되던 날 노인은 큰 고기를 한 마리 잡았습니다. 돛새치라고 하는 고기였습니다. 어제 신문에 보니까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 돛새치는 그 주둥이가 뾰족합니다. 이 돛새치가 배 위에 뛰어올라서 낚시하는 사람의 배를 찔러서 중상을 입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돛새치는 엄청나게 큰 고기입니다. 너무 커서 고기가 낚시에 잘 딸려 오지 않습니다. 노인은 며칠 동안 그 고기와 씨름을 했습니다. 줄을 풀었다가 당겼다가 하면서 필사의 싸움을 했습니다. 드디어 사흘 째 되던 날 고기가 바다에 떠올랐습니다. 노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작살로 고기의 옆구리를 찔러 죽였습니다.
축 쳐진 고기를 배 옆에 끼고 노인은 육지로 돌아옵니다. 노인은 모처럼 오랜만에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습니다. 피 냄새를 맡은 상어 떼가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노인은 또 상어와 필사의 싸움을 해야만 했습니다. 가까스로 육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미 고기의 살점은 다 떨어져 나가고 앙상하게 뼈만 남았습니다.
노인은 허탈한 심정으로 침대에 누워서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맙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입니다. 해 아래서의 수고는 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수고해도 남는 것이 없으니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3. 해 아래서의 수고는 왜 무익한가?
솔로몬은 좀더 구체적으로 4절 이하에서 해 아래서의 수고가 왜 유익하지 못한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측면에서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과학적인 시각으로 본 이유입니다. 해 아래 이 세상 만물이 돌아가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세상 만물이 부산하게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데 실상은 똑같은 일을 지겹도록 반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해 아래서 그 수고가 아무리 크다 한들 무슨 의미가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그것이 4∼7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역사적인 접근입니다. 인간의 역사라는 것도 반복될 뿐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새 것을 창조할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새 것을 만드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테두리 속에서 맴돌 뿐입니다. 해 아래서는 새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해 아래서 인간이 땀흘리면서 아무리 수고해봤자 별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8∼1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세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철학적으로 접근하여 본 것입니다.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깊은 사색을 통해서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해보고자 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뛰어난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서도 인생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지혜를 다 짜내도 인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해 아래서의 수고가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그것이 12∼18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1) 과학적으로 본 이유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까? 야단법석을 떨면서 수고하고, 죽도록 고생을 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똑같은 일이 반복될 뿐입니다. 한 세대가 와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다 끝내고 나면 그 세대는 갑니다. 또 그 다음 세대가 와서 그 일을 이어갑니다. 이것이 계속 반복되어질 뿐입니다. 연극을 보면 무대 위에 배우가 나와서 자기의 배역을 하고 나면 무대 뒤로 사라지지 않습니까? 또 다른 배우가 와서 자기가 맡은 배역을 연기합니다. 말하자면 땅이라고 하는 지상 무대는 그대로 있고, 한 세대가 와서 살다가 사라지고, 또 그 다음 세대가 오고, 그 세대가 사라지면 그 다음 세대가 또 옵니다. 이것이 되풀이될 뿐입니다.
인간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연만물이 다 그렇습니다. 솔로몬은 그 예로 세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해와 바람과 강물입니다.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아침이 되면 동쪽 하늘에 해가 떠오릅니다. 해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쉬지 않고 서쪽을 향해서 달리고 또 달려갑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서쪽으로 해가 집니다. 그것으로 끝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해는 밤새도록 떴던 곳 동쪽을 향해서 또 계속해서 달립니다. 해가 쉬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지만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또다시 동쪽으로 움직이는 일을 반복합니다. 그러니 그 수고가 뭐 그리 대단히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바람도 마찬가지입니다. 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해를 말할 때는 동쪽과 서쪽을 말했습니다. 이번에 바람을 말할 때는 나머지 두 방향, 곧 남쪽과 북쪽을 대표적으로 언급하였습니다. 바람이 남쪽으로 불기도 하고, 북쪽으로 불기도 합니다. 이리 돌고 저리 돌지만 따지고 보면 그 바람이 그 바람입니다. 결국은 왔다갔다 하는 일만 반복합니다. 똑같은 일만 지겹도록 반복할 뿐입니다.
강물도 마찬가지입니다. 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강물이 쉼 없이 바다로 흘러들어 갑니다. 그러나 강물은 바다를 다 채우지 못합니다.
강물은 수증기가 되어서 위로 올라가 구름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비가 되어 땅에 떨어져 강물이 됩니다. 이것이 다시 바다로 흘러들어 갑니다. 계속해서 그 일만 반복할 뿐입니다.
지금 솔로몬이 자연의 이치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 만물은 결국 다 원점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입니다. 해는 떴다가 지는데 결국은 그 떴던 곳으로, 원점으로 되돌아갑니다. 바람이 이리 돌고, 저리 돌지만 결국은 원점, 그 불던 곳으로 되돌아갑니다. 강물이 끊임없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지만 결국은 그 원점인 강물로 되돌아갑니다.
우리의 인생도 예외가 아닙니다. 해 아래서 이모저모로 고생하고 수고하지만 결국은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그 원점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흙에서 왔으므로 흙으로 돌아갑니다. 결국은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인생인데 해 아래서 땀흘리며 수고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2) 역사적으로 본 이유
그 다음에 해 아래서의 수고가 유익하지 못한 두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역사적인 접근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결국은 되풀이될 뿐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이므로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없습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습니다. 새 것도 만들지 못하는데 해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의미가 그리 있겠습니까?
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여기서 말하는 만물은 앞에서 솔로몬이 언급했던 세대, 해, 바람, 강물 등을 말합니다. 그런 것들이 아무리 끊임없이 계속해서 움직인다 해도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만물의 피곤함은 사람이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만물의 피곤함"이라는 말은 모든 일이 반복될 뿐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눈이 아무리 보아도 족함이 없습니다. 새 것이 있어야 족함이 있지요. 우리 귀도 아무리 들어도 차지 않습니다. 늘 똑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말에는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마음에 차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해 아래를 쳐다보지 마십시오. 해 위의 세계를 바라보세요. 영원한 세계, 하나님이 계신 곳을 바라볼 때 우리 인간은 참된 만족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울러 인간의 말에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우리 영혼에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충만할 때 비로소 우리 마음에 참된 평안과 만족이 임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인간의 역사는 돌고 돌고 되풀이될 뿐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은 이미 우리 선조들이 다 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장래에 우리 후손들이 또 다 행할 것입니다. 해 아래는 새 것이 없습니다.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창조주가 아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세요.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이것은 새 것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사실은 어떻습니까? 10절 마지막 부분에 보니까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해서 그런 것뿐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유명한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My inventions are only bringing out the secretes of nature and applying them for the happiness of mankind(내가 발명한 것은 단지 자연 속에 감추어진 비밀을 들추어내서 그것을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적용했을 뿐이다)." 자기가 발명한 것 중에 새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해 놓으신 자연 속에 있는 원리, 비밀을 드러내서 그것을 이용했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새 것이 있는 것처럼 자꾸 착각을 합니까? 그 이유가 11절 말씀에 있습니다.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인간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쉽게 잊어 버립니다. 예컨대 우리가 할머니, 할아버지 이름까지는 잘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위의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고조할머니 이름은 쉽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과거의 일을 곧 망각해버립니다.
지금 솔로몬이 역사의 이치를 통해서 말하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역사에도 새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 되풀이될 뿐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범위 안에서 똑같은 일을 되풀이할 뿐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해 아래서 수고한다 해도 새 것도 만들어내지 못하는데 무슨 대단한 의미를 찾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새 것을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고후 5:17에서 말씀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새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 23:1에서 다윗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부족함이 없는, 만족을 누릴 수 있는 삶은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께 내 모든 삶을 다 맡기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 마음에 참된 만족이 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앙망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 마음속에 비로소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안과 만족이 찾아오게 됩니다.
(3) 철학적으로 본 이유
솔로몬은 해 아래서 인간이 하는 수고가 유익하지 못한 이유를 세번째로 철학적인 접근을 통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솔로몬은 자기가 이스라엘의 왕임을 이미 1절에서 밝혔는데 여기서 다시 한번 밝히고 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앞으로 자기가 하는 말에 더욱 권위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같은 말이라도 동사무소 직원이 하는 것과 동장이 하는 것은 다릅니다. 같은 내용이라도 대통령이 말하면 더욱 권위가 있습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하는 말에 권위를 주기 위해서 자기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밝혔습니다.
지금 솔로몬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며."
진지한 태도로 했습니다. 대충한 것이 아닙니다.
"지혜를 써서."
솔로몬의 지혜가 얼마나 대단했습니까? 문자 그대로 "summa cum laude"였습니다.
최고의 지혜였습니다. 지혜를 써서 어떻게 했습니까?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를 깊이 있게 공부했습니다. 폭넓게 다각적으로 다 살펴보았습니다.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내린 결론은 무엇이었습니까?
"이는 괴로운 것이니."
인간의 지혜를 아무리 다 짜내어도 그것 가지고는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괴로울 수밖에 없지요. 솔로몬만 그렇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역사상 많은 철학자들이 다 똑같은 질문으로 괴로워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가? 왜 사는가? 그러나 아무도 속시원한 해답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괴로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솔로몬은 똑같은 내용을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생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해 아래서의 모든 수고를 다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러분, 손으로 바람을 잡을 수 있습니까? 손으로 한번 움켜쥐어 보세요. 손에 남는 것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그렇습니다. 솔로몬은 인간의 지혜가 얼마나 무능하고 무력한지를 다시 한번 일깨워주기 위해서 15절에서 하나의 속담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
이지러졌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이지러진 달 조각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까? 꽉 차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보름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꽉 차지 않은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셀 수도 없습니다. 아울러 이 세상에 구부러진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두 개가 아닙니다.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그렇게 많은 구부러진 것들을 어떻게 펼 수 있겠습니까? 이지러진 것을 어떻게 채울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 오늘날 얼마나 발달했습니까? 그렇다고 세상의 구부러진 것이 다 펴졌습니까? 오히려 범죄가 얼마나 더 많아졌습니까? 더 살기 어렵고 더 구부러진 세상이 되지 않았습니까? 모르면 차라리 마음이 편할 것입니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부족한 것이 더 많이 느껴집니다. 옛날에 다 없이 살았을 때는 오히려 마음은 편했습니다. 요즘에 먹고살기 어려운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상대적인 빈곤감 때문에, 이것저것을 아니까 자살하는 사람이 오히려 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지혜로써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솔로몬 만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솔로몬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16절에서 솔로몬은 자기 자신을 이렇게 평하고 있습니다.
"내가 마음 가운데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였나니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밤에 꿈 가운데 솔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게 구하라 내가 무엇을 줄꼬." 그때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의 간구대로 그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왕상 4:32에 보면 솔로몬이 잠언을 3,000개를 말했고, 노래를 1,005개나 지었다고 했습니다. 그 지혜가 얼마나 대단하던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듣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천부적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솔로몬은 노력도 많이 했습니다. 17절을 보세요.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솔로몬은 지혜에 대해서 깊이 연구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지혜의 반대가 되는 미친 것, 미련한 것, 어리석음에 대해서도 깊이 탐구했습니다. 인생의 밝은 면, 어두운 면, 긍정적인 측면, 부정적인 측면을 두루두루 깊이 조사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깨닫기 위함이었습니다. 인생의 어려운 문제들을 지혜로 풀어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그러면서 솔로몬이 마지막 18절에서 무엇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까?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인간의 지혜가 많다고 해서, 지식이 더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번뇌가 많아지고, 근심이 더해집니다. 아담과 하와 때부터 그랬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행복해졌습니까?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과 멀어지고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 발달했습니다. 과학 문명이 극도로 발달했습니다. 인공위성이 지금도 수없이 하늘에 떠다니고 있습니다. 사람이 달나라에 가서 달 표면을 밟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발달한 지혜와 지식은 무서운 원자폭탄을 만들었습니다. 수소폭탄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불안에 떨면서, 더 큰 공포와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지혜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인간의 지식이라는 것이 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지혜와 지식에 너무 의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솔로몬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해 아래서의 수고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말씀해주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연 만물을 자세히 관찰하고, 인간의 역사를 주도면밀하게 살펴보고, 지혜를 다 짜내어 생각해보아도 해 아래서의 수고는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해 아래의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러다가는 여러분도 생을 다 살고 나서 솔로몬처럼 인생을 헛살았구나 하고 탄식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너무나도 잘 깨달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해 아래 것들을 다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그리고 눈을 들어 해 위의 세계, 영원한 세계, 하나님 계신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땅의 것, 해 아래 것을 사모하지 않고, 위의 것, 신령한 것을 바라보면서 사모하면서 살았습니다.
해 아래의 수고는 다 헛되고 무익할 뿐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부활장에서 말한 것처럼 주 안에서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모든 것을 다 바쳐 주를 위해서 충성하며 헌신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자기 일생을 다 보내고 난 뒤에 무엇이라고 고백했습니까?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도다."
해 아래서의 수고, 육신의 수고는 헛되지만 주 안에서의 수고는 우리를 영광스러운 길로 인도해줍니다. 해 아래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고 눈을 들어 해 위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의미 있고, 가치 있고 보람있는 복된 삶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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