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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녹취 7

by 【고동엽】 2022. 4. 17.
한 주간도 건강하셨습니까? 오늘은 사도행전 9장부터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시면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회심 사건, 사도 바울의 회심 이야기가 사도행전 9장에 나와 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의 인생을 관통하는 한 단어를 꼽자면 열정과 헌신, 열심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인생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는 터닝 포인트가 다메섹 도상 사건입니다. 다메섹 도상 이전까지 바울의 열정과 헌신은 대단했습니다. 다메섹 도상 이후에도 바울의 열정과 헌신은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 이전의 바울의 열정과 헌신은 분별없는 열심, 분별없는 열정이었습니다. 자기 딴에는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수고하고 애쓰고 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될 것이다 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바울의 그 열정과 헌신은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시게 하는 열정과 헌신이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열정과 헌신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다메섹 사건을 경험하고 나서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나는 여태까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하늘로부터 들려온 평가는 뭐죠? “네가 나를 핍박하고 있다, 네가 나를 괴롭히고 있다” 이런 얘기를 들었을 때 사도 바울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참 감사한 것은 바울이 다메섹 사건을 통해서 지금까지의 자기의 걸음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성찰하게 되었고 그리고 자기의 인생을 뒤바꿔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에도 바울 같은 회심 사건들이 있다고 봅니다. 내 나름대로는 하나님을 위해 수고하고 애쓴다고 생각해왔는데 정말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인가, 하나님께도 정말 기쁨과 영광이 되는 것인가 깨닫게 되는 중요한 사건들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는 그런 사건이 있어도 깨닫지 못하거나 그런 사건들이 있어도 돌이키지 못하는데 바울이라고 하는 사람의 위대함은 그 사건을 온전히 부여 안았고,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바대로 자기의 존재를 변화시켜 내었다는 것에서 사도 바울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바울이 오랜 세월 동안 초대 교인들을 핍박했습니다. 스데반을 죽였던 재판을 주관했던 사람도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초대 교인들을 핍박했을까요?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정통 율법 교육을 배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신명기 21장 23절에 어떤 말씀이 있습니까? 나무에 매어 달려 죽은 자마다 하나님께 저주받아 죽었다, 이 신명기 21장 23절의 말씀을 통하여서 바울은 나무에 매어 달려 죽은 예수가 하나님께 저주 받아 죽었다고 확신했을 겁니다. 당시 유대교 교육에 근거해보면 예수가 하나님께 저주받아 죽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굉장히 많습니다. 첫째 예수는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둘째 예수는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불경한 말을 했습니다. 셋째 예수는 하나님이 명하신 안식일법이나 음식 정결법을 대놓고 위반했습니다. 넷째 예수는 정통 유대인들이 만나기를 꺼려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만났고, 부정한 사마리아 땅을 아무렇지도 않게 관통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를 유대인이 생각했을 때 예수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일 수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 참람하고 불경한 말과 행동을 했던 예수가 하나님께 저주받아 죽었다는 것을 모든 유대인들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죽은 다음에 예수 운동이 사그라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가 죽은 다음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길을 따르겠다고 불같이 일어나게 된 겁니다. 이것을 당시 유대교 교육에 근거했을 때 바울이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예수가 하나님께 불경하고 참람한 말을 한 것 때문에 하나님께 저주받아 죽었는데 그 하나님께 저주받아 죽은 예수의 길을 너무나 많은 유대교인들이 따르는 것을 보면서 바울 입장에서는 너무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다시 정통 유대교 안으로 돌이키기 위해서 때로는 핍박하기도 하고 박해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다시 유대교의 품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바울은 열정과 헌신을 다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 다메섹 사건을 통해서 자기가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는 일이고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께 저주받아 죽었다고 확신했던 예수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이고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바울은 굉장히 혼란스러운 시간과 회심의 시간을 보내게 된 겁니다.


사도 바울에 대해서 앞으로 쭉 보게 될 텐데 몇 가지 바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사도 바울을 얘기할 때 원래 사도 바울의 이름은 사울인데 다메섹 도상 사건을 경험하고 나서 이름이 바울로 개명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이 계십니다. 마치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사래가 사라가 되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처럼 원래는 이름이 사울이었는데 예수를 만난 이후에 바울로 개명이 되었다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계신데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다 뒤져보아도 사울이 바울 되었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유일하게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도행전 13장 9절입니다. 이런 말씀이 나오죠.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 이 말씀 외에는 다른 언급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봐라,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라고 하지 않았냐. 이것은 사울이 바울이 된 것이다”라는 주장을 많이 하십니다. 만약 그렇다면 12장 12절은 우리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12장 12절에 보면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만약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사울이 바울 된 것이라면 그러면 마가라 하는 요한 이 말은 요한이 마가가 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과 관련해서 꼭 기억하셔야 될 것이 뭐냐면 사도 바울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디아스포라라는 것이 뭐냐면 혈통은 유대인인데 팔레스타인 땅에 살지 않는 자를 디아스포라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로 얘기하자면 교포입니다. 당시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보통 두 개의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가 뭐죠? 유대인으로서의 이름 하나, 그리고 자기가 태어났던 그리스 로마식 이름 하나입니다. 사울이라고 하는 이름은 베냐민 지파 남성들이 가장 선호한 이름입니다. 왜요? 이스라엘 역사를 보시면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한 최초의 왕이 누구였죠? 사울입니다. 사울이 어느 지파죠? 베냐민 지파입니다. 사도 바울도 베냐민 지파입니다. 그래서 아마 부모가 사도 바울이 태어났을 때 베냐민 지파가 가장 선호했던 사울이라고 하는 이름을 지어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태어난 곳이 어디냐면 팔레스타인 본토가 아닙니다. 길리기아 다소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스 로마 지방입니다. 이방 땅입니다. 그래서 그리스 로마 지역에서 태어난 사도 바울은 어렸을 때부터 바울이라고 하는 그리스 로마식 이름도 갖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사울이 바울이 된 것이 아니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정통 유대식 이름 하나, 그리스 로마식 이름 하나, 두 개의 이름을 다 가지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보통 사울이 바울 되었다, 언제? 다메섹 도상에서 라는 식의 표현을 많이 쓰는데 성경 어디에도 그런 식의 주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도 바울과 관련해서 꼭 기억하셔야 할 것이 뭐냐면 사도 바울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다, 사울이 바울 된 것이 아니라 태어났을 때부터 유대식으로는 사울, 그리스 로마식으로는 바울이라고 하는 두 개의 이름을 가진 자였습니다.


다메섹 도상 사건을 경험하면서 사도 바울은 이런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단칼에 심판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나를 선택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나를 사용하시는가.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사도 바울이 해온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나라 백성들을 잡아 가두고 그들을 죽이는 일에 앞장선 거잖아요.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한 거잖아요. 그런데 나 같은 자를 하나님이 단칼에 심판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나를 구원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나를 사용하시는 것에 대해 바울은 많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는가, 언제부터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는가, 이런 질문을 실존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서신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 나를 언제부터 선택하셨는가 라는 바울의 고백이 점점 더 깊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처음에는 하나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나를 부르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초기 바울 서신의 하나인 갈라디아서를 보시면 갈라디아서 1장 15절에서 다메섹 도상이 아니라 어머니의 모태에서부터 이미 나를 선택하셨다는 고백을 합니다. 나중에는 후기 옥중 서신 가운데 하나인 에베소서를 보시면 에베소서 1장 4절에서는 창세 전에 이미 하나님은 나를 선택하셨다 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다는 시점이 점점 깊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처음에는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이 부르셨다고 고백했던 사도 바울이 그렇지 않아, 이미 어머니의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은 나를 부르셨어,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게 되었을 때는 이미 창세 전부터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시고 나를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셨다 라는 고백을 합니다. 그러면 왜 나를 부르셨는가. 여기에 대해서도 바울은 심사숙고 합니다. 왜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단칼에 심판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나를 갱생시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 나를 사용하시는가, 나를 구원하시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 깊은 고민 가운데 바울이 구원의 목적을 깨닫고 말했던 내용이 두 구절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가 로마서 1장 14절이고 또 하나가 고린도전서 9장 16절입니다.


로마서 1장 14절에 보면 내가 모든 자에게 빚져 있다, 한 마디로 하자면 구원의 빚을 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고린도전서 9장 16절을 보십시오.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라”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어떤 의미냐면 사람들은 “우리 바울 선생님 정말 대단하시다 그 힘들고 어려운 모든 난관을 극복하시고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감당하셨다”고 하며 막 박수를 보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뭐라고 얘기하고 있는 거냐면 이것은 내가 박수받을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부득불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부득불’이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까지 하냐면 “내가 이것을 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꿔 얘기하자면 내가 이것을 끊임없이 신실하게 감당하는 중요한 이유는 화가 나에게 미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말이죠? 제가 짧게만 설명을 드리면 바울은 오랜 세월 동안 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는가에 대해서 심사숙고를 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깨달은 것이 뭐냐면 보통 우리 한국 교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세요. “하나님이 당신을 구원하셨음을 믿습니까” 그러면 대다수 한국 교인들은 “아멘”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다음 질문을 해보세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당신을 구원하셨습니까” 그러면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저를 사랑하셔서요”라고 대답합니다. 또 질문 해보세요. “하나님은 당신을 왜 사랑하십니까”라고 하면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요” 그러면 “하나님은 당신을 왜 구원하십니까” 그러면 “저를 사랑하셔서요”라고 답변합니다. 제가 이것을 임상 실험을 정말 많이 해 본 겁니다. 대다수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분명합니다. 문제는 뭐냐면 나라고 하는 존재를 뛰어넘지 못한다는 겁니다. 마치 누구와 같은 거냐면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과 같은 겁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부르신 것 맞습니다. 이스라엘은 선민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선택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왜 선민으로 부르셨죠? 이스라엘만 사랑하기 위해서요? 이스라엘만 구원하려고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부르신 목적은 이스라엘을 먼저 선택하시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백성 만드심을 통하여서, 거룩한 백성 이스라엘을 통하여 세계 만민을 하나님 앞으로 견인해 오기를 기대하신 겁니다. 이스라엘은 어떤 선민으로 부름 받은 겁니까? 만민을 위한 선민으로 부름받은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것을 망각합니다. 만민을 위한 선민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이스라엘은 어떤 신앙을 주창했습니까? 배타적 선민사상입니다. 한 마디로 선민으로 부름받은 우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고 선민으로 부름 받지 못한 이방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가 임한다, 이것이 소위 배타적 선민 사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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