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간 동안 건강하셨습니까. 오늘은 사도행전 11장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 사도행전 10장의 베드로의 회심 사건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 명령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서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 이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큰 난관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유대 정결법입니다. 10장에 보시면 정결법에 근거해서 베드로는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으려고 했고 부정한 이방 사람들과 교제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가라고 명하셨고 베드로는 고넬료 집에 가서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졌을 때 자신들이 받은 동일한 성령을 그들이 받는 놀라운 사건을 경험합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베드로가 다시 예루살렘 교회에 돌아오게 되었을 때 율법주의자들이 베드로를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성경 사도행전 11장 2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할례자들들이 비난하여, 이 할례자들은 율법주의에 근거해서 왜 당신이 정결법을 준수하지 않았냐, 왜 부정한 이방인들과 교제했고 그들의 집에 들어갔냐 라고 하면서 성령의 역사보다 베드로가 율법의 정결법을 위반한 것에 대해서 책망을 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하나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정치적인 역학 관계를 기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절대 다수의 힘은 예루살렘 교회가 쥐고 있었습니다. 그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 누구냐면 야고보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입장은 뭐냐면 우리는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메시아이심을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구원자이심을 믿는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어왔고 그들이 지켜왔던 모든 율법의 조항들을 순종해야 한다,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마땅히 할례 받아야 된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음식 정결법 준수해야 된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절기 준수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을 다 지킬 뿐만 아니라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고백해야 된다, 이것이 예루살렘 교회의 입장입니다. 쉽게 이해하시면 예루살렘 교회와 정통 유대인들은 딱 하나가 다른 겁니다. 뭐가 다른 겁니까? 예수가 메시아인가, 그렇지 않은가,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인가, 그렇지 않은가 이 입장에 있어서만 예루살렘 교회와 유대인들이 다른 것이었고 나머지 모든 것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할례의 언약의 표를 지녀야 된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음식 정결법을 준수해야 된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절기 준수를 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유대인들과 초대 교회나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입장이 있었고 이 예루살렘 교회와 완전히 반대편에 있었던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뭐냐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에 대한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 가운데 당신의 백성 삼아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믿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 할례를 받아야 된다거나 음식 정결법을 준수해야 된다거나 절기 준수를 해야 한다는 것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의 입장은 정반대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뭐냐면 바울은 모든 율법을 부정했던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제의법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것 안에는 크게 제의법이라는 것이 있고 도덕법이 있습니다. 제의법은 제사법입니다. 거기에 포함되는 것이 뭐죠? 할례, 음식 정결법, 절기 준수법 이런 것들이 대표적인 제의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에는 또 뭐가 있습니까? 도덕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정직하게 살아야 된다, 진실하게 살아야 된다, 거룩하게 살아야 된다 이런 것들이 율법 안에 있는 도덕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반대했던 것은 뭐냐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 신자들에게 율법의 도덕법은 유효하지만 그들에게 제의법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울의 주장입니다. 바울이 율법 전체를 부정하였다기 보다는 율법 가운데 제의법을 이방 기독교인들에게도 준수하도록 해야 된다, 이런 입장을 바울은 반대했던 겁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 하자면 예수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꽃을 활짝 피울 수있는 것이고 이방인은 이방인의 문화 가운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꽃을 활짝 피울 수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신앙의 문화를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강요하냐, 이것을 사도 바울은 용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입장은 예루살렘 교회가 바라볼 때는 마치 율법을 폐기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오랜 시간 동안 사도 바울에 대해서 뭐라고 비판했냐면 율법 폐기론자라고 비판한 겁니다. 예수를 믿을 뿐만 아니라 너희들이 진정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할례도 받고 음식 정결법도 지키고 제의도 준수해야지 이런 것도 지키지 않아? 그러면 너희는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야 이것이 예루살렘 교회의 입장이었습니다. 그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야고보입니다. 그 반대편에 누가 있었던 겁니까? 사도 바울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중간에서 원래는 예루살렘 교회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가 이후에 바울의 입장으로 선회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누구죠? 바로 베드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10장에서 본 것처럼 베드로는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음식 정결법을 준수한 사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원래 같은 신학적 입장을 공유하고 있던 겁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고넬료 집에 갔을 때 베드로가 뭘 경험하게 된 거죠? 할례를 받지 않았지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진 고넬료와 그 집안 사람들에게 주의 성령이임하는 것을 경험한 겁니다. 이때부터 베드로는 할례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믿음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원래는 예루살렘 교회와 같은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가 바울과 같은 입장으로 선회한 겁니다. 그 결과 점점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밀려날 수 밖에 없던 겁니다. 그래서 12장을 보면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박해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루살렘 교회에서 정통 율법주의자들로부터 책망을 받기도 하고 비판을 받기도 하면서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점점 밀려나게 됩니다. 그 결과 베드로는 어디로 갔느냐, 로마로 갑니다. 로마에 가서 베드로가 주의 복음을 증거할 때 누가 베드로의 사역을 도와주었는가, 베드로전서 5장 13절을 보면 베드로의 믿음의 아들이 나옵니다. 그가 누구냐면 마가입니다. 보통 사도 바울의 믿음의 아들 하면 두 명을 얘기합니다. 한 명은 디모데이고 한 명은 디도입니다. 베드로의 믿음의 아들이 누구냐면 마가입니다. 그래서 마가가 베드로가 경험했던 예수 이야기, 예수로부터 전해 들었던 말씀들, 예수께서 행하셨던 사역들을 베드로가 말을 하면 이것을 그대로 마가가 기술했다고 봅니다. 이것이 마가복음입니다. 그래서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마가복음이 초대 교회에서 정경으로서의 권위를 획득하게 된 거냐면 쓴 것은 마가가 썼지만 실제 이것은 베드로가 말한 것을 마가가 기술한 것이다, 거의 베드로가 쓴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베드로 복음적인 권위를 가지고 마가복음이 초대 교회에서 정경으로 채택이 된 겁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안에서 이 야고보를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 교회, 이 반대편에 누가 있었습니까? 바울, 그리고 중간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예루살렘 교회와 같은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점점 바울처럼 유대인은 유대인의 신앙 문화 안에서 신앙의 꽃을 피울 수있는 것이고 이방인은 이방의 문화 안에서 이방인다운 신앙의 꽃을 피울 수있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그래서 나중에 보시면 사도행전 21장에서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에 왔던 바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에 대해서 우리 예루살렘 교회 안에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뭘로 오해하는 거죠? 반 율법주의자, 그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당신이 나실인 서원이 만료된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을 데리고 성전에 가서 이 사람들을 위해서 대신 돈도 지불하고 이 나실인 정결 규례가 끝났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보고함을 통해서 당신이 얼마나 율법의 규례를 충실히 지키는 사람인지 증거해 달라고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 안에 있는 바울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켜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 부탁을 듣고 바울이 나실인 서원이 끝난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다가 유대주의자들에 의해서 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2장부터 28장까지가 죄수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바울 이야기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면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남아있던 제자들에게 주셨던 마지막 명령, 지상 명령이 뭐였습니까? 그러므로 가서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 유대인들만을 위한 전도자가 아니라 세계 만민을 위한 전도자로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제자들에게 중요한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몇 가지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첫째가 뭐죠? 언어의 장벽이라는 걸림돌이 해결되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해결된 사건이 뭐였죠? 2장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입니다. 오순절에 모여 있던 초대 교인들에게 놀라운 역사가 임한 겁니다. 그게 뭡니까? 성령이 임하면서 불의 혀처럼 초대 교인들에게 이방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 방언의 은사가 주어진 겁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찾아왔던 무수한 이방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이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인데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지역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네 라고 하면서 초대 교인들이 선포했던 복음의 메시지를 이방 사람들이 듣게 된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걸림돌이 뭐였냐면 유대 정결법입니다. 이 정결법은 철저하게 레위기에 근거한 규례입니다. 구약 레위기에 보시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야 되는데 구약이 말하는 거룩의 핵심은 부정한 모든 것들과 단절하고 분리되는 겁니다. 사실 레위기가 말하는 거룩과 정결이라고 하는 것은 힘이 약한 거룩과 정결입니다. 왜 그렇죠?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이 섞이게 되면 부정해진다고 본 겁니다. 레위기가 말하는 정결함, 레위기가 말하는 거룩함이라는 것은 나의 거룩과 정결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부정한 모든 것들과 단절해야 합니다. 분리되어야 합니다. 레위기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될 때는 이스라엘이 신앙 안에서 이제 막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 때 주어진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 하자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어린 아이 단계에 있던 겁니다. 자기를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벅찬 겁니다. 그러다가 사사시대, 왕정시대, 남북 분열시대, 포로기 시대, 중간기 시대를 거치면서 즉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무수한 사건과 연단을 경험하고 나서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명령을 주시는 겁니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 그리고 마지막 지상 명령이 바로 모든 민족으로 예수의 제자를 삼으라는 겁니다. 이제는 세계 만방으로 나아가서 너희가 경혐했고 너희가 알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파하라는 겁니다. 이제는 유대교의 정결법을 뛰어 넘어서 그 유대교의 문지방을 뛰어 넘어서 세계 만민과 만날 것을 예수님은 촉구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12제자는 여전히 유대 정결법이라는 울타리 안에 머물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보여주셨던 환상이 뭡니까? 사도행전 10장의 환상입니다. 이제는 네가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내가 정결케 했다는 겁니다. 세계 만민에게 나아가라는 겁니다. 그 환상을 경험하고서 베드로는 이방인이었던 고넬료 집으로 찾아 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뭘 경험했습니까? 할례를 받지 않은 그 이방인이 예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게 되었을 때 할례를 받은 주의 백성들이 경험했던 성령이 그들에게도 똑같이 임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 하자면 베드로의 세계관과 베드로가 지금까지 갖고 있었던 신학적 사고가 완전히 붕괴되는 회심의 사건을 경험한 겁니다. 그런데 여전히 예루살렘 교회 안에 있었던 율법주의자들은 베드로가 보였던 이런 행보가 이해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왜 유대 정결법을 위반했냐고 베드로를 책망하고 있는 겁니다. 이때 베드로가 했던 말이 바로 11장 17절입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저는 이 말씀이 너무 중요하다고 봅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여러분 당시 유대인들과 초대 교회 안에서도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특정 장소와 특정 대상에게 제한 시켰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것을 뛰어넘을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데 하나님이 새로운 역사를 행하고 계시는데 그것을 내가 어떻게 기존에 갖고 있었던 신학적인 사고, 선입견 이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새 역사를 가로막을 수 있겠냐는 겁니다. 도리어 우리의 마음 문을 열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역사를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주의 백성 된 자들의 태도가 되야 한다, 이것을 베드로가 담대하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18절에 보면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그래서 고넬료 사건의 중요성,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도 예수에 대한 믿음이 있었을 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경험케 만들었다는 겁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안 되고에 할례가 중요합니까? 아닙니다. 할례보다 열 배, 백 배, 천 배 중요한 것이 뭐죠? 믿음이라는 겁니다.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이런 혈통에 제한받지 않고 예수에 대한 믿음, 하나님에 대한 존재를 다하는 믿음이 있다면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 삼아주신다는 것을 초대 교회가 서서히 인정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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