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음에 11장 26절을 보면 안디옥에서 초대 교인들은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됩니다. 이제는 유대교의 주류 세력과 구별된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 겁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 이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예수에게 속한, 예수의 길을 따라 걸어가는 이라는 뜻입니다. 교인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타이틀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겁니다. 예수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예수가 걸어갔던 그 길을 따라 걸어가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입니다. 이런 칭호를 안디옥에서 제일 먼저 얻게 되었고 12장으로 넘어가시면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서 12사도 가운데 야고보가 최초의 순교자가 됩니다. 초대 교회 역사를 보시면 12사도 대부분이 순교를 당합니다. 최초의 순교자가 누구냐면 바로 야고보입니다. 이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고 사도행전 12장에서 순교한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하실 때 중요한 사역의 현장에는 3명의 제자만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누구였죠? 베드로, 야고보, 요한입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입니다. 이 야고보가 12사도 가운데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고 나머지 사도들도 대부분 다 순교를 당합니다. 유일하게 순교를 당하지 않고 자연사 한 제자는 요한으로 봅니다. 요한이라고 하는 제자는 신약성경 가운데 5개의 본문을 쓴 제자입니다. 요한복음, 요한 1,2,3서, 요한계시록입니다. 이 5개의 성경을 쓴 제자, 요한만 자연사 한 것으로 보고 나머지 11명의 제자는 다 순교를 당했다고 봅니다. 그 가운데 최초의 순교자가 야고보입니다.
12장 15절에 보면 재밌는 이야기가 하나 나옵니다. 베드로가 투옥을 당했는데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 가운데 베드로를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십니다. 재미있는 것은 감옥에서 탈출한 베드로가 초대 교인들이 기도하고 있는 장소에 찾아 갑니다. 그 시간에 초대 교인들은 뭘 했습니까? 베드로의 탈출을 위해서 베드로의 해방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감옥으로부터 탈출한 베드로가 초대 교인들이 모인 곳에 와서 문을 두드립니다. 그때 이 문 소리를 듣고 로데라고 하는 계집종이 문을 열었는데 베드로가 서 있는 겁니다. 너무 놀라서 다시 문을 닫고 기도하고 있는 초대 교인들에게 뭐라고 하냐면 베드로 사도가 문밖에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던 초대 교인들이 베드로가 문밖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로데라는 계집종에게 뭐라고 하냐면 네가 미쳤냐 라고 합니다. 아니 베드로는 감옥에 있어야 되는데 무슨 베드로가 문밖에 있다고 하냐 라고 하면서 이 로데를 도리어 꾸짖습니다. 12장 15절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 참 재미있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알게 모르게 기도의 정답을 아뢰어야 된다는 부담감이 많습니다. 그래서 보통 대표기도 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화려한 수사들을 거기에 동원을 많이 하십니까? 정말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이시고 역사의 주관자이시고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주관하시고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고백한다면 예수가 정말 우리의 구원자이고 예수가 정말 우리 인생의 주인이라면 우리 인생의 주인 되신 예수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 인생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어 가야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정말 정직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진실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주의 제자로 살기를 원합니다 라고 고백한다면 우리를 정직하고, 진실하고, 거룩하게 주의 제자 된 길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서 우리가 온전히 순종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가 기도하자고 할 때 우리가 이 땅의 평화와 이 땅의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정말 여러분 남북한의 통일을 간절히 원하십니까? 내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하십니까? 정말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그런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하십니까? 그런데 그런 마음이 별로 없으면서도 내 욕심과 내 이기심에 따라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할 때는 하나님께만 온전히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진짜 우리의 기도대로 하나님께만 온전히 순종하는 자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이끄실 때 그것을 감사하기보다는 하나님에 대해서 왜 나를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길로 인도하시냐고 불평하고 원망할 때가 많습니다. 무슨 얘기죠? 기도하지만 그 기도가 온전히 이뤄질 것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도는 하지만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이 우리에게 사실 있습니다. 초대 교인들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었다는 것이 참 재미있습니다.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지만 베드로가 문밖에 있다고 할 때는 믿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런 현실로부터 이제는 좀 극복하고 뛰어 넘어서 정말 하나님께 진실을 다해 고백하고 그리고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께 응답되어 졌을 때 그것을 정말 하나님께 도리어 감사할 수 있는 신앙의 성장과 진보가 우리에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3장부터 28장까지는 사도 바울의 선교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3장에 보시면 안디옥 교회,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함을 제일 먼저 받았던 안디옥 교회에 성령께서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할 것을 명하십니다. 안디옥 교회는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가 동역을 하게 됩니다. 13장부터 보시면 구브로라든가, 비시디아 안디옥이라든가 이고니온, 루스드라 여기를 순회하면서 바나바와 바울이 정말 아름답고 멋진 선교 사역을 행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13장 13절에 보면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바나바와 바울이 선교 여행을 떠날 때 바나바의 조카가 바로 마가입니다. 이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했습니다. 마가에게 선교 여행을 가자고 하니까, 이 마가는 제가 볼 때 선교보다는 여행에 방점을 찍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나는 여행이 될 줄 알고 바나바와 바울의 선교 여행에 마가가 동참합니다. 그런데 마가는 120명이 모일 만한 큰 다락방이 있었던 부유한 집안의 아들 아닙니까? 그래서 마가는 어떻게 보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인생의 어려움과 고난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선교 여행을 간다고 하니까 여행에 방점을 찍고 이것이 마치 즐거운 여행이 될 줄 알고 함께 동참했는데, 한 마디로 마가는 준비됨 없이 선교 여행에 동참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하루에도 막 수십 킬로를 걸어야 되죠, 그리고 엄청나게 무서운 짐승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 되고 산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 됩니다. 너무나 힘들고 고된 선교 여행 가운데 마가가 밤빌리아 버가라는 곳에서 돌아가 버린 겁니다. 준비됨 없이 선교 여행에 동참했다가 마가가 중간에 너무 힘들고 어려우니까 “나는 더 이상 못해” 하면서 돌아가 버린 겁니다. 그럼에도 마가 없이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선교 여행을 완수해 냅니다. 그런데 2차 때 원래는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동역하려고 했습니다. 이때 바나바가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가자고 요청합니다. 이때 바울이 굉장히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밤빌리아 버가에서 중간에 돌아갔던 그 마가를 데리고 갈 수 없다는 겁니다. 바나바는 데리고 가자, 바울은 절대 안돼 그래서 바나바와 바울의 의견 대립이 일어납니다. 이것 때문에 2차 전도 여행 때부터 바울과 바나바는 결별하게 됩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따로 선교 여행을 떠나고 바울은 새로운 파트너인 실라를 데리고 2차 전도 여행을 하게 됩니다. 이 마가의 성급한 행동, 미숙한 모습으로 인해서 너무나 아름다운 동역자였던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게 되는, 이것을 경험하면서 마가가 얼마나 마음의 미안함과 큰 깨달음을 얻었겠습니까. 자신의 어리석고 미성숙한 행동 때문에 하나되어야 될 바울과 바나바가 결별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가는 다시는 그런 실수를 행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겠죠. 그래서 나중에 이 마가가 바울에게도 너무나 중요한 사람이 됩니다.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오라고 하면서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마가는 나에게 너무나 중요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마가를 평가합니다. 베드로는 이 마가를 자신의 믿음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마가가 굉장히 중요한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미성숙함과 자신의 한계를 깨우치게 되고 이후에는 완전히 환골탈태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어서 그때부터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위대한 사역자로 신실한 걸음을 내딛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 기억하셔야 될 것은 바울이 너무나 단호한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이 바울의 단호함 때문에 바울이 개척한 교회들에서도 바울이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다음 주에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13장까지 보고 다음 주에 14장부터 계속해서 사도행전을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주간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신실하게 동행하는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건강하십시오. |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과 회개로 응답하는 세대 (누가복음 11:29~32) (0) | 2022.04.18 |
---|---|
주일 아침에 읽어 볼 만한 글입니다. (0) | 2022.04.17 |
사도행전 녹취 9 (0) | 2022.04.17 |
사도행전 녹취 8 (0) | 2022.04.17 |
사도행전 녹취 7 (0) | 2022.04.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