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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 불을 쬐더라 / 요한복음 18:15-27

by 【고동엽】 2021.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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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 불을 쬐더라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8:15-27


 

 

며칠 전 어떤 행사에 참석하여 예배를 드린 다음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행사장에서 뷔폐식으로 제공되는 점심이었기에, 동행했던 강석영 전도사님이 성경과 찬송이 든 가방을 한쪽 구석에 내려놓고 음식 테이블 앞에 가 섰을 때입니다. 전도사님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던 한 분이 전도사님에게 느닷없이 '전도사님은 참 행복하시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얼른 알아듣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전도사님에게 그 분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저도 전도사님과 똑같은 가방을 들고 다닙니다만 속에 들어 있는 것이라곤 온통 수표장과 어음 쪽지들 뿐입니다. 모두 제 골치를 아프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어디 가서는 불안해서 아무데나 가방을 내려놓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전도사님은 아무 걱정없이 저렇게 어디든 가방을 둘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또 설령 가방을 도둑 맞는다 해도, 가지고 간 사람이 그 속에 들어 있는 성경과 찬송을 보고 새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을 테니 뭐 아쉬울게 있겠습니까? 도둑맞는게 곧 전도아니겠습니까? 정말 전도사님이 부럽습니다."

그 행사장에서 처음 만나본 그 분은 웃으면서 말을 했고, 그 말을 듣는 전도사님도 웃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말은 전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정말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말은 제 마음 속에 더 긴 여운을 남겼습니다. 그 분의 그 말이야말로,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 오히려 추위와 불안에 떨고 있는 현대인의 영혼을 반영하는 거울이었기 때문입니다.

물질의 풍요로움이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영혼의 평안함과 따스함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영혼을 추위와 불안에 떨게 만드는 경우가 더 허다합니다. 영혼의 평안함과 영혼의 따스함은 같은 말입니다. 따스함 없이 평안함이 있을 수 없고, 평안이 배제된 따스함이란 애시당초 불가능합니다.

만약 우리 영혼이 따뜻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이 세상 그 무엇으로부터도 참된 평강과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영혼이 따뜻할 때에는 마치 광야에서 외치던 세례자 요한이 그러했던 것처럼, 텅 빈 주머니를 가지고서도 말할 수 없는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흡사 하박국 선지자와 같이 1년 내내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을지라도, 지극한 행복을 구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2,500년전 학개 선지자가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학 1:6)

 

먹으면 배가 불러야 되지 않겠습니까? 마시면 갈증이 해소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껴입으면 따뜻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아무리 먹어도 배부름이, 아무리 마셔도 시원함이, 아무리 입어도 따뜻함이 없습니까? 왜 아무리 삯을 받아도 구멍 뚫린 지갑에 넣는 것처럼 만족이 없습니까? 이유는 하나―그 영혼이 추위와 불안에 떨고 있기 때문입니다. 추위와 불안에 떨고 있는 영혼을 가진 자에게는 어떤 경우에도 참된 만족, 참된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의 영혼이 추위와 불안에 떨고 있습니까? 학개 선지자는 그 이유를, 하나님을 외면했기 때문이라고 간단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 날 태양을 외면한 자의 육체가 추위와 불안에 떨 수밖에 없듯이, 내 생명의 빛이시요 구원자되신 하나님을 외면한 자의 영혼이 영적 한기와 불안 속에서 떨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회개가 무엇이겠습니까? 영적 추위와 불안에 떨던 삶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신앙이겠습니까? 내 영혼의 빛되신 하나님 앞에서 내 영혼을 따뜻하게 가꾸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내 영혼을 따뜻하게 세우는 것으로부터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왠지 아십니까? 영혼이 따뜻한 사람만 남을 따뜻하게 사랑하고 포근하게 감싸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 결박당하신 예수님께서는 지금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이때의 시각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던 당일 첫 새벽녘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날은 지금 우리의 달력으로 3월 말에서 4월 초 사이였습니다. 이스라엘은 12월부터 3월말까지가 겨울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3월말에서 4월 초 사이란 겨울이 끝나가고 이른 봄이 막 시작하려는 때입니다. 그렇기에 밤이 되면 기온은 뚝 떨어져 버립니다. 특히 예루살렘은 유다 광야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밤이 되면 유난히 추운데, 그 추위의 특성은 뼈 속까지 사무치는 추위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계절이었으니 본문 속의 그 날 새벽 대제사장의 집 뜰 또한 얼마나 추웠겠습니까?

그래서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18)

 

베드로가 또 다른 제자의 주선으로 전임 대제사장이자 이스라엘 최고 실권자인 안나스의 집 뜰 안으로 들어갔을 때에, 그 곳의 하속들은 얼마나 추웠던지 숯불을 피워 놓고서 그 앞에서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걸어오느라 추위에 떨어야만 했던 베드로 역시 그 틈에 끼어 불을 쬐었습니다.

본문 24절로 25절 상반절이 다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24-25a)

 

심문을 끝낸 안나스는 예수님을 자신의 사위요, 대제사장 현직에 있는 가야바에게 보내었습니다. 그 집 사람들도 숯불을 피워 놓고 있었고, 베드로는 이번에도 역시 그들 속에서 불을 쬐었습니다.

우리 성경에서 '숯'으로 번역된 anthrakia는 숯 몇 조각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활활 타오르고 있는 숯더미' 혹은 '무연탄 무더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대단한 열량을 특별히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또 '쬐다'로 번역된 thermaino란 단어는 '따뜻하게 하다'는 의미입니다.

추운 첫 새벽의 한기에 떨고 있던 베드로는 추위를 떨쳐 버리기 위해 안나스의 집 뜰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숯 무더기 앞에서 몸을 녹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따뜻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여전히 춥습니다. 그래서 가야바의 집으로 옮겨가서도 그는 또 다시 불 앞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베드로가 따뜻함을 얻었을까요? 그 뜨거운 숯불 무더기에 의해 얼었던 손발이 녹을 수는 있었겠으나, 그의 심령은 결코 따뜻함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정작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은 그의 몸 이전에 그의 영혼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3년 동안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다니긴 했지만, 그러나 그 분을 성육신 하신 하나님으로 믿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자 하나님이라면 반드시 이런 분이어야 한다는 자기 자신의 생각, 즉 자신의 신념이 만들어 낸 하나님의 허상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무력하게 체포당하시어 끌려가는,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될 때 그는 눈 앞의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몸은 주님을 따라가고 있으면서도, 그의 영혼은 주님을 이미 외면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주님을 외면한 베드로의 영혼은 추위와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영혼이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했던지 안나스의 집에서도 가야바의 집에서도, 베드로는 앉지도 못한 채 서서 불을 쬐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타오르는 숯불을 쬔다고 가실 추위나 불안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영혼이 추위와 불안에 떨고 있을 때 그가 한 짓이라고는, 고작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며 욕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한 짓이 그 정도였으니, 베드로가 한기와 불안에 떨던 그 영혼으로 누구 한사람 제대로 사랑하며 포근하게 감싸줄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나 사람을 위해서나 아무런 쓸모 없는 무익한 인간이었을 뿐입니다.

그 무익하던 베드로가 새벽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서는 대제사장의 집을 뛰쳐나가 통곡하며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추위에 얼어붙은 영혼은 통곡도 회개도 불가능합니다. 베드로가 뛰쳐나간 한길 위에는 타오르는 숯불더미가 없습니다. 그 곳은 유다 광야로부터, 뼈속까지 스며드는 찬 바람만 몰아치는 한데 였습니다. 불이 타오른 대제사장의 집 뜰보다 훨씬 더 추운 곳이었습니다. 어찌 그 추운 한길 위에서 베드로가 참회하며 통곡할 수 있었습니까?

지난 주일 깊이 묵상해 보았던 바와 같이 닭 울음 소리로 인해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과 사랑 앞에 바로 섰기 때문입니다. 굳이 외면했던 주님을 똑바로 향하였을 때, 주님 말씀의 온기가, 주님 사랑의 따스함이 얼어붙었던 베드로의 영혼을 녹여 주었던 것입니다. 영혼의 온기를 지닌 자만이 말라 붙었던 눈물 샘이 터지며 통곡할 수 있습니다. 영혼의 따뜻함을 가진 자만 열린 영안으로 자신의 실상을 바로 보고 참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제사장 집 뜰안, 타오르는 숯불 무더기 앞에 서있는 베드로로부터 얼음처럼 차가운 냉기만을 느끼는 반면, 찬바람이 몰아치는 한길 위에서 통곡하는 베드로로부터는 말할 수 없이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이후 베드로는 이 따뜻한 영혼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진정으로 따뜻하게 사랑하는 참된 크리스챤이 비로소 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반하여 가룟 유다는 어떠했습니까? 마가 다락방에서 주님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끝낸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기기 위해 집을 나설 때, 그때가 캄캄한 밤이었음을 요한복음 13장 30절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때가 정확하게 언제 였습니까?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기 불과 몇 시간 전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추위를 견디다 못한 베드로가 타오르는 숯불더미 앞에서 몸을 녹이려 했던 바로 그 추운 날 밤이었습니다.

그 추운 밤에 가룟 유다가 집을 나섰음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날 밤 가룟 유다의 영혼이 추위로 인해 꽁꽁 얼어붙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의 영혼이 얼었을 때 그가 한 것이라고는 은 30냥을 받고 자신의 스승을 배신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가룟 유다는 다시 주님을 향해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와의 결정적인 차이였습니다. 그 결과 가룟 유다는 스스로 목매어 죽는 비참한 최후를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얼어붙은 그 차디찬 영혼으로는, 타인은 고사하고 자기 자신마저 바르게 사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영혼이 추위 속에서 벌벌 떨고 있는 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 무엇을 행하든 그 본질은 자학이요, 그 결과는 자멸일 뿐임을 아는 것이 곧 지혜입니다.

시인은 자기 영혼을 향해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5)

 

시인은 추위와 불안 속에서 떨고 있는 자기 영혼을 향해 하나님을 바라라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 시인은 한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영적 추위와 불안은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의 말씀을 덧입을 때에만 가셔질 수 있고, 영혼의 온기를 되찾은 자만 참된 행복을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북한 황장엽 비서의 망명과 때를 같이하여 지난 15일 밤, 귀순자인 이한영씨가 괴한들에게 피격되어 중태에 빠져서 우리 모두들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17일, 경찰은 이한영씨가 피격 당시 옷과 손가방 속에 지니고 있던 소지품을 공개했습니다. 치솔, 치약, 수건 3장, 화장지 1통, 면도기, 휴대폰, 이사짐계약서, 이혼확인서, 두통약, 소화제 등 총37종 119점이 전부였습니다.

그것들은, 가족들과 떨어져 동가식서가숙하는 그의 모든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다 합쳐도, 그의 손가방 하나를 다 채우지 못하는 양이었습니다. 그로 미루어 귀순한지 10여년이 지나도록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거액의 빚만 지고, 게다가 늘 북한의 암살 공포에 시달려온 그 젊은이의 영혼이 얼마나 춥고 불안했겠는지, 또 그로 인해 그의 심신이 얼마나 피곤했을는지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두통약과 소화제를 늘 지니고 다녔겠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가련한 청년에 비하면 참으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손가방 하나에도 못미칠 정도가 아니라, 대형 트렁크 몇 개라도 모자랄 만큼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많은 소유가 우리 영혼을 추위와 불안으로부터 지켜주고 있습니까? 그 소유가 우리 영혼의 따뜻함과 평안함을 보장해 주고 있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 분의 사랑과 말씀 앞에 바로 서지 않는 한, 우리의 소유가 많아질수록 우리의 영혼은 더 얼어붙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자기 가방 하나 마음놓고 아무 곳에나 두지 못하는 불신과 불안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추운 겨울 날 입을 옷을 쌓아 두고서도 태만하여 옷을 입지 않아 감기에 걸리고, 급기야 폐렴에 걸려 할일을 하지 못하고 앓아 눕는다면 그것은 자기 육체에 대한 범죄 행위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주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말씀과 사랑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단지 무지와 나태함으로 우리의 영혼을 추위 속에 방치에 둔다면, 그 사람은 옷을 두고도 입지 않아 병드는 자와 같이 어리석은 자요, 그의 행위는 자신의 영혼에 대한 범죄요, 그 영혼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죄악인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의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난방시설은 놀랄만큼 발전했습니다. 장작을 때던 시절에서부터 시작하여 무연탄시대를 거쳐 보일러 시대에 이르렀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발전할는지 알수 없습니다. 이에 비하여 우리 영혼을 따뜻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사순절 두 번째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의 영혼을 추위와 불안 속에 방치했던 우리의 죄를 회개합시다. 영혼이 얼어있었기에 한풍에 휩싸인 이웃과 이 사회를 녹이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얼어붙게 하였음을 회개합시다.

이 시간부터 주님 앞에 바로 서서 주님의 따뜻한 말씀으로, 주님의 포근한 사랑으로 우리 영혼을 녹이고 영혼의 온기를 되찾는 자들이 되십시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은 난세입니다. 이 사회는 구심점을 상실한채 표류하고 있습니다. 내일 아침 또 무슨 일이 일어날자 알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가 아무리 난세라 할지라도, 따뜻한 영혼의 소유자가 있는 한 소망이 있습니다. 역사를 허무는 자는 언제나 영혼이 얼어붙은 소위 영웅이었지만, 분열과 증오 그리고 다툼으로 찢어지고 망가진 역사에 늘 사랑과 봉합의 불을 지피는 자들은 그 영혼이 따뜻한 자들이었습니다.

잊지 마십시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내일의 역사는 그들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선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내 자식에게 필요한 옷을 사 주었음에도, 내 자식이 그 옷을 입지 않고 벌거벗은 채 돌아다니다 중병을 얻고 눕는다면 그 자식이 얼마나 한심하며, 또 그 자식에 대한 우리의 배신감이 얼마나 크겠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이 그처럼 어리석었음을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럼에도 우리를 일없다 버리지 않으시고, 오늘도 이렇듯 찾아오시어 우리와 함께 해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주님의 그 따뜻한 말씀과 포근한 사랑을 내 영혼의 옷 삼으므로 우리 영혼이 온기를 회복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사랑과 진리의 불꽃에 내 영혼을 쬐므로 얼어붙은 우리의 영혼이 녹아지게 하옵소서. 주님의 체온이 우리의 체온, 주님의 온기가 우리의 온기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한편으로 허물 투성이고 또 한편으로는 꽁꽁 얼어붙은 이 세상을, 한편으로는 포근하게 감싸주고 또 한편으로는 따뜻하게 녹여주는, 참된 사랑의 불씨, 진리의 불씨, 새 역사의 불씨들이 되게 해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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