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목록가기 |
바라바라 하니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8:38b-19:7
서울 구치소의 요청으로, 지난 3월 29일 서울 구치소 강당에서 부활절 축하 기념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 이미 사형 확정을 받아 집행할 날만 기다리고 있는 사형수 8명의 특송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방황할때 나 주님을 몰랐네내맘대로 고집하며 온갖 죄를 저질렀네 예수여, 이 죄인도 용서받을수 있나요 벌레만도 못한 내가 용서받을수 있나요 많은 사람 찾아와서 나의친구가 되어도 병든 몸과 상한 마음 위로 받지 못했다오 예수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의지 할것 없는 이몸 위로 받기 원합니다 이 죄인의 애통함을 예수께서 들으셨네 못자국난 사랑의 손 나를 어루만지셨네 내 주여 이죄인이 다시 눈물흘립니다 오 내주여, 나 이제는 아무 걱정없어요 내 모든죄 무거운짐 이젠 모두 다 벗었네 우리 주님 예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오 내 주여 이 죄인이 무한 감사드립니다 나의 몸과 영혼까지 주를 위해 바칩니다. 주를 위해 바칩니다. |
일반 수인들과는 달리 사형수임을 나타내는 붉은 명찰을 달고서,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기에 사형언도를 받았음이 분명한 그들이, '주여 이 죄인도 용서받을 수 있나요' 하고 외치는 소리는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안겨주는 동시에 처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앳띤 소년의 얼굴에서 부터 장년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9명의 사형수들이, 언제 사형을 집행당할른지 알 수는 없으나 남아있는 시간동안, '나의 몸과 영혼을 주를 위해 바칩니다'라는 걸단으로 찬양을 끝맺는 모습은 실로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특송을 마친 후 원언식씨가 잠시 마이크 앞에 섰습니다. 그분은 몇 해전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장본인이었기에 낯설지 않았습니다. 원주에서 한 직장에만 20년을 다닐 정도로 착실했던 그는, 어느 날 아내가 '여호와의 증인'에 빠져 가정을 내팽개치기 시작하면서부터 심각한 가정불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날도 가정을 마다하고 '여호와의 증인'회관에 나가있는 아내와, 아내를 불러내는 사람들을 혼내주기위해 석유통을 들고 회관을 찾은 그는, 입구에 석유를 뿌리고는 성냥을 그었습니다. 불길은 삽시간에 집회장 안으로 번져갔고, 그 방화로 인하여 따로 비상구가 없는 실내에 있던 사람중 무려 15명이나 되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불에 타죽었습니다. 그 아비규환의 현장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끔직한 범죄요, 살인행위입니까? 사형제도가 없다면 모르되 법에 사형이 명시되어있는 한, 그처럼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고서도 사형이 언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것입니다.
마이크 앞에서 그는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눈물을 훔친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직장 상사 내외분이 제게 전도하기 위해 목사님과 함께 저희 집으로 심방을 왔던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나는 일부러 술집에 앉았다가 밤 12시가 너머서야 귀가했습니다. 만약 그날 내가 예수님을 영접했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좇으십시오. 예수님 아니면 여러분들도 저처럼 붉은 명찰을 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그 사형수와 사형수의 말을 듣는 수인들에게만 국한된 이야기이겠습니까?
정말 귀한 교우님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매사에 철저하게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기에 존경치 않을 수 없는 그런 분입니다. 그분은 한때 도박에 빠져 젊음을 탕진해 버렸던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게 된 이후에도 가족들에 대해 늘 그 사실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도박만 하지 않았더라면 참으로 행복했을 것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95년 9월 넷째 수요예배시간에 '자서전들을 쓰자'고 권해드린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소설가 이청준씨의 소설제목이 아닙니다. 자서전이란 거창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무릇 살아있는 자들은 원고지 단 10장이라도 반드시 자서전을 쓸 의무가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글로 정리해 봄으로써, 주님 앞에서 우리의 실상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이 얼마나 큰지 비로소 구체적으로 확인하면서, 주님만을 좇는 더 분명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 날밤 그 성도님 역시 자신의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분의 글로 직접 들어보시겠습니다.
자서전을 써보라는 설교를 듣던 날 밤, 아내와 아이들에게 자랑스럽게 변한 제 자신의 대견스러운 모습을 확인시켜주기 위하여 연필을 잡았다가, 그만 제자신의 적나라한 실상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밤 제가 확인한 것은, 삶자체가 더러운 죄인이었던 추하디 추한 제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지난날의 제 모습은 가룟유다보다 더 흉칙했습니다. 저는 주님을 향해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 주님! 저 많은 죄를 정말 제가 다 지었군요, 언제 저토록 많은 죄를 범했습니까? 저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죄를 구해야 합니까? 주님! 이 용서받지 못할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이전까지는, 자신이 범한 죄는 도박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해 봄으로써, 자신의 삶속에서 죄아니었던 것이 없음을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로 삼지 않는 자가 어찌 죄아닌 것을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그와 같은 자들은 자기욕망에 따라 선택하는 자인즉, 그들이 선택하는 것의 형태가 어떠하던 그 본질은 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심문한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죽일만한 죄를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이면 죄수 한 명을 특사로 풀어줄수있는 전례가 있음을 상기한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기위하여, 예수님을 고발한 유대인들에게 본문을 통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39)
빌라도 총독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유대인들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40)
유대인들은 예수님대신 바라바를 선택했는데, 바라바는 강도였다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7절은, 바라바는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 중에 살인을 저지르고 체포된 자라고 기록하고있습니다. 한마디로 자기 욕망을 위해서는 어떤 불법이나 폭력, 심지어는 살인도 불사하는 흉칙한 사형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진리이신 예수님을 마다하고 추악한 욕망의 상징인 강도 바라바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들 자신들이 진리는 안중에도 없는 더러운 욕망의 노예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선택한 바라바와 함께 파멸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냐? 아니면 바라바냐? 이 양자에 대한 선택의 문제는 2천년전 유대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인생 자체가 이 양자에 대한 선택의 연속입니다. 예수님을 선택할 것인가 혹은 강도 바라바를 선택할 것인가에 따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나게 되고, 또 내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선택의 대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삶이 근본적으로 이 양자중 무엇을 선택했느냐에따라 일차적으로는 신·불신이 결정나고, 삶속에서 매 순간순간마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 신앙의 질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4년전 수요 예배시간을 통해 로마서를 공부할 때, 로마서 8장 29절로 30절을 깊이 묵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 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강도 바라바와 같던 우리를 먼저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해주시고,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자녀로 친히 불러주시고, 주홍보다 더 붉고 먹보다 더 검은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씻어주시사 의롭다 인정해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룩한 성도가 되도록 인도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예정' '소명' '칭의' '성화', 이 네 단어는 '복음의 황금사슬'이라 불리우고 있습니다. 복음의 요체가 이 네 단어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까닭입니다.
칼빈은 이중에서 '예정'을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라 불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어떤 선을 행하기도 전에, 여전히 죄가운데 있을때 우리를 이미 예정해 두셨더라는 의미에서 였습니다. 그 다음 '소명'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러주시면 강도든 창녀든 살인자든, 그 누구도 피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시는 은혜가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아니였다면 우리같은 죄인들이 어찌 이 아침 이 귀한 자리에 앉아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칭의'는 '필승불패의 은혜'라 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의롭다 인정하시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 할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있게 이렇게 단언하고 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3)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남아 있는것은 성화에 대한 의무와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소명 그리고 칭의의 은혜에 의해 의롭다 구원받았음을 정녕 믿는다면, 정말 구원받은 자 답게, 의인 답게, 거룩한 삶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 소명, 칭의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이요 선물이라면, 성화는 철자하게 우리 자신의 책임 사항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본질적으로 예수님을 향하게 되었음에 만족하는 것이아니라, 삶의 매 상황상황마다 강도 바라바를 선택치 않고 어떤 경우에도 진리이신 예수님을 선택할 수 있도록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자기 훈련, 경건의 훈련을 게을리 해서는 않된다는 말입니다. 그때 우리의 신앙은 성숙해지고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로 아름답고 바르게 쓰임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을 믿을때 다 구원을 얻지만, 구원 받았다고 해서 다 쓰임을 받는것은 아닙니다. 구원 받은 자 중에서 성화의 의무를 다 하는 자가 하나님의 도구로 선택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학적으로 두 번째 부르심, 혹은 제 2의 구원이라 한다 했습니다.
지난 주초 개최되었던 신앙사경회를 통하여 강사 박 영선목사님 께서는, 칭의를 신분의 문제로 그리고 성화를 수준의 문제로 명쾌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보다 더 적절한 표현을 저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는 신분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신분을 지닌자로써 얼마나 거룩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수준이, 교회의 수준이, 민족의 수준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국민의 25%가 크리스쳔들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가 갈수록 혼란스러워진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분을 즐기기만 할뿐 스스로 수준을 높이기위해 성화의 의무를 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외교관 신분으로 칠레에서 몇 년간 거주하던 분이 있었습니다. 처음 도착하여 칠레 운전면허증을 발급받기 위해 필기 시험을 치룰때 였습니다. 마지막 면접을 위해 면접관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을때 면접관은 놀랍게도 할머니 였습니다. 할머니가 술을 먹을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면허증을 받기가 까다로울것 같아 먹지 못한다고 답했습니다. 할머니가 당신의 직업이 외교관인데 파티에서 술 한잔이라도 먹어야 되지 않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 분은 재차 먹을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 후 시간이 되어 면허증을 찾으러 갔더니 시험에서 탈락했다는 것입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면접관이 정신진단을 요하는 자라고 판정하였으므로 면허증을 줄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할머니 면접관을 찾아가서 왜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자 취급하느냐며 따졌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외교관이라면 파티석상에서 술 한잔 정도는 할줄아는 사람임이 분명한데, 내가 물을때 당신은 두번씩이나 거짓말을 했으니, 당신은 정신이 건강치 못한 사람입니다. 당신 같은 사람은 교통법규를 위반하고서도, 교통순경이 면허증을 달라하면 위반한 적이 없다고 거짓말할 사람일텐데, 내가 어찌 면허를 발급해 줄수 있겠습니까?'
잘 알려진대로 칠레는 카톨릭 국가입니다. 우리가 조금 먹고 살게되었다고해서 칠레와 같은 남미국가들을 얼마나 우습게 여기고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와 칠레사이에는 이만한 수준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적인 정신위에서 소위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나라들과의 수준의 차이는 얼마나 크겠습니까?
윌리엄 도일 신부는 그의 저서, '성인이 되는 비결'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이겨야 할 기회를 만날때마다 이것은 나의 힘에 너무겨웁다. 나는 성인이 아니잖아! 이렇게 말하고는 그 유혹에 스스로 빠져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대는 왜 성인이 못되는가? 성인이 되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의무가 아닌가?"
성인이 된다는 것을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자체가 성인이 되는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 '성도'라 부르고 있습니다.성도란 단어 hagios 자체가 영어로 saint, 곧 성자란 의미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란 거룩한 신분을 얻은 자들이기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가 되었기에 이제 우리수준에 대한 의무를 지니게 된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인이 될수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도일 신부는 agere contra, 즉 자기를 거스려 행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자기의 욕망이나 탐욕을 거스릴수 있는자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매 순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좇으려면 먼저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자기를 거스리지 못하고 자기를 좇는자는 영락없이 강도 바라바를 선택하는 자가 될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의 수준은 얼마나 자기를 거스릴줄 아느냐로 판가름 나게됩니다.
서울 구치소에서 붉은 명찰을 달고있는 사형수들과 우리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가슴에 붉은 명찰을 달고있던 죽을수 밖에없는 사형수들이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행적 은혜로 택정해 주시고,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불러주시고, 필승불패의 은혜로 우리 가슴에서 붉은 명찰을 떼어내시사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지 않았습니까? 호돈의 주홍글씨처럼 수치스럽던 붉은 글씨를 천사의 상징으로, 성도의 표징으로 승화시켜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 사실을 정녕 믿는다면 이제는 의인답게, 성도답게, 성인답게, 우리의 수준을 끌어올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 자기를 거스리는 자가 됩시다. 어떤 경우에도 강도 바라바가 아니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을 선택하는 자들이 됩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를 거스려 우리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은 이 민족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임을 잊지마십시다. 자기를 거스리지 못하는 자는 언제나 강도 바라바의 편일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민족의 수준은 오직 그리스도인 우리 자신들에게 달려있습니다.
우리 다 함께 '주여 이 죄인이'를 찬양하시므로 기도를 대신하겠습니다.
세상에서 방황할때 나 주님을 몰랐네내맘대로 고집하며 온갖 죄를 저질렀네 예수여, 이 죄인도 용서받을수 있나요 벌레만도 못한 내가 용서받을수 있나요 많은 사람 찾아와서 나의친구가 되어도 병든 몸과 상한 마음 위로 받지 못했다오 예수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의지 할것 없는 이몸 위로 받기 원합니다 이 죄인의 애통함을 예수께서 들으셨네 못자국난 사랑의 손 나를 어루만지셨네 내 주여 이죄인이 다시 눈물흘립니다 오 내주여, 나 이제는 아무 걱정없어요 내 모든죄 무거운짐 이젠 모두 다 벗었네 우리 주님 예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오 내 주여 이 죄인이 무한 감사드립니다 나의 몸과 영혼까지 주를 위해 바칩니다. 주를 위해 바칩니다. |
이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헛된 승리와 참된 승리 (0) | 2021.12.28 |
---|---|
헬라파 와 히브리파 (0) | 2021.12.28 |
하나님의 아들이라 / 요한복음 18:38b-19:7 (0) | 2021.12.28 |
채찍질 하더라 / 요한복음 18:38b-19:3(이재철) (0) | 2021.12.28 |
무엇을 하였느냐 / 요한복음 18:33-38a (0) | 2021.12.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