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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찍질 하더라 / 요한복음 18:38b-19:3(이재철)

by 【고동엽】 2021. 12. 28.

채찍질 하더라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8:38b-19:3


불경 보왕삼매론( 王三昧論)에 다음과 같은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병으로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기를 바라지마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 세상을 살아가라'하셨느니라"

여기에서 말하는 병, 곤란, 근심이란, 우리 용어로 표현하면 한마디로 고난이란 의미입니다.

석가모니께서는 사카국의 국왕이었던 정반왕의 첫째 아들로 왕궁에서 태어나신 분입니다. 왕위 계승권을 가진 태자였던 것입니 다. 그렇기에 어린 시절은 물론이요 16세에 결혼하여 아들을 얻은 뒤 그 분의 젊은 시절 역시 유복하였습니다. 그러나 뜻한 바 있어 29세 되던 해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기까지 6년여에 걸친, 마치 가시밭길과 같은 고행의 기간이 있었지만, 이 땅에서의 삶을 다 마치고 떠날 때에 그 분은 참으로 평화로이 입적하셨습니다. 그 이후 그 분의 제자들에 의해 태동된 불교 는 철저한 자력 종교입니다. 각자 스스로 깨달아 부처가 되므로 자기가 자신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고 난을 피하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의 유익함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왕궁과는 거리가 먼 비천한 여인의 몸에서, 그것도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나마 당신의 고향에서 사 실 수도 없으셨습니다. 헤롯 대왕의 유아 대학살이 시작되었기에 애굽으로 피신하시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고향 땅으로 되돌아가신 후에는,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 목수 생활로 하루하루를 연명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리스도 로서의 공생애를 시작한 후에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공중의 새에게도 보금자리가 있고 여우에게도 굴이 있건만, 주님께는 머 리둘 곳조차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시고, 끝내는 인간의 죄값을 치루시려 십자가 위에 못 박혀 비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의 삶 자체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후 그 분으로부터 비롯된 기독교는 철저한 타력종교입니다. 우리 에게는 죄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원해 낼 능력이 전혀 없기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던 주님께서 부활하시어 우리를 위한 구 원자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고난을 당하셨던 그 분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부딪히게 되는 크고 작은 고난을 회피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아니 불교 도들보다 고난의 더 깊은 의미를 깨닫고, 더 큰 유익함을 얻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고난의 주님께서 주시는 고난이라면, 주님 께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내게 고난이 주어졌다면, 그 고난의 결과는 나의 유익함으로 귀결될 것이 명약관화합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전에 닥친 고난을 두려워하고 근심하고 회피하려고만 한다면, 우리가 어찌 십자가의 고난을 자취하셨던 주님을 믿는 참된 그리스도인일 수 있으며, 주님의 도우심으로 구원받고 살아가는 우리가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원해야 하는 불 교도들보다 나을게 무엇이겠습니까?

구한말 이 땅에 선교사로 와서 복음 전파는 물론이요, 한국 문화를 연구하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도 애를 썼던 헐버트 박사는 그의 저서 <대한제국멸망사>에서, 한국인의 종교를 이해하기는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 니다.
"한국인들은 사회적으로는 유교도이며, 철학적으로는 불교도이고, 고난을 당할때는 영혼 숭배자 즉 미신적이 된다. 따라서 어느 한국인의 종교가 무엇인지 알려면 그가 고난에 빠졌을 때에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참으로 놀라운 통찰력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민족의 모든 삶의 규범은 유교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오늘날 소위 신세 대를 기성세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도 따지고 보면 유교적인 규범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우리의 명상과 사색의 근간을 이루 는 것은 불교적 사상입니다. 이를테면 인생무상, 인간은 작은 우주, 모든 본질은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이(不二)사상, 예를 들어 요즈음 유행하는 '신토불이'와 같은 사상들이 다 불교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하면 너나 할 것 없이 한결같이 미신적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고난을 피하려고만 하거나 아니면 비굴하게 굴종했지, 주어진 고난 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고 감사하면서 그 고난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극복하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 점에 관한 한 그리스도 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규범과 사고를 가지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참다운 신앙 여부가 가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고난의 때에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원치 않는 고난을 당했을 때, 그 때 오히려 더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더 깊이 신뢰한다면, 그는 이미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된 자입니다. 그러나 고난때문에 주님을 원망하고 고난으 로 인해 주님을 불신할 수밖에 없는 자라면, 아직까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자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 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 )

지금 당장 내가 원치 않는 고난이 주어졌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세상의 악한 부모보다 더 못한 존재로 여기고 있음에 불과한 것이니, 그러고서야 어찌 하나님을 믿는다 할 수 있겠습니까?

목회를 하면서 정말 가슴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평소 믿음이 출중하게 보이던 분이 뜻하지 아니한 고난을 당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을 보는 것은, 얼마나 가슴아픈 일인지 모릅니다. 그 반면에, 신앙연륜이 지극히 ㅉ음에도 불구하고 뜻하지 않은 고 난을 당하나, 오히려 그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는 분을 만나는 것은 목회의 가장 큰 보람입니다.

마태복음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 배를 타고 앞서 건너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 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마 14:22∼24)

주님께서 벳세다 들판에서 빵 다섯 조각과 물고기 두 토막으로 남자 장정만 오천명이 넘는 대 군중을 배불리 먹이시어 오병이어 의 기적을 일으키시던 밤, 무리가 흩어진 뒤 주님께서는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배가 바다 한 가운데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바다에 역풍이 몰아 닥치면서 무서운 폭풍 속에 배가 휩싸이게 되었습니 다. 성경은 그 상황을 제자들이 고난을 당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고난을 당 하는 순간, 그들은 그들이 믿던 주님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따르던 주님께서 이제 방금 전 벳세다에서 오병이어의 능력을 베푸셨던 사실조차 기억치 못했습니다. 산 위에서 그 모습을 보고 계시던 주님께서 제자들을 구출하시기 위해 파도가 끓어오르는 바다 위를 걸어 오셨습니다. 주님의 모습을 발견한 제자들은 더 큰 무서움에 비명을 지르기까지 했습니다.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분이 주님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제자들은, 분명 유령일 것이라 생각한 까닭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 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말라"
그러나 제자들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여전히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외쳤습니다.
"정말 당신이 주님이시라면 지금 당장 내게 명령하여 나도 물위를 걷게 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즉석에서 베드로에게 물 위를 걸어오라 명령하셨습니다. 한 발 두 발 물 위에서 조심스럽게 발을 옮기던 베드로는, 그 러나 몰아치는 폭풍을 보는 순간 공포에 사로잡혀 그만 물 속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다가가시어 베드로를 건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이것은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물으심이란 사실을 아십니까? 믿음은 부드러운 미풍을 위해서 뿐 아니라 몰아치는 폭풍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참됨 여부는 잔잔한 호수 위에서가 아니라, 끓어오르는 고난의 파도 속에서 가려지는 것입니다. 그날 밤 제자들에게 닥쳤던 그 고난의 폭풍은, 주님과의 더 깊은 사귐을 위해 주님께서 베풀어 주셨던 은총이요 선물이었음을 그 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18:38b∼39)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해 보았지만, 십자가 사형에 처할 만한 죄를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이면 죄수 한 명을 특사로 풀어주는 관례에 따라 예수님을 풀어주기 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 사형에 처해 달라 고발한 유대인들에게 다시 나 가 그들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의 사주를 받은 유대인들은 한 목소리로 예수님이 아니라 강도 바라바를 풀어 달라고 외쳤습니다.

그 이후의 일을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옷을 입히고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19:1∼3)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에게 죽음고난이 구체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못보다도 더 예리한 가시관이 머리에 씌워져 이마가 찢겨져 나가고, 그 잔인한 채찍질로 인해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핏방울이 틔어 오릅니다. 무지막지한 로마군인들의 손바닥에 마구 뺨을 맞는 수모도 당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고난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그 고난은 십자가 위에서 사지가 찢어져 죽는 죽음으 로까지 연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야말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 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참혹한 죽음의 고난 속에서도 그 분은 그리스도의 길을 포기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헐버 트박사의 말을 빌린다면 예수님께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그 최악의 고난속에서, 그리스도로서 따라야 할 하나님의 명령만을 따 르셨기에, 그 분은 명실공히 그리스도가 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2절은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 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고 증거하고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 서 그 고난에 연연하며 한 순간이라도 비굴하셨더라면 결코 그리스도가 되실수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로 하여금 왜 그 참혹한 고난을 당하게 하셨습니까?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 으시는 고난을 당케 하시므로 인류의 구원자로 삼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분이 내 죄를 위해 죽으시지 않았다면 어찌 나의 구 원자가 되실 수 있겠습니까? 그 뿐만이 아닙니다. 죽으시고 무덤 속에 장사 지낸바 되셨다가 그 무덤을 깨트리시고 다시 사시는 부활주로 삼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분이 어찌, 언젠가는 죽어 무덤 속에 시체로 드러누울 수밖에 없는 우리 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부활주가 되실 수 있겠습니까?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오셨던 예수님께서는, 그 참혹한 고난을 통하여 온 인류의 구원자가 되셨고 영원한 부활주가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그 죽음의 고난이야말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 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의 결과인 동시에, 당신의 독생자를 위한 하나님의 은총이자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고난은 고난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자녀를 더욱 더 정금같이 빚 어 주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손길이요, 사랑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까지는 잘못된 길을 걸었지만,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지킵니다. 고난을 당한 것이 오히려 내게는 유익이 되었습니다. 고난때문에 나는 주님의 법도을 배웠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친히 일러주신 그 법이, 제게는 천만 금은보다 더 귀중합니다."(시119:67,71~72)

아무리 훌륭한 도자기라 할지라도 고난의 가마불을 지나지 않고서는 어찌 예술품이 될 수 있겠습니까? 쇠붙이가 고난의 용광로 속에서 연단되지 않고서는 어찌 강철이 될 수 있겠습니까? 금광석이 고난의 풀무 불 속에서 녹지 않고서는 어찌 정금이 되겠습니 까?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지금이야말로 죄의 길에서 돌아서 하나님을 향할 때입니다. 지금 고난을 통과하고 있습니까? 지 금이야말로 내가 믿던 하나님을 더 깊이 알 때입니다. 고난 속에 있습니까? 지금이야말로 내 영혼이 정금같이 제련될 유일한 기 회입니다.

지금 대기업들이 연쇄적으로 도산하고 적자는 겉잡을 수 없이 커지고 외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습니다. 한보사태와 대통령 차남으로 인해 정부와 공권력의 위신은 추락했고 정국은 혼미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국가의 위기입니다. 바꾸어 말해 고난의 시대가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닥쳐온 이 고난을 하나님께 감사 드립시다. 이 고난이 아니라면, 자신의 분수를 망각한 채 교만과 사치와 방 종과 타락과 온갖 죄악에 빠져 경거망동하던 이 민족이 언제 정신을 차릴 이 좋은 기회를 또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 고난이야말 로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아직 사랑하시는 증거입니다. 이 민족을 다시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고난 자체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이 고난의 시기에 우리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지 못하는 자가 될까 두려워합시다. 고난의 의미와 가치를 아 는 자에게 고난은 고난일 수가 없습니다. 고난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총은 없습니다. 고난이야말로 찬란한 부활을 향한 유일한 발판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그대여, 당신은 아십니까?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에, 그토록, 날 감동시키는 그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폭풍우가 휩쓸고 지날 때 어찌하여, 나는 더욱 강해지고, 참된 삶에 대한 확신은 더욱 커지는 것인지,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 합니다. 그러나 나는 폭풍우를 사랑합니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나는, 몰아치는 폭풍우를 몇 배나 더 사랑합니다." - 칼힐 지브란.

사랑의 주님!
우리에게 고난의 폭풍우가 몰아치지 않는다면 우리의 추악한 죄악과 교만, 오만과 방종이 어찌 깨끗하게 씻겨 질 수가 있겠습니 까? 고난의 폭풍우가 아니라면 우리가 어찌 진리를 향해 더 깊이 뿌리를 박을 수 있겠습니까. 고난의 폭풍우가 없다면 우리의 영 혼이 어찌 찬란한 무지개로 성숙해 질 수 있겠습니까.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고난이란 최대의 선물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고난주일 아침, 고난의 참 가치와 의미를 깨닫게 해 주셔서 더욱 감사합니다. 영광된 부활의 발판은 오직 고난뿐이란 사실을 어떤 경우에도 망각치 아니하므로, 우리의 삶이 날로 정금같이 변모케 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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