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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라는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8:28-32a
작년 12월 19일 새벽 2시 30분, 어머님의 목 오른쪽 경정맥이 짧지 않은 간격을 두고 두 번 희미하게 뛴 것을 마지막으로 어머님께서 86세의 생애를 이 땅에서 마감하셨을 때, 어머님의 머리 맡에서 어머님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던 큰 누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가셨다'
그러나 그것은 비통에 찬 어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듣는 이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평강을 느끼게 해주는 소망의 말이었습니다. '이제 가셨다'는 그 한마디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로 가셨다는 것을 의미함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이후 지난 80일 동안 어머님을 생각할 때마다 그 마지막 장면이 제 머리 속에 떠오르곤 합니다. 마치 주무시는 듯 평화로이 운명하시는 어머님, '이제 가셨다'고 나지막이 말하는 큰 누님, 그리고 그 방을 가득 채우던 신비스러운 하나님의 평강―제가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잊지 못할 장면입니다.
이와 동시에 그 장면을 연상할 때마다 제 마음 속에는 지울 수 없는 반문이 일어납니다.
믿지 않는 분들 역시 죽은 사람을 가리켜 '돌아 가셨다'고 말합니다. 믿는 우리의 표현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마저 같을 수는 없습니다. 믿지 않는 분들이 돌아가셨다고 말할 때 도대체 어디로 돌아가셨다는 것입니까? 소위 죽은 자의 귀신이 떠돌아다닌다는 구천입니까? 아니면 소위 북망산으로 대표되는 공동묘지입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번에 타계한 철저한 유물론자 등소평 주석의 유언과 같이, 단순한 물질로의 회귀입니까? 똑같은 세상을 똑같이 살아가서 이 세상을 떠날때가 이르러매 갈곳이 어디인지 알고서 가는자와, 그곳이 어디인지 도무지 알지도 못한채 떠나가는 자의 삶이 이 땅에서 결코 동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나온 그 분의 삶의 족적을 보건대 사회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한 원로께서, 지나온 당신의 생애를 하나님 앞에서 총정리하는 글을 쓰고 계시는데, 그 글의 제목이 '세상을 다녀가며' 입니다.
'세상을 다녀가며'―이 한 구절은 그 분의 신앙관과 인생관을 아주 뚜렷하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을 다녀간다는 말은 앞으로 가야할 곳뿐만 아니라, 어디로부터 왔는지 또한 알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시원과 최후의 목적지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인간의 혼돈과 인생의 혼미는 시작되고 심화됩니다. 내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바르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만이 이 세상을 목적이나 우상으로 삼음이 없이, 무엇을 위해 이 세상을 다녀가는 지를 바로 알고 바르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시인은,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것임을 잊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존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을 다녀가는 동안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양으로 살아야 함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요 16:28)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시발점도 종착역도 오직 하나님 아버지 되심을 분명히 일러주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우리가 이 세상을 다녀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꾸어 말해 우리가 이 세상을 다녀가는 동안 이 세상에서 추구해야 할 삶의 목표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그 해답을, 아버지께로 나와서 이 세상에 오셨다가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무엇을 하셨는지 살펴봄으로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8장 1절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각 성과 촌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을 다녀가신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단지 입으로 외치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구현을 위해 당신의 몸을 송두리째 십자가 위에 던지셨습니다. 그 십자가야말로 이 땅의 죄인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하는 구원의 능동적 수송선인 동시에,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하는 통로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고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우리가 이 땅을 다녀가는 절대적 이유 또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기 위함인 것입니다.
시편 100편을 노래한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분의 기르시는 양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 자체가 목적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함입니다. 진리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양떼로 살지 아니하고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하는 도구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작금 우리 나라가 모든 면에서 혼미하기 짝이 없는 것은, 이 나라의 통치권이 제대로 확립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지경이 되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하루 빨리 원인을 분석하고 시정하여 나라의 통치권이 바르게 세워지지 않는 한, 현재의 무질서와 혼란은 심해질지언정 수습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한다는 것은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인인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확립하는 도구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크리스천 개개인의 삶이 누구보다도 더욱 구체적이며 현실적이지 않으면 안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의 역사와 현실과는 무관하게 천상에서만 거하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성육신, 즉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시어 이 땅의 역사와 현실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시기 위해 누구보다도 구체적으로 사셨던 분이었습니다. 구체적인 현실 속에 구체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삶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땅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몰역사적이요, 비현실적이요, 반사회적임으로 인하여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의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고 할 때, 이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만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사후 목적지만으로 오인할 때, 이 땅의 역사와 현실을 도외시하거나 혹은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마치 이상적인 양 우리의 삶은 왜곡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지인 동시에,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이 땅에서 구현해야 될 삶의 목표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며 친히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여기에서 말하는 '나라'는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무엇보다도 우리 삶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구현이 우리 삶의 가장 큰 목표임을 분명히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바르게 인식할 때 크리스천들은 그 누구보다 역사에 대한 정확한 통찰력을 지니고, 현실이 아무리 암울하다 할지라도 회피하거나 도피함이 없이 그 현실을 뚫고 나가며, 극복하고 바르게 개선해 가는 구체적인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의 역사와 현실 속에서 누구보다도 구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함의 의미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위해 진리를 구체적으로 사는 것을 뜻함이요, 그것은 무엇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때와 장소를 보아가며 진리를 선별적으로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의 통치권 확립을 위한 온전한 통로가 될 수 없기에, 그 사람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구현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진리를 사는 자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될 수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에게 그 좋은 본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체포한 무리들은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의 사주에 따라, 결박당하신 예수님을 이번에는 빌라도 총독의 공관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러나 공관 앞에 당도한 유대인 중 누구 한 명 그 안으로 들어가려는 자는 없었습니다. 이미 지난 주일 살펴본 바와 같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의 거처는 다 부정하고, 그 속에 들어가면 부정을 타 그 부정이 일주일을 계속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의 거처는 설령 빌라도 총독의 공관처럼 웅장한 궁궐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장소를 가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날 밤부터 유월절 예식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들의 몸을 정결하게 지키려 했습니다. 정결해야 할 때가 따로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때와 장소를 가려가며 선택적으로 진리를 실천하려 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이중적인 위선자의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고,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을 가로막는 차단 막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3절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유대인들이 왜 총독 공관 안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던 빌라도는 밖으로 나가 유대인을 만났습니다. 그 곳에서 유대인들로부터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해 달라는 요구를 받은 빌라도는, 다시 공관으로 되돌아가 예수님을 그 안으로 불러 들였습니다. 그리고 공관 안에서 빌라도 총독과 예수님 사이에 문답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께서 로마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 역시 유대인이었습니다. 빌라도의 공관이 부정타며 공관안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하던 유대인들과 똑같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유대인들과는 달리, 나도 그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며 밖에서 버티시지 않았습니다. 조금도 개의치 않고 공관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빌라도의 공관을 전혀 부정타 여기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주님의 사고와 행동이 이처럼 유대인들과는 판이하게 다를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그 해답을 본문 36절이 증거 하는 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주님의 답변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추구하시던 주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였더라면, 주님 역시 부정한 곳과 정결한 곳을 따지시며 반드시 장소를 가려야만 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관습이요 가치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이 땅에 도래한 주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하나님의 나라였기에,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장소를 따질 필요도 없으셨고 또 따져서도 안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권을 이 세상 속에 편만하게 확립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 어디든 구별없이 가시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주님께서 아무 거리낌없이 빌라도의 공관으로 들어가시던 시각은 꼭두새벽이었습니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달라고 당부치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진실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시고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언제 어디서나 진리의 실천을 통한 하나님의 통로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그 고난과 수치와 죽음의 십자가 위에 당신의 몸을 송두리째 내 던지기까지 하셨습니다. 그것이 이 땅을 다녀가시는 동안 이 땅에서 행하여야 할 당신의 의무요, 죽기까지 진리를 행하는 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반드시 당신을 붙들어 책임져 주실것이요, 또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도래케 하실 것임을 확신하셨기 때문입니다.
과연 주님의 믿음은 헛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까지 기꺼이 감수하신 주님을 하나님께서 붙드시사 부활의 주로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오늘도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을 믿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친히 펼치시고 계십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께서 때와 장소를 가림 없이 진리를 온전히 사셨던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오늘이라는 시간과, 대한민국이라는 공간 속에서 유독 대한민국 사람으로 살게 하신 이유와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지금 부정과 부패가 난무하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 구현을 위한 진리의 도구로 쓰시기 위함입니다. 법과 질서가 유린당하고, 불의와 온갖 비리가 판을 치는 이 땅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진리를 살아간다는 것은 대단히 무모하고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 요령껏 세상과 타협하며 사는 것이 훨씬 더 실속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언제나 어디서나 진리를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함은, 첫째 이 세상은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라 단지 다녀가는 경유지일 뿐이요, 둘째 이 땅을 다녀가는 우리의 목표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는 것이요, 셋째 하나님의 나라는 진리를 좇는 사람에 의해서만 구현됨이요, 넷째 진리를 따르다 우리가 고난과 불이익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지막을 반드시 붙들어 책임져 주시면서, 우리를 통해 당신의 나라를 확장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카톨릭 사제였던 헨리 누엔(Henry Nouwen)은, 그의 저서 '우리의 가장 위대한 선물'(Our Greatest Gift)에서 그가 만났던 공중 곡예사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공중을 마치 우아한 무용수처럼 이리저리 날아오르고 서로 붙잡아 주는 것은 얼마나 매혹적입니까?
그런데 그처럼 환상적인 공중곡예가 가능한 것은, 날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붙잡아 주는 사람이 중요한 역활을 다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붙잡아 주는 사람은 그네에 거꾸로 매달린 채 0.1초의 정확성으로 날아오는 사람의 위치로 이동하여, 공중점프를 하면서 날아오는 사람을 정확하게 잡아채므로 곡예를 펼쳐갑니다. 날아가는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실수는 붙잡아 주는 자를 자신이 붙잡으려는 것입니다. 그 경우에는 십중팔구 붙잡아 주는 자의 손목을 부러뜨리거나, 아니면 자기의 손목을 부러뜨리게 되어 두 사람은 모두 끝장이 나 버리고 맙니다. 따라서 날아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두 팔을 뻗쳐, 붙잡는 사람이 반드시 자기를 붙잡아 아름다운 곡예가 펼쳐져 갈것을 의심없이 신뢰하는 것뿐입니다.
결국 아름다운 공중곡예를 최종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은 날아가는 사람과 붙잡아 주는 사람 사이의 믿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끊임없이 거듭된 훈련의 결과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어찌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어 갈수 있겠습니까? 이 땅의 현실이 아무리 암울하고 난마처럼 얽혀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이 땅위에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위해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삶을 내 던질 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당신의 팔로 우리를 붙드시사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친히 펼쳐 가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진정 이나라가 새로워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진리를 발판삼아 하나님을 향해 삶을 던지십시오. 그것이 이 나라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요,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부끄럼없이 돌아 갈수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이 세상은 목적지가 아니라 경유지란 사실을 말입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폭염이 이글거리는 광야에서, 해가 저문 벳세다 벌판에서, 폭풍우가 몰아치는 캄캄한 바다위에서, 이른 새벽 빌라도 총독의 공관에서, 그리고 한낮 죽음의 십자가 위에서까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몸을 던져 진리를 사시므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케 하는 통로가 되셨던 주님! 우리들은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불법과 무질서가 횡행하는 이 대한민국에서의 삶을 명령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껏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진리의 증인이 되지못한 것을 이 사순절 네 번째 주일 아침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부터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처럼 구체적으로 진리를 행하게 하옵소서. 주님을 본받아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향해 우리를 던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를 붙잡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이 땅의 암울한 현실 속에 하나님의 통치권을 확립하고 나라를 일구어 가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옵소서. 이 세상이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위해 잠시 다녀가는 경유지임을 늘 기억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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