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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닭이 울더라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8:15-27
프랑스의 작가 삐에르땅 빠셍이 쓴 작품 중에 '우리의 삶의 날들'이란 제목의 단편이 있는데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보그라는 마을에, 마음씨 착하기 그지없는 곱추 우그린이 누나 소랑케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데다가 어머니는 중증의 알콜 중독자였기에, 누나인 소랑케가 온갖 궂은 일을 마다 않으며 곱추 동생 우그린을 키웠습니다. 어느 날 소랑케는 뜻밖에도 도둑의 누명을 쓴 채 옥살이를 하고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뒤로 소랑케는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은 맹세코 결백했지만 사람들은 믿어 주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소랑케는 몸을 팔아 곱추 동생 우그린을 부양하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곱추 우그린이 마을로 나갔을 때 마침 그 곳에 모여 있던 무리들이 우그린을 밀어 넘어뜨리고는, 쓰러진 우그린을 발로 차고 밟으면서 창녀의 동생이라 놀려대었습니다. 그 곳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모두가 다 똑 같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 곳을 지나가던 그 마을 신부님이 그 장면을 목격하고 무리들에게 호통을 치며 피투성이가 된 우그린을 구출해 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말할 수없이 큰 충격을 받았던 곱추 우그린은 강에 투신하여 자살해 버렸고,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누나 소랑케는 권총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소랑케와 우그린 남매의 자살 소식을 접한 신부님은 '이들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무자비한 인간들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며, 가슴을 치면서 탄식했습니다. 마침내 장례식 날이 되었습니다. 우그린 남매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마을 사람들 역시, 좋은 구경거리라도 생겼다는 듯 모두 장례미사가 거행되는 마을 성당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며 미사를 집례 하는 신부님이 이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소위 기독교인들이여, 이 세상 마지막 심판 날 공의로우신 주님께서 '내 양떼들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신다면 나는 '모르겠습니다'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내 양떼들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신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내 양떼들은 어디 있느냐?' 하고 또 물으신다면, 그때 나는 부끄러움과 송구스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주님이시여! 저들은 양떼가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이리떼들이었습니다."
착하디 착한 곱추 우그린과 마음씨 고운 누나 소랑케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그 마을 사람들이 신부님의 눈에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주님의 양떼들로는 더더욱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이리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 이리떼들과 함께 얼굴을 마주보고 살아야 하는 그 신부님의 절망감과 좌절감이 얼마나 컸을런지는 그의 설교를 통해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보그 마을의 이 신부님이 오늘 이 땅에 와서 우리의 삶을 안팎으로 속속들이 살펴본다면 과연 무엇이라 말하겠습니까? 이 세상 마지막 심판날 공의로우신 주님께서 '내 양떼들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때 '주님, 주님의 양떼들이 서울에 모여 있습니다'라고 신부님이 답할까요? 온갖 부정과 비리가 난무하고, 온 나라를 거덜나게 하고서도 누구하나 책임지는 사람없이 변명과 은폐에만 급급한 우리를 바라보며, 그 신부님은 부끄러움과 송구스러움을 무릅쓰고 똑같은 대답을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시여! 저들은 양떼가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이리떼들이었습니다.'
우리 중 누구이든 이 답변을 부정할 수 없다면, 이리떼들만이 득실거리는 이 시대 역시 절망의 시대요, 좌절의 시대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암울한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신부님처럼 절망하고 탄식하는 것으로만 그치겠습니까? 아니면 지금 세인들처럼 비방과 비난, 그리고 비판으로만 일관하다가 모두 함께 공멸하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처럼 의미 없고 무가치한 삶을 살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발상의 대전환입니다.
우리가 이리떼와 같은 인간들에 대해 절망하고 탄식하는 까닭은 하나―인간은 본래 이리가 아니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결코 이리일 수 없는 인간이 하루 아침에 이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면 인간사에서 그보다 더 절망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과연 그러합니까? 하나님의 법을 유린한 채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이 이리가 아니었습니까? 동생 아벨을 단지 시기심으로 쳐 죽였던 카인이 이리가 아니었단 말입니까? 아내야 어찌 되건 말건 자기 한 목숨 살겠다며 아내를 동생이라 속였다가 그 아내를 빼앗겼었던 아브라함이 이리가 아니었습니까?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애굽인을 때려 죽였던 모세가 이리가 아니었습니까? 삼촌을 교묘하게 속여 삼촌의 재산을 횡령하여 부정축재했던 야곱이 이리가 아니었습니까? 충복의 아내와 몰래 통정하고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아예 충복을 살해해 버렸던 다윗이 이리가 아니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돌로 쳐죽이던 바울이 이리가 아니었었단 말입니까? 도대체 성경에 나타난 인간 중 본래 이리가 아니었던 자가 단 한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오죽했으면 성경이 이렇게 단언했겠습니까?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 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2-3)
하나님 보시기에, 이 세상에 인간같은 인간, 양같은 인간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든 인간이 한결같이 이리떼들일 뿐이었습니다.
알겠습니까? 우리는 본래 모두 이리들이었습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에게는 더 절망할 것이 없습니다. 이리가 이리 짓을 하는 게 당연한 데 뭘 새삼스레 더 절망할 게 있겠습니까? 오히려 인간이 본래 이리였음을 알 때 절망 속에서 우리는 반대로 말할 수 없는 소망을 갖게 됩니다. 본래 이리와 같은 인간을 사람다운 사람, 인간다운 인간으로 거듭나게 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말씀, 그 분의 사랑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보면 탄식할 수밖에 없으나 눈을 들어 그 분을 보면 우리에게 소망이 넘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의 집 뜰에 서 계십니다. 군대와 천부장과 대제사장의 종들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체포, 결박하여 그 곳으로 끌고 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아 왔던 자들은 여전히 그대로 그 집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본 대제사장은 즉각 예수님을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곁에 있던 하속 한 명은 예수님의 답변 태도가 불손하다 하여 예수님을 주먹으로 쳤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 부인하며 예수님을 욕하고,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또 다른 제자 한 명은 대제사장 측과 은밀하게 내통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지금 대제사장의 집안에 있는 사람들은 대제사장에서부터 시작하여 베드로에게 이르기까지 모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진리를 결박하고 폭행하고 저주하고 부인하고 조롱하는 이리떼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리떼들 중의 한 사람인 베드로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며 이리 같은 짓을 서슴치 않고 있을 바로 그때 닭이 울었다는 것입니다. 새벽에 닭이 우는 것은 다반사로 있는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중요한 대목에서 그런 것까지 성경이 증언하고 있습니까?
마태복음이 그 이유를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저(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 26:74-75)
그날 새벽 닭이 울었다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닭이 우는 바로 그 순간에, 베드로가 자신의 잘못을 통감하고 참회하면서 통곡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 순간이야말로 이리 떼들 속에서 이리와 같던 베드로가 인간으로서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에게 이와 같은 극적인 반전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닭이 우는 소리를 듣는 순간,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할 것이란 주님의 말씀이 베드로의 심령을 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닭 울음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 소리는 바로 주님의 음성이요 말씀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말씀이 이리와 같던 베드로의 심령 속에 인간성을 소생케 해 주셨던 것입니다.
누가 복음 22장 61절은 바로 이때, 닭이 우는 그 순간, 예수님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 쳤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심문 당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곁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욕하고 저주했습니다. 에수님께서도 그 소리를 다 들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친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쳐다보시는 주님의 눈초리는 예전과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여전히 호수와 같이 잔잔한 사랑과 용서와 포용의 눈초리 였던 것입니다. 주님의 그 사랑, 그 생명의 말씀을 외면할 때 베드로는 이리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 사랑, 그 말씀 앞에 바로 섰을 때에 그는 참다운 인간으로 거듭나는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었던 것입니다.
본문 속의 대제사장 집은 보그 마을의 신부님이 그토록 통탄해 마지않았던 이 세상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곳에는 온통 이리떼들밖에 없습니다. 이리떼들만 들여다 보노라면, 절로 터지는 탄식과 더불어 그저 눈앞이 캄캄할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절망 가운데 침몰치 아니하고 오히려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이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생명의 주, 진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곳에 계시는 까닭입니다.
크리스천이 경영하는 기업에 세무서에서 실사를 나왔습니다. 마침 실사를 나온 세무 공무원도 크리스천입니다. 기업주와 세무 공무원이 함께 기도하고 세무실사를 시작합니다. 세무 공무원은 그 기업이 단돈 1원의 외형 누락도 없이 세무 자료를 100% 발생시키고 있는데 감동을 받고, 기업주는 세무 공무원이 어떤 부당한 요구도 없이 법대로 처리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실사가 다 끝난 뒤에 단돈 1원의 떡값 수수도 없이 서로 격려하며 헤어집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도대체 그게 어느 나라 이야기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이야기라 하면 당치도 않는 이야기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우리 나라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제가 이처럼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작년 10월 달에 저희 집 2층에서 있었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합정동 2층에는 제가 1974년 설립하여, 아직까지 '믿음의 글들'을 펴내는 홍성사 사무실이 있습니다. 지난 해 10월 14일 홍성사로 세무소에서 정기 법인세 실사를 나왔는데 그 날이 마침 월요일이어서 제가 서재에 있었던 터라, 실사 나온 반장이 아직 법적으로 발행인인 저를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홍성사 사무실로 가서 그 분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홍성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 기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립이래 지난 22년 동안 단돈 1원이라도 외형을 누락시키거나 고의로 탈세를 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번에 실사 나오신 김에 잘 살펴보시고 저희들이 혹 잘못 알아 틀렸거나 혹은 계정을 잘못 처리한 부분이 있으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반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도 크리스천이고 또 홍성사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저도 예전에는 부끄러운 삶을 살았지만, 주님을 만난 뒤로부터는 크리스천답게 살아가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매일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 기도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면서 온갖 유혹을 이기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세무 공무원의 양심으로 실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세무회계와 기업회계상의 차이 때문에 혹 추가로 세금을 더 납부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저를 위해, 그리고 이 땅의 세무 공무원들을 위해 기도 한번 해 주십시오."
저는 그 분을 위해, 그리고 세무 공무원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 드렸습니다. 기도가 끝났을 때 그 분은 이런 당부를 잊지 않았습니다.
"목사님, 제가 지금처럼 바르게 살 수 있도록 생각 날 때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 이후 저는 그 분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공직자들이 그 분 같아지기를 기도 드립니다.
요즈음 신문을 펼치면 비리에 연루된 공직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기사를 보면 정말 절망적입니다.
지난달 노동법 변칙 처리와 관련하여 노동계가 펼쳤던 총 파업을 반박하는 전 5단 광고를 자비로 일간지에 게재하여 화제를 모았던 모기업 대표가 지난 14일 한국 경영자 총 협회 주최 조찬 세미나에서 그가 그 동안 사업상 상대했던 공직자들이 얼마나 부패했었는지를 발표하며 울분을 토했던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그런 기사를 접하면 말못할 절망감에 그저 숨이 막힐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절망만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방금 말한 세무 공무원과 같은 참다운 크리스천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가 아무리 썩고 부패했다 할지라도 아직까지 지탱되고 있음은 사회 요소 요소마다 그와 같은 참 인간이, 참다운 크리스천이 박혀 있기 때문임을 저는 확신합니다. 그들이야말로 이 시대, 이 사회, 이 민족의 희망이요, 소망입니다. 그 소망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이리와 같은 우리를 참 인간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 주님의 생명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신문 지상을 오르내리는 비리자들과 우리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적발되었고 우리는 아직 적발되지 않았다는 것뿐이지 않습니까? 주님의 사랑과 말씀을 외면할 때 우리 모두 사람이 아니라 이리였음을 우리 자신이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사순절 첫째 주일을 맞이하여 이리였음을 회개하십시다. 그리고 그 분의 사랑과 말씀 앞에 바로 서므로 우리 모두 베드로처럼 통곡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우리 각자의 통곡 속에만 이 민족의 소망이 있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이리는 통곡할 줄 모르는 반면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만 통곡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우리는 이제껏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양떼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자기 욕망으로 인해 울부짖는 이리들이었을 뿐입니다. 그러고서도 남을 비난하고 비방했으며 이리가 이리를 욕하는 것과 같은 한심한 작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어 사랑으로 생명의 말씀으로 함께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사랑과 말씀에 바로 응답하여 통곡하는 베드로, 회개하는 베드로, 참다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옵소서. 거듭난 베드로로 인해 인류의 역사가 새로와지듯이, 거듭난 우리로 인해 이 사회가 정녕 새로와지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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