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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제자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8:15-27
근대 프랑스가 낳은 가장 위대한 수도자였던 사를르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는 1858년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카톨릭 국가였기에 그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어린 나이에 양친을 여의면서 그는 신앙의 길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육군사관학교에 진학, 장교가 되어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반란군 진압에 참여하여, 상관의 명령에 따라 반란군의 심장을 겨누어 총을 쏘면서 그는 인생에 대하여 큰 회의를 갖게 됩니다. 그 후 군대를 스스로 떠나 학자로써 모로코를 탐험하던 중, 그 곳의 이슬람 교도들이 깊은 신앙 속에서 신앙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하나님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다시 기독교로 귀의합니다.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의 수도원 생활을 거쳐 그의 나이 43세가 되던 1901년 신부 서품을 받은 후, 당시 세상에서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여겨지던 아프리카 사하라의 베니아베스로 들어가, 1916년 12월 한 토착민이 쏜 총에 맞아 숨질 때까지 15년 동안 그곳에서 그곳 원주민들과 더불어 살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느 날 푸코는 나무를 보면서 깊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나무는 떨어지는 자신의 잎이나 부서져 나가는 가지에 대해 아무런 염려를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떨어지지 못하도록 기를 쓰거나 떨어지는 것을 잡으려고 전혀 안달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저 의연할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들이 떨어져 나가는 재물이나 건강이나 생명 때문에 염려하고 절망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하찮은 나무보다도 더 못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근심하거나 탄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뒤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 여러분은 무엇이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십니까? 푸코의 답변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이야기합니까? 그러나 정말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진정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부족함 없는 신앙을 갖고 있습니까?
진짜 향나무와 가짜 향나무의 차이가 언제 드러납니까? 도끼에 찍히는 순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향나무는 찍힐수록 향기를 더욱 진동하지만, 가짜는 찍을수록 도끼의 날만 상하게 할뿐입니다. 겉모습은 똑같아 보일 수 있지만 찍히우므로 비로소 진위가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생화와 조화의 차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진짜 꽃의 잎은 떨어지지만 인조 꽃잎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진짜 꽃은 벌이나 나비에게 기꺼이 자신의 꿀을 빼앗겨 주고 나누어주지만, 모조 꽃은 떨어지거나 빼앗길 것을 아예 소유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요즈음 조화를 얼마나 잘 만듭니까? 구별이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떨어짐과 빼앗김의 유무에 따라 생화와 조화 여부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자인가 아닌가는 평소에는 판가름 나지 않습니다. 오직 결정적인 때에 드러나는 법입니다. 내 건강이, 내 재물이, 내 생각이, 내 뜻이 찍히고 떨어지고 빼앗기고 부서지고 깨어져 나갈 때, 바로 그 순간에서 마저 우리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한다면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그 결정적일 때를 위해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일 때,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믿음이 필요할 때에 비신앙적인 길을 걷는다면 우리는 아직까지 참된 신앙인 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를르 드 푸코는 크리스천들이 이처럼 결정적일 때 오히려 비신앙적으로 처신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보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보기 때문이요, 둘째는 하나님보다는 내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더 크게 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적절한 지적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들여다 본들 탄식밖에 더 나오겠습니까?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극대화하여,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자요, 가장 불행한 자요, 그 누구보다 비참한 자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자란 피해망상에 젖는다면 절망 외에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샤를르 드 푸코가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의뢰하고, 하나님보다 자기 상황을 더 크게 여기는 자였다면, 어찌 그 절망적인 사하라 속에서 금세기를 밝히는 진리의 불꽃, 인류의 양심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매일 매일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면서, 모든 면에 걸쳐 진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스스로 훈련하지 않는 한, 이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 되기는커녕,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정말 추한 인간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는 것―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세지입니다.
주님의 제자였던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예수님께 어떤 호언장담을 했었는지를 4복음서는 이렇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 13:37)
얼마나 자신에 찬 고백입니까? 베드로는 이처럼 고백만으로 그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나타난 군대가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순간, 칼을 뽑아 휘두르며 그들 앞을 가로막고 선 사람은 베드로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어떻게 베드로 홀로 그처럼 용감할 수 있었습니까? 그는 그와 함께 하고 계신 예수님께서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에 독립을 가져다 줄 정치적 메시야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지금 주님을 잡으러 나타난 군대의 수효가 얼마이든지 간에, 주님께서 광풍이 몰아치는 바다를 잠재우시던 그 능력으로, 떡 다섯 조각과 물고기 두 토막으로 5천명이 넘는 대 군중을 먹이시던 그 권능으로, 그들을 완전히 쓸어버리실 것을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주님 앞에서 그 주님을 위해 단신으로 군대와 맞선다는 것은 오히려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의 눈 앞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처럼 철썩같이 믿었던 주님께서 군대를 쓸어버리시기는커녕 저항한번 없이 잡히시는 게 아닙니까? 그저 무기력하게 결박을 당하고 계십니다. 그리고는 마치 개 끌려가듯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베드로가 상상하던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머리 속에 그리던 메시야의 형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소망하고 바라던 사건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그의 신념이 찍히우고 꿈이 꺾어지며 계획이 부서지고 희망이 떨어지며 야망이 빼앗기우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 결정적인 순간에 베드로가 무엇을 했다고 오늘의 본문이 증거하고 있습니까?
"문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17)
결박당하신 채 끌려가는 예수님을 따라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안 뜰에 들어갔을 때, 문을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너도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냐'고 묻자 베드로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아니라고 간단하게 부인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버릴 찌라도 나만은 주님을 버리지 않겠노라 장담하던 그 베드로가 말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아니라 하니"(25)
이번에는 뜰 안에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지만 이번에도 베드로는 한 마디로 부인해 버렸습니다. 내가 죽을지언정 어떤 경우에도 주를 부인치 않겠노라 맹세했던 베드로가 말입니다.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라,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26)
마침 그곳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가 칼을 휘두르는 것을 직접 목격했던 증인이 있었습니다. 그가 베드로를 분명히 알아보았지만 베드로는 역시 부인으로 일관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 의하면, 이때 베드로는 자신이 정말 예수님과 무관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저주하고 욕하며 맹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주님 가시는 곳이라면 감옥에도 죽는데도 따라가기로 이미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고 큰소리 치던 베드로,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마저 아까워하지 않겠다던 바로 그 베드로가 말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생각과 뜻과 꿈이 여지없이 찍히우고 부서지고 깨어지고 떨어지고 빼앗겨 나가는 그 결정적인 순간을 맞아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 너머 계시는 하나님을 보아야만 했습니다. 그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이 아니라 더더욱 하나님을 의뢰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베드로는 가장 결정적일 때 상황만을 보고 자기만을 의지하므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추악한 배신자가 되고 말았고, 그 일생 중 가장 수치스러운 기록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문 속에서 베드로보다 더 추악한 인간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 15절 상반절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15a)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는 예수님을 베드로만 뒤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제자 한 명이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뒤를 좇고 있었습니다.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15b-16a)
그 제자는 평소에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잘 아는 사이였는지 대제사장 집 문 앞에 당도한 베드로가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고 문 밖에서 기다리는 반면, 그 제자는 분명히 그 집에 경비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그 집을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는 자였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본문은 더 놀라운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 왔더니"(16b)
대제사장의 저택이라면 이스라엘에서 최고 실권자의 집인데 어찌 아무나 출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대제사장의 집안으로 먼저 들어갔던 그 제자가 다시 나와 문 지키는 여종에게 말하자, 그때까지 문 밖에서 기다리던 베드로도 그냥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베드로의 얼굴을 본 여종이 '너도 예수의 제자가 아니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신성모독법, 국사범으로 끌려 대제사장의 집에 끌려와 심문을 받고 있는 중이라면, 그 집의 하속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소위 '예수일당'은 모두 일망타진해야 하는 대상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속은 또 다른 제자에게는, 그 역시 분명히 예수님의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의문이나 질문도 제기치 않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겉으로는 예수님의 제자인 것처럼 살아가면서도 내막적으로는 대제사장과 내통하던 자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자기를 감추고 있는 이 추악한 제자가 누구였을까요? 칼빈의 말처럼 그것은 공허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요한은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표현할 때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 표현하지, '다른 제자'라 표현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만에 하나라도 요한 자신이었다면 요한은 이 후에 반드시 회개의 사실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엄청난 죄를 짓고서도 회개치 않았다면, 결코 복음서를 기록하는 주님의 사도로 쓰임 받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배신했던 가룟 유다였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만약 가룟 유다였다면 요한이 그 이름을 본문 속에서 밝히지 않았을 리도 없고, 더욱이 이미 예수님의 배신자로 증명된 가룟 유다와 베드로가 함께 걷거나, 그 가룟 유다의 청탁으로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 리는 더욱 만무합니다.
몇몇 주경학자들의 주장처럼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 자신이었을까요?
예수님께는 초기부터 주님을 따르던 12명의 제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복음서는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과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던 니고데모 역시 제자라 부르는 등, 2명 이외에 제자라 불리우는 자들이 더 있었음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 속에서 자신을 숨긴 채 대제사장과 내통했던 그 제자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처럼 끝까지 불의와 은밀하게 내통했던 그의 삶은, 비록 그 댓가로 현실적인 이득을 취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한 순간만이 아니라 일평생동안 결정적으로 추악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어리석고 추악한 제자가 바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우리가 바로 공개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이요, 숨어서는 온갖 불의와 내통하는 치사한 인간들이 아닙니까? 우리의 이와 같은 이중적인 삶때문에 이 세상이 점점 더 추악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과 우리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아니 분명한 차이가 있긴 있습니다. 그의 허물은 이미 공개된 데 비해 우리는 본문속의 제자처럼 아직까지 우리의 이름을 감춘 채 숨어서 그 짓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충청북도 능곡에 있는 조그마한 식당 벽에는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인 그 집 딸이 지은 시가 걸려 있습니다.
듣기만 해도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아름다운 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내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십시다. 목전의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그 분의 빛으로 우리를 채우십시다. 그래서 내 존재가 찍히고 부서지는 결정적인 순간에 이 빛을 발하십시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아니 일평생토록 이 빛 속에서 살아가는 맑고 밝은 그리스도인이 되십시다.
나의 정화없이 이 사회는 정화되지 않습니다. 이 사회는 비판만으로 바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내가 빛 가운데 거하는 만큼 이 세상은 맑고 밝아지는 것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므로,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부인하는 베드로가 아니라, 통곡하며 회개하는 베드로가 되게 도와주십시오. 눈 앞에 펼쳐진 상황보다는 그 너머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은밀하게 불의와 내통하는 추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한평생 빛의 증인이 되게 해 주십시오. 내 존재가 찍히우고 꺾이우고 부서질 때, 그때도 이 빛을 발하므로 이 빛으로 이 세상을 맑히고 밝히는 자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어린아이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부모를 신뢰하듯,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쉬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충만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임을 보여주는 자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 사회는 비판만으로 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빛의 증인이 됨으로부터 시작됨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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