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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 요한복음 18:1-14

by 【고동엽】 2021.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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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8:1-14


지난 주간에 육 해 공군 본부가 있는 계룡대를 다녀왔습니다. 계룡대 인근에 있는 육군 항공대를 방문했을 때, 착륙장에는 UH-1H형 헬리콥터가 여러 대 착륙해 있었습니다. 60년대 월남 전에서 진가를 발휘하던 그 헬기의 현 시가는 25억원이라 했습니다. 격납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 곳에는 이제 방금 본 UH-1H형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헬기가 정비를 받고 있었습니다. 일명 'BLACK HWAK', '검은 매'라고 불리는 UH-60형으로써 참모총장 전용기였습니다. 헬기 내부에는, 비상시 참모총장이 그 속에서 전쟁을 지휘할 수 있는 모든 장치가 다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지상의 어떤 사격이나 미사일 공격으로부터도 탑승자의 안전을 지킬 수 있도록 완벽하게설계되었다고 했습니다. 헬기의 여러 가지 기능에 대한 교관의 설명은 가히 환상적이었습니다. 현재 싯가가 80억원이라 하니, 밖에 있는 헬기 3대보다 더 비싼 가격이었습니다. 그러나 교관의 설명대로라면 결코 비싸다고만 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전에 관한 한 최고의 헬기였습니다. 헬기의 엔진은 지붕 위에 장착되어 있다는 교관의 설명에, 그렇다면 헬기의 제일 앞 부분에는 무엇이 부착되어 있느냐고 묻자, 교관은 전문용어로 헬기의 코라 불리우는 제일 앞쪽의 'nose compartment'의 뚜껑을 열어 보였습니다. 그 곳에는 크고 작은 상자들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모두 헬기를 움직이는 첨단장치들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저는 한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오른쪽과 앞 부분에는 속이 텅 빈 쇠틀이 각각 하나씩 붙어 있었습니다. 그 속에도 분명히 첨단 장비가 설치된 상자가 들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보이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교관에게, 왜 그 두 틀은 속이 비어 있는지 이유를 묻자, 교관은 쓴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 두 부분이, 미국 정부가 이 헬기를 우리 나라에 판매할 때 빼어 버리는 부분입니다. 말하자면 이 헬기의 최첨단, 핵심기술이 들어 있는 부분입니다. 그 기술이 유출될까 두려워 미국정부는 법으로 판매를 금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도대체 어떤 기술인지, 무슨용도인지 조차도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씁쓸한 이야기였습니다. 교관의 그 설명은 저로 하여금 두 가지를 절감하게 했습니다. 첫째는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이었습니다. 80억원이나 되는 거금을 지불하고서도 가장 중요한 핵심 기술이 빠진 것밖에 살 수 없고, 그것을 당연히 여길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나머지라도 가지게 된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면, 미국인들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미국인들 앞에서 너무나 비참하지 않습니까? 틈만 나면 5천년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이제 겨우 200여 년의 역사밖에 갖지 못한 미국인들과의 관계에서 우리 스스로 2류 3류 민족으로 자족할 수밖에 없다면 이보다 더 큰 수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가와 국민들은 나라야 어찌되건 말건 정쟁이나 일삼고 밥그릇 싸움만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온 국민들이 한 마음이 되어 나태와 안일과 방종그리고 무절제에서 벗어나 각자 맡은 책무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지 않는 한, UH-60형 헬기의 nose compartment가 지금은 두 곳이 비어 있을 뿐이지만, 머지않아 세 곳 네 곳이 비게 되는 더 큰 수모를 당하고야 말 것입니다.

둘째는 진정한 차이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주한 미군도 HU-60형 헬기를 보유하고 있을 것입니다. 한국 상공에 한국군의 헬기와 미군의 헬기가 같이 날고 있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다. 두 대가 똑같은 UH-60형입니다. 모양도 똑같고 길이도 똑같습니다. 이 착륙시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 또한 동일합니다. 두 대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나타나 보이지 않습니다. 누가 보아도 똑같은 기종이라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사실입니까? 아닙니다. 그 두 헬기는 결코 동일치 않습니다. 한 대가 부품을 완전히 갖춘 완전한 헬기라면, 나머지 한 대는 가장 중요한 알맹이를 갖지 못한 불완전한 헬기입니다. 뜨고 오르고 날고 내리는 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한 상황 속에서도 두 대 사이에는 차이가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알맹이를 제대로 갖춘 헬기와 그것을 갖지 못한 헬기는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고야 말 것입니다. 그것은 외적 차이가 아니라 내적 차이입니다. 진정한 차이는 외적 조건에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내적상태, 바로 알맹이의 유무입니다.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 모두 그리스도인들이 됩니다. 주일이면 교회를 나오고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바치고 또 봉사를 합니다. 겉으로는 모두 동일해 보입니다. 아무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사실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녀야 할 알맹이를 지닌 자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도 있을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여부는 외적 조건이 아니라 내적 상태로 드러납니다. 그 속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녀야 할 알맹이를 지니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평소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어 보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엄청난 차이를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으로써 마땅히 품어야 할 알맹이를 추구하지 아니한, 혹은 못한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알맹이가 빠져 버린 자기 자신에 대해 수치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수치를 느낀다는 것은 개선의 여지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치를 느끼기는커녕, 알맹이가 결여된 외형에만 만족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본문 속의 가야바처럼 알맹이 없는, 속빈 강정이 되고 맙니다. 한평생을 애쓰면서 땀흘리며 살아온 결과가 알맹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빈 껍데기만으로 끝나 버린다면 그보다 더 허망한 인생은 없습니다.

지금 가룟 유다 일행이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 당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순간,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칼을 뽑아 휘둘렀는데, 대제사장의 종이었던 말고가 그 칼에 맞아 오른쪽 귀가 떨어져 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땅에 떨어진 말고의 귀를 주우시사 귀에 붙여 도로 낫게 해 주신 다음, 베드로를 향해 다음과 같이 꾸짖으셨다고 마태복음 26장 52절로 53절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여기에 영이란 단어 lege�n은 군단을 가르키는 말로써, 당시 로마의 1개 군단은 보병 6,000명과 마병 7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따라서 12영이라면 12군단으로써 보병 7만 2천명과, 마병 8,400명으로 구성되는 엄청난 군대였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달려온 군사의 숫자가 얼마였던 지간에, 예수님은 그들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더 큰 군대를 하시라도 하늘로부터 동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길을 선택하시지 않았습니다. 검을 쓰는 자는 반드시 검으로 인해 망한다는 사실, 다시 말해 폭력은 예외없이 더 큰 폭력 앞에 굴복하고 만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셨던 것입니다. 폭력은 손쉽게 승리를 가져다주긴 하지만 그러나 그때의 승리란 일시적인 승리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참혹한 패배의 전주곡일 따름임을 잘 아셨기에, 예수님은 폭력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주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11)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우리가 다 함께 마시자고 말씀치 않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오직 당신 홀로 마시겠다 말씀하셨습니다. 당신 한 사람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므로 만인을 살리시는 것―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법칙이요, 계획임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순순히 체포에 응하셨고, 본문 12절로 13절은 그 이후를 다음과 같이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예수님 체포에 성공한 군대는 예수님을 결박한 뒤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안나스는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최고 종교지도자인 대제사장으로 군림했던 자로써, 지금은 대제사장직을 사위인 가야바에게 세습해 주었으나, 종교적 실권은 여전히 그가 행세하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체포하자마자 제일 먼저 그에게로 끌고 갔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나 제나 권력에 관한 한 누가 실세인지를 분간하는 민감한 촉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안나스의 사위인 가야바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14)

 

베다니에서 살던 나사로란 청년이 어느 날 갑자기 죽었습니다. 장사한지 나흘이나 지나 시체에서 썩은 악취가 풍기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 마을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시어 '나사로야 나오라' 외치시매 그 단 한마디에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 무덤으로부터 걸어 나왔습니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 소문은 삽시간에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퍼져 나갔고, 자연히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의 수가 급증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종교적 기득권을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낀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급히 회동하여 대책을 숙의하게 되었습니다. 회의 참석자들이 묘책을 찾지 못하자,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가 이렇게 일갈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 하는도다"(요 11:50)

 

한 사람이 죽으므로 백성 전체가 소요에 빠짐없이 유익과 안녕을 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때로부터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구체적으로 모의하기 시작했음을 요한복음 11장 53절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죽으므로 모든 백성을 살릴 수 있다는 가야바의 제안이 유일 무이한 대안임을 그 곳에 참석한 자들은 모두 확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도 형식상으로는 유대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봉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죽으므로 만인을 구원할 수 있다는 하나님의 법칙을 당신의 철칙으로 삼는 분이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야바와 그 집단은 어떠합니까? 그들도 유대인입니다. 그들도 여호와 하나님을 신봉하는 자들입니다. 그들 역시 한 사람의 죽음이 뭇 백성을 살릴 수 있음을 철저하게 신봉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이나 가야바 집단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양자 모두 그 누구보다도 한 사람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양자는 모든 면에서 똑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합니까? 양자는 정말 똑 같습니까?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똑같아 보였지만 그러나 한 꺼풀만 벗겨보면 그 속은 본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이 죽어 만인을 살릴 수 있다 하심은 인간에 대한 사랑의 발로였습니다. 그러나 가야바 집단이 똑같은 말을 한 것은 경쟁자로 인식되는 인간에 대한 증오심이 그 동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의 죽음으로 살리기 원하셨던 것은 영원히 살아 있을 인간의 영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야바 집단이 한 사람의 죽음을 발판으로 살리기 원했던 것은 썩어 없어질 인간의 육이요, 백해 무익한 인간의 욕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이 죽어 만인을 구원하실 수 있다 말씀하실 때 그 한 사람은 당신 자신이었습니다. 당신 한 사람이 죽으므로 만인을 살리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가야바에게 있어서 죽어야 할 한 사람이란 자신이 아닌 타인이었습니다. 타인을 죽이므로 자기들이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과는 근본적으로 틀렸습니다. 겉모습은 같아 보였지만 알맹이가 달랐습니다. 아니,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로써 지녀야 할 알맹이를 갖지 못한 자들이 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속 빈 강정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가장 중요한 핵심 알맹이가 비어 있는, 한국군이 보유한 UH-60형 헬기와 같은 셈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품어야 할 알맹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타인을 죽여 나의 유익을 꾀하려는 헛된 욕망이 아니라, 나 한 사람이 죽으므로 모두를 살리려는 십자가 정신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명령이요, 그리스도의 정신인 까닭입니다. 이 알맹이를 품고 있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알맹이를 지니지 못했다는 것은, 겉은 그럴듯해 보여도 실상 그 속은 진리를 못박는 가야바와 같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자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자에게 무서운 고통이 될 따름입니다. 그와 같은 자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 타인을 서슴없이 죽이는 자인 까닭입니다. 오늘 왜 이렇듯 세상이 시끄럽습니까? 오늘 왜 우리의 가정에 화평과 평안이 없습니까? 자기를 위해 남을 죽이려는 가야바는 많은데, 자기 한 사람이 죽어 모두를 살리려는 진정한 크리스천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저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참된 크리스천과 구별하여 'church goer', 즉 문자 그대로 '교회 가는 자'로 부릅니다. 이 시대는 가야바와 같은 church goer를 더 이상 요구치 않습니다. 가야바는 세상을 허무는 자 일뿐, 어떤 경우에도 새상을 세우는 자가 아닙니다. 알맹이를 지닌 참된 크리스천, 즉 모두를 위해 자기가 죽는 한 사람을 요구합니다. 그 한 사람이란 타인을 위해 희생과 헌신을 감수할 수 있는 자, 내 속상함을 견딜 수 있는 자입니다. 가장 중요한 알맹이가 빠져 버린 UH-60형 헬기에 자족할 수 없지 않습니까?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여 그 빈 곳을 우리의 기술력으로 매꾸어야 민족적 긍지를 지닐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없는 것을 힘쓰며 채우는 것이 우리의 의무일진대, 그런데 우리 주님은 어떠하십니까? 당신 한 사람이 죽으므로 우리 모두를 살리셨던 그 분은 부활하시어 지금 우리늘 도와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알맹이를 채워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당신의 사랑으로, 당신의 진리로, 생명으로, 정신으로 우리를 충만케 해 주시지 않습니까? 그분 자신이 우리속에서 우리의 알맹이가 되어 주시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분을 외면하고 가야바 같은 속빈 church goer로 만족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인 우리 자신에 대한 모독이 아닙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이제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내 속에 계시는 주님을 배척하는 속빈 가야바, church goer의 삶에 종지부를 찍으십시다. 그리스도를 품고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십시다. 인간의 영혼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영혼을 사랑하는 자만 스스로 육체를 죽일 수 잇습니다. 오직 그 속에서만 우리 모두의 소망이 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가야바의 방법은 반드시 한계를 갖기 마련인 폭력이기에 그 결국은 피아간에 공멸로 끝날 수밖에 없지만, 남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는 것은 영원한 사랑이기에 그것은 모두의 공생으로 귀결됩니다.

그것이 사실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구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당신 한 사람이 죽으셨던 주님께서 부활하시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그것만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이 세상을 정녕 더불어 아름답게 살아가는 유일한 대안임을 증명해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우리는 지금 누군가 먼저 죽어야 이 난국이 수습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먼저 죽기 보다는 네가 먼저 죽어라고 요구만 하고 있습니다. 이제껏 아내더러 죽으라 명령하던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이 먼저 죽어 주기를 고대하던 아내였습니다. 자식들이 죽기를 강요하던 부모였습니다. 부모님이 먼저 죽기를 기도하던 자식이었습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 근로자는 안중에도 없던 기업주였습니다. 기업주야 어떻게 되건 말건 내 주머니만 챙기던 근로자였습니다. 권력을 위해 국민의 죽음을 당연하게 여기던 지도자였습니다. 지도자가 죽는것을 감상만하던 국민이었습니다.

오, 주님!

저는 알맹이를 잃어버린 가야바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있는 곳에서는 소요와 다툼이 끊이지를 않았습니다. 이 모든 죄를 회개하오니 이 시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부터 내 속에 계시는 주님을 배척치 않고 온전히 품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알맹이를 갖춘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만인을 위해 죽을 줄 아는 한 사람, 이 세상을 살리는 한 사람, 주님께서 찾으시는 한 사람―바로 그 한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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