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 목록가기 |
하나도 이재철 목사님
말씀: 요한복음 18:1-11
26년 전 핏덩이인 채로 스웨덴에 입양된 고아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옷에는 박서애란 이름의 명찰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애는 스웨덴에 도착하는 순간 더 이상 서애일 수가 없었습니다. 양부모가 이미 지어놓은 '아스트리드 트롯직'이란 이름이 서애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스트리드 트롯직은 24살이 되던 지난 95년 6월, 자기를 버렸던, 조국이면서도 조국이 아니기도한 대한민국을 처음으로 찾았습니다. 그리고 조국이 아니면서도 조국인 스웨덴으로 되돌아가,「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바로 그 책 속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친 엄마는 나를 정말로 사랑했었다. 그러나 엄마는 내가 살아 남도록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나를 버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엄마의 마음과는 달리 "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자기를 버린 비정한 친 어머니를, 자기를 사랑했기 때문에 버렸을 것이라고 마음 속으로 용납하고 수용하며 이해하고 납득하기까지 그녀가 삼켜야만 했던 배신감과 고통의 아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용케도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화해와 용서를 선포했습니다. 그런 만큼 그녀가 겪었어야만 했을 진통이 더 절실하게 느껴져 제 마음이 저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았던 고아가 어머니를 용납하고 화해와 용서를 선포했다 할지라도, 자기 자식을 버렸던 어머니의 행동은 정당화되지도, 될 수도, 또 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미가 자기 자식을 버릴 때 왜 사정이 없었겠습니까? 왜 이유가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정과 이유가 어떠하든지간에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것이 옳은 일일 수는 없습니다. 생명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믿으시고 당신의 자녀를 맡기시므로 우리가 감히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 된 자가 자식을 함부로 버린다는 것은, 그 자식을 자기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요, 자기를 믿으신 하나님에 대한 배신인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부모 자식간의 만남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모든 만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의 만남을 통해 역사 하십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만나므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망의 가나안 땅, 약속의 땅을 얻게 됩니다. 농사꾼 엘리사가 엘리야를 만났기 때문에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바나바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위대한 세계 선교사 사도 바울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만남은 이처럼 신비스럽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만남의 가치와 의미를 알지 못했더라면, 그래서 모세가 여호수와의 만남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더라면, 엘리야가 밭을 갈던 엘리사를 그저 농사꾼으로만 보았다면, 바나바가 다른 사람들처럼 바울을 멋대로 사람이나 때려잡는 폭도로 속단했다면, 그 만남을 통한 하나님의 대역사는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을 믿고 당신의 사람을 보내셨던 하나님에 대한 불충이요, 불경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히도 그들은, 그들에게 다가 오는 모든 만남을 소중히 가꾸므로 그들과 더불어 함께 하나님의 아름다운 도구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1년전 여러분의 곁에 있던 사람 중, 혹 지금은 떠나 버린 사람은 없습니까? 만약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사람들이 자기 욕심 때문에 여러분을 이용하다가 스쳐 지나간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여러분들의 욕망으로 인해 그들을 버린 것입니까? 1년전 여러분은 누구 곁에 있었습니까? 만약 그 사람 곁을 벌써 떠나버렸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불의로 인함입니까? 아니면 그 사람의 의로움이 불의한 여러분을 불편하게 했기 때문입니까?
오늘 본문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이 드디어 로마 군병들에게 체포되는 장면을 보여 주고 있는 바, 우리는 본문 속에서 전혀 상반된 두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본문이 이렇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거기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유다가 군대와 및 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2∼5)
우리가 만나게 되는 첫 번째 인물은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은 30냥 때문에 그가 섬기던 스승을 미련없이 팔아 넘겼습니다. 버린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팔아 넘긴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는 군대의 앞잡이가 되어 예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체포의 현장에 태연하게 서 있었습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흉내도 내지 못할 만큼 뻔뻔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 가룟 유다는 예수님만을 배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와 더불어 예수님을 섬겼던 예수님의 제자들-이를테면 자기 동역자에 대한 배신이었고, 나아가 예수님을 만나게 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눈앞의 작은 이득 때문에 사람과의 만남과 하나님과의 만남을 동시에 짓밟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의 이름은 배신자의 대명사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본문 속에 등장하는 두번째 인물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7∼8)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잡으러 온 자들을 보시고서 숨거나 위장하거나 도망가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너희들이 찾는 자가 바로 나다', '내가 바로 예수다' 하시면서 그들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여기에서 '이 사람들'이란 예수님의 제자중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명의 제자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의미는, 너희들이 찾는 자는 바로 나이므로, 나 한 사람만 잡아가고 나의 제자들에게는 손끝하나 대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을 지키고 보호하시려는 주님의 모습이 너무나도 역력합니다.
바로 이 현장에서 이 모든 것을 직접 목격했던 요한 사도는 이때 얼마나 감동을 받았던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9)
과연 주님의 믿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백발 노인이 되기까지 마리아와의 만남을 경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년에 이르러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쓰기 전까지 그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노파 마리아를 극진히 봉양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마리아를 자기에게 맡기신 주님을 섬기는 일임을 그는 분명히 알았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였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시는 순간까지도 당신 자신이 아니라 제자들의 안위를 위하실 정도로 사람과의 만남을 귀히 여기시는 분이시기에, 오늘 우리 한사람 한사람 모두를 지성으로 극진하게 대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또 다른 이름은 그리스도 -만인의 구원자이십니다.
자, 우리는 어느 쪽입니까? 내가 사람들을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 소모품으로 여기고 있다면, 그래서 필요한 경우에는 온갖 친절을 다 베풀면서 다가가지만, 그러나 상대의 효용가치가 끝나는 순간 미련없이 버려버리는 사람이라면, 내가 아무리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다 할지라도, 나는 가룟 유다의 후예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주신 만남 때문에 때로는 불이익을 당하고 때로는 고통을 받고 때로는 오해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 만남을,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가꾸는 자가 있다면, 그 본인은 아무리 부인해도 그는 신실한 그리스도인 임에 틀림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체포의 현장에서까지 제자들을 위하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인 까닭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람과의 만남을 끝까지 소중하게 가꾼다는 것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즐겁게 웃고 떠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매번 보기 좋게 인심 쓰는 것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극진하게 친절을 베푸는 것만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다가도 감정이나 생각, 계산이 조금만 어긋나면 주저없이 관계를 깨트려 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나 자주 경험합니다. 정말 모든 만남을 하나님께서 주신 만남으로 알아 소중히 여기는 자라면, 그 사람의 마음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마음으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첫째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결과가 아니라 언제나 동기를 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아이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그 아이를 버린다는 것은 결과를 중시했기 때문이요, 그것은 결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일 수가 없습니다. 정말 사람과의 만남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면, 책임도 지지 못해 버려야만 할 아이가 태어날 짓을 하거나, 하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경영인이 요즈음 문제가 되고 있는 감원, 소위 명예퇴직에 관해 제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답변을 드렸습니다.
"직원을 감원시킨다는 것은 결과로서의 일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은 동기를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사람을 뽑을 때, 상황의 변화에 따라 그 사람을 책임질 수 없을 것 같으면 조금 덜 벌더라도 아예 뽑지 말아야 합니다. 뽑을 때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람으로 믿고 뽑았다면, 그 사람이 자진해서 나가지 않는 한 어렵더라도 어려움을 함께 극복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을 소모품처럼 뽑았다 버렸다 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습니다."
동기를 중히 여김 없이 사람을 귀히 여긴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진실일 수 없습니다. 동기를 먼저 깊이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에 의해서만 사람과의 만남은 존중됩니다.
두 번째는 진리에서 벗어 난 것을 요구치 않는 마음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이든지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그를 전혀 귀히 여기고 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중히 여긴다는 것은 불필요한 것, 불의한 것, 요구할 수 없는 것을 요구치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목전의 이득을 위해 불의와 타협하기를 종용했기 때문에 그가 나를 떠났다면, 그것은 그가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그를 버린 것입니다. 어떤 남자가 여자에게 불륜을 요구했기 때문에 여자가 남자를 다시 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자가 남자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를 업수이 여긴 것입니다. 100원을 가진자에게 100원을 몽땅 요구하므로 그가 나를 등졌다면, 그것은 내가 그를 버린 것입니다. 직장인이 태만하여 일하지 않고 오히려 남의 방해꾼 노릇하다 사규에 의해 해고 당했다면, 그것은 회사가 그를 버린 것이 아니라 그가 회사를 버린 것입니다. 사용주가 무리한 것을 근로자에게 요구하고, 근로자들이 요구할 수 없는 것까지 사용주에게 요구한다면 그것은 서로 짓밟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진리에서 벗어난 것을 요구하고서 상대가 날 버렸다고 욕하거나 원망치 마십시오. 오직 진리 안에서 참되고 바른 것을 서로 바라고 원하고 요구하는 마음 속에서만 사람과의 관계는 더욱 심화됩니다.
사람에 대한 존중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기 전에 먼저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상대를 받아들이는 만큼만 상대를 존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만남이 하나님의 섭리하심임을 믿는다면, 허망한 욕망 때문에 사람들을 소모품으로 마구 버리고 짓밟고 무시하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만큼은, 모든 사람을 중히 여길 수 있도록 먼저 우리의 마음을 닦고 키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금년도 우리 교회의 표어는 누가복음 3장 4절에 의거하여 '예비하라'입니다. 그리고 지난 구역 공부시간을 통해 주의 길을 , 내일을 예비한다는 것은 바로 마음을 새로이 가꾸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참된 새 날은 우리의 마음이 바르게 일구어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말씀으로 우리 마음의 모난 부분들이 갈아지고, 높고 낮은 교만이 제해지고, 굽은 생각들이 바르게 펴지고, 거친 감정들이 고르게 가다듬어 질 때 우리 마음은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있고, 우리 마음이 수용하는 만큼 더 많은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사람을 중히 여기는 사람과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참된 새날이 잉태되는 것입니다.
20대의 조미희씨 역시 태어나자 마자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아 벨기에로 입양되었던 슬픈 과거를 가진 젊은이입니다. 그녀도 20세가 넘어서 한국으로 되돌아와 자기를 버렸던 친어머니를 천신만고 끝에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그토록 애타게 찾아온 딸을 자기 딸로 공개적으로 맞아줄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조양을 내 딸로 인정한다는 것은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기 전 사생아를 낳았던 과거를 공개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양은 어머니를 이해하고 수용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전시회를 가졌는데, 그녀 그림의 주제는 온통 여자의 자궁이었습니다. 태아를 따스하게 감싸고 있는 자궁―그 그림을 통해 조미희 양은 무엇을 외치고 있겠습니까? 제발 생명을 버리지 말라는 울부짖음 아니겠습니까? 부디 생명과의 만남을 소중히 해달라는 절규 아니겠습니까? 모든 생명을 수용하는 생명의 자궁이 되어 달라는 호소 아니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가룟 유다가 되지 말라는 외침 아니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의 심령을 가꾸어 생명의 자궁이 되게 하십시다. 생명의 호수, 생명의 활화산으로 일구어 가십시다. 그때 이 세상은 정말 살만한 곳이 될 것입니다. 왠지 아십니까? 사람을 수용하는 생명의 자궁이 되었다는 것은 생명이신 하나님을 이미 내 마음속에 품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하나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사람으로가 아니라, 내 욕망을 위한 소모품으로 취급해 왔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동기보다 언제나 결과를 중시하므로 사람을 마구 버려 왔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사람에게 진리에서 벗어난 것을 요구하므로 내가 먼저 그를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가 나를 버렸노라 원망하고 비난했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의 심령을 생명의 자궁으로 일구게 하옵소서. 생명의 호수, 생명의 활화산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모든 사람을 품고 모든 만남을 존중히 여기므로 이 세상을 살만한 세상으로 일구는 생명의 도구들이 되게 하소서. 진정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나 같은 죄인 한 사람까지도 사랑하시고 존중해 주시는 주님을 닮게 하옵소서. 아멘.
📜 요약
본 글은 요한복음 18:1-11 말씀을 바탕으로 **'만남의 가치와 의미'**를 다루며, 특히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태도를 강조합니다. 스웨덴으로 입양된 박서애(아스트리드 트롯직)의 용서와 화해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자식을 버린 어머니의 행동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으며 생명을 맡기신 하나님에 대한 배신임을 지적합니다.
모세와 여호수아, 엘리야와 엘리사, 바울과 바나바의 만남처럼, 모든 인간관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음을 강조하며, 이 만남을 소중히 가꾸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의 가룟 유다는 작은 이득(은 30냥) 때문에 스승과 동역자, 그리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짓밟은 배신자의 대명사로 제시됩니다. 반면, 예수님은 체포되는 순간에도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하시며 제자들을 끝까지 보호하신, 만남을 가장 귀하게 여기신 분으로 대비됩니다. 사도 요한은 이 주님의 중심을 깨달아 주님께 맡겨진 마리아를 평생 극진히 봉양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들에게는 가룟 유다의 후예처럼 사람을 욕망의 도구로 여기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모든 만남을 소중히 가꾸라고 촉구합니다. 이는 감정적인 친절을 넘어, 다음 두 가지 마음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 결과가 아닌 동기를 중히 여기는 마음: 사람을 소모품처럼 뽑았다 버리지 않기 위해 채용할 때부터 책임질 수 있는 동기로 대해야 합니다.
- 진리에서 벗어난 것을 요구치 않는 마음: 상대에게 불의한 것을 요구하여 관계가 깨지는 것은 상대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먼저 상대를 업수이 여긴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으로 마음을 **'생명의 자궁'**처럼 가꾸어 모든 생명과 만남을 수용하고 존중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권면합니다.
🗣️ 설교용 개요
Ⅰ. 제목: 만남을 귀히 여기시는 주님, 만남을 짓밟는 우리 (요 18:1-11)
Ⅱ. 도입: 모든 만남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 A. 버림받은 고아의 고통 (박서애/아스트리드 트롯직): 자식을 버린 어머니의 행위는 사정이 있더라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생명을 맡기신 하나님께 대한 배신입니다.
- B. 만남 속의 하나님의 섭리: 모세-여호수아, 엘리야-엘리사, 바울-바나바처럼 모든 만남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룹니다. 만남을 경홀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충입니다.
Ⅲ. 본문 분석: 상반된 두 인물 (요 18:2-9)
- A. 가룟 유다: 만남을 짓밟은 자 (요 18:2-5)
- 1. 행동: 은 30냥에 스승을 팔아 넘기고, 체포 현장에 태연히 앞장섬.
- 2. 배신: 예수님, 제자들(동역자), 그리고 만남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배신.
- 3. 결과: 눈앞의 작은 이득 때문에 모든 만남을 짓밟아 배신자의 대명사가 됨.
- B. 예수 그리스도: 만남을 끝까지 존중하신 분 (요 18:7-9)
- 1. 태도: 숨지 않고 스스로 나아가 "내로라(내가 그다)" 밝히심.
- 2. 보호: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제자들을 끝까지 지키심).
- 3. 중심: 아버지께서 주신 자(제자들)를 하나도 잃지 않으려 하신 중심 (요 17:12 응함).
Ⅳ. 교훈: 우리는 어느 쪽입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
- A. 가룟 유다의 후예인가: 사람을 욕망을 위한 도구/소모품으로 이용하고 효용가치가 끝나면 버리는 자.
- B. 그리스도인인가: 불이익/고통/오해를 당해도 만남과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가꾸는 자.
Ⅴ. 적용: 만남을 존중하는 구체적인 마음가짐
- 1. 결과가 아니라 동기를 중히 여기십시오:
- 책임을 질 수 없을 것 같으면 아예 시작하지 마십시오 (낙태, 무책임한 채용의 예).
- 사람을 '소모품'으로 여기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십시오.
- 2. 진리에서 벗어난 것을 요구치 마십시오:
- 불필요한 것, 불의한 것을 요구하는 순간 내가 상대를 버리는 것입니다 (불륜 요구, 과도한 요구의 예).
- 오직 진리 안에서 참되고 바른 것만을 서로 바랄 때 관계는 심화됩니다.
Ⅵ. 결론: 마음을 생명의 자궁으로!
- 말씀으로 마음을 다듬어 모든 사람을 수용하는 **'생명의 자궁'**이 되게 하십시오 (눅 3:4 예비하라).
- 생명의 자궁이 되는 것은 생명이신 하나님을 내 마음속에 품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 주님을 닮아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이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일구는 생명의 도구가 됩시다.
🕯️ 묵상 포인트
- 나의 만남 속 하나님의 섭리: 내가 만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람임을 진심으로 믿고 있는가? 혹시 내 욕심으로 인해 소중한 만남을 잃어버리거나 버린 적은 없는가? (모세-여호수아, 바울-바나바의 예)
- 예수님의 '내로라'와 제자 보호: 잡히시는 순간까지도 자신보다 제자들의 안위를 우선하신 주님의 사랑을 묵상하십시오. 주님은 나의 만남도 이토록 귀히 여기시는가?
- 가룟 유다와 나의 모습 대비: 나는 작은 이득, 눈앞의 욕망 때문에 만남의 가치를 짓밟고 사람을 소모품으로 취급하며 가룟 유다의 길을 걷고 있지는 않은가?
- 동기의 정결함: 만남을 시작하고 관계를 유지하는 나의 동기는 무엇인가? 결과가 아닌 동기를 중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며, 이것이 사람을 버리는 죄를 막는 유일한 길이다. (명예퇴직, 자식을 버리는 부모의 예)
- 요구의 정당성: 나는 상대에게 진리에서 벗어난 것, 불의한 것을 요구하며 오히려 그 관계를 내가 파괴하고 있지는 않은가? 진리 안에서의 요구만이 관계를 심화시킴을 기억하라.
- 마음을 생명의 자궁으로: 말씀으로 내 마음의 모난 것, 굽은 것, 거친 것을 다듬어 모든 생명을 수용하고 품을 수 있는 생명의 자궁이 되기를 간구하십시오.
📖 강해
요한복음 18:1-11은 예수님의 체포 장면을 다루며,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가 끝난 후 수동적 희생자가 아닌 자발적 구원자로서의 예수님을 강조합니다.
- 자발적인 헌신 (1-6절):
-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4절) 군중 앞으로 나아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는 운명에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도하여 인류 구원의 길로 들어가셨음을 보여줍니다.
- "내로라"(에고 에이미 - I AM)는 단순한 인칭대명사가 아니라,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 사용된 거룩한 이름입니다. 체포자들이 이 말에 뒤로 물러나 땅에 엎드러진 것(6절)은 그들의 폭력 앞에서도 예수님은 여전히 주권자이심을 드러냅니다.
- 제자들을 향한 사랑 (7-9절):
- 예수님은 재차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명하십니다. 이는 당신의 목숨을 바쳐 제자들을 지키려는 목자의 희생적인 사랑을 보여줍니다.
- 9절의 사도 요한의 주석처럼,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요 17:12) 하신 대제사장적 기도의 말씀의 성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맡겨진 **만남(제자들)**의 가치를 끝까지 존중하셨습니다.
- 인간의 불완전함과 주님의 교훈 (10-11절):
- 베드로의 칼부림(10절)은 인간적인 혈기와 불완전한 열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이를 "네 칼을 칼집에 꽂으라"며 꾸짖으시고(마 26:52),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11절)고 하시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인간의 의분을 앞선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이 사건은 주님이 베드로까지도 품으신, 만남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모습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 주석
| 구절 | 원어/핵심어 | 의미 |
| 1절 | 겟세마네 | '기름 짜는 틀'이라는 뜻. 예수님의 고난의 장소. |
| 4절 | 당할 일을 다 아시고 | Knowing all things that should come upon him. 예수님의 수난은 우연이 아닌 자발적 선택임을 강조하는 요한복음의 특징. |
| 5절 | 내로라 (에고 에이미) | I AM. 요한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신적 자기 계시. 잡으러 온 자들을 엎드리게 한 신적 주권의 표현. |
| 8절 |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 ἄφετε τούτους ὑπάγειν (아페테 투투스 휘파게인). '이들이 가도록 허락하라/놔 주어라'는 의미. 예수님은 제자들을 대신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대속적 희생의 첫 걸음. |
| 9절 |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 요한복음 17:12 기도의 성취.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호하신 동기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만남을 끝까지 책임지시려는 것임을 요한 사도가 강조. |
| 10절 | 시몬 베드로가... 칼을 빼어 | 인간적인 의분과 폭력의 상징. 예수님의 체포는 물리적 저항이 아닌 영적 순종을 통해 이루어져야 함을 가르치심. |
🗃️ 자료 노트
- 배경 (Historical Context): 예수님이 체포된 겟세마네 동산은 감람나무가 많았으며, 예수님과 제자들이 종종 모여 기도하던 장소였습니다 (1-2절). 유월절이 임박한 시점으로, 유대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소요를 우려하여 밤중에 체포를 진행했습니다.
- 유다의 역할: 유다는 단순히 스승을 넘긴 배신자에서 그치지 않고, 체포하는 군대의 안내자(앞잡이)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Temple police) 및 로마 군대(군대: 헬라어 스페이라는 로마 군대를 의미)와 함께 왔습니다.
- 박서애 (아스트리드 트롯직): 1969년생 입양아. 1995년 6월 한국을 방문 후, 1996년 스웨덴에서 자전적 에세이 《피는 물보다 진하다》(Blodet är tjockare än vatten)를 출간했습니다. 본문은 그녀의 책 내용을 인용하여 '버림'의 아픔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용서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만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도입부로 활용했습니다.
- 요한 사도의 만남 존중: 요한은 주님의 마지막 부탁(요 19:26-27)에 따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평생 봉양했습니다. 이는 만남에 대한 주님의 중심을 깨달은 자가 취해야 할 진정한 제자의 자세의 구체적인 예입니다.
🗣️ 원어
- 요 18:5 - 내로라
- 헬라어: Ἐγώ εἰμι (에고 에이미)
- 의미: '나는 ~이다' 혹은 '나 바로 그다'를 뜻하며, 출애굽기 3:14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이름 (I AM THAT I AM)과 직결됩니다. 예수님의 체포 현장에서 신적 권위를 드러내신 강력한 선언입니다.
- 요 18:8 - 용납하라
- 헬라어: ἄφετε (아페테)
- 의미: '허락하다, 놓아주다, 떠나게 하다'의 뜻을 가진 동사 아피에미의 명령형. 예수님은 제자들의 안전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권위를 가지고 명하셨음을 나타냅니다.
💎 금언 (Aphorisms)
- 만남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은, 나를 믿고 당신의 사람을 보내주신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다.
- 내가 사람을 도구로 여기는 순간, 나는 이미 가룟 유다의 후예이다.
- 사람과의 관계에서 결과를 중시할 때 우리는 버리지만, 동기를 중시할 때 우리는 끝까지 책임진다.
- 참된 그리스도인은 불이익을 당해도 만남을 지키는 자이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 상대에게 진리에서 벗어난 것을 요구하는 순간, 나 자신이 먼저 그를 업수이 여기고 버리는 것이다.
- 우리의 마음이 생명의 자궁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생명이신 하나님을 품은 자가 된다.
🎨 예화
| 인물/사건 | 주제 | 핵심 내용 |
| 박서애 (아스트리드 트롯직) | 용서와 화해, 만남의 아픔 | 친모에게 버림받았으나 '엄마는 내가 살도록 사랑했기 때문에 버렸다'고 이해하며 화해를 선포한 고통스러운 과정. (아픔을 수용한 극적인 만남) |
| 조미희 양 | 생명의 존엄성, 자궁의 의미 | 사생아 과거 때문에 친모에게 공개적으로 환영받지 못했으나 어머니를 수용함. 그녀의 그림 주제인 '여자의 자궁'은 **"제발 생명을 버리지 말라"**는 절규. (생명을 수용하는 마음) |
| 사도 요한과 마리아 | 끝까지 책임지는 만남 |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부탁을 받은 요한은 노인이 되도록 마리아를 극진히 봉양. 이는 주님의 중심을 꿰뚫어 본 참된 제자의 순종의 증거. (만남에 대한 책임) |
| 경영인의 감원 상담 | 결과 vs. 동기 | 감원은 결과. 그리스도인은 뽑을 때부터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람으로 믿고 끝까지 책임질 동기로 임해야 함. (동기의 중요성) |
🎯 주제별 정리
1. 만남의 신비와 가치 (하나님의 섭리)
- 사람과 사람의 만남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으며, 하나님은 만남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 모세와 여호수아, 엘리야와 엘리사, 바울과 바나바의 만남이 하나님의 대역사를 이룬 것처럼, 모든 만남을 소중히 가꾸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충성입니다.
- 만남의 가치를 알지 못해 만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충과 불경입니다.
2. 배신과 용납의 대비 (가룟 유다와 예수님)
- 가룟 유다: 은 30냥 때문에 만남(스승, 동역자, 하나님)을 짓밟고 배신자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눈앞의 작은 이득에 모든 것을 버림)
- 예수 그리스도: 체포의 순간에도 제자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며 끝까지 보호하셨습니다. (만남의 가치를 목숨보다 귀하게 여김)
3.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 가룟 유다처럼 사람을 욕망의 도구/소모품으로 이용하고 버리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불이익, 고통, 오해를 당해도 주어진 만남과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가꾸는 자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4. 만남을 존중하는 두 가지 핵심 동기
- 첫째, 결과가 아닌 동기를 중히 여기는 마음: 사람을 뽑을 때부터 책임질 동기로 대하며, 책임을 질 수 없다면 아예 시작하지 않아야 합니다. (소모품처럼 버리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음)
- 둘째, 진리에서 벗어난 것을 요구치 않는 마음: 불의하고 부당한 것을 요구하는 것은 내가 먼저 상대를 짓밟고 버리는 행위입니다. 오직 진리 안에서 바른 것을 요구해야 관계가 심화됩니다.
5. 마음의 준비 (예비하라)
- 참된 새 날은 마음을 새로이 가꾸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 말씀으로 마음의 모난 것, 교만, 굽은 생각, 거친 감정들을 다듬어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생명의 자궁, 생명의 호수/활화산으로 일구어야 합니다.
- 이러한
'◑Comprehensive◑ > Comprehensive'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 사람 / 요한복음 18:1-14 (0) | 2021.12.28 |
|---|---|
| 그 종의 이름은 / 요한복음 18:1-11 (0) | 2021.12.28 |
| 알더라 아시고 / 요한복음 18 : 1∼11 (0) | 2021.12.28 |
| 자주 모이시는 곳 / 요한복음 18 : 1∼11 (0) | 2021.12.28 |
| 기드론 저편으로 / 요한복음 18 : 1∼11 (0) | 2021.12.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