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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 요 18: 1-11

by 【고동엽】 2021.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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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이재철 목사님

말씀: 요한복음 18:1-11


 

26년 전 핏덩이인 채로 스웨덴에 입양된 고아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옷에는 박서애란 이름의 명찰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애는 스웨덴에 도착하는 순간 더 이상 서애일 수가 없었습니다. 양부모가 이미 지어놓은 '아스트리드 트롯직'이란 이름이 서애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스트리드 트롯직은 24살이 되던 지난 95년 6월, 자기를 버렸던, 조국이면서도 조국이 아니기도한 대한민국을 처음으로 찾았습니다. 그리고 조국이 아니면서도 조국인 스웨덴으로 되돌아가,「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바로 그 책 속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친 엄마는 나를 정말로 사랑했었다. 그러나 엄마는 내가 살아 남도록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나를 버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엄마의 마음과는 달리 "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자기를 버린 비정한 친 어머니를, 자기를 사랑했기 때문에 버렸을 것이라고 마음 속으로 용납하고 수용하며 이해하고 납득하기까지 그녀가 삼켜야만 했던 배신감과 고통의 아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용케도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화해와 용서를 선포했습니다. 그런 만큼 그녀가 겪었어야만 했을 진통이 더 절실하게 느껴져 제 마음이 저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았던 고아가 어머니를 용납하고 화해와 용서를 선포했다 할지라도, 자기 자식을 버렸던 어머니의 행동은 정당화되지도, 될 수도, 또 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미가 자기 자식을 버릴 때 왜 사정이 없었겠습니까? 왜 이유가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정과 이유가 어떠하든지간에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것이 옳은 일일 수는 없습니다. 생명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믿으시고 당신의 자녀를 맡기시므로 우리가 감히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 된 자가 자식을 함부로 버린다는 것은, 그 자식을 자기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요, 자기를 믿으신 하나님에 대한 배신인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부모 자식간의 만남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모든 만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의 만남을 통해 역사 하십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만나므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망의 가나안 땅, 약속의 땅을 얻게 됩니다. 농사꾼 엘리사가 엘리야를 만났기 때문에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바나바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위대한 세계 선교사 사도 바울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만남은 이처럼 신비스럽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만남의 가치와 의미를 알지 못했더라면, 그래서 모세가 여호수와의 만남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더라면, 엘리야가 밭을 갈던 엘리사를 그저 농사꾼으로만 보았다면, 바나바가 다른 사람들처럼 바울을 멋대로 사람이나 때려잡는 폭도로 속단했다면, 그 만남을 통한 하나님의 대역사는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을 믿고 당신의 사람을 보내셨던 하나님에 대한 불충이요, 불경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히도 그들은, 그들에게 다가 오는 모든 만남을 소중히 가꾸므로 그들과 더불어 함께 하나님의 아름다운 도구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1년전 여러분의 곁에 있던 사람 중, 혹 지금은 떠나 버린 사람은 없습니까? 만약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사람들이 자기 욕심 때문에 여러분을 이용하다가 스쳐 지나간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여러분들의 욕망으로 인해 그들을 버린 것입니까? 1년전 여러분은 누구 곁에 있었습니까? 만약 그 사람 곁을 벌써 떠나버렸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불의로 인함입니까? 아니면 그 사람의 의로움이 불의한 여러분을 불편하게 했기 때문입니까?

오늘 본문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이 드디어 로마 군병들에게 체포되는 장면을 보여 주고 있는 바, 우리는 본문 속에서 전혀 상반된 두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본문이 이렇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거기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유다가 군대와 및 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2∼5)

 

우리가 만나게 되는 첫 번째 인물은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은 30냥 때문에 그가 섬기던 스승을 미련없이 팔아 넘겼습니다. 버린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팔아 넘긴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는 군대의 앞잡이가 되어 예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체포의 현장에 태연하게 서 있었습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흉내도 내지 못할 만큼 뻔뻔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 가룟 유다는 예수님만을 배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와 더불어 예수님을 섬겼던 예수님의 제자들-이를테면 자기 동역자에 대한 배신이었고, 나아가 예수님을 만나게 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눈앞의 작은 이득 때문에 사람과의 만남과 하나님과의 만남을 동시에 짓밟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의 이름은 배신자의 대명사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본문 속에 등장하는 두번째 인물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7∼8)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잡으러 온 자들을 보시고서 숨거나 위장하거나 도망가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너희들이 찾는 자가 바로 나다', '내가 바로 예수다' 하시면서 그들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여기에서 '이 사람들'이란 예수님의 제자중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명의 제자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의미는, 너희들이 찾는 자는 바로 나이므로, 나 한 사람만 잡아가고 나의 제자들에게는 손끝하나 대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을 지키고 보호하시려는 주님의 모습이 너무나도 역력합니다.

바로 이 현장에서 이 모든 것을 직접 목격했던 요한 사도는 이때 얼마나 감동을 받았던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9)

 

제자들을 만나게 하셨음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아, 제자들과의 그 만남을 끝까지 존중하시려는 예수님의 중심을 사도 요한만은 그때 똑똑히 보았던 것입니다. 그 사도 요한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죽기까지 제자들을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 당신의 중심을 꿰뚫어 보고 있는 사도 요한이라면, 능히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귀히 받들어 줄 것이라 믿으셨던 것이었습니다.

과연 주님의 믿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백발 노인이 되기까지 마리아와의 만남을 경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년에 이르러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쓰기 전까지 그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노파 마리아를 극진히 봉양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마리아를 자기에게 맡기신 주님을 섬기는 일임을 그는 분명히 알았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였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시는 순간까지도 당신 자신이 아니라 제자들의 안위를 위하실 정도로 사람과의 만남을 귀히 여기시는 분이시기에, 오늘 우리 한사람 한사람 모두를 지성으로 극진하게 대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또 다른 이름은 그리스도 -만인의 구원자이십니다.

자, 우리는 어느 쪽입니까? 내가 사람들을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 소모품으로 여기고 있다면, 그래서 필요한 경우에는 온갖 친절을 다 베풀면서 다가가지만, 그러나 상대의 효용가치가 끝나는 순간 미련없이 버려버리는 사람이라면, 내가 아무리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다 할지라도, 나는 가룟 유다의 후예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주신 만남 때문에 때로는 불이익을 당하고 때로는 고통을 받고 때로는 오해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 만남을,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가꾸는 자가 있다면, 그 본인은 아무리 부인해도 그는 신실한 그리스도인 임에 틀림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체포의 현장에서까지 제자들을 위하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인 까닭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람과의 만남을 끝까지 소중하게 가꾼다는 것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즐겁게 웃고 떠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매번 보기 좋게 인심 쓰는 것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극진하게 친절을 베푸는 것만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다가도 감정이나 생각, 계산이 조금만 어긋나면 주저없이 관계를 깨트려 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나 자주 경험합니다. 정말 모든 만남을 하나님께서 주신 만남으로 알아 소중히 여기는 자라면, 그 사람의 마음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마음으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첫째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결과가 아니라 언제나 동기를 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아이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그 아이를 버린다는 것은 결과를 중시했기 때문이요, 그것은 결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일 수가 없습니다. 정말 사람과의 만남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면, 책임도 지지 못해 버려야만 할 아이가 태어날 짓을 하거나, 하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경영인이 요즈음 문제가 되고 있는 감원, 소위 명예퇴직에 관해 제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답변을 드렸습니다.

"직원을 감원시킨다는 것은 결과로서의 일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은 동기를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사람을 뽑을 때, 상황의 변화에 따라 그 사람을 책임질 수 없을 것 같으면 조금 덜 벌더라도 아예 뽑지 말아야 합니다. 뽑을 때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람으로 믿고 뽑았다면, 그 사람이 자진해서 나가지 않는 한 어렵더라도 어려움을 함께 극복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을 소모품처럼 뽑았다 버렸다 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습니다."

동기를 중히 여김 없이 사람을 귀히 여긴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진실일 수 없습니다. 동기를 먼저 깊이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에 의해서만 사람과의 만남은 존중됩니다.

두 번째는 진리에서 벗어 난 것을 요구치 않는 마음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이든지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그를 전혀 귀히 여기고 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중히 여긴다는 것은 불필요한 것, 불의한 것, 요구할 수 없는 것을 요구치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목전의 이득을 위해 불의와 타협하기를 종용했기 때문에 그가 나를 떠났다면, 그것은 그가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그를 버린 것입니다. 어떤 남자가 여자에게 불륜을 요구했기 때문에 여자가 남자를 다시 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자가 남자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를 업수이 여긴 것입니다. 100원을 가진자에게 100원을 몽땅 요구하므로 그가 나를 등졌다면, 그것은 내가 그를 버린 것입니다. 직장인이 태만하여 일하지 않고 오히려 남의 방해꾼 노릇하다 사규에 의해 해고 당했다면, 그것은 회사가 그를 버린 것이 아니라 그가 회사를 버린 것입니다. 사용주가 무리한 것을 근로자에게 요구하고, 근로자들이 요구할 수 없는 것까지 사용주에게 요구한다면 그것은 서로 짓밟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진리에서 벗어난 것을 요구하고서 상대가 날 버렸다고 욕하거나 원망치 마십시오. 오직 진리 안에서 참되고 바른 것을 서로 바라고 원하고 요구하는 마음 속에서만 사람과의 관계는 더욱 심화됩니다.

사람에 대한 존중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기 전에 먼저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상대를 받아들이는 만큼만 상대를 존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만남이 하나님의 섭리하심임을 믿는다면, 허망한 욕망 때문에 사람들을 소모품으로 마구 버리고 짓밟고 무시하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만큼은, 모든 사람을 중히 여길 수 있도록 먼저 우리의 마음을 닦고 키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금년도 우리 교회의 표어는 누가복음 3장 4절에 의거하여 '예비하라'입니다. 그리고 지난 구역 공부시간을 통해 주의 길을 , 내일을 예비한다는 것은 바로 마음을 새로이 가꾸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참된 새 날은 우리의 마음이 바르게 일구어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말씀으로 우리 마음의 모난 부분들이 갈아지고, 높고 낮은 교만이 제해지고, 굽은 생각들이 바르게 펴지고, 거친 감정들이 고르게 가다듬어 질 때 우리 마음은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있고, 우리 마음이 수용하는 만큼 더 많은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사람을 중히 여기는 사람과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참된 새날이 잉태되는 것입니다.

20대의 조미희씨 역시 태어나자 마자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아 벨기에로 입양되었던 슬픈 과거를 가진 젊은이입니다. 그녀도 20세가 넘어서 한국으로 되돌아와 자기를 버렸던 친어머니를 천신만고 끝에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그토록 애타게 찾아온 딸을 자기 딸로 공개적으로 맞아줄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조양을 내 딸로 인정한다는 것은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기 전 사생아를 낳았던 과거를 공개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양은 어머니를 이해하고 수용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전시회를 가졌는데, 그녀 그림의 주제는 온통 여자의 자궁이었습니다. 태아를 따스하게 감싸고 있는 자궁―그 그림을 통해 조미희 양은 무엇을 외치고 있겠습니까? 제발 생명을 버리지 말라는 울부짖음 아니겠습니까? 부디 생명과의 만남을 소중히 해달라는 절규 아니겠습니까? 모든 생명을 수용하는 생명의 자궁이 되어 달라는 호소 아니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가룟 유다가 되지 말라는 외침 아니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의 심령을 가꾸어 생명의 자궁이 되게 하십시다. 생명의 호수, 생명의 활화산으로 일구어 가십시다. 그때 이 세상은 정말 살만한 곳이 될 것입니다. 왠지 아십니까? 사람을 수용하는 생명의 자궁이 되었다는 것은 생명이신 하나님을 이미 내 마음속에 품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하나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사람으로가 아니라, 내 욕망을 위한 소모품으로 취급해 왔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동기보다 언제나 결과를 중시하므로 사람을 마구 버려 왔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사람에게 진리에서 벗어난 것을 요구하므로 내가 먼저 그를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가 나를 버렸노라 원망하고 비난했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의 심령을 생명의 자궁으로 일구게 하옵소서. 생명의 호수, 생명의 활화산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모든 사람을 품고 모든 만남을 존중히 여기므로 이 세상을 살만한 세상으로 일구는 생명의 도구들이 되게 하소서. 진정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나 같은 죄인 한 사람까지도 사랑하시고 존중해 주시는 주님을 닮게 하옵소서. 아멘.

 

출처 : 주님의 시선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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