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드론 저편으로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8 : 1∼11
일주일전 4부 청년 예배시간에 신은희 집사님의 귀한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암선고를 받은 뒤, 의사로부터 가만히 있으면 1년, 항암치료를 받는다면 2년 정도 살 수 있으리라는 최후통첩을 받은 것이 지난 봄이었습니다. 그 이후 최근의 골수 이식 수술에 이르기까지 본인으로서는 매번 죽었다 깨어나야 하는 대수술을 네 번이나 받아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날마다 죽음과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하는 삶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눈을 감으면 이미 죽어서 관속에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 그리고 무덤 속에 내려진 자기 관 위로 검은 옷을 입고서 흙을 뿌리는 가족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보였습니다. 그때 죽음의 공포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 세상 그 누구도 자신을 도와줄 수 없다는 생각에 얼마나 고독했겠습니까? 가족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한 채 오히려 무거운 짐만 되고 있다는 자책으로 인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러나 그처럼 처절하리 만치 고독하게 죽음의 늪속으로 빠졌기에 바로 그 죽음의 밑바닥에서 그 분은 생명으로써의 하나님 말씀을 새롭게 만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내 욕망을 채워 줄 나의 도구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생명으로써의 하나님, 내 생명을 창조하신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최근에 받은 골수 이식수술이란, 쉽게 말한다면 사람을 죽였다가 다시 살리는 수술법 입니다. 이를테면 환자의 몸 속에 퍼져있는 암세포를 완전히 죽여 버리기에 충분한 양의 항암제를 환자에게 투여합니다. 이 경우에 암세포가 죽는 것은 좋지만, 치사량을 넘는 항암제로 인해 환자도 죽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환자의 몸에서 미리 추출해 두었던 골수를 이때 재 이식하여 환자를 다시 살려내는 것입니다.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죽었다가 살아나는 마지막 수술인 것입니다.
골수 이식 수술이 끝난 뒤 희미하게 의식이 회복되었을 때, 다시 말해 긴 죽음의 터널을 벗어나 막 정신이 들었을 때에 집사님이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예전의 자기 자신은 간 곳이 없고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잘 빻아진 가루 뿐 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가루가 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집사님의 마음 속에 떠오른 단어는 바로 `순종'이었습니다. 내가 가루가 된 이상, 하나님께서 어떤 물을 부어 어떻게 반죽하시어 어떤 모습으로 빚어내시던지 순종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꾸어 표현하면 생명이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에, 생명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만 그 아름다운 값어치를 발휘할 수 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참으로 값진 깨달음입니다. 이것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책상 앞에서 혹은 공원의 벤취에서 우연히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그 처절한 죽음의 늪을 헤치면서, 그 고독한 죽음의 터널을 거치면서 비로소 터득한 생명의 깨달음입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에서 썩어 가는 악취가 진동을 합니까? 마치 불개미가 기둥마다 그 속을 다 파먹어 버린 사막의 집마냥, 멀쩡하게 보이다가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어이없이 붕괴되어 버리는 인생이 그다지 많습니까? 생명이 자기 것이라 착각한 탓입니다. 생명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자는 참 생명 되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법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이탈하는 것과 같아서 썩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은희 집사님은 이제 39세입니다. 아직 젊은 나이입니다. 그 젊은 나이에 그 분은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요, 생명이신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만 생명이 생명다울 수 있음을 죽음을 통해 깨달았기에, 이제 앞으로 살아가는 그의 인생이 그 누구보다도 진리 안에서 아름답게 세워지며, 많은 사람들에게 참 인생과 생명의 의미를 일깨워 주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임은 명약관화합니다. 그렇다면 신집사님에게 있어서 암이란 중병은 신비한 은총이었습니다. 죽음의 체험은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설령 백년을 건강하게 산다 할지라도, 38년동안 그랬던 것처럼 생명을 자기의 것으로 착각한 채 정말 죽음의 길을 달려갈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음을 알기 전까지는 생명을 진정으로 알지 못합니다. 죽음은 생명의 실체를 들여다보는 창입니다. 죽음을 아는 자만이 이 땅에서 주어진 우리의 생이 얼마나 고귀하고 값진 것인지를 압니다. 그래서 죽음을 일찍 아는 것보다 더 큰 은총은 없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는 `기억하라' 였습니다. 그것은 전도서 12장 1절에서 따온 말씀이었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가능한 한 빨리 창조자를 기억하며 사는 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너희 창조자를 기억하라'는 말씀을 `너의 무덤을 기억하라'고 바꾸어서 읽기도 합니다. 지금부터 3천년 전 솔로몬에 의해 전도서가 기록될 당시 히브리어는 모음 없는 자음으로만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모음은 훨씬 뒤에 생겨 발음과 뜻에 따라 자음에 덧붙여지게 되었는데, 히브리어로 창조자란 단어의 자음은 무덤이란 단어의 자음과 형태가 동일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는 구절을 `너의 무덤을 기억하라'고 바꾸어 읽기도 하는 까닭은, 단순히 두 단어의 자음 모양이 같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자기 무덤을 기억하는 자만이 자기 생명의 창조자를 기억할 수 있다는 심오한 믿음 때문입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무덤을 기억하라"
청년의 때에 너의 무덤을 기억하랍니다. 한해라도 빨리 너의 묘지를 기억하랍니다. 한달이라도 빨리 너의 결국을 기억하랍니다. 하루라도 빨리 너의 죽음을 인식하랍니다. 바로 그 사람이 한 시간이라도 더 빨리 나의 생명이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깨달아, 영원한 내 생명의 창조자 되신 하나님의 뜻과 법에 순종하면서 그 인생이 바르게 세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달리던 자동차가 차도에서 이탈해 버린다면 그것은 사고입니다. 그 때의 자동차는 자신과 타인을 해치는 무서운 흉기일 뿐입니다. 정해진 차도 위를 달릴 때에만 자동차는 모두를 위한 문명의 이기가 됩니다.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법도를 벗어난 생명은 기둥을 속으로 파먹는 불개미와 같아서 모두에게 해악이 될 따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의 법도 위에 있는 인생은 반석 위에 지어진 집과 같아서, 많은 이를 위한 영원한 생명의 보금자리가 됩니다. 그래서 하루라도 더 빨리 자기 무덤을 기억하는 자가 되라고 성경은 명령합니다. 그 사람만이 하나님의 법도 위에서 자기 생명의 가치를 극대화시킬 수 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 제자들을 위한 세족식, 강론, 중보기도를 다 마치신 후의 주님 행적에 대하여 오늘 본문 1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 (1)
마가의 다락방에서 나오신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동산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여기에서 동산이란 바로 감람산의 겟세마네 동산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 사도는 본문에서 `겟세마네'란 이름을 밝히지도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동산이 무슨 동산인지, 어디에 있는지 삼척동자도 다 알기에 구태여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요한사도가 그 동산은 기드론시내 건너편이라고, 본문에서 기드론을 밝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다른 지명들은 구약에서 수십번 혹은 수백 번씩 언급되는 데 비해 기드론 시내는 단지 11번밖에 거명되고 있지 않습니다. 구약성경 기자들에게 기드론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 심한 것은 신약에서는 본문에서만 단 한번 언급되고 있을 뿐입니다. 요한사도 이외에는 아무도 기드론 시내에 대하여 관심도 갖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의 행적을 기록한 마태, 마가, 누가 역시 이때 주님께서 감람산 혹은 겟세마네로 나아가셨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 기드론시내에는 눈길 한번 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사도만은 오히려 겟세마네란 이름은 제쳐놓고 기드론 시내를 부각시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이것을 기록한 요한사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특별히 일깨워 주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메세지가 간직되어 있음이 분명합니다.
예루살렘 동쪽 벽과 감람산을 갈라놓는 기드론 시내는 1년에 몇번 폭우가 쏟아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말라 있었습니다. 그래서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곳을 기드론 계곡이란 명칭으로 더 자주 불렀습니다. 옛날 그 계곡은 지표면으로부터 120m나 아래 쪽에 위치한 상당히 깊은 계곡이었습니다. 그래서 별다른 용도가 없었던 그곳은 일찍부터 공동묘지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의 왕권을 빼앗기 위해 아버지의 심장에 칼을 겨누었던 패역한 압살롬의 무덤도 이곳에 쓰여졌고, 그 무덤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에스겔 선지자가 계곡 가득한 마른 뼈들이 살아난 환상을 본 곳이 바로 이 기드론 골짜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드론 골짜기만큼 무덤으로 가득찬 계곡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드론 계곡이란 바로 무덤의 계곡, 죽음의 계곡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기드론 시내를 건넜음을 왜 강조하시는지 그 이유를 이제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체포당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에 먼저 죽음의 계곡, 무덤의 계곡을 통과하셨습니다. 그 계곡을 통과하시면서 당신의 무덤을 기억하셨던 것입니다. 그 즐비한 공동묘지의 무덤들을 건너시면서 당신의 죽음을 보셨던 것입니다. 그 죽음의 골짜기에서 당신의 생명은 당신의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소유라는 그 당연한, 그러나 가장 망각하기 쉬운 사실을 다시 확인하셨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은 체포당하시기도 전에 이미 당신의 죽음을 하나님 앞에서 100% 수용하셨던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죽음의 골짜기를 건너지 않으셨더라면, 당신의 죽음을 먼저 수용치 않으셨더라면, 체포현장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그 현장에서, 구차하게 당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얼마든지 비굴해 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덤의 골짜기를 미리 건너시므로 남아 있는 그 짧은 시간을 철저하게 하나님께 순종하시매, 우리 모두를 영원히 살리는 영원한 부활자자 되실 수 있었습니다.
기드론 시내란 실은 무덤의 골짜기, 죽음의 골짜기라 했습니다. 그런데 기드론 시내란 히브리 말의 뜻은 `백향목의 시내'란 의미입니다. 기드론 골짜기는 1년 내내 거의 말라붙은 계곡이기에 백향목이 살래야 살 수가 없는 곳입니다. 현실적으로는 무덤이 가득찬 무덤의 골짜기일 따름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 골짜기를 `백향목의 시내'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현실과는 전혀 걸맞지 않는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중 누구도 그 이름에 대해 이의를 제기치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그 무덤의 골짜기를 가리켜 `기드론 시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진리인 것입니다. 즉 죽음의 골짜기를 건넌 자에게 그곳은 더 이상 죽음의 골짜기가 아니라 백향목의 시내가 된다는 것입니다. 백향목이란 당시 집을 짓는데 사용되던 최고의 목재였습니다. 자기의 무덤을 기억하는 자, 자기의 죽음을 아는 자의 인생만이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아름다운 백향목의 집, 향기로운 진리의 집으로 영원히 세워 질 수 있다는 하나님의 메세지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하셨기에 우리를 위한 영원한 기드론 시내, 백향목의 시내가 되신 것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도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 나이가 들 수록 자칫 그 삶이 진리와 동떨어지고 추해지기가 쉽습니다. 구약의 열왕기를 보십시오. 늙어 죽을 때까지 권력을 쥐고 있었던 왕들은 거의 대부분 말년에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예외였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실수하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어 갈수록 그의 삶은 진리 안에서 더더욱 아름답게 가꾸어졌고, 마침내 모든 왕들의 본이 되었습니다. 다윗 역시 죽음의 골짜기를 건넜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다윗은 눈물을 흘리며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 피신하였습니다(삼하15:23). 그 무덤의 골짜기를 건너매 다윗은, 천하의 제왕이라 할지라도 결국엔 땅에 묻히고 만다는 것, 끝내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통감했던 것입니다.그 이후로 자기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생명의 법도를 따르므로, 그 삶이 영원한 진리의 집으로 세워 진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가 아닙니까? 다윗이 피신할 때 울며 건넜던 그 죽음의 계곡은, 그러나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갈 때에는 이미 백향목의 계곡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대강절 세번째 주일입니다.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여 주시려 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죽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죽지 않으면 결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덤의 골짜기를 건너야 백향목의 시내가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34장 7절은 모세가 죽을 때 그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기력이 다 쇠하였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닙니다. 기력이 있고서도 죽을 수 있고 그날이 오늘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수용하는 것이 죽음의 골짜기를 건너는 것입니다. 허무주의에 빠지란 것이 아니라 나의 실체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바른 생명의 관계가 성립될 수 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너의 무덤을 기억하라,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그래야 아름답고 향기로운 백향목 시내가 전개됩니다. 이것을 보여주시려고 주님은 지금, 우리 앞에서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고 계십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하나님!
올해 초 우리는 우리 교회 표어를 `기억하라'로 정했습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을 기억하며 바른 삶을 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오늘, 지난1년을 되돌아 볼 때 하나님을 기억하며 산 날보다 하나님을 망각했던 시간이 더 많음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오늘 아침에도 우리를 불러 주시사, 매일 하나님을 기억하며 사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무덤을 기억하는 자가 되어야 함을 깨닫게 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의 죽음을 생각해 봅니다. 그 날 누가 나를 위해 진정으로 슬퍼해 줄 것인지, 사람들은 나의 일생을 어떻게 평가하며 자식들은 또 어떤 평가를 내릴 것인지 생각해 봅니다. 무엇보다도 그 날 하나님께 무엇을 보여 드릴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주님!
나의 무덤을 생각하면 할수록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법도, 그 생명의 길에 순종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나의 죽음을 기억하므로 날마다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매일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백향목 시내, 많은 사람을 살리는 향기로운 진리의 집이 되게 하옵소서.
― 아 멘 ―
출처 : 주님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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