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전 부터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7 : 20∼26
아무리 밤늦은 시각에 귀가해도, 저는 잠든 네 아이의 얼굴을 꼭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또 한편으로는 말할 수 없이 큰 신비로움에 젖어 들곤 합니다. 그 아이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저와 제 아내가 더불어 한 가정을 이루는 부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저나 제 아내가 다른 사람과 가정을 이루었더라면 그 아이들은 절대로 태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가족 중 한사람이 아내와 저의 만남을 주선하지 않았더라면, 당시 아내를 아끼던 아내 주위의 사람들이 열이면 열, 모두 한결같이 "저 남자와는 결혼하지 말라"고 말릴 때 만약 아내가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네 아이들은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져보면 따져 볼수록, 그 아이들이 이 세상 이 시대에 태어날 수 있었던 확률보다는 오히려 태어날 수 없었던 확률이 훨씬 더 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출생하여 제 자식으로 실재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신비로움입니까?
그러나 신비로움은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 아이들의 아빠로서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부부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에도 이 땅위에 처녀총각들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았습니다. 만일 제 부모님께서 각각 다른 배필을 만나 셨더라면, `나'라는 실체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고 내 자식들 또한 태어날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으로 인해 내 생명이 존재할 수 있다면 우리 부모님은 어떻게 존재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증조부모님들이 부부 되셨기 때문이고, 그것은 고조부모님들께서 결혼하신 결과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존재의 근원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우리는 인류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만나게 됩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가 없었더라면 오늘 우리 자신도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우리는 아담과 하와 그 이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기 전에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속에 인간을 두시려는 계획을 갖지 아니하셨더라면, 또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않으셨더라도 오늘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 그에 따른 천지창조,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서부터 시작하여 우리 부모님에 이르기까지 감히 헤아리기조차 불가능한 그 아득한 세월 속에서 단 한 세대만 어긋났어도, 오늘 우리의 존재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창세전부터, 오늘 나를 존재케 하시기 위하여 한치의 오차도 없이 역사하신 하나님 섭리의 결과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 각자는 말할 수 없이 신비로운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창세전부터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그 영원과 연결되어 있는 존재임도 인식하게 됩니다. 마치 우리 집과 저수지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은 파이프를 통하여 저수지의 물과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영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십니까? 우리 자신이 신비로움이요, 영원과 연결된 존재임을 아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며, 그때부터 우리의 영성은 깊어지게 됩니다. 사도바울의 말처럼 영적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고후 4: 18), 이 신비로움과 영원을 알기 전까지는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볼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신비로움 그 자체요, 내가 영원에 연결된 존재임을 깨달을 때부터 이 세상 모든 것이 영원한 신비로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됩니다.
이 세상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 우리 부모님이 우리 부모님 되셨다는 것은 얼마나 신비로운 일입니까? 내 아내, 내 남편과 부부 되었다는 것은 또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우리의 자식이 우리의 몸을 통해 우리의 자식으로 태어나 존재한 것이 말할 수 없는 신비로움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 가정 자체가 영원한 신비로움의 산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영원한 신비로움 없이는 우리 가정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얼마전 익명의 성도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살아 계시다는 하나님을 저는, 직접 체험하고 싶었습니다. 아주 옛날 사람들처럼 직접 뵙거나 그 음성을 듣지는 못해도 그저 살아 계신다는 느낌만이라도 느끼고 싶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데 왜 하나님은 날 만나 주시지 않는지―, 그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다는 평안을 내가 이렇듯 구하고 있는데 왜 주시지 않는 것인지― 이곳에 와서 하나님께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따져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몰랐던 것이 있었습니다. 지금껏 주변 친구들이나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많은 이들이 주님을 직접 뵈었다는 것입니다.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마음 속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 얘기를 듣고 저는 너무 속상해 하고 절망했습니다. 나는 아니로구나―. 그런데 제가 지금껏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제 마음 속에 이미 성령님께서 와 계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게 이미 오셨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이미―. 이 놀라운 사실을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깨닫고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계셨었구나-."
이분은 서울을 벗어나 추운 겨울날 인적도 드문 횡성수련원에서 며칠을 지내다가 바로 그 곳에서, 이미 마음속에 와 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체험했습니다. 만약 횡성수련원이 없었다면 그 분은 언제까지나 `나는 아니로구나' 하는 절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수십년 전 강원도 그 산골 속에 분교가 세워지고 그 분교가 작년에 주님의 교회 수련원이 된 것은, 바로 이 성도님을 위한 하나님의 신비로운 예비하심이 아닙니까? 8년 전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짐으로 주님을 믿게 된 분들이 아주 많습니다. 만약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다면 그 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신비롭지 않습니까? 올 3월 초부터 우리가 주일낮 예배를 이곳 정신여고 3층에서 드리기 시작하므로, 이 주위에 사는 분중 주님을 영접한 분들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배처소를 옮기지 않았다면 그 분들은 이 아침 어디에 있을까요? 신비롭지 않습니까?
오래 전 한 성도님이 자기 인척을 인도했습니다. 그 분은 평소에 알던 여성도님을 우연히 만나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그 여성도님은 단군교 교주를 인도했습니다. 그 단군교 교주가 이번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신비롭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오늘 이 아침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은 바로 여러분들에게도 이와 같은 여러 단계에 걸친 신비로운 인도하심이 있었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닙니까? 확실히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는 영원한 신비로움의 결정체이기에 충분합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어제 밤에도 내가 잠자는 동안 내 심장이 계속 뛰었다는 것이 신비롭고, 서산에 너머가는 해가 신비롭고 아침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태양이 신비롭습니다. 봄에 피어나는 꽃이 신비롭고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이 신비롭습니다. 여름에 쏟아지는 폭우가 신비롭고 겨울에 흩날리는 눈발이 신비롭습니다. 이 세상에서 신비스럽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처럼 영원한 신비를 알고 그 신비 속에서 살아가는 자의 삶의 가치는, 그 크기를 도저히 측정할 수가 없습니다.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신비스러울 수가 없고, 신비스럽다는 것은 이미 측정의 범주를 벗어났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더 신비로운 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곧 천국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그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서며, 그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신비로움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이 세상을 떠나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로 되돌아 갈 수 있다는 것은 결코 같은 말이 아닙니다. 우리 집 수도꼭지의 물이 파이프를 통하여 저수지의 물과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그러나 이미 우리집 수도꼭지에 다다른 물이 저수지로 되돌아 갈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남 녀 연합선교회에서 발행하는 우리 교회 소식지 `함즐함울' 12월호에는 고려대 의대 교수인 최상용 집사님의, 능동적 수송과 수동적 수송에 대한 감동적인 글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동식물을 포함해서 모든 세포와 세포사이에 일어나는 전해질의 왕래에는 수동적 수송과 능동적 수송이 있는데 농도가 짙은데서 옅은데로 옮겨가는것이 수동적 수송이요, 반대로 농도가 옅은데서 짙은데로 거슬러 올라가가는 것을 능동적 수송이라 한답니다. 그런데 이 양자의 차이는, 능동적 수송은 수동적 수송과는 달리 반드시 능동적인 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면 이런 이야기가 됩니다. 수많은 인파에 휩쓸려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인파가 움직이는 대로 밀려가는 것은 수동적 수송입니다. 반면에 그 인파를 뚫고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능동적 수송인데, 이때에는 그 사람에게 인파를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는 능동적인 힘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필요한 만큼의 능동적인 힘이 없을 때 그는 어쩔 수 없이 인파에 밀리고 맙니다.
저수지의 물이 우리집 수도꼭지까지 이른 것은, 물이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수동적 수송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요, 수도꼭지에 이른 물이 저수지로 되돌아 갈수 없는 것은, 물은 물을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는 능동적인 힘이 없기에 능동적 수송이 불가능한 까닭입니다. 굳이 하려면 모터의 힘을 빌리는 방법밖에 없는데, 세상에 그 어떤 모터가 우리집 수도꼭지에 이른 물을 파이프를 통해 저수지까지 밀어 올릴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죄의 삯인 사망의 골짜기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가, 그 사망의 골짜기로부터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로 거슬러 올라가 그분의 영원한 생명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을 꿰뚫고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집 수도꼭지의 물을 저수지로 밀어올릴 힘조차 없는 우리에게 어찌 그 엄청난 힘이 있을수 있겠습니까? 우리 자력에 의한 하나님 나라에로의 능동적인 수송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이미 천국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있습니다. 이 엄청난 일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능동적인 힘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도르래가 되어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로 끌어올리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모터가 되어, 사망의 골짜기로 부터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치밀어 올리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한 능동적 수송선이 되시어 우리를 싣고 사망을 거슬러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신비로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신비한 구원, 이 신비한 영생이야말로 신비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신비로운 구원이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인간의 요청으로 입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 본문을 통해 이렇게 기도하고 계십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24절)
지금 주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목전에 두신 최후의 순간에 무엇을 하나님께 원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주님을 창세전부터 사랑하사 주님께 주신 영광을 우리가 보고, 그 영광의 자리에 주님과 함께 있게 해달라고 원하고 계십니다. 그 영광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 나라의 영광, 곧 영원한 생명의 영광입니다. 영원한 생명보다 더 큰 영광은 있을수 없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그 영원한 생명을 믿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거하는 자가 되기를 주님께서 먼저 요청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소원이심을 주님은 아셨던 것입니다.
단지 입으로 기도하기만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본문 22절을 통하여 그 영광을, 그 영원한 생명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다고 고백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주셨습니까? 우리가 받아야만 할 죄의 형벌을 십자가에 못 박혀 대신 받으시므로, 바로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사망에서 끌어올리시는 생명의 모터가 되시므로 그 신비로운 구원의 대역사를 이루신 것이었습니다.
병석에 누워 계시는 저의 어머님께서는 요즈음 극도로 기력이 쇠약해지고 호흡이 가빠지셔서 말씀도 거의 하지 못하시지만, 혹 하시더라도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몇 일전 모처럼 빨리 귀가한 날 밤, 어머님께 찬송을 불러 드렸습니다. 평소 어머님이 좋아하시던 찬송가를 이것저것 불러드리던 중, 318장을 부를 때 저는 감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제가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자마자, 갑자기 어머니께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큰 목소리로 함께 부르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세월이 살같이 빠르게 지나 쾌락이 끝이 나고
사망의 그늘이 너와 내앞에 둘리며 가리우네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두신 영원한 집이 있어
죄많은 세상을 떠나게 될때 영접해 주시겠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앞에 오라
그리고 찬송이 다 끝났을 때에 어머님의 눈으로부터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도대체 누구시기에 죽음을 앞둔 86세된 노인을 향하여 `오라, 오라,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고 계십니까? 우리를 사망에서 끌어 올리는 능동적 수송선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2년반동안이나 꼼짝없이 병상에 누워있는 노환자를 그토록 감격에 겨워하게 했습니까?
우리를 치밀어 올리시는, 생명의 모터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한 힘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우리를 위한 생명의 모터, 아니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수송해 주는 능동적 수송선이 되시기 위해 이 땅위에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대망하는 대강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그 수송선에 오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안에서는 모든 절망이 희망으로 변합니다. 모든것이 아름답습니다. 모든것이 신비스럽습니다. 실패와 질병까지도 신비한 은혜로 귀결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창세전부터 창세후까지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 고난을 자처하신 분이 왜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신비한 은혜를 터득했던 사도 바울은 그래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수 없도다(롬8:18)"
기적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지닌 신비덩어리란 사실을 깨달은 것으로부터 신비로운 기적의 삶은 시작됩니다. 그것을 깨닫았다는 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한 기적속에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주님! 우리는 구세주이신 주님을 믿으면서도 지나칠 정도로 삭막하게 살아왔습니다. 너무나도 비 영적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대강절 두 번째 주일을 허락하시고, 우리의 삶 자체가 신비덩어리임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죽음에서 영생으로 끌어 올리신 생명의 모터요, 능동적 수송선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한 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깨닫게 하시니 신비한 소망이 넘칩니다. 우리의 삶이 이미 신비한 하나님의 기적속에 있음을 깨우쳐주시니 신비한 위로가 충만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창세전부터 영원후까지 영원히 있을 그 영원한 생명을 호흡하게 하시니 우리의 영안이 열립니다. 이 신비한 은총가운데서 한해를 마루리하게 하시고, 이 신비한 힘 의지하여 절망을 딛고 일어서 신비한 소망가운데서 신비한 새해를 맞게하여 주옵소서. 아 멘
출처 : 주님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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