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우신 아버지여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7 :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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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우리는, 수요예배 시간을 통하여 많은 죽음을 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패역했던 아합왕의 죽음, 그의 아들 요람의 죽음, 외손자 아하시야의 죽음, 왕비 이세벨의 죽음, 그외 그의 혈족들과 측근들의 죽음입니다. 그 숱한 죽음을 보면서 우리는 참으로 귀한 교훈들을 얻었습니다.
첫째, 죽음이라고 결코 다 똑같은 죽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어서 더 비천해지는 죽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죽어서 더 존귀하게 되는 죽음이 있습니다. 요람은 북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왕이 죽으면 온 나라가 슬퍼하며 장엄하게 국상을 치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요람왕이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 시체를 밭에다 던져 버렸습니다. 방금 직전 호흡이 붙어 있을 때까지만 해도 요람은, 그 나라에서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가장 좋은 말을 타고 최고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가장 지체 높고 제일 존귀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호흡이 멈추는 그 순간, 그 육체가 시체로 변하는 순간, 시체의 온기가 사라지기도 전에 그의 시체는 그냥 내버려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던져진 시체는 거지의 시체가 아니었습니다. 지엄한 왕의 시신이었습니다. 그는 죽어서 거지보다도 더 비천한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좋은 옷을 입고 있습니까? 지금 좋은 곳에서 살고 있습니까? 지금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존귀하다 높임을 받고 있습니까? 그러나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지금 누리는 그 존귀함이 참된 존귀함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숨이 넘어가는 순간, 관 뚜껑이 채 덮이기도 전에, 그 존귀라는 것이 비천의 나락으로 추락해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화려했던 요람의 삶에 비한다면, 말년의 사도 바울의 삶은 가히 걸인이라 할만 했습니다. 로마의 토굴 속에 갇힌 바울은 입는 것, 먹는 것, 잠자리 등 모든 것이 요람과는 비교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더욱이 그는 중죄수의 몸으로 참수 당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사형대 위에 올려진 목이 단칼에 떨어져나가 목 따로, 몸통 따로 나뒹굴다가 죽은 바울, 그는 참으로 비천하고 비참한 삶을 산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비천한 바울의 비천한 죽음은 더 이상 바울을 비천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토록 처참하게 죽고 난 뒤, 바울은 존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더더욱 존귀해 졌습니다. 그래서 그의 사후 2천년이 지난 이 시간에도 그는, 그리스도의 가장 존귀한 사도로 우리 앞에 우뚝 서 있습니다.
지금 비참한 가운데에 있습니까? 사람들로부터 비천하다 업수임을 받고 있습니까? 그러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지금의 비천함이 오히려 영원한 존귀의 발판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살아 생전 비천한 것 같으나 죽은 뒤, 이 세상 누구보다 더더욱 존귀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살아 생전 세상으로부터 주어지는 평가에 속지 마십시오. 참된 평가는 죽음과 동시에 돌아오는 법입니다. 죽어서 존귀한 자가 정말 존귀한 자요, 죽어서 비천해지는 자는 영영 비천한 자입니다. 이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두 삶의 차이는 오직 하나, 호흡이 있는 동안 바른 길을 걸었는가? 생명이 있는 동안 진리를 좇았는가? 심장이 뛰고 있는 동안 하나님의 의를 추구했는가? 그 여부로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둘째, 아침에 살아서 집을 나섰다고 해서 반드시 살아서 집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왕국의 아하시야왕이 아침에 예루살렘궁을 떠날 때는 분명히 살아 있었습니다. 그의 사지가 자유자재로 움직였고 젊은 그의 심장은 어김없이 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궁으로 되돌아 올 때에, 그는 이미 시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살아서 나갔다가 죽어서 되돌아 온 것이었습니다. 아침에 살아서 집을 나섰다고 그날 밤 반드시 산채로 귀가하리라 착각하지 마십시오. 만약 제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지금 아무 병원의 영안실이든 찾아가서 확인해 보십시오. 그 곳에 안치된 시신들이 집에서 죽어 시체가 된 뒤에 옮겨졌겠습니까? 분명히 아닐 것입니다. 아침에 살아서 집을 나섰다가 다시 집에 되돌아 가보지도 못한 채 영안실로 들어온 경우가 거의 대부분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좇아 바르게 사는 삶을 결코 중단할 수 없음은, 우리가 늘 당연한 듯 여겨 오던 귀가 길을 더 이상 가지 못한 채, 우리의 겉사람은 영안실의 냉동실로 들어가고 우리의 속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야 할 날이 오늘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 세상에 태어난 자는 모두 죽는다는 면에서는 동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는 자가 모두 유언을 남길 수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아합왕은 아람군대와의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요람왕은 예후가 쏜 화살이 염통을 꿰어 즉사하였습니다. 아하시야왕은 북이스라엘군의 단칼에 비명횡사했습니다. 왕비 이세벨은 내시들의 배신으로 순식간에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중 단 한사람도 유언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예외일 것이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온 식구들을 다 불러 모아 놓고, 이태백의 시보다 더 멋진 유언을 남겨놓고 임종을 맞을 것이란 낭만적인 착각에 빠지지 마십시오.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한마디의 유언도 남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요행히 죽는 순간 유언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살아 있는 자들은, 이미 혀도 굳고 숨이 가쁘게 넘어가고 있는 자의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그렇기에 이 세상을 떠나는 자가 남아 있는 자에게 남기는 유언이란 입으로부터의 말이 아니라, 평소의 삶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매일 눈으로 보고 확인한 삶의 유언은, 비록 유언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몇 마디의 말로 이루어진 유언과는 비교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한평생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좇아 살아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불의한 삶으로 일관한다는 것은 남아 있는 자들 역시 불의하게 살도록 그들에게 불의한 유언과 유산을 남겨주는 것이요, 의를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그들이 의롭게 살도록 가장 의롭고 위대한 유언과 유산을 물려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넷째, 평소 우리의 삶이 유언이 된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의 지체를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왕비 이세벨이 측근 내시들의 배신에 의해 왕궁 2층으로부터 내동댕이쳐 죽은 후, 사람들이 그녀의 시체를 수습하러 갔을 때는, 개들이 이미 그녀의 시체를 뜯어먹어 버린 뒤였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 남아 있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이세벨의 두골과 손, 그리고 발이었습니다. 이세벨의 그 두골은 세상을 향하여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세상의 악으로만 가득차 있던 악의 창고였습니다. 그 손은 악을 도모하고 세상의 불의한 것으로 자기를 치장하던 악의 손이었습니다. 그 발은 언제나 불의한 자리를 찾아 나서던 흉악한 발이었습니다. 이세벨은 그 악한 머리와 악한 손과 악한 발로 남편과 후손을 그리고 측근들을 악으로 도왔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그들과 함께 한 순간에 비참하게 파멸했고, 죽은 뒤에 더 비천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에도 악을 추구하던 두골과 손, 그리고 발은 고스란히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은 충격적이리만큼 충격적인 하나님의 메세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하고 그의 행적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결국 이 세 가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의 마음은 보이지 않는 반면에, 보이지 않는 마음은 그 사람의 머리와 손, 그리고 발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투영되기 때문입니다. 그 머리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가? 그의 머리가 진리를 향하여 안테나를 세우고 있었는가? 아니면 불의를 향하여 고정되어 있었는가? 그 두 손으로 무엇을 했는가? 두 손으로 무엇을 붙잡고 있었는가? 그의 두 발은 무엇을 좇고 있었는가? 어디, 어느 자리에 그 발이 서 있었는 가에 따라 그 인간이 의로운 사람이었는가, 불의한 사람이었는가가 판가름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우리 머리의 주파수를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고, 우리의 두 손으로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고 붙잡으며, 우리의 두 발로 진리를 좇고 진리의 터 위에 서 있지 않으면 안될 당위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면서 살아 있는 자들에게 남겨줄 가장 위대한 유언과 유산이 바로 이 세 가지요, 하나님 앞에서는 날 하나님 앞에 보여드려야 할 것도 이 세 가지이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또한 결국은 이 세 가지에 대한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삶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 길만이 참된 길이요, 영원한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길을 걸어 갈 수 있음은 우리의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하나님, 의의 하나님이신 까닭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의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우리는 영원한 의의 길을 알지도 못한 채 악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며 살다가 영원히 자멸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목전에 둔 최후의 순간에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기도의 마지막 단락인 본문 25절에 이르러 하나님을 이렇게 부르고 계십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짧지 않는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문을 통하여 주님께서 아버지란 호칭앞에 수식어를 붙이신 경우는 여기가 처음인데, 그 처음이자 마지막 수식어가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는 이 기도를 통하여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의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은 의의 하나님이심을 깨닫기를 원하고 게십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 마지막순간에 왜 하나님이 의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계시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바꾸어 말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왜 의의 하나님이신 지 그 까닭을 단 한번이라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본래부터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참됨과 모든 선함과 모든 아름다움의 원천이시자 영원한 진리이시기에 하나님은 의 그 자체이시요, 의로우신 하나님이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기에 더 이상 언급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하나님 되심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의의 길이란 고독한 길입니다. 종종 쓰리고 아픈 길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단 한번도 의의 하나님이시기를 포기치 아니하시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이, 의로우신 하나님을 좇아 영원토록 의의 길을 따를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기 위함입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을 통하여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3)"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이 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여 구원하실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불의의 하나님이시라면, 그 하나님은 우리를 불의의 길로 이끌어 파멸시켜 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확실히, 인간을 향한 하나님 사랑의 가장 큰 증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의는 둘이 아니라 하나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의는 사람을 사랑하는 능력이요, 사랑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힘이라 말씀 드린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본문 26절을 통하여 이렇게 기도의 대미를 장식하고 계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주님께서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게 하셨고 또 알게 하실 터인데 그 이유인즉,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 속에 채워 주시기 위함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그 두 가지 일을 동시에 감당하셨습니까? 한평생 의의 길만 좇으신 완전한 의인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성자 하나님으로써 의 그 자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더러운 우리의 죄를 대신 받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사 우리를 의롭다 하시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의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십자가 위에서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과 의를 동시에 완성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임도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의를 좇아 의로우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요, 사람을 위하여 의의 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곧 의롭게 하는 능력이기에 내가 먼저 하나님의 의를 좇지 않고서는 결코 참다운 사랑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30년도 더 전에 세 부처의 장관을 역임하고 현재는 교통신문 회장인 후암교회 김일환 장로님에게는, 두려운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이요, 둘째는 자식들이라고 합니다. 내가 잘못하면 자식들이 얼굴을 들고 세상에 다니지를 못할텐데, 그것도 대대손손 그럴텐데 어찌 자식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그 분은 반문합니다.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그 분이 하나님과 자식을 두려워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자식들 앞에서 의롭게 바른 삶을 살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말해 그 분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사는 것이요,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식들을 위하여 의의 본이 되는 것임을 알고 있는 분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자식을 두려워하며 그렇듯 학처럼 고고하게 의롭게 살아올 수 있었겠습니까?
작은 불의라 할지라도 미련없이 버리십시오. 사람이 큰돌에만 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돌에도 넘어집니다. 오히려 작은 돌에 미끄러지면 더 치명적이 됩니다. 하나님의 의를 좇다가 고난 당하는 것은 당장은 고통스러워 보여도 결국엔 곁에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영광스럽게 만들지만, 불의를 따르다 넘어지는 것은 두고두고 후손들에게 수치를 남기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의는 사람을 사랑하는 능력이요,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힘임을 친히 십자가 위에서 보여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대강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그 주님을 정말 구원자로 믿습니까? 그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과 사람을 두려워하며 의를 좇으십시오. 의를 향해 머리의 안테나를 높이 세우십시오. 손으로 의를 붙드십시오. 의의 자리에 두발로 서십시오. 그때 우리의 머리와 손과 발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최대의 멋진 선물이요, 하나님께 드려지는 가장 향기로운 예물이요, 우리가 이 땅을 떠난 뒤에 남아있는 자들에게 물려줄 위대한 유산, 최고의 유언이 될 것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하나님, 철저하게 악의 길을 좇고 불의를 사랑하던 이세벨이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의 시체는 비천하게 유린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현장에 악으로 가득 찼던 그녀의 머리, 악을 붙잡고 도모했던 손, 악의 길을 좇던 그의 발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생애는 결국 이 세 가지에 의해 평가받게 된다는 하나님의 메세지 였습니다. 이 세 가지에 의해 우리가 죽은 뒤에 비천해 질 수도 있고 오히려 존귀해 질 수도 있습니다. 이 시간 지나간 삶을 되돌아보며 우리의 머리 속에 무엇이 채워져 있는지 들여다봅니다. 이제껏 우리의 손이 도모해 왔던 일들을, 우리의 발이 서있던 자리를 봅니다. 주님, 모든 것이 부끄럽고 의롭지 못한 것들로 만 채워져 있음을 고백 드립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불러주시고, 의롭다 하시고, 모든 죄 용서해 주시고, 이 구원의 자리에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여 의로우신 하나님을 닮아가게 하옵소서. 사람을 사랑한즉 사람들을 위해 의의 본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머리가 하나님의 의를 향하여 안테나를 높이 세우게 하시고, 우리의 손이 하나님의 의를 붙잡으며 우리의 발이 의의 길 위에 있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머리와 손과 발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기로운 예물이 되게 하시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가장 위대한 사랑의 유산, 유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 아 멘 ―
출처 : 주님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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