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으로 알게 하려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7 : 20∼26
--------------------------------------------------------------------------------
몇 해전 우리교회에서 교역자로 영어 성경반을 인도하던 이기반 박사님이 이번에 "묵상의 숲속에서"란 제목의 묵상집을 출간했습니다. 그 분이 인생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행복에 대해 그리고 신앙에 대해 그처럼 깊은 사색의 묵상집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캐나다 토론토의 "성 James Town" 공동묘지 숲을 아침 저녁 산책하면서, 그 울창한 묘지 숲의 초입에 세워져 있는 시비문(詩碑文)이 울리는 가슴의 종소리 때문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시간은 흐르고
꽃들은 떨어지며
새날은 사라지고
새 삶도 소멸되어
모든 것 지나가나
사랑만은 남으리
아무리 생각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번쯤은 인생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공동묘지 입구에 세워진 시비문으로는 참으로 적절한 내용과 표현의 시입니다. 한번 흘러간 시간은 결코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일단 떨어진 꽃에게는 아무리 구슬프게 울어도 다시 가지로 돌아가는 길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1996년 11월 24일 오늘도 지금 우리 눈 앞에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밤 12시가 되기만 하면 우리 중 아무도 오늘을 더 이상 붙잡을 수 없습니다. 관속에 드러누운 자의 삶은 어떤 경우에도 되풀이되지 않습니다. 바람도 구름도 강물도 젊음도 모든 것이 다 지나가고 흘러가고 사라지고 소멸됩니다.
그러나 마치 조명 꺼진 무대처럼 모든 것이 다 사라진 뒤에도 언제나 변함없이 남아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어떤 여건 하에서도 위촉되거나 변형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여 질 것이나 오직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전 13:8)"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랑이 영원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요한은 또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Ⅰ요 4:7-8)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정의가 가능하겠습니까? 사랑이 영원하다면 영원한 것은 영원한 것으로부터만 나오는 것인즉, 영원하신 분은 하나님 한분 밖에 없으시매 영원하신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이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사도요한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과 더불어 영원한 것은 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의(義)입니다. 불의는 응집력이 강해 보이는 데 반해 의는 형편없이 약해 보입니다. 불의는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 것 같은데 의는 민망할 정도로 무력해 보입니다. 불의는 호화찬란하게 보이는데 의는 부끄러울 정도로 초라해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나 주저없이 불의의 벗이 됩니다. 그것을 자신의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나간 인류의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의가 의를 영원히 이긴적이 있었습니까? 불의가 의를 영원히 소멸시켜 버릴 수 있었습니까? 오히려 그와 정반대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무기력해 보이고 무능해 보이고 초라해 보이는 의가 언제나 이겼습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었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진리에 바탕을 둔 의는, 실은 가장 강하고 영원한 까닭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을 이렇게 부르고 계십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25a)
주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의로우신 하나님, 의(義)의 하나님으로 정의하고 계십니다. 의가 영원하다면 그것 또한 영원하신 하나님으로부터만 비롯된 것이기에, 영원하신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곧 사랑이신 동시에 또한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의는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의는 구별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의는 하나를 가리키는 두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의 다른 이름이 곧 의요, 의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3장을 통하여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사랑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랑이 곧 의라는 사실을 터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사랑은 곧 의요, 의가 곧 사랑입니다. 의란 사람을 사랑하는 능력이요, 사랑이란 사랑을 의롭게 하는 힘입니다. 의인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자요, 사랑의 사람이란 사람을 의롭게 하는 능력속에 거하는 자입니다. 사랑을 깨닫고 사랑 속에 있는 자가 바른 모습으로 바르게 설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교도소에 수감된 흉악범들이 교도관들로부터 얼마나 의로운 교훈을 많이 듣겠습니까? 그러나 흉악범들이 의로운 교훈의 말을 듣고 의로와 졌다는 이야기를 아직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반면에 비록 몸은 교도소에 갇혀 있을 망정 참된 사랑을 만나고 깨달은 자로서, 그 마음과 행동이 여전히 흉악하게 남아 있다는 사람의 이야기도 접해 본 적이 없습니다.
몇 해전 자동자의 진입이 금지된 여의도 광장으로 차를 몰아 그 곳에 있던 시민 여러 사람을 살상케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 모두를 죽이고 싶었다고 무서운 증오심에 사로잡혀 있던 그 젊은이는 사건 직후, 더 많은 사람을 죽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인명을 무고하게 해치고서도 더 해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면, 그는 이미 짐승일 뿐 인간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짐승 같은 인간에게 언제부터 본질적인 변화가 있었습니까? 그가 치어 죽인 피해자들의 유족 중 독실한 크리스찬이 그를 찾아오면서부터 였습니다. 그 가족은 나 어린 자식을 짐승만도 못한 그 인간 때문에 졸지에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젊은이에게 용서를 선포하고 사랑을 고백하며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넣어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그 흉악하던 인간의 흉측한 생각과 마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는 뜨거운 참회의 눈물을 흘렸고, 그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행동이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피해자 가족은 진정한 의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범인을 의롭게 만드는 힘 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사건건 부모의 속을 썩이던 탕자와 같은 자식이, 자신을 향한 부모님의 사랑을 진심으로 깨닫고 알게 될 때부터 그의 생각과 마음이 바르게 세워지는 것 또한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사랑은 곧 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 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아침 그리스도인들을 또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언제 어디서나 진리를 좇아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 그 마음과 생각과 행동이 날마다 더욱 의롭게 변화되는 사람―바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사랑이신 동시에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사랑 속에 거한다는 것은 곧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그 분의 능력 속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우리 같이 하찮고 더러운 죄인이 감히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고백할 수 있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아는 까닭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치 아니하신다면, 우리로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사랑할 수단도 없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행여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면서도 그 삶이 전혀 의롭게 변화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하는 자일 뿐 정말 그 사랑을 신뢰하고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자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가장 확고한 증거는 바로, 날로 의롭게 변화되어져 가는 우리의 삶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인간을 의롭게 하나님의 힘가운데 있는 것을 의미하기에, 그 사람은 의롭게 변화되어져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일깨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이렇게 간구하고 계십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0-21)
여기에서 `이 사람들'이란 지금 주님 앞에 있는 제자들을 일컬음이요, `저희'란 제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고 있는 혹은 믿게 될 그리스도인들 곧 교회를 칭함이요, 우리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세상이란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문의 요지는 이 세상에서 아직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도 알지 못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보내신 구원자이심을 믿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믿는 사람들을 인해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22-23절을 통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계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 안에서 하나되게 하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해주는 것이란 말입니다.
자, 생각을 한번 해 보십시다.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이심을 믿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태산보다 더 높이 쌓여진 돈으로 가능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보다는 재벌그룹 회장님들이 더 적격일 것입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권력으로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보다는 강대국의 집권자들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아니면 강철같은 육체의 건강으로 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올림픽의 금메달리스트들이 우리보다 백번 더 유리할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의로운 삶으로만 그 일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시간마다 의로워져 가는 우리의 마음, 날로 의롭게 변해 가는 우리의 생각, 주일이 거듭될수록 더욱 의를 추구하는 우리의 행동을 통해서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자 되심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우리를 사랑하심이 구체적으로 보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과 구분되는 구별점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하나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이것 없이는 불신자들의 삶과 분별될 수가 없고, 불신자들을 감화시킬 수 없고, 불신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가 없으며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할 수도 없기에, 결국 참된 그리스도인 일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각기 다른 모습, 다른 성품, 다른 직업, 다른 환경,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삶에 관한 한 하나가 되어야 할 이유는,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요, 의로우신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힘이요 능력이며, 우리는 바로 그 사랑을 세상으로 알게하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줄 알았삽나이다"(25)
세상 사람들은 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분명히 알고 계셨고,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주신 구원자이심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루어 주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친히 못 박혀 돌아가시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의요, 하나님의 의는 곧 사랑임을 몸소 증명해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아는 우리에게 남은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의 의를 좇아 사는 삶―바로 이것입니다.
아담한 아파트로 새로이 이사를 간, 사회적으로 유능하고 능력을 인정받는 성도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마음만 먹으면 이보다 훨씬 더 큰 아파트에서 훨씬 부자로 살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으면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지금의 삶이 정말 행복합니다"
그 말이 저에게는 이렇게 들렸습니다.
"나는 불의하게 잘 사는 세상의 길보다는, 의롭고 바르게 사는 믿음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길속에 참된 행복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 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알고 바로 깨닫고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자요, 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을,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자요, 이 세상을 밝히는 진리의 등불이 되는 자입니다.
1983년에 이어 지난 11월 7일 또 다시 기성, 명인, 본인방 3대 타이틀을 동시에 석권하여 일본 바둑계에서 전무후무한 신기록을 세운 조치훈 기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바둑은 모노레일과 같다. 타고난 운명이다.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둑은 나의 원점이고 바둑이 없으면 나도 없다"
이런 정신으로 살아가는 한 그는 불멸의 기사로 남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구원자 되심과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세상에 보여주고 세상으로 알게 하려 선택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를 좇는 삶이란 모노레일과 같습니다. 타고난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원점이자 종점이며, 의가 없으면 우리도 존재치 않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 거하는 자들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의롭게 하는 힘이요 능력이며, 우리는 그 사랑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선택받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아버지의 그 사랑을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사랑한다 고백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사랑 속에 거하지는 아니하면서 우리의 욕망을 위해 그 사랑을 이용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기는커녕, 세상을 더럽히는 자들을 욕하면서도 그들과 공범이 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죄를 회개하오니 이 시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의는 둘이 아니요 하나임을 깨달아 하나님의 사랑 속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인 사랑의 말씀 속에 거하므로 우리의 믿음이, 생각이, 행동이 날로 의롭게 변화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삶을 통해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보여주는 의로운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불의 하게 잘 사는 번민과 갈등과 고통보다는 의롭고 바르게 사는 평강과 행복이 가장 큰 재산임을 아는 지혜를 갖게 해 주시옵소서.
―― 아멘 ――
출처 : 주님의 시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