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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더라 아시고 / 요한복음 18 : 1∼11

by 【고동엽】 2021.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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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더라, 아시고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8 : 1∼11


2년전 안식년 때 미국을 여행하던 중, 미국사람이 쓴 책을 통해 그 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뇌졸중 환자와 같이 손이 마비되어 오그라 붙은 사람의 경우 살아 있는 동안 그 손을 펼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그러나 그 사람의 숨이 멎는 순간에 그 손이 저절로 풀려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살아 생전 무엇인가 움켜 쥘 듯이 오그라져 있던 손이 죽음과 동시에 저절로 풀려진다는 것은, 제게는 참으로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그래서 95년 4월 첫째 주일 설교 시간에 저는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원문을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 중에 손이 마비된 분들이 계십니다. 마비된 손은 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같이 오그라들어, 무엇인가 움켜쥐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움켜진 그 손은 약으로 펴지지 않습니다. 수술로도 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손이 저절로 펴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바로 인간의 호흡이 멈추는 순간, 인간이 죽는 순간 그 손이 저절로 펴진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욕망에 사로잡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움켜잡아도, 그것 때문에 살아 생전 악취만 풍기다가, 죽을 때는 그 모든 것 다 남겨두고 빈 손으로 갈 뿐입니다. 그야말로 공수래 공수거,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 속에는 서랍이 없고,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지 않습니까?
 
지난 12월 19일 새벽 2시 30분, 저희 어머님께서 소천하셨습니다. 어머님의 운명을 확인한 뒤 제일 먼저 한 것은, 평소 어머님께서 원하셨던 찬송을 불러 드리면서 어머님의 온 몸을 바르게 정돈해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2년 9개월 전 자리에 누우시면서 부터 마비되어 있던 어머님의 왼손이 오그라붙은 채, 그대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제가 읽은 책에는 사람의 호흡이 멎는 순간에 마비된 손이 풀린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어머님의 손이 펴지지 않고 그대로 있다는 것은, 아직 운명을 하시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희 가족들은 새벽 3시가 될 때까지 30분 동안이나 찬송가를 부르면서 계속 어머님을 지켜보았습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어머님의 호흡은 완전히 멎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님의 왼손은 전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의아해 하면서도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어 새벽 3시 15분 경, 미리 얘기가 되어 있던 삼성의료원 영안실로 전화를 드렸습니다. 병원으로부터 앰블런스가 도착하자 먼저 응급실로 향했습니다. 의사의 사망진단서가 있어야 고인을 영안실에 안치할 수 있는 까닭이었습니다. 응급실에 도착하자 당직 의사가 필요한 절차를 다 거친 뒤에 정식으로 사망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저는 의사를 뒤따라가며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사망하셨다는 데 왜 마비되었던 손이 풀리지를 않습니까?"
의사가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저희 어머님의 왼손이 뇌졸증으로 오그라붙어 있었습니다. 정말 운명하셨다면 이제 그 손이 펴져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아직 그대로 입니까?"
그제서야 제 말을 알아들은 의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한번 마비되어 오그라 붙은 손은 죽어서도 펴지지 않습니다."
제가 책을 통해 알고 있던 것과는 정반대의 말이었습니다. 나중에 장례식이 다 끝난 뒤 전문가에게 확인해 보았더니, 의사의 말이 맞았습니다. 죽기 직전에 근육이 마비된 경우에는 혹 죽으면서 풀리는 수가 있지만, 평소에 마비된 손이 죽었다고 해서 풀리는 경우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읽었던 그 책의 저자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책의 내용을 전문가에게 확인도 해보지 않고 그대로 믿어 버렸던 저의 경솔함이 결코 면해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님께서 운명하신 뒤 근 45분 동안이나 할일 없이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하마터면 더 긴 시간을 허비해 버릴 뻔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잘못된 앎 때문에 설교시간에 잘못된 인용을 행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 날 설교를 들으신 분 가운데에서 아직까지 마비된 손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고 계신 분이 있으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설교를 했던 저의 잘못이므로 이 시간을 빌어 여러분들께 정중하게 사과를 드립니다. 그리고 95년 4월 첫째 주일 설교 중 문제가 된 부분을 다음과 같이 정정하겠습니다.
살아 생전 마비된 손은 죽었다고 해서 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손이 자유자재로 움직일 때, 지금 그 손으로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그 손으로 진리를 움켜쥐십시오. 살아 생전 무엇을 움켜쥐느냐에 따라 죽음 이후가 결정됩니다.
 
아는 것은 정말 좋은 힘입니다. 아는 만큼 삶의 경지와 폭이 더 넓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른 것을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 알면 엄청난 폐해를 초래하게 됩니다. 바른 것을 바르게 알고서 살아가는 삶과, 잘못 된 것을 잘못 알고 살아가는 삶의 차이가 얼마나 지대한지를 오늘의 본문이 똑똑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그런데 4절 역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유다도 알고 있었고, 주님께서도 알고 계셨다고 본문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에게 사용된 동사의 원어 역시 똑같이 eido입니다. 알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관한 한 주님과 가롯 유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알기는 알되 그 아는 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본문이 말하는 바 예수를 배신한 가룟 유다가 알고 있었던 것은 대체 무엇이었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제자들과 더불어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시기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으로 나아가실 것이란 사실을 가룟 유다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마가의 다락방에서 예수님과 함께 최후의 만찬에 동석하고 있다가 그 자리를 빠져나와, 대 제사장으로 부터 은 30냥을 받는 댓가로 예수님을 팔아 넘기기로 한 가룟 유다는, 그 시간에 예수님을 잡아 넘길 최적지야 말로 겟세마네 동산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예루살렘 성 내에서 예수님을 체포하려 했다가는 예수님을 추종하는 예루살렘 군중들과 큰 충돌을 빚을 것이 뻔했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은 기드론 시내를 사이에 두고 예루살렘 성과 격리되어 있었으므로, 그 한 밤중에 예루살렘의 군중들이 그곳에 있을 리 없었습니다. 예수님 주위에 사람이 있다면, 자기를 제외한 제자 11명밖에 없을 터인데 그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데 겟세마네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 수 없음을 가룟 유다는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군대와 및 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가룟 유다는 진리를 사모하는 자들을 데리고, 그 손에 예물을 들고 주님 앞으로 나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장한 병사들을 이끌고, 그 손에 병기를 움켜쥐고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잡아 넘길 최적지로 알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을 생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가롯 유다가 알고 있었던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이었습니까? 은 30냥으로 더러운 자신의 욕망을 충족킬수 있는 욕망의 방법, 욕망의 길이었습니다. 욕망에 관한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떨쳐 버려야 할, 잘못된 것을 잘못 알고 있는 자였습니다. 겟세마네 예수님 앞으로 다가가는 가룟 유다 일행의 손에 든 병기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이야먈로 추악한 욕망, 그 자체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살아 생전 두 손으로 오직 욕망만을 움켜쥐고 살았던 자였습니다. 욕망을 움켜 쥔 가룟 유다가 지금 주님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가룟 유다의 몸은 주님과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마음은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죽인 뒤였습니다. 욕망과 진리는 양립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가룟 유다와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알고 계셨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만민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당신 자신이 십자가 고난을 당해야 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십자가 고난의 때가 바로 지금임을 아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아셨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바른 것을 바르게 알고 계셨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예수님께서도 빈손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룟 유다처럼 두 손으로 사악한 욕망을 움켜쥐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과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이 다 잠든 캄캄한 밤 중, 겟세마네 동산에서 병기로 무장한 배신자 가룟 유다 일당 앞에 홀로 서 계신 예수님은 혈혈단신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님 안에, 주님께서 아버지 안에 계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두손으로 붙잡는 자의 심령 속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도 알고 있었고, 예수님도 알고 계셨습니다. 알았다는 그 행위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양자는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양자가 알고 있었던 내용과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 알고 살아 생전 허망한 욕망을 움켜쥐었던 가룟 유다는 은 30냥으로 지갑을 불리는 듯 싶더니 인류 역사상 가장 더러운 배신자의 표상이 되어, 자기 욕망의 무게에 짓눌려 스스로 목숨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참되고 바른 진리의 길을 바르게 알아 마지막 순간까지 약속의 말씀을 붙잡았던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유사이래 가장 처참하고 무력하게 죽는 것처럼 보이더니, 죽음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시어 영원한 생명의 주, 만인을 위한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무엇을 아느냐에 따라서 아는 것이 영원한 힘일 수도 있고, 치명적인 독약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올해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 모두 지난 1년을 되돌아보십시다. 바른 것을 바르게 알고 바른길, 즉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좇았습니까? 아니면 잘못된 것을 잘못 알고 그릇된 길, 곧 가룟 유다의 길을 따랐습니까? 얼른 판단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간단한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지금 각자 자기의 두 손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두 손으로 힘껏 움켜쥐고 있는 것이 욕망인지 아니면 약속의 말씀인지를 살펴보십시오. 손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한 세상의 병기입니까? 아니면 진리의 법도입니까? 각자 자기의 마음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그 속에 하나님께서 자리 잡고 계십니까? 아니면 욕망이 활개치며 왕노릇하고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참된 진리를 바르게 알아 두 손으로 진리를 붙잡지 아니하는, 올해는 말할 것도 없고, 새해를 백번 맞이 한다한들 그것이 새해 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떠나서는 새로운 생명도, 새로운 역사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살아 생전 오그라 든 손은 죽었다고 해서 펴지지를 않습니다. 여러분의 두 손이 자유자재로 움직일 때 지금 그 손으로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진리를 움켜쥐십시오. 지금 이 순간부터 무엇을 알고 무엇을 움켜잡느냐에 따라 내년은 물론이요, 우리 죽음 이후가 결정됩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유다도 알고 있었고 예수님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과 결과는 판이했습니다. 한 해 마지막 주일을 맞아 아무리 되돌아보아도 우리가 알고 추구하던 모든 것이 가룟 유다와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이제 이후로 진리를 바로 알고 진리를 좆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두손이 자유자재로 움직일 때 진리를 붙잡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내년은 정녕 새해가 되게 하시고, 우리가 살아 생전 움켜 쥔 그것을 주님께서 부르시는 날, 주님께 보여 드리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아 멘­

 
출처 : 주님의 시선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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