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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종의 이름은 / 요한복음 18:1-11

by 【고동엽】 2021.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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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첫머리인 창세기 1장 1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불과 네 단어로 구성된 아주 짧은 문장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우리 신앙의 연륜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이 한 구절이 실은 모두임을 절감치 않습니까?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창조주이신 하나님만 당신의 피조물인 우리를 책임져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피조물인 우리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고 고치는 방법과 능력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그 분이 우리를 만드신 창조자시기 때문에 피조물된 우리는 그 분의 법도 안에서만 참된 행복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분이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우리가 끝내 그 분의 법도에서 벗어나려 할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분에 의해 용도 폐기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확실히 창세기 1장 1절은 우리 신앙의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훈련, 경건훈련을 거듭하는 것은 우리의 삶으로 이 한 구절에 승복하기 위함입니다. 이 한 구절에 우리의 삶이 온전히 승복하는 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진정 우리는 창세기 1장 1절 말씀만 가지고서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또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창세기 1장 1절 한 절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신구약 합쳐 무려 31,173절이라는 엄청난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 한절만으로도 다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머지 31,172절은 왜 필요할까요? 우리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이 한 구절만으로도 족한 신앙 경지에 다다를 때까지, 우리의 모든 질문에 답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사려 깊은 인간일수록 자기 정체성을 바르게 인식하기 원합니다. 성숙한 인간일수록 맹신을 경원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는 바른 신앙을 추구합니다. 그렇기에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많은 질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 인간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성경인 것입니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 1)

"아브람의 99세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 1)

 

어느 날 하나님을 만난 아브라함에게는 그가 만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많은 질문들이 제기되었습니다. 그 아브라함의 질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나는 방배요 너의 상급이며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매, 너는 한눈 팔지 말고 내 앞을 걸어가라'고 답변 하십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1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3 ∼14)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인간의 질문에 대해 인생이란 안개처럼 덧없는 것이란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질문에 대하여 답을 갖고 계십니다. 이것은 자동차를 만든 자가 자동차에 관한 모든 질문에 대해 해답을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답을 갖고 있다는 것과 그 답을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해 준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답을 알면서도 말해주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또 답을 말해 주어도 난해해서 알아들을 수 없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질문에 대해 답을 갖고 계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답을 인간이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의 수준에 맞추어 되풀이하여 설명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이것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구절로 시작된 성경이 이처럼, 무려 31,173절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엮어지게 된 동기이자 이유입니다.바로 그와같은 하나님의 답변과 설명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되며, 우리의 신앙은 더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지난 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횡성 수련원에서는 '제 1회 성경통독 수련회'가 열렸습니다. 4박 5일동안 밤에 잠자는 시간, 하루 세끼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서 전적으로 성경만 최대한 빠른 속도로 통독하는 데 무려 61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긴 시간입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한 인간의 쏟아지는 질문에 대해 이처럼 긴 시간 동안 인내하면서 답해 주고 설명해 줄 수 있겠습니까? 자기 자식이라 할지라도 계속된 질문에는 끝내 신경질로 답하는 것이 인간인데, 하물며 타인에게는 두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31,173 구절로 인간의 물음에 답하시는 하나님이야말로 답변의 하나님, 설명의 하나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 역시 이 하나님을 우리에게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의 기도를 드리시는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가룟 유다가 군대를 이끌고 왔습니다. 바로 그 체포의 순간을, 4복음서 중 가장 먼저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마가복음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라.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저희가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곁에 섰는 자 중에 한 사람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 뜨리니라."(막 14:44∼47)

 

가룟 유다 일행이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순간, 예기치 않았던 충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곁에 서 있던 한 사람이 예수님을 체포하지 못하도록 검을 뽑아 휘둘렀는데, 대제사장의 종이 그 칼에 맞아 그만 귀가 떨어져 나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14장 48절로 49절은 이렇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 와중에 주님께서는 진리보다 폭력을 더 숭상하고 있는 인간에 대해 탄식하셨음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보다 뒤늦게 기록되었던 마태복음은 똑같은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 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마26:51)

 

또 55절이 계속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마26:55)

 

이 두 구절은 마가복음의 내용과 동일합니다. 그런데 이 두 구절 사이에는 마가복음에 없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52절로 5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마26:52~54)

마가복음에는 나타나 있지 아니한 이 부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가복음을 통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게 된 사람들 사이에 질문이 제기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곁에 있던 자가 체포조에게 칼을 휘둘러 귀를 베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더 이상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어떻게 체포조들은 제자들의 별다른 저항없이 예수님을 손쉽게 연행해 갈 수 있을까?' 바로 이 질문에 대하여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며 꾸짖으시고, 당신 스스로 체포에 응하셨기 때문이라고 답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또 다른 질문이 제기 되었습니다. '그때 정말 대제사장의 종의 귀가 베임을 당했다면 그것은 오른쪽 귀인가? 아니면 왼쪽 귀인가?' '그리고 그 종의 귀는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의사인 누가가 기록한 누가복음을 통해 이렇게 설명해 주십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편 귀를 떨어 뜨린지라,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눅 22:50∼51)

 

그때 떨어져 나간 종의 귀는 오른쪽 귀였는데, 예수님께서 떨어진 그 귀를 주워 종의 귀에 도로 붙여 주시사 낫게 해 주셨다는 답변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질문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또 제기 되었습니다. '만약 그 이야기가 정말 사실이라면 그때 칼을 휘둘렀던 사람은 구체적으로 누구며, 또 칼에 맞았던 사람은 실제로 누구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인 요한복음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 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요 18:10)

 

칼을 휘둘렀던 자는 예수님의 제자 중 제일 성질이 급했던 베드로요, 그 칼을 맞은 자의 이름은 말고라는 사람이었다는 하나님의 설명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인간의 질문에 대해, 무슨 그런 하찮은 질문을 하느냐며 면박을 주시지 않습니다. 거듭되는 인간의 질문을 귀찮아 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몇 번이든지 계속해서 답해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답변의 하나님, 설명의 하나님이신 까닭입니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분은, 사망으로 치닫는 죄인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는 인간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었고, 그 분의 삶은 그 답변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그 분은 인간과 함께 떡을 떼고 인간과 함께 주무시고 인간의 언어를 쓰시면서 인간의 수준에 맞추어 하나님의 답변을 되풀이하여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 분 역시 답변의 그리스도, 설명의 그리스도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곧 성자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임한 자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2천년전 오순절 날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임했을 때, 그 곳에 모인 제자들에게 한 공통점이 나타났으니, 그들이 모두 방언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방언이란 흔히 생각하듯이, 소위 천사의 말이라 하여 그 말을 듣는 자는 두말할 것도 없고, 그 말을 하는 사람조차도 그 뜻을 알지 못하는 그런 방언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장 5절로 8절이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자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바로 그 곳에는 각각 다른 16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자들이 방언을 할 때, 그 사람들은 각기 자기나라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진리의 답변을, 진리의 설명을 들었던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령님은 인간에게 답변을 얻게 하고 그 얻은 답을 설명케 하는 능력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답변의 하나님 설명의 하나님이시기에, 그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인간에게 바로 그 능력을 부어 주신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불교와의 차이입니다. 선불교를 보십시오. 공한,화두만을 던져놓고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네 스스로 답도 설명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등지고 산속에 앉아서 답을 얻지 못한 자들이 있는가 하면, 불교의 고고한 진리는 대중속에서 미신화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친히 답변해 주시고 자상하게 설명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진정 참된 그리스도인이요,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라면, 세상 사람들의 질문에 대하여 진리로 답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진리의 답을 상대의 언어로 상대의 수준에 맞추어 상대가 원하는 한 상대가 알아들을 때까지 몇 번이든 반복하여 설명해 주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모습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이요, 성령의 권고인 동시에 그것이야말로 끊임없는 우리의 질문을 귀찮다 아니하시고, 31,173절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우리에게 답하시고 설명해 주시므로 우리를 이 정도로까지 가꾸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인 것입니다.

작금의 정국을 보십시오. 노동관계법 변칙 개정과 관련하여 참으로 혼미하기 그지없습니다. 조국의 장래가 심히 염려스럽습니다. 온 나라가 이렇듯 시끄럽게까지 된 것은, 조국의 내일을 바라보면서 욕을 듣는 한이 있더라도 바른 답을 추구해야 할 자들이 답을 갖기는커녕 오직 시류에 따라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이 첫째 이유요, 자기 나름대로 답을 가졌다고 하는 자들은 자기 답을 일방적으로 강요만 할 뿐, 왜 그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 답변인지를 끈기 있게 설명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 두번째 이유입니다.

정치란 무엇입니까? 오늘 그리고 내일 우리 국민 모두에게 요구되는 바른 해답을 더불어 함께 찾고, 그 해답에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국민들을 끈기 있게 설득하여 국민의 힘을 하나로 모우는 기술과 능력입니다. 바로 그 과정속에서 조화와 타협이 가능합니다. 답하고 설명한다는 것은 먼저 상대방의 질문에 귀기울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정부든 국민이든, 여든 야든, 사든 노든, 힘과 영향력을 가진 자들이 사심을 떠나 나에게 유리한 답이 아니라 모두에게 바른 답을 찾고 그 답을 정직하게 설명하는 겸허함을 갖지 않는 한, 참된 대화도 타협도 있을 수 없으며, 오늘의 소요가 잠복할지언정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의 삶이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여전히 목전의 이득에만 급급할 뿐 진리안에서 바른 답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까? 진리위에서 바른 답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속한 가정과 일터속에 소요가 그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가 찾은 답을 교만한 마음으로 단지 강요하고 명령하기만 할 뿐 겸손하게 설명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을 통해서는 주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 이 땅을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최후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복음을 증거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주님의 말씀 곧 진리를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전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안에서 바른 삶의 해답을 찾아 그것을 인내와 끈기를 갖고 그 사람의 언어로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 사람과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시리라 약속하십니다. 주님께서 바로 답변의 주님이시요, 설명의 주님이신 까닭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 우리에게 유리한 답이 아니라, 진리안에서 옳고 바른 답을 찾아 나섭시다. 그리고 그 답을 우리의 가족들에게, 동료에게, 이웃에게, 사회를 향해 겸손하게 삶으로 설명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십시다. 그것은 갈등과 반목과 대립 그리고 분쟁과 다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내일을 대비하는 최선의 예비책이 될 것입니다. 왠지 아십니까? 진리안에서 바른 해답과 설명을 추구하는 우리를 통해 답변의 하나님, 설명의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내일을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침묵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바른 해답을 알지 못해 방황하는 자 앞에서 해답을 가진 자의 침묵은 무서운 교만일 뿐입니다. 침묵은 귀합니다. 그러나 간절히 설명을 구하는 자 앞에서 입을 다무는 것은 잔인한 범죄일 따름입니다. 내가 진리안에서 바른 답을 구하지 않았음에, 내가 얻은 답을 강요만 할 뿐 겸손하게 설명하려 하지 않았음에, 세상이 이처럼 혼미와 소요 속에 빠졌음을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칼을 휘두른 자는 베드로요, 그 칼을 맞은 자는 말고라 끝까지 답변하시고 설명하시는 하나님을 닮게 하옵소서. 답변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바른 답을 얻게 하시고 설명하시는 하나님의 설명으로 설명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갈등과 반목과 대립으로 얼어붙은 사람들의 마음들을 따스하게 녹여주는 진리의 등불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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