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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이라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8:38b-19:7
빌라도 총독은, 십자가형에 처해 달라고 유대인들이 고발한 예수님을 심문해 보았지만, 그에게서 죽일만한 죄를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그날 저녁부터는 유월절이 시작되게 되어 있었으므로, 유월절이면 죄수 한 명을 특사로 풀어 줄 수 있는 관례에 따라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으로 고발당한 예수님을 풀어 주려 했지만, 유대인들은 강도 바라바의 특사를 소리 높여 요구했습니다.
1차적으로 자신의 뜻이 무산된 빌라도는 일단 예수님을 군병들에게 내어 주었고,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무자비한 채찍질을 가한 뒤에, 예수님의 머리에 왕관 대신 가시관을 그리고 몸에는 왕을 상징하는 붉은 망또를 씌웠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고발된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놀리면서 손바닥으로 마구 구타하기까지 했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을 다시 유대인 앞으로 끌고 나와 본문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4)
너희들이 보는 바와 같이 이 정도로 혼을 내어 주었으니 이제 풀어 주겠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말이 끝나자마자 무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일종의 시위였던 것입니다. 기분이 언짢아진 빌라도는 6절 하반절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자꾸 십자가 십자가 하는데, 어디 할테면 너희들 마음대로 해봐라, 내가 판결을 내리지 않는 한, 그런 일을 절대로 있을 수 없을 것이다란 의미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우리에게도 법이 있다'고 소리쳐 응수했습니다. 로마인 너희들에게만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인 우리에게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요구할 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7)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여 마땅한 이유를,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씀하신 데서 찾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이요, 개의 새끼는 개이듯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곧 하나님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인간이 하나님일 수 있다는 것, 그것도 초라하기 짝이 없는 빈민 출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아니 하나님일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믿는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믿는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자처하는 예수님을 죽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결코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며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를 주저치 않았던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믿었던 대로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습니까? 유대인들의 확신과는 달리 그 분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 가셨음에도 불구하고 무덤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고 사망을 이길 수 있는 분은 참생명이요,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흉내낼 수 있지만, 결코 흉내낼 수 없는 것 한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스스로 죽음을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그 누구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2천년 전 죽음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삼위일체 하나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고 계십니다. 그 분이 부활치 아니하셨다면, 그 분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지 않는다면, 어찌 우리가 그 분의 이름으로 이처럼 거듭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각자 각자를 향한,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하시며 자상하신지, 이제 구체적인 실례를 직접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3교구를 담당하고 있는 강정호 목사입니다. 저는 너무나 평범한 가정에서 2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3학년이던 1967년 8월 6일, 저의 아버님께서 오랜 병환과 두 번에 걸친 대수술 끝에 위암으로 돌아가시고 의료보험도 없던 그 시절, 저희 집은 가세가 기울어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어머님은 저희 5남매를 양육하시기 위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애쓰셨지만 점점 심해지는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저와 두 여동생과 그리고 당시 네 살이었던 막내를 전라남도 순천에 있는 보육원에 맡기셨습니다. 사실은 버리신 것입니다. 1968년 3월 28일, 저와 세 동생들은 지금은 돌아가신 저의 외할머님의 손에 이끌려 순천 시에서 약 10리 정도 떨어진 외진 골짜기에 소재 했던 보육원에 맡겨졌습니다.
주위 어른들은 저희들이 보육원에 가게 되면 전혀 새로운 희망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지만 실제 보육원에서의 생활은 말로 들었던 것과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저와 동생들은 각각 다른 방에서 살아야 했고 그 때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단체생활에 적응을 해야만 했습니다. 보육원에서는 규율을 잡기 위한 아침저녁의 집합이 있었고, 집합 끝에는 으레 기합이 따랐으며 매가 덤으로 추가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엄마 품을 떠나 생면부지의 친구 형들과 사귐을 가지는 것도 힘들었고 더욱 참고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이제 보육원에 들어간 저에게 집중되는 다른 아이들의 시선이었습니다. 다른 아이들보다 비교적 공부를 잘했지만 몸집이 왜소했던 저의 행동거지 하나 하나가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었고 대부분 친구들의 따돌림과 놀림 속에서 저는 [해꾸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형들에게 개인적인 일로 불려가 얻어맞을 때면 생각나는 것은 살벌한 보육원 분위기와는 너무나 달랐던 다정한 엄마의 얼굴이었습니다. 형에게 얻어맞고 외진 언덕 바위 위에 앉아서 엄마를 생각하며 홀로 울다가 보육원형에게 발각되어 또 다시 얻어맞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당시 11살이었던 저에게는 너무나 견디기 어려운 일들이었습니다. 엄마는 저와 동생들을 보육원에 넣을 때 학교를 다녀서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보육원에 가야한다고 말씀했지만 저에게는 장래에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지금 당장의 이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 더욱 절실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보육원 생활이 힘들수록 엄마가 보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한 저는 저의 세 동생들을 내버려두고 보육원에서 도망하여 엄마를 찾아갔습니다. 엄마가 보고 싶은 마음이야 지금 저의 막내딸과 똑같이 당시 네 살바기 아기였던 저의 막내 남동생이나 저의 여동생들이 훨씬 더했겠지만 저는 저만 의지하고 바라보는 동생들을 생각할 것 없이 그들을 버려두고 엄마를 찾아 홀로 도망했습니다. 큰 길로 가면 행여 보육원 형들과 선생님들을 만날까봐 산길로 10리길을 걷고 안전한 길에 들어서서 다시 기차역까지 시내를 끝까지 가로질러 걸었습니다. 기차에 몰래 숨어들어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지만 그러나 엄마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에 추위와 배고픔과 힘든 것도 몰랐습니다. 엄마가 너무나 그립고 보고 싶었고 엄마 품에 안겨서 그 동안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잊고 싶었습니다. 전에 살던 곳으로 가서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엄마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엄마는 저를 보시고 끌어안고 우셨습니다. 하지만 엄마품은 이미 제가 꿈에 그리던 안식처가 아니었습니다. 엄마는 다른 아저씨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엄마하고 같이 살 수만 있다면 그런 것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고 엄마하고 같이 살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저에게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제가 보육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훌륭한 사람이 되면 그 때 같이 살자고 했습니다. 엄마품을 떠나 보육원으로 돌아가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지만 저는 엄마품을 다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심정으로 보육원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보육원 근처까지는 갈 수 있었지만 그러나 도저히 보육원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보육원에서 새나오는 불빛을 멀리서 바라보며 산 속에서 떨며 밤을 보내기도 했고 기차대합실에서 쪼그리고 밤을 지새우다가 경찰아저씨에게 붙잡히기도 했습니다. 엄마한테 다시 가서 엄마하고 같이 살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엄마는 이 세상에 엄마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라고 했고 엄마를 잊어버리고 열심히 공부하고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다시 만나자고 했습니다. 엄마에게 거절당하고 그렇다고 보육원에 들어가 살기가 엄두가 나지 않아서 보육원 근처에서 배회하다가 산길을 걷고 시내를 가로질러서 기차를 몰래 숨어 타고 다시 엄마를 찾아서 같이 살게 해달라고 부탁하기가 네 번이었습니다. 결국 엄마와 재혼하신 아저씨의 손에 잡혀 보육원 총무에게 넘겨지면서 저는 다시는 엄마를 찾지 않을 것이라고 모진 마음을 먹었습니다. 엄마 말처럼 저를 거절하고 쫓아낸 엄마는 이제 엄마가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고 우리 엄마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고 마음을 굳게 고쳐먹었지만 엄마에게 거듭 거절당했던 일은 저의 마음 속에 깊은 슬픔과 절망과 분노로 자리잡았습니다.
그 후로도 저의 보육원 생활은 여전히 힘들었고 모든게 귀했고 모두가 가난했던 그 시절, 보육원 사정도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꽁보리밥과 보리죽이 메인 메뉴였고 점심식사의 고정메뉴는 미국에서 원조해 준 옥수수 가루를 물에 풀어서 쑨 죽이었는데 그 옥수수 마저 없어서 한 끼를 건너 뛸 것이라는 불안한 소식도 심심찮게 들려왔습니다. 때문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나 스스로 해결해야 했는데 보육원 난방을 위해서 오후마다 보육원 근처 산에서 나무를 해 오는 일은 그 중에서도 큰 일이었습니다. 세 명이 한 조가 되어서 죽은 나뭇가지를 모으거나 이미 잘라진 나무의 썩은 등걸을 괭이나 삽으로 캐서 한 가마니씩 채워가지고 오는 것이었는데 해 온 나무 양이 적어 방이 따뜻하지 못할 때는 고참형이 몽둥이로 내 엉덩이의 불을 지펴 주었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무는 확실히 해 가지고 와야 했습니다. 나무를 하다가 산 주인에게 발견되어 도망 다니기가 다반사였고 가까운 산에서는 땔감으로 쓸 나무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먼 산으로 홀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정규중학교를 갈 수가 없어서 재건학교라고 오후에만 네 시간씩 공부하는 학교를 다녔습니다. 오전에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왕복 20리 길을 걸어서 학교를 다녔는데 까만 교복을 입고 학생 모자를 쓰고 정규 중학교 교육을 받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재건학교에서도 학교건물을 짓는다고 작업에 동원되기 일쑤였고 캄캄해서 보육원에 돌아오면 꽁보리밥에 간장종지가 우리를 반갑게 맞았습니다.
검정고시를 거쳐 고등학교를 가고 싶었지만 보육원의 어려운 형편 때문에 도저히 고등학교 갈 수 있는 형편이 안되어서 혼자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 때가 보육원에서 개척했던 교회의 부흥회 기간이었습니다. 부흥회 기간 내내 고등학교에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생떼를 쓰고 있었는데 부흥회 3일째 되는 밤에 마침 저의 옆자리에 보육원 원장이신 장로님께서 앉으셨습니다. 기도하다가 옆자리에 앉으시는 원장님을 본 순간 다시 올 수 없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원장님이 저의 기도소리를 들으시라고 더욱 큰 소리로 '고등학교에 보내주시면 주님께서 기쁘게 여기시는 착한 사람으로 살아가겠다'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저의 큰 기도소리를 들으셔서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니는 것은 보육원에서 일을 돕는 친구들에 비해 그야 말로 큰 특권을 누리는 일이었고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통학버스를 타기 위해서 매일같이 새벽밥을 먹고 하루에 왕복 20리 길을 걸어서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대학에 진학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대학진학예비고사를 치루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스로 생활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 보육원을 나왔습니다.
생각해 보면 제가 어린 시절을 보육원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일은 제가 극복하기 힘들었던 불행이요 고통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아버님을 여위고 그리운 엄마 품을 떠나 보육원에서 살아야만 했던 삶은 마치 삭풍이 몰아치는 광야에 홀로 버려져서 스스로 생존의 방법을 찾아야만 했던 것 같은,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나날이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9년 동안의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기간이었지만 저의 어린 기억을 온통 눈물과 외로움과 고통으로 장식해 버린 그 때의 일들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꺼내 보여주기 싫어 저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몰래 감추어 두었던 저 혼자만의 아픈 추억입니다.
그러나 한 편 제가 보육원에서 살았던 그 기간은 주님께서 저의 삶을 강권적으로 주장하시려고 준비시키신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보육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저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었습니다. 제가 유치부 나이였던 시절에 근처 교회에 잠깐 다녔을 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예수님을 믿어야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살고 있었습니다. 보육원에서 살면서 비로소 주님을 믿는 법을 배웠고 그 때의 외로움과 고통과 눈물을 통하여 저의 모든 것 되시고 저에게 힘과 위로가 되시는 주님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주님은 저에게 너무나 좋은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육신의 부모님을 대신하여 저의 부모님이 되어 주시겠다 말씀하셨고 비록 '육신의 부모는 너를 버렸어도 나는 언제까지나 너를 결코 버리지 않고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사랑이 지극하신 주님은 언제라도 기꺼이 저의 한풀이 기도를 들어주셨고 제가 울 때에는 저의 눈물을 닦아주셨고 제가 슬퍼할 때에는 저의 마음을 위로해 주셨고 낙망하고 절망할 때에는 저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시고 제가 희망을 갖고 살아가게 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바르게 살아가는 것인지 가르쳐 주셨고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잃지 않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도록 해 주셨습니다. 제가 제 힘으로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던 것처럼 강권적으로 역사 하셔서 저의 앞길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만약 그 때, 저에게 주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저는 결코 정상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되지못했을 것입니다. 버림받은 제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또 저를 버린 이 사회에 대한 불신과 반감 때문에 방종하고 타락한 인생길을 걷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절망과 한숨 속에서 살아가는 저에게 다가오셔서 당신의 존재를 알리셨고 당신의 사랑을 깨닫게 하셨고 부모님처럼 저의 모든 생활을 챙겨주시고 간섭해 주시고 언제나 함께 계셔서 저의 삶을 주장하시고 제가 오직 주님만 바라고 의지하게 하셨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여수에서 조그마한 선박회사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배에서 숙직을 하다가 난로를 잘못 건드려 목조선박에 불을 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엎질러진 석유를 타고 불길은 순식간에 온통 배를 감싸 버렸습니다. 불은 선실바닥에서 시작하여 석유가 가득 들어있는 플라스틱 석유통이 있는 선실내의 조그마한 창고로 옮겨 붙고 있었는데 만약 그 플라스틱 석유통이 불길에 녹아서 안에 있던 석유가 흐른다면 불길을 잡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옆 배에 있던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불길을 잡을 수 있었지만 불을 끈 후에 석유통이 있던 창고 안을 살펴보니 석유통이 불기에 녹아 온통 찌그러져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군데라도 더 녹아 석유가 샜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등에 식은땀이 흐릅니다. 선박의 화재가 순전히 저의 실수로 인한 사고였지만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순간에도 저와 함께 하셔서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강하고 의로운 오른 손으로 저를 붙들어 주시고 하마터면 실패의 수렁에 빠져서 다시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저를 지켜 주셨습니다.
화재사건으로 회사에서 쫓겨나게 되었지만 그러나 평소에 저를 귀엽게 보신 분의 배려로 쫓겨난 회사와 비교할 수 없이 좋은 회사에 다시 취직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저의 삶을 예리하게 주시하시고 일마다 때마다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년 후에 당시 보건사회부 소속 국가기관에서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는 내가 장차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확실한 목표와 계획이 없었고 인생을 차분히 설계해 볼 마음의 여유도 없었습니다. 5년 3개월 동안의 말단 공무원생활은 저에게 어느 정도 생활의 안정을 가져다주었고 지금까지 지내온 저의 인생을 돌이켜 보고 그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다시 한 번 도약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현실에 만족하는 삶이 아니라, 내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제가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순간에 저와 함께 계셔서 말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의지할 데 없는 저와 동생들을 거두어 주고 키워주었던 보육원과, 보육원을 통해서 저와 동생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우리 나라와, 그리고 저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셨던 많은 분들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런 생각에서 목회자의 길을 걷고 싶었지만 제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익히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이 없었던 데다가 점차 직장생활에 재미를 느끼게 되면서 아직도 보육원에서 생활하고 있던 저의 남동생에게 목회자의 길을 걷게 하고 저는 동생이 목회자의 길을 걷도록 도와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점차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 하나님께서 뜻하지 아니한 사고로 저의 남동생을 먼저 하나님 나라로 불러 가셨습니다. 겨울에 아이들이 보육원 앞 저수지에서 얼음을 지치고 놀다가 한 아이가 얼음물에 빠지게 되었는데 물에 빠진 아이를 건져주러 가다가 그만 저의 동생이 얼음 속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동생이 건져주러 간 아이는 얕은 곳에 빠져서 깨진 얼음을 잡고 나올 수 있었지만 저의 동생은 깊은 곳에 빠져서 얼음구멍을 찾아 나오지 못한 채 그만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저의 성격이 모난 데가 있고, 이기적이기도 하고 소심했던 반면에, 제 동생은 성품이 무난하고, 착하고, 남을 생각하고 배려할 줄 아는 아이였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의 동생이 세상에 있는 것보다 하나님 나라로 불러 가시는 것을 더 선하게 여기셨는지 4살 때 보육원에 들어와 중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평생 엄마 아빠 사랑도 받지 못하고 못난 형의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어렵게 자란 제 동생을 당신의 품으로 불러 가셨습니다. 슬픔과 외로움을 딛고 꿋꿋하게 살려했던 동생, 나쁜 이 형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지도 못했어도, 형을 원망하지 않고 항상 서글서글했던 제 동생의 차디찬 죽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지는 듯합니다.
동생을 먼저 하나님 나라로 보내고 저는 다시 저의 인생을 생각했습니다. 제가 그 동안 죽 생각만 해오던 대입학력고사를 다시 치르기로 결심한 때가 제가 스물 여섯 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평소 저를 아껴주시던 상사 분께서 시험준비를 할 수 있도록 업무를 줄여주셨고 직장에서도 공부할 수 있도록 사무실 건물의 조그마한 빈 방을 내 주셨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대입시험을 치룰 때는 [예비고사]라고 해서 합격만 하면 어느 대학에도 지원할 수 있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년이 지나 7년째 되던 그 때는 [학력고사]로 이름이 바뀌었고 학력고사 점수에 따라 대학에 지원하도록 제도가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학교 교과과정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고 고등학교 다닐 때 조금 공부해 놓은 것도 영어 빼 놓고는 거의 잊어먹은 형편이었습니다. 성도님 여러분의 가정에도 대입을 준비하는 자녀분들이 계시겠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7년이 되는 해에 대학에 새로 도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고 의지할 데 없이 살았던 사람이 스물 여섯의 나이에 인생을 새로 시작하기 위해 직장을 버린다는 것도 쉽게 결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상사 분의 배려로 시험준비를 할 수 있었지만 근무규칙 상 제가 원하는 대로 무작정 많은 시간을 얻을 수는 없었고 본격적인 공부를 할 수 있는 기간은 두 달여에 불과했습니다. 그 때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그것은 다른 학생들도 저와 똑같이 하는 것이고 그 학생들이 3년 이상 계속 공부해도 쉽지 않은 시험인데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6년 지나 7년째에 대입시험을 치르면서 그것도 본격적으로 공부한 기간은 2달여에 불과했던 제가 공부를 했다면 얼마나 했겠습니까?
시험을 치르고 저의 점수를 대충 계산해 보니 도저히 대학에 갈 수 있는 점수가 안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마음을 낮추어 문교부에서 학위를 주지 않는 신학교에 가기는 싫어서 내심 포기하고 있었는데 학력고사 점수표를 받아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점수표에는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무려 80점 정도나 더 많은 점수가 적혀 있었습니다. 혹시 다른 사람의 통지서가 제게로 잘못 배달된 것이 아닌가?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살펴도 그것은 분명 제 이름이 적힌 저의 성적표였고 혹시 다른 사람의 점수가 제 것으로 잘못 채점된 것은 아닐까? 며칠 후에 사과편지와 함께 정정통보가 오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으로 며칠을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제가 저의 실력에 비해 월등 많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알지 못한 채 선택한 답들이 정답이 되도록 주님께서 역사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답을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정답을 선택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저에게 지혜를 주시고 저 대신 펜대를 움직여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신학교를 다니면서도 주님께 나의 모든 것을 온전히 맡겨드리는 삶을 살지 못했고 목회자가 된 지금에도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모습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저의 이런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저를 사랑하셨고 저의 못남을 그대로 용납해 주셨고 은혜를 베푸시고 저의 삶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언제나 저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대로 일마다 때마다 당신의 은혜와 넘치는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모든 면에서 부족할 수밖에 없는 제가 오늘날 목회자로서 주님의 교회와 성도님 여러분들을 섬기게 된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입니다. 저의 수많은 인간적인 결점들과 연약한 점들, 그리고 성인이 되기까지 제가 저질렀던 그 수많은 실수들과 시행착오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이 자리에 서 있기가 부끄러울 뿐입니다. 언제나 신실하셔서 저와 함께 계시고, 외로웠던 저에게 좋은 상담자가 되어 주시고, 육신의 부모님 대신 저의 부모님이 되어주시며, 저와 함께 웃고 울어주신 주님, 성도님 여러분께서도 아시는 것처럼 목회자로서 특별한 능력이나 달란트도 없이 부족하기 만한 사람을 부족하다 말씀하지 않으시고, 충성되지도 못한 저를 충성되이 여기셔서 당신의 말씀을 증거하는 목회자로 세워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세상에 오셔서 모든 연약한 자들의 연약함을 감당해 주시고 그들과 함께 즐거움과 슬픔을 나누셨던 주님을 본받는 작은 목회자가 되려고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항상 제 마음에 고통이 되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아직도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제 자신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알고, 제 자신에 대한 주님의 뜻을 분명히 깨닫고, 또 어떻게 어머님을 공경해야 할지 그 방법까지 익히 알고 있지만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기에는 아직도 멀었음을 제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저를 낳아주시고 돌이 지나서부터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계속해서 앓았던 저를 보살펴 주셨던 어머니, 어린 저희 남매를 보육원에 보내시고 한 순간도 편히 살지 못하셨을 어머님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한편 어린 자식들을 고아원에 맡기고 엄마하고 같이 살고 싶어서 매달려 애원하던 저를 애써 외면하시던 그 모습을 생각하면 엄마에게 서운했던 마음을 완전히 지워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저희를 고아원에 버렸던 어머님이 미웠고, 이제 와서 자식들을 고아원에 버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당연히 이해해 줄 것을 요구하는 어머님이 미웠고, 이제는 성장한 자식들에게 부모로 공경해 줄 것을 요구하시는 어머님이 미웠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머님이 밉지 않습니다. 제가 외롭고 힘들고 괴로울 때마다 베풀어주신 크신 은혜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순종하지 못하는, 저같이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을 이해하시고 인정해 주시는 주님을 생각하면 당시 홀로 사시기엔 너무나 젊으셨던 어머님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나온 인생동안 주님의 인도하심과 사랑하심을 늘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만을 바라보지 못하고, 주님만을 의지하지 못했던 저를 이해하시고 용납하셨던 주님을 생각하면 어린 저희 남매를 고아원에 보내셨던 어머님을 용납할 수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시고 내가 받아야할 죄값을 대신하여 온갖 조롱과 모욕과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어 주신 주님,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 죽음을 깨치시고 다시 살아나신 주님의 그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 당신의 인생을 위해 저희를 고아원에 버리시고 외면하셨던 어머님을 공경하기 위하여 보다 많은 노력을 할 수 있고 어머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더 많은 애를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같은 사람을 택하시고 그 삶을 인도하셔서 당신의 사랑을 증거 하는 목회자로 세워주신 주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과, 베풀어주신 감당할 수 없는 은총을 생각하면 앞으로도 주님을 위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껏 제가 살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인도하심 때문이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병환으로 세상을 버리시고 어머님께서 어린 저와 동생들을 고아원에 버리셨을 때 저와 동생들은 세상에서 버려진 존재들이었고 그 후로도 저는 세상에 희망을 두고 살 수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죄악 때문에 버려진 존재와도 같았던 세상사람들을 찾아오시고 함께 계시며, 위로하시고, 온 세상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영생을 선물로 주시는 큰 사랑을 보여 주셨던 주님께서는 또한 저를 찾아오셔서 저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저의 위로자가 되어 주셨고, 저의 힘과 능력이 되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저에게 모든 것이 되어 주셨고, 어떻게 살아야할지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저를 은혜 가운데 일일이 주장하셨습니다. 제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주님은 저와 언제나 함께 계셔서 저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고,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할 때에는 강권적으로 역사 하셔서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게 해 주셨을 뿐 아니라 그 어려움을 통하여 더욱 큰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부활치 아니하셨더라면 어찌 저에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으며 제가 이런 모습으로 살아 있을 수 있으며 어찌 감히 제가 주님의 이름으로 설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감히 사랑한다고 고백드릴 수밖에 없는 주님은 또한 바로 여러분의 주님이 되십니다. 그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나라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우리의 친구가 되시고 위로가 되시며 우리 힘과 능력이 되시는 주님! 저희 같은 사람을 사랑하셔서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베풀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저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언제까지나 주님을 사랑하는 백성들이 되게 하시고 주님께서 저희에게 신실하셨던 것처럼, 주님 앞에서 언제까지나 신실한 자로 살아가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결코 저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함께 계시는 것처럼 주님만을 바라고 의지하는 자들이 되게 하시며 주님만이 저희의 모든 것 되시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저희를 한없이 사랑하시고 저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이해하시고 용납하신 주님이 저희 모든 인생의 주님 되심을 알게 하시고 가장 괴롭고 힘들었던 순간에 크고 강한 손으로 저희 모든 삶을 은혜로 주장하셨던 주님이 온 세상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이시오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옵소서. 오직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능력 속에서 이 나라와 민족이 정녕 새로워지게 하옵소서. 연약한 죄인들을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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