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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예언서 녹취 3

by 【고동엽】 2021. 12. 7.
지난 시간에는 한국 교회에서 예언서의 위상과 중심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복습을 해보면 세상에서 말하는 예언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다, 성경의 예언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고 그래서 구약에 나와 있는 예언을 신약과만 연결시키는 즉 약속과 성취의 관점으로만 예언서를 이해하는 방식을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대부분의 예언은 당대에 1차 적용되었다고 하면서 이사야 7장의 말씀을 함께 보았습니다. 그다음에 예언서의 중심 내용은 4가지인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살아내고 있는가,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은 종교 의식의 과잉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의 순종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런저런 고백을 하고 있고 하나님에 대해 나름 많이 안다고 주장하는데 정말 우리가 알고 고백하는 하나님과 성경의 하나님이 어느 정도 일치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100이라고 했을 때 일부만을 알면서 마치 우리가 일부의 하나님을 하나님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우리가 예언서를 통해서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시야를 넓혔으면 좋겠다고 지난 시간에 드렸습니다. 오늘은 두 가지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예언자는 두 부류가 있는데 참된 예언자들은 누구인가와 관련한 문제를 하나 다루고, 다른 하나는 예언서를 읽다 보면 시대마다 예언자들이 등장해서 매번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맨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고 심판을 경고하고, 그래서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차피 예언자들이 하는 얘기는 똑같은거 아니야? 그런데 왜 이렇게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쓰지?”라는 생각이 많이 드는데 자세히 보시면 시대마다 예언자들이 외쳤던 메시지의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에 대한 시대적 분류를 함께 하겠습니다.


먼저 성경이 말하는 3대 예언자는 누구인가에 대해 나누려고 합니다. 모세오경을 공부할 때 돕는 배필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돕는 배필의 역할을 가장 신실하게 잘했던 사람이 예언자들입니다. 창세기 2장 18절에 보면 사람이 홀로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여서 하나님이 돕는 배필을 지으시죠. 여기 돕는 배필의 의미가 3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가 반대하여 돕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사람이 실수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잘못된 생각을 할 수 있고 그릇된 행동을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누군가가 잘못된 생각을 할 때 이 사람을 어떻게 하는 것이 돕는 겁니까? 잘못된 생각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반대를 해야죠. 이게 이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이게 돕는 배필입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돕는 배필의 역할을 가장 신실하게 감당한 사람들이 예언자들입니다. 성경의 참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서서 “너희들 잘 살고 있다, 힘 내라”고 응원의 박수를 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들춰내고 그들의 죄를 책망하고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그러면 백성들 입장에서는 짜증 나죠.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데 누가 와서 계속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면 기분 좋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성경의 예언자가 그런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어떻게 보면 우리를 짜증나게 만드는 사람인 겁니다. 우리가 하려는 것을 무조건 반대하는 사람인 겁니다. 지적하는 사람인 겁니다. 그런데 예언자의 그 책망이 사실은 우리를 진짜 살리는 음성인 겁니다. 예언자는 성격이 이상해서 사람들에게 매번 태클을 건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현실을 바라보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으로 다시 돌아오라고 때로는 그들을 책망하기도 하고 권면하기도 하고 경고하기도 하고 때로는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이스라엘이 살 길이라고 외쳤던 사람들이 참된 예언자들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모세오경과 역사서를 공부할 때 강조했던 것 가운데 하나가 땅 신학입니다. 사람들이 발 딛고 살아가는 모든 땅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특정한 민족과 공동체에게 그 땅에 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특정한 민족과 공동체는 그 땅의 주인으로가 아니라 임차인으로 그 땅에 거주하는 것입니다. 그 특정한 민족과 공동체가 그 땅에 계속 거주하기 위해서는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성실하게 임대료를 납부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납부해야 할 임대료는 미쉬파트와 체다카입니다. 미쉬파트는 사법적 정의가 구현되는 것이고 체다카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도리, 특별히 형제로서의 돌봄입니다. 그래서 사법적 정의가 구현되고 서로가 서로를 형제답게 대할 때 하나님은 그 땅에 거주하는 임차인들이 매달 꼬박꼬박 임대료를 내는 것으로 이해하십니다. 그런데 그 땅에 살고 있는 임차인들이 임대료를 납부하지 않고 체납되었을 때 하나님은 예언자를 보내셔서 임대료가 체납되었다고 그들을 경고하십니다. 그 땅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성실하게 임대료를 납부하고 있지 않다고 경고한 자들이 예언자입니다. 예언자들의 경고를 듣고서 백성들이 하루 빨리 돌이켜야 하는 겁니다. 미쉬파트와 체다카가 넘치는 공동체를 건설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그 땅에서 내어쫓김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언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임대료를 체납한 결과, 땅에 거주하는 임차인들이 임대료를 낼 마음이 제로 상태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땅에 살고 있는 임차인을 내어 쫓으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임차인을 거하게 하십니다. 안타깝게도 주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이 먼저 내어 쫓김을 당하고 주전 586년에 남유다가 그 땅으로부터 내어 쫓김을 당했습니다. 땅 신학에 근거했을 때 예언자들은 땅의 임차인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임대료를 체납했다, 더 이상 체납하게 되면 이 땅으로부터 우리가 내어쫓김을 당할 수밖에 있다는 것을 경고한 사람들이 성경에 나오는 참된 예언자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참된 예언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말씀을 맡겨서 자기들을 예언자로 부르시고 파송하셨음을 기억하면서 자신들을 파송하신 하나님 중심의 사역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심판을 경고하라고 하시면 심판을 경고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책망하라고 하면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책망합니다. 이게 바로 참 예언자들의 모습입니다. 성경에 보면 거짓 예언자들도 많이 등장합니다. 이들의 특징은 파송자 중심, 하나님 중심의 사역이 아니라 소비자 중심의 사역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 예언자들은 위기의 순간에도 평화를 외쳤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심판의 소리를 듣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위기의 순간에도 “너희는 살거야, 하나님이 구원해주실거야” 이런 이야기를 듣길 원합니다. 사람들의 그런 마음을 이용해서 사람들에게 평화를 외치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을 거라고 외치면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받았던 자들이 바로 거짓 예언자들입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것이 뭐냐면, 성경에 나오는 대다수 예언자들은 역사에서 승리한 겁니다. 당대에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매 맞고 버림받고 감옥에 갇히고 목숨을 빼앗겼습니다. 너무 역설인 겁니다. 당대에는 어떤 사람들이 환호 받았습니까? 사람들은 우리에게 심판이 임하지 않을 거라고 외쳤던 거짓 예언자들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죄를 질타하고 심판을 경고했던 참 예언자들을 사람들이 싫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예언자들이 계속해서 그 말씀을 외치게 되면 그들을 때리고 죽였습니다. 참된 예언자들은 당대에는 실패한 자들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복권시켜 주신 겁니다. 역사에서는 승리했습니다. 예언자들의 말처럼 나중에 심판 받고 나서야 이들이야말로 진정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참된 예언자구나,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뒤늦게 깨닫게 된 겁니다. 왜 참된 예언자들은 미움 받았을까요? 참 예언자들은 하나님 중심의 사역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눈으로 사역한 사람들인 겁니다. 대다수의 제사장들은 성전 중심의 사역을 합니다. 성전이라는 것이 자신의 밥벌이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은 성전 중심의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사역을 행합니다. 그래서 성전이 하나님을 떠나있을 때는 성전을 질타합니다. 여기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성전을 책망합니다. 이런 것들을 제사장들은 견딜 수 없었습니다. 참된 예언자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입니다. 말씀에 기준했을 때 지금의 경제, 정치, 종교가 하나님의 뜻대로 작동되는지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리 떠나있는 정치, 경제, 종교에 대해서 날카롭게 질타하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촉구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이 힘 있는 사람들이 볼 때는 짜증나는 거죠. 듣기 싫은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예언자들을 책망하고 심지어 그들에게 가해를 가하기까지 합니다.


예언자 하면 회개를 촉구하는 사람들이라는 느낌이 있습니다. 여기서 기억하셔야 할 것은, 예언이라고 하는 것과 묵시라는 것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의 일부, 다니엘의 일부, 요한계시록 같은 경우에는 묵시라고 합니다. 예언과 묵시에는 어떤 차이가 있냐면 예언은 청중의 반응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 가능한 것입니다. 어떤 예언자가 등장해서 우리에게 “너희가 지금 죄된 삶을 돌이키지 않으면 40일 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거야”라고 예언을 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예언자를 보내셔서 이런 메시지를 우리에게 선포하게 하시는 궁극적 목적이 뭡니까? 40일 후에 이런 심판이 있을 거라는 것을 미리 예고하는 것이 목적입니까? 아닙니다. “너희가 지금의 죄된 삶을 돌이키지 않으면 40일 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거다” 라고 예언의 메시지를 선포할 때 하나님은 뭘 기대하는 겁니까? 이 경고를 듣고 사람들이 돌이키길 기대하시는 겁니다.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의 심판은 철회됩니다. 예언자를 보내셔서 심판을 경고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심판이 뭐죠? 유기입니다. 유기는 내어버려 두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든 내어버려 두는 겁니다. 죄된 삶을 지속하다가 이후에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임당하는 것, 이런 것이 유기인 겁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죄된 길을 질주할 때 우리를 내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돌이키길 기대하십니다. 그래서 예언자를 보내십니다. 그래서 예언자를 통해 심판을 경고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예언자의 경고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된 길을 청산하길 기대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언자들은 심판의 메신저임과 동시에 구원의 메신저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예언자를 보내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예언은 묵시와 다릅니다. 예언에서는 청중의 반응이 중요합니다. 심판의 예언조차도 청중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경고한 것처럼 예언이 성취될 수도 있고 아니면 철회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묵시는 전혀 다릅니다. 묵시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겁니다. 청중의 반응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결정된 시나리오입니다. 예언은 청중의 반응에 따라 변경 가능한 것입니다.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예언자가 말한 것처럼 심판이 임하지 않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가 가득한 것이 예언이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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