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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예언서 녹취 1

by 【고동엽】 2021. 12. 7.

이번에는 예언서를 공부하고자 합니다. 한국 교회에서 가장 설교되지 않는 본문 중 하나가 예언서입니다. 우리가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 예언서의 중요한 내용들을 짧은 시간이지만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예언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말씀들을 잘 살폅보기를 바랍니다. 먼저 한국 교회 안에서의 예언서의 위상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구약이 39권인데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 17개의 본문이 예언서입니다. 굉장히 많은 분량인데 한국교회 안에서는 거의 설교되지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 교회에서 가장 홀대받는 장르가 예언서라고 할 수 있는데 보통 한국 교회에서는 예언서와 관련하여 예수님에게 성취되어진 몇 개의 구절만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7장 14절, “처녀가 아이를 잉태하여 낳을 것이요, 그 아이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리고 미가서 5장 2절,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한다” 그리고 스가랴 9장 9절 “메시아가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다”는 그런 식의 예언들을 가지고 “봐라 예수님 때 이 모든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하면서 “놀랍지 않냐, 구약은 예언하고 신약에서 성취되었다, 몇백 년 뒤에 일어날 일을 미리 예언했고 이것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이런 식으로 예언서를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예언서를 공부할 때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예언이라고 하는 것과 성경이 말하는 예언이 조금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겁니다. 사회에서는 뭐를 예언이라고 하죠? 예전에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이런 것들을 많이 얘기했죠. 일반적으로 사회에서는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미리 예’ 자를 많이 씁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예언자라 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예언을 말할 때는 ‘미리 예’자 보다는 ‘맡길 예’ 자를 써야 보다 정확합니다. 성경은 뭘 예언이라고 하냐면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예언자라는 타이틀을 제일 먼저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이며, 창세기 20장에 나옵니다. 그다음에 예언자의 전형으로 볼 수 있는 인물은 모세입니다. 신명기 5장 5절에 보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중간에 서서 모세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예언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언을 할 때는 ‘미리 예’ 자 보다는 ‘맡길 예’, 즉 하나님이 맡겨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것이 예언이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말씀은 1차적으로 당대에 적용됩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일반 사회에서 사용되는 예언이라고 하는 정의에 근거해서 성경에 나오는 예언들도 당대와 상관없이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미리 말했고 이것이 예수님과 신약 시대에 성취되었다고 해석되는 경우가 많은데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미리 예’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맡겨 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겨 주신 말씀을 100이라고 할 때 그 가운데 20정도가 먼 미래의 일일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대다수 하나님이 맡겨주신 말씀은 말씀을 듣는 당대에 일차적 의미를 갖는 것들입니다.

 

이사야 7장 14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보통 한국 교회에서는 이 말씀을 예수님 탄생에 대한 예언이라고 해석합니다. 이사야는 주전 8세기 인물입니다. “이사야가 700년 전에 예수 나심에 대해 동정녀 탄생을 예언했다, 그리고 700년 후에 마리아를 통하여 동정녀 탄생의 예언이 성취되었다”, 이것이 일반적인 한국 교회가 예언을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미리 예가 아니라 맡길 예입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말씀 가운데 일부가 먼 미래에 해당하는 이야기이지만 대다수는 예언의 말씀이 선포되는 당대에 1차 적용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사야 7장 14절을 보시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한국 교회는 7장 14절까지 읽고 끝납니다. 그 밑에 15~16절을 보시면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오면 엉긴 젓과 꿀을 먹을 것이다”, 16절이 중요합니다.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14~16절까지 연결해서 읽으면 14절에서는 처녀가 아이를 잉태해서 낳고 그 아이의 이름이 임마누엘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이의 이름이 임마누엘이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16절입니다. 태어난 그 아이가 성장을 해서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그러면 한 몇 년 정도 되어야 할까요? 보통 아이들이 태어나고 뭐가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 있을 때가 몇 살 정도죠? 빠르면 3~4살, 늦어도 5살 정도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된다는 것이 이 예언의 핵심입니다. 여기서의 두 왕은 남유다를 공격하는 아람의 왕과 북이스라엘의 왕을 가리키는 겁니다.

 

우리가 예언서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 선포되는 배경과 맥락을 아는 것입니다. 이사야 7장의 상황은 북이스라엘과 아람이 연합군을 형성해서 남유다를 공격하는 상황입니다. 이것 때문에 아하스 왕과 남유다의 모든 백성이 두려워 떨고 있는 겁니다. 이때 이사야가 “두려워 떨지 말라 하나님이 너희들을 구원해주실거야, 하나님을 믿어라”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어떤 징조의 예언을 하냐면 지금 북이스라엘과 아람이 힘을 모아 남유다를 공격하지만 길어야 5년 이내에 남유다를 공격했던 두 나라의 땅이 황폐하게 될 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주는 징조가 뭡니까? 어떤 여인이 아이를 낳을 것인데 그 아이의 이름은 임마누엘이 되고, 그 아이가 선을 택하고 악을 버리는 것을 알기 전에, 즉 길어야 4~5년 이내에 남유다를 공격했던 두 나라의 땅이 황폐하게 될 것이다, 이게 바로 이사야 7장 14~16절의 핵심입니다. 정리해 보면, 한국 교회는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예언서를 미리 예 자로 이해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먼 미래의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리 말한 이 예언이 언제 성취되었는가, 예수님에게서 또는 신약에 성취되었다”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가 구약의 예언서와 신약을 이해하는 전형적인 방식이 뭐냐면 약속과 성취, 예언과 성취의 도식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미리 예가 아니라 맡길 예 자를 써야 합니다. 어떤 것이 예언입니까? 하나님이 맡겨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겁니다. 그 예언 행위의 전형적인 인물이 누구입니까? 모세입니다. 신명기 5장 5절, 하나님이 맡겨주신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는 그대로 선포한 사람이 모세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예언을 설명할 때는 미리 예 자가 아니라 맡길 예 자를 써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맡겨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오늘날 목사님들의 설교가 바로 예언 사역인 겁니다. 성경 공부가 예언 사역입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말씀 가운데 대다수는 예언의 말씀이 선포되는 당대에 1차 적용이 됩니다. 그리고 약간 일부가 먼 미래에 해당됩니다. 대다수의 예언은 당대에 1차 적용이 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국 교회는 이사야 7장 14절까지만 읽고 신약으로, 예수님의 탄생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면서 “너무 놀랍지 않니, 700년 전에 이사야가 예수의 탄생을 예언했는데 700년 후에 마리아를 통하여 성취되었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가 예언서를 이해하는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우리가 방금 읽었지만 이사야 7장 14절은 16절까지 함께 읽어야 합니다. 아이가 태어난 것과 그 아이의 이름이 임마누엘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아이가 선악을 분별하기 전에 남유다를 공격했던 두 나라의 땅이 황폐하게 될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약 예언서를 읽을 때 그 예언이 선포된 배경, 맥락을 먼저 아는 것이 필요하고, 모든 예언은 1차적으로 당대에 적용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예언의 중요한 특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모든 예언은 1차적으로 당대에 적용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언의 말씀은 한 번 적용된 후에 용도 폐기되지 않고 동일한 상황과 맥락 가운데서 제 2, 3의 적용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7장 14절의 말씀을 마태는 예수 탄생에 적용한 겁니다. 다시 한번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미리 예 자가 아니라 맡길 예 자를 쓴다는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러면 한국 교회에서는 왜 예언서를 홀대하고 잘 보지 않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예언서는 신앙적인 종교적인 열심은 다 하지만 일상의 순종이 없는 신앙인들의 삶에 대해 책망을 합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는 어떤 사람을 좋은 신앙인이라 하죠? 예배 안 빠지고 기도 열심히 하고 교회 봉사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아는 사람을 좋은 신앙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언서는 그렇게 예배를 많이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일상의 순종임을 강조합니다. 예배는 빈번하게 자주 드리는데 일상의 삶에서 미쉬파트와 체다카를 구현하지 않는, 정의로운 삶을 살지 않고, 정직하고 진실하고 거룩한 삶을 살지 않는 것을 질타합니다. 하나님이 진짜 원하시는 것은 일상의 순종인데, 이것은 내팽겨치고, 일상의 삶에서는 자신의 힘으로 연약한 자를 억압하고 착취하고 지배하면서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예배는 자주 드리고 기도는 열심히 하고 찬양은 뜨겁게 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끊임없이 책망하시는 것이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 교회가 말하고 있는 좋은 신앙인의 기준과 정반대입니다. 한국 교회가 그래서 예언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는 시간 날 때마다 교회 와서 예배 드리는 것을 좋은 신앙이라고 합니다. 시간 날 때마다 교회에서 헌신 봉사하는 것을 좋은 신앙이라고 합니다. 시간 날 때마다 성경읽고, 기도하고 전도도 잘하면 금상첨화인 겁니다. 그런데 예언서를 보시면 일상의 순종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음을 강조합니다. 일상의 순종은 없이 종교의식이 과잉되는 것을 책망하십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서 나름대로 좋은 신앙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예언서를 읽다 보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서 가장 사랑받지 못하는 본문이 예언서입니다. 예언서에서 책망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현재 한국교회의 모습은 너무나 유사합니다. 종교의식은 넘치도록 행하는데 일상의 삶에서는 맘몬의 지배를 받고 권력의 지배를 받는 비신앙인들과 어떤 다른 삶을 살고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거룩은 구별된 삶입니다. 주류 문화에 동화되거나 동참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에 근거한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도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 책망받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종교 의식은 과잉이지만 일상의 순종은 너무나 부재합니다. 예언서가 가장 필요한 곳이 한국 교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함께 예언서를 공부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로 예언서가 말하는 중요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언서에는 종교의식에 열심을 다한 결과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있어”라고 자기 만족에 빠진 사람들을 부담스럽게 만드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고 원하시는 좋은 신앙인과 성전과 교회가 말하는 좋은 신앙인이 많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는 것이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한국 교회는 예배 잘 드리고 봉사 많이 하고 기도 생활과 말씀 생활 열심히 하고 전도 잘하는 사람을 좋은 신앙인이라고 했습니다.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그동안 교회가 자랑했던 많은 것들이 부메랑이 되어서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전세계 교회와 비교했을 때 한국교회는 정말 예배를 많이 드리는 교회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매일 새벽 기도드리고 수요 예배하고 금요 철야하고 주일 오전과 오후 예배까지 드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전세계 대부분의 교회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예배를 드리는데 한국 교회는 일주일에 10번 이상 예배를 드리는 신앙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렇게 많은 예배를 드림에도 불구하고 세계관이 바뀌지를 않습니다. 맘몬을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 고백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 고백하는 사람이 세계관이나 인식이나 사람을 대하는 자세나 물질을 소비하는 모습이나 문화를 향유하는 모습이나 자녀를 양육하는 모습이 다르지가 않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세상이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냐면, ‘예배를 아무리 많이 드린다고 해도 삶이 바뀌는가, 예배를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신앙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된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여달라’, 이것이 오늘날 세상이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는 메시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조적으로 이런 얘기를 합니다. “정말 예배를 많이 드리면 우리 삶이 바뀌는 건가, 설교를 많이 들으면 인식이 바뀌는 건가.” 심한 경우에는 예배 무용론, 설교 무용론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짜 우리는 하나님께 제대로 예배하고 있는가, 진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제대로 만남을 갖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예언서를 통해서 던지고 스스로를 성찰하고 돌아보고 우리의 잘못된 모습들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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