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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료 18,185편 ◑/설교및자료 16,731편

역사서 녹취 12

by 【고동엽】 2021. 12. 7.
그다음에 에스라, 느헤미야로 넘어가겠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를 보통 개혁과 부흥의 교과서라고 합니다. 에스라는 2차 귀환, 느헤미야는 3차 귀환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 이후에 주전 538년에 1차 귀환을 합니다. 이때 대표적 인물이 스룹바벨, 세스바살, 학개, 스가랴이고, 주전 458년에 페르시아의 고위 관료였던 에스라가 귀환하면서 에스라와 함께 온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전 445년에 페르시아의 술 맡은 관원장 느헤미야가 가나안 땅으로 귀환할 때 느헤미야와 함께 가나안으로 왔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1~3차 귀환을 통해서 총 100년의 기간 동안 42,360명이 돌아왔다고 봅니다. 에스라,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 때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의 후손입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도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의 후손입니다. 에스라, 느헤미야도 그 조상들이 안 돌아온 겁니다. 계속 페르시아에 머물면서 페르시아의 고위 관료가 된 겁니다. 이 사람들이 페르시아 정부의 결정에 의해서 이스라엘에 파송됩니다. 에스라,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에 의해 파송되었지만 와서는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를 재건하는 일에 열과 성을 다했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를 보시면 돌아온 사람들이 성전, 성벽을 재건하고 말씀으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재건하는 것이 주요 내용입니다. 위에서 설명드렸던 것처럼 고레스 왕의 칙령 때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다 돌아왔을 것 같지만 다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3가지 이유가 있다고 했죠. 돌아오려면 바벨론에서 형성한 모든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고, 출발한다고 해서 안전하게 도착한다는 보장이 없었습니다. 길 곳곳에 있었던 강도떼와 짐승떼의 공격을 감수해야 합니다. 세 번째, 돌아온다고 해도 가나안 땅을 지키고 있는 본토인들이 환영하지 않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불리한 상황을 감수하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실패했던 조상들과 달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멋지고 아름다운 이스라엘 건설하겠다고 결단한 사람들이 돌아온 겁니다.


에스라, 느헤미야가 돌아와 보니까 예루살렘의 종교권력자들과 사마리아 정치 권력자들이 사돈 관계를 형성하면서 한쪽은 사회 경제적 신분상승을 기대하고 한쪽은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돈에 눈독을 들였습니다. 이것을 에스라, 느헤미야가 단호하게 끊어냅니다. 그 통혼을 통해서 다섯 가지의 부정적인 현상들이 나타났습니다. 신앙을 상실할 위험성, 경제적 손실, 신앙이 계승되지 않음, 이스라엘 가정의 파괴, 백성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침 등. 이런 문제들로 인해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이방 여인과 결혼한 사람들에게 이방 여인과 그사이 태어난 혼혈 자녀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라는 대대적인 회개 운동을 펼칩니다. 이것이 지나쳐서 순수 신앙이 가능하려면 순수 혈통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이데올로기가 강조되었고 여기에 반박하는 본문이 룻기였다는 것을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에스라에서는 몇 군데 말씀을 봤으면 좋겠습니다. 5장 13절을 보겠습니다. 바벨론 왕 고레스 원년에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렸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고레스는 페르시아 왕이잖아요. 여기 보면 바벨론 왕 고레스 라고 되어 있는데 고레스는 페르시아 왕 아니냐고 질문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뭐냐면 제국의 왕들이 이런 전략을 구사한 겁니다. 앗수르를 무찌른 것이 바벨론이고 바벨론을 무찌른 것이 페르시아입니다. 내가 바벨론을 무찌른 페르시아 왕입니다, 이러면서 제국 전체에 이제 바벨론은 끝나고 페르시아가 유일하다고 선포하게 되면 바벨론의 백성, 바벨론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페르시아에 대한 반감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국의 왕들은 자기가 무찔렀던 나라가 여전히 자기의 통치를 통해 지속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고레스는 원래 페르시아 왕인데 바벨론을 무찔렀는데 “나는 바벨론의 왕임과 동시에 페르시아의 왕이다”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이것을 통해서 바벨론의 백성, 바벨론을 지지한 사람들이 고레스를 지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고레스가 바벨론제국은 끝장나고 지금은 오직 페르시아 제국만 있고 그 페르시아 제국의 왕이 자신이라고 얘기하면 고레스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이 생길 수 있습니다. 특히 바벨론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고레스를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서에 나오는 이런 표현들은 역사적 사실로만 보면 안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고레스는 페르시아 왕인데 왜 바벨론 왕이라 했을까, 이것은 제국의 왕들의 고도의 전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전 제국은 무너졌지만 자기 자신을 이전 제국의 계승자라는 의미에서 바벨론 왕이라고도 하고 페르시아의 왕이라고도 한 겁니다.


그 다음에 7장 25~26절입니다. 아닥사스다라는 왕이 에스라를 파견하면서 “에스라여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네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를 법관과 재판관을 삼아 강 건너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 중 알지 못하는 자는 너희가 가르쳐라 무릇 네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여 혹 죽이거나 귀양보내거나 가산을 몰수하거나 옥에 가둘지니라 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자세히 보시면 아닥사스다 왕이 페르시아 제국 전체를 야훼 하나님을 믿는 제국으로 만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에스라에게 무엇을 부탁합니까? “에스라야, 야훼 하나님의 율법을 잘 아는 사람을 재판관으로 삼고 제국의 모든 백성들에게 야훼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라”는 겁니다. 그리고 “야훼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의 가산을 몰수하고 죽이라”는 겁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진짜 아닥사스다가 야훼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한 겁니까? 아닙니다. 지난번에 열왕기상 18장에서 본 것처럼 여기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번역하면 안 되고 신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여기 신은 페르시아의 신인 겁니다. 자기들의 신의 법, 페르시아의 법을 가르치라는 것이고 그 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처벌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를 신이라 번역하지 않고 하나님이라고 번역하다 보니까 우리는 어떤 착각을 하냐면 마치 아닥사스다 왕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 것처럼, 그리고 제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라고 한 것처럼, 그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처벌하라고 한 것처럼 이해하기 쉬운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 나와 있는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엘’과 ‘엘로힘’입니다. 페르시아 사람들이 섬겼던 그 신을 말하는 겁니다. 그 신의 법을 제국에 있는 백성들에게 가르치라는 겁니다. 에스라는 어떤 사람이냐면 페르시아 법에 정통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에스라는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아닥사스다라는 왕이 에스라라는 사람을 이스라엘에 파송할 때는 무엇을 기대한 겁니까? 이스라엘 땅에 가서 페르시아 법을 잘 가르치기를 기대한 겁니다. 그런데 에스라는 이스라엘 땅에 와서 자신이 원래 파송되었던 목적인 페르시아 법을 잘 가르치는 것보다는 무엇에 집중한 겁니까? 이스라엘을 야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신앙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서 애를 쓴 겁니다. 정리하자면, 여기 나와 있는 7장 25~26절은 ‘하나님’이라 번역하면 안 되고 열왕기상 18장 21절처럼 ‘신’으로 번역해야 되고 여기 말하는 신은 페르시아 사람들이 섬기던 주신입니다.


느헤미야에서는 5장 15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느헤미야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느헤미야는 총 12년 동안 총독으로 봉직했습니다.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다.” 저는 오늘날 한국교회 신앙인들이 느헤미야의 결기와 기백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마다 오랜 시간 굳어진 관행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전 사람들은 다 그렇게 했는데”라고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느헤미야 이전의 모든 총독들은 뇌물을 받았습니다. 그 권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압제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나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사실 오늘 한국교회 신앙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자세가 느헤미야 5장 15절에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느헤미야 13장에 보면 산발랏이라고 하는 사마리아 정치 권력자가 예루살렘 종교 권력자의 아들과 사돈을 맺어서 예루살렘 성전내 십일조를 모아 놓는 곳에 자기 사무실을 차렸습니다. 이것을 느헤미야가 단죄합니다. 여기 산발랏이 예루살렘 성전의 십일조를 모아 놓은 창고 안에 자기 사무실을 두었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에 손을 대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자기 맘대로 사용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을 느헤미야가 단호하게 막은 겁니다. 그래서 산발랏이라는 사람이 나중에 뭘 하냐면 자기 사위를 아예 사마리아로 데려 갑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에 성전을 따로 짓습니다. 이것을 그리심산 성전이라고 합니다. 사마리아에 성전을 짓고 나서 이제는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돈을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 갈릴리 사람들은 여기서 예배드리라고 하면서 완전히 성전의 돈을 자기 돈처럼 마음껏 주물렀습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성전이 두 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을 때 사마리아 여인이 어떤 질문을 합니까?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 열납됩니까, 아니면 우리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리심산에서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 열납됩니까 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 그리심산 성전이라는 것이 산발랏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주전 400년에 세워진 겁니다. 정리하자면,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이방 여인과의 통혼, 그것을 통해서 사회 경제적인 신분상승을 기대했던 예루살렘 종교권력자들과 예루살렘 성전내의 이권에 개입하고자 한 사마리아 정치 권력자들의 동맹관계를 단호하게 끊어냅니다. 여기에 불만을 가지고 산발랏이라는 사람이 아예 자기 사위를 사마리아로 데려 가서 성전을 짓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마리아 땅에 있던 그리심산 성전입니다.


마지막으로 에스더를 보시면 에스더는 포로처럼 살아가는 소수 민족에게 가장 사랑받는 본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메길롯’이라는 다섯 두루마리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로 치자면 추석, 설날 이런 중요한 절기에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함께 읽는 성경 본문을 메길롯이라고 합니다. ‘메길롯’이라는 뜻은 ‘다섯 두루마리’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유월절에 아가를 읽습니다. 오순절에 룻기를 읽습니다. 예루살렘 멸망 기념일에 애가를 읽습니다. 장막절에 전도서를 읽습니다. 그리고 부림절에 에스더를 읽습니다. 에스더에는 원래 하나님의 율법에는 나오지 않는 절기가 있는 겁니다. 그것이 부림절입니다. 부림절이 어떻게 탄생하였는가를 잘 설명해주는 것이 에스더서입니다. 아말렉의 왕이었던 아각의 후손 하만이라는 사람이 엄청난 뇌물을 바치고 페르시아 왕을 꼬드겨서 페르시아 안에 있는 유대인을 다 학살하고자 합니다. 그 하만의 음모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내는 이야기, 거기에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시킨 이야기가 에스더의 이야기입니다. 이때 탄생한 절기가 부림절입니다. 20세기에 나치 독일에 의해서 무수히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을 당할 때 유대인들이 가장 사랑했던 책이 에스더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보면 국가 공동체 전체가 위기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부림절도 있고 특정한 지역이 위기 가운데 구원 받은 것을 기념하는 지역 부림절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정이 힘들고 어려웠는데 가정이 회복된 것을 기념하는 가정 부림절도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곤고하고 힘든 삶의 여정 가운데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의 손길로 우리가 위기의 수렁에서 구원받은 그날을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의 부림절로 기념하면서 그 날을 지킬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호수아부터 에스더까지 역사서를 4주에 걸쳐 함께 공부했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아 상세하게 본문을 공부하지는 못했지만 역사서의 중요한 내용들은 더듬어 보았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영상을 보시고 말씀도 보시면서 역사서를 자기의 것으로 잘 소화시키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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