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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료 18,185편 ◑/설교및자료 16,731편

역사서 녹취 11

by 【고동엽】 2021. 12. 7.

이제 역대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역사서 처음 공부하면서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구약에서의 역사서는 두 개인데 하나는 신명기 역사서이고 또 하나는 역대기 역사서입니다. 두 개의 역사서가 필요한 이유는 역사서를 쓰는 목적이 다르고 시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역사서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 즉 하나님의 심판의 매를 맞는 상황에서 쓴 것입니다. 무엇을 해명하고자 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심판의 매를 맞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을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역사서에는 하나님께 심판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의 죄가 많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역대기는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하던 자들이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말미암아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온 이후에 쓴 것입니다. 가나안으로 귀환하면서 이들은 실패했던 조상들의 전철을 본받지 말자고 결단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아름답고 멋진 이스라엘을 건설하자고 다짐하면서 과거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그들이 본받을 만한 아름다운 모습을 취사선택하여서 이스라엘 역사를 재기술 하였습니다. 이것이 역대기 역사서입니다. 이처럼 신명기 역사서는 과거 반성이 목적이고 역대기 역사서는 미래 건설이 목적입니다.

 

역대기가 쓰여질 때는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하던 자들이 고레스 칙령에 의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이후입니다. 페르시아는 이스라엘에 새로운 왕이 세워지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관료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페르시아는 어떤 체제를 인정한 겁니까? 왕이 아니라 제사장들이 다스리는 신정체제입니다. 제사장 지도 체제를 인정한 겁니다. 역대기는 이때 쓰여진 겁니다. 그래서 역대기에는 성전이 강조됩니다. 옛날에는 다윗 왕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을 통치하셨는데 지금은 하나님께서 성전을 통해서 우주만물에 대한 통치를 행하십니다. 누구를 통해서 행하십니까? 제사장입니다.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 역대기입니다. 그래서 역대기에서는 다섯 가지가 중요합니다. 역대기는 성전을 강조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성전에서 거행되는 제의가 강조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 제의를 집례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을 강조합니다. 성전을 강조하니까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강조하고 예루살렘을 강조하니까 자연스레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 특히 유다 지파를 강조하게 됩니다. 이 다섯 가지가 역대기가 강조하는 핵심 키워드입니다. 성전, 제의, 제사장과 레위인, 예루살렘, 유다입니다.

 

역대기와 그 이후 나오는 에스라, 느헤미야를 이해하시려면 중요한 배경을 하나 알아두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배경이냐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멸망하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갑니다. 특히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되었을 때 1~4차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끌려갑니다. 어떤 사람들이 주로 끌려갔습니까? 왕족이나 귀족이나 제사장 가족 아니면 전문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끌려갔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이 원래 소유하고 가나안의 땅을 바벨론 제국은 땅이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몇 십년이 지나고 나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된 겁니다. 여기서 원래 가나안 땅에 계속 머물렀던 사람들과 포로 생활 하다가 돌아온 사람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납니다. 어떤 충돌이 일어나냐면 누가 진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이스라엘인이냐 라고 하는 것과 관련되어 포로로 있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모두가 하나님께 죄를 범했는데 우리가 대속의 고난을 짊어졌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매를 맞으면서 갱신과 정화를 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그 땅에 계속 머물려 있고자 하지 않고 제 2의 출애굽을 감행했음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남유다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머문 지역이 니푸르라는 지역입니다. 이 니푸르라는 지역이 아브라함이 원래 살았던 갈대아 우르 바로 옆동네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살다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라고 명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났습니다. 그래서 우르를 떠나서 하란을 거쳐서 하나님이 최종 지시하시던 땅 가나안에 아브라함은 정착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아브라함이 살았던 우르 바로 옆 동네에 살았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길 원하는 자들은 돌아가도 좋다고 했을 때 이 사람들은 기꺼이 바벨론에서 자기들이 형성한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이들이 그 길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올 때 이들이 걸어왔던 모든 여정이 누구의 여정을 따라한 겁니까? 아브라함의 여정을 따라한 겁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를 범해서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대속의 심판을 받았고, 자신들은 심판의 매를 맞음으로 갱신과 정화가 되었고, 제2의 출애굽을 감행했고, 무엇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길을 함께 걸은 믿음의 사람들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가나안 땅에 계속 머물렀던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너희들이 심판의 매를 맞은 것은 너희가 잘못해서 그런거다”, “우리는 심판의 매를 맞지 않았고 그리고 우리는 한 번도 약속의 땅 가나안을 벗어나지 않았다”, “너희는 오랜 세월 어디 있었어? 바벨론에 있었잖아, 그 바벨론은 부정한 이방인의 땅이다”라고 하면서 자신들이 약속의 땅을 계속 지킨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계속해서 가나안 땅에 머문 사람들과 돌아온 사람들 사이가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갈등하고 분열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땅에 대한 소유권 분쟁 때문입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가나안 땅에 계속 머문 사람 가운데 상당수가 원래 땅이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족이나 귀족이나 제사장의 가족, 전문 기술자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때 원래 이 사람들이 소유하던 땅을 바벨론이 땅이 없던 자들에게 나누어준 겁니다. 왜 준겁니까? 이 사람들이 농사를 지어야 세금을 걷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땅이 없던 밑바닥 인생들은 남유다가 멸망하고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것이 하나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자면 바벨론 때문에 자기 땅이 생긴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겁니다.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다시 돌아온 겁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은 돌아온 이후에 무엇을 요구하겠습니까? “너희들이 경작하고 있는 땅은 원래 우리 조상 땅이니까 다시 돌려줘”라고 하겠죠? 이 말을 듣고 땅을 차지한 사람들이 순순히 돌려주겠습니까? 아닙니다. “너희 땅이라는 증거있어? 우리가 수십 년 동안 농사지은 땅이야”라고 하면서 반박을 하겠죠. 이런 갈등의 상황에서 누가 진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스라엘인이냐 라는 신학적인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바벨론 포로지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각축의 상황 속에서 역대기, 에스라, 느헤미야가 등장하는 겁니다.

 

남유다가 멸망한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이 살았던 우르 옆에 니푸르라는 동네에 모여 살았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죄수복 입고 포승줄에 묶여 있는 그런 포로는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자신들이 원하지 않게 뿌리 뽑혀 온 것이지, 니푸르라는 땅에서 나름대로 자기들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허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니푸르에 살면서 자수성가를 합니다. 이것을 알 수 있는 증거물이 주전 4세기 경에 페르시아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무라슈 문서입니다. 이 문서는 채권자들이 내가 누군가에게 얼마를 받아야 한다고 써놓은 장부입니다. 채권자 이름이 있고 채무자 이름 나오고 그 다음에 금액이 나오는데 채권자의 이름 가운데 상당수가 유대식 이름입니다.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서 불과 1~200년이 안 되어서 자수성가한 유대인이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자들은 돌아가도 좋다고 하니까 돌아온 사람도 있고 돌아오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때는 오늘날처럼 금융이 발달한 때가 아닙니다.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소 달구지에 실고 올 수 있는 것이 자기 재산의 전부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안 돌아왔냐면 바벨론 땅에서 많은 것들을 형성한 기득권자들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왜요? 자기들이 그 땅에서 형성한 것들을 포기하고 올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에스라를 보면 돌아온 사람들이 42,360명이라는 말이 있는데 신학자들은 이 숫자가 1~3차 귀환을 다 합친 숫자라고 봅니다. 100년의 기간 동안 바벨론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총 수가 42,360명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을 나중에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 부릅니다. 혈통은 유대인이지만 가나안 땅에 살고 있지 않은 교포인 겁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에스겔에 의하여 신학이 변화된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원래 이스라엘 백성은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다신교적인 이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다스리는 신이라는 이해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을 벗어나면 하나님과의 만남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에스겔 1장을 보면 그발 강가에 있는 에스겔을 하나님께서 불병거를 타고 심방오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사건을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된 겁니까? 그의 백성이 어디에 있든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찾아오시는구나, 이방 땅에서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하구나,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땅에 회당을 세운 겁니다. 이런 신학적인 인식이 전환되지 않았다면 아마 다 목숨 걸고 바벨론 포로지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을 겁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이방 땅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신학적 인식 전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외에도 돌아오지 않은 이유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돌아가게 되면 바벨론 땅에서 형성한 모든 기득권을 포기해야 합니다. 이런 경제적인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돌아오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니푸르에서 가나안까지가 약 1,300KM 정도 됩니다. 에스라, 느헤미야의 고백에 따르면 하나님의 특별하신 도우심 가운데 일찍 왔다고 하는데 그 기간이 4달입니다. 이 1,300KM를 걸어서 와야 하는데 그 여정 내내 강도떼와 짐승떼의 공격이 많았습니다. 출발한다고 해서 안전하게 도착한다는 보장이 없는 겁니다. 진짜 목숨을 걸고 오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많은 이들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이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바벨론에 있는 것들을 포기하고 돌아간다고 해서 가나안 땅의 사람들이 이들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돌아오게 되면 오랜 세월 원래 이들의 땅을 경작했던 가나안 사람들과 소유권 분쟁을 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뭘 기억해야 하냐면, 이런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들이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바벨론에서 형성했던 기득권을 포기하고 자기의 목숨을 걸고 이 땅에 왔을 때 아무도 환영해 주지 않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이들이 돌아올 때 어떤 결단으로 돌아왔을까요? 조상들의 실패를 재현하지 말자, 조상들은 실패했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멋지고 아름다운 이스라엘 공동체를 세워나가자는 마음으로 돌아온 겁니다. 그러면서 페르시아는 돌아온 사람들에게 “이제 다윗 왕조처럼 왕을 세울 수는 없어, 이스라엘이 정치 공동체가 되는 것은 안 돼”라고 명했습니다. 왕 같은 정치 지도자를 세우게 되면 이 사람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이면서 무엇을 모의하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페르시아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이런 것을 모의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페르시아는 이제 왕과 같은 정치 지도자는 불허하면서 대신 이스라엘을 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종교인들이 다스리게 한 겁니다. 그 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릴 때 가장 중요한 왕실의 역할을 담당한 기관이 성전입니다. 그러면서 이때부터 어떤 신학이 등장하게 된 거죠? 옛날에는 하나님이 다윗 왕조를 통해서 온 우주 만물을 통치했는데 이제는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은 세계 통치를 이어가고 계신다, 그래서 역대기는 성전이 가장 중요합니다. 모든 이스라엘은 성전을 사랑해야 한다, 성전을 통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기대해야 한다, 그래서 역대기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두 왕이 다윗과 솔로몬입니다. 다윗은 왜 이상적으로 생각합니까? 성전 건축과 관련하여 모든 것을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솔로몬이 지었지만 이 모든 것을 준비한 사람은 다윗입니다. 다윗은 성전 건축할 재료를 준비하고 노동력을 확보하고 설계도를 준비하고 다 짓고 나서 어떻게 성전을 운영해야 할지 그 메뉴얼까지 마련합니다.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다윗은 성전건축의 준비자이고 다윗이 준비한 모든 것을 가지고 성전 건축을 완성한 사람이 솔로몬입니다. 열왕기와 달리 역대기에서는 다윗과 솔로몬이 가장 이상적인 왕입니다. 그리고 또 누굽니까? 성전을 정화하였던, 히스기야와 요시아가 이상적인 왕으로 묘사됩니다. 이처럼 역대기는 성전을 강조하는 책입니다. 정리하자면, 다섯 가지, 성전, 제의, 제사장과 레위인, 예루살렘, 유다를 강조하는 책이 역대기입니다.

 

역대기에서 가장 중요한 동사가 있습니다. ‘묻다’라는 동사입니다. 히브리어로 ‘다라쉬’라는 말입니다. 역대기 10장, 14장을 보시면 하나님께 사울은 심판을 받고 다윗은 왜 사랑을 받았냐고 했을 때 사울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다윗은 중요한 순간마다 하나님께 물었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았던 사울은 심판을 받았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묻었던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 그래서 역대기에서 가장 중요한 동사가 ‘묻다’라는 동사입니다. 신앙인은 인생의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말씀 따라 인생의 걸음을 내딛는 자입니다.

 

남유다가 멸망하고 나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신학적인 각성을 하게 됩니다. 자신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린 결과 이러한 심판을 받고 있다는 각성이었습니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 A민족과 B민족이 전쟁을 했을 때 어디가 이긴다고 생각했을까요? 군사력이 강한 나라일까요? 아닙니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민족과 민족의 전쟁은 그 민족의 수호신들 간의 전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강력한 신을 믿는 민족이 이긴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의 신은 야훼이고 바벨론의 신은 마르둑입니다. 이스라엘과 바벨론이 전쟁한다는 말은 야훼와 마르둑 간의 전쟁인 겁니다. 그런데 남유다가 처참하게 패배하였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고대 근동의 인식 속에서 사람들은 마르둑이 야훼보다 강력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스라엘이 그것 때문에 처음에는 너무 힘들어했습니다. 진짜 야훼보다 마르둑이 강력한 신인가, 우리도 마르둑을 믿어야 하는 걸까, 이런 식으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이 나중에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고 나서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했습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약속입니다. 서로가 목숨을 걸고 쌍방에게 약속을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언약에 근거해보면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겠다고 약속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지 못하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겠다고 결단한 이스라엘이 하나님만을 믿지 못했을 때,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지 않고 도리어 그들의 죄를 대신하여 짐승을 제물로 바칠 수 있는 제사 제도를 허용해 주셨습니다. 제사 제도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는 제사를 매번 드려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예언자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이 돌아오기를 바라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벨론이라는 막대기를 사용하셔서 친히 이스라엘을 치십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르둑이 하나님보다 강력한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뒤늦게 언약이라는 단어를 기억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체결했는데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겠다고 다짐했는데 우리가 하나님만을 섬기지 못하고 하나님과 이방의 우상들을 오랜 세월 겸하여 섬겨왔다, 그 결과 하나님이 우리를 치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지만 회복되기 위해서는 뭘 해야 합니까? 언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언약으로 돌아간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용서해주실 것이라 하면서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매를 맞을 때 이스라엘이 언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펼칩니다. 언약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하나님만을 믿고 섬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햐서 무엇이 선행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기 때 그동안 구전으로 전해지던, 파편으로 전해지던 하나님의 말씀들을 집대성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토라가 집대성 된 시기가 바벨론 포로기 라고 봅니다. 이때가 바로 역사적 유대교가 탄생하는 시점입니다. 역사적 유대교는 율법을 가르치고 율법을 배우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 역사적 유대교가 바벨론 포로기에 탄생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저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오랜 시간 하나님을 저버려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다시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백성이 되겠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아는 그 시간들을 굉장히 중시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집대성 되고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율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이 강조되었던 것이 바로 바벨론 포로기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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