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사울은 아각이라는 사람을 살려줍니다. 그 아각을 사무엘이 죽입니다. 사무엘상 15장과 연결되는 본문이 에스더입니다. 에스더를 보면 이스라엘이 전멸의 위기에 처합니다. 누구 때문에요? 아각인 후손인 하만이라는 사람이 왕에게 뇌물을 주면서 페르시아 제국 안에 있는 유대인들을 다 죽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왕이 승낙한 겁니다. 거기 하만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하만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수식하냐면 아각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여기 아각이 사무엘상 15장에 나오는 아말렉 왕 아각입니다. 이것을 통해 하만이 아말렉 왕족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만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에 의해 더 좁게는 사무엘에 의해서 자신의 조상인 아각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각의 복수를 하려던 사람이 하만입니다. 하만의 복수 이야기가 잘 나오는 곳이 에스더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15장과 에스더는 연결하여 읽어야 합니다.
이번에는 사무엘상 26장 19절을 보겠습니다. 사울이 계속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닐 때 도리어 역전이 되어 다윗이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 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고 내가 당신을 죽일 수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물을 확보합니다. 예를 들면 옷자락을 조금 베어내거나 사울의 물병과 창을 빼앗거나 증거물을 확보합니다. 그리고 안전거리가 확보되었을 때 다윗은 사울을 부릅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나는 당신을 죽일 수 있었으나 죽이지 않았다”고 증거를 제출하고 그리고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입니까”라고 사울을 책망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다윗이 사울을 책망할 때마다 사울은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미안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않습니다. 다윗과 완전히 화해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26장 19절 말씀이 나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 하면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원하건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길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사람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여기의 그들이 누구냐면 사울의 신하들입니다. 사울의 지지자들입니다. 이들이 다윗에게 뭐라고 하냐면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사울과 그의 지지자들은 다윗을 가나안 땅 밖으로 몰아내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본 겁니까?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가나안 땅을 벗어나면 다른 신을 섬길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나를 쫓아내서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려 한다, 이런 얘기를 다윗이 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26장 19절이 왜 중요하냐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었던 신학적 인식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고대 근동사회에서는 크게 3가지의 신앙 양태가 있습니다. 유일신교, 일신교, 다신교입니다. 유일신교는 신은 한 분밖에 없다고 고백하고 그 한분을 섬기는 것이 유일신교입니다. 일신교는 여러 신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한 신만 섬기겠다는 겁니다. 다신교는 여러 신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여러 신을 섬기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는 다신교 내지는 일신교였습니다. 이스라엘만 유일신교 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만이 신이시다, 그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겠다고 다짐하고 결단했습니다. 사무엘상 26장 19절은 우리에게 뭘 알려주냐면 이스라엘이 머리와 입술로는 유일신교를 고백했지만 실제 이스라엘이 갖고 있었던 신앙적인 사고는 다신교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의 지지자들은 사울에게 빨리 다윗을 가나안 땅 밖으로 쫓아내라고 말합니다. 가나안 땅 밖으로 다윗이 쫓겨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다른 신을 섬길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겁니다. 여기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떤 신앙적 사고가 반영되고 있죠? 하나님은 가나안 땅만 다스리는 신, 가나안 땅에 있을 때는 다윗은 하나님과 소통하고 도우심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을 벗어나면 다윗과 하나님의 관계는 단절된다고 보는 겁니다. 이게 전형적인 다신교적인 사고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다신교에서의 신은 특정한 지역을 다스리거나 특정한 영역을 주관하니다. 예를 들어 산의 신, 바다의 신, 학문의 신이 있죠. 이런 식으로 특정한 지역과 영역을 주관하는 신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유일신 하나님을 섬긴다고 고백했음에도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가나안 땅으로 한정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지지자들은 사울에게 빨리 다윗을 가나안 땅 밖으로 쫓아내자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다윗에게는 다른 곳에서 다른 신을 섬기라고 명합니다. 이것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었던 신학적 사고입니다. 이게 요나서에도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니느웨 백성들에게 심판을 경고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니느웨로 가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니느웨에 가지 않고 이스라엘 땅에 계속 머물러 있어도 될 텐데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을 치려 합니다. 왜 그 땅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치려 했을까요? 가나안 땅에 머물러 있는 한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다고 본 겁니다. 하나님의 힘이 미치지 않는 이방 땅으로 도망쳐서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자유하기를 기대한 겁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입으로는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다, 하나님은 천하를 다스리시는 유일한 신이라고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가나안 땅으로 한정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신앙인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고백을 할 때는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자이고 세계 역사의 주관자라 고백하면서도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은 교회만을 다스리는 신인 것처럼 착각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학적인 인식 때문에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갈 때 너무나 괴로워 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떠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때, 포로로 끌려가는 사람들의 가장 큰 괴로움은 이제 하나님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그러니까 포로로 끌려가는 사람들의 사고 속에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가나안 땅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으로부터 1000km 이상 떨어진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 갑니다. 그 부정한 이방 땅에 가서 더이상 하나님과 소통될 수 없음에 대해 그들은 너무 안타까워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갖고 있었던 이 신학적 사고를 뒤집어 엎는 사건이 에스겔 1장에 나옵니다.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 있을 때 하나님이 불 병거를 타고 그발 강가에 있는 에스겔을 찾아 오십니다. 여기서 에스겔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가나안 땅을 벗어나면 하나님과의 소통,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올 때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이 가장 큰 슬픔이었는데 이방 땅 그발 강가에서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했죠. 이때부터 이스라엘은 이방 땅에 회당을 세웠습니다. 이방 땅에서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함을 증거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26장 19절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갖고 있었던 신앙적 인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유일 신앙을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다신교적인 이해를 갖고 있었다, 이것이 뒤집어 진 것이 바벨론 포로기입니다. 특히 에스겔 1장이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방 땅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회당이라는 것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본문이 사무엘하 11~12장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그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우리야를 죽입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밧세바와 다윗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때 나단이라는 선지자가 다윗을 찾아옵니다. 나단이 다윗의 죄를 질타합니다. 이때 다윗은 그 어떤 핑계도 대지 않고 무릎을 꿇습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그가 죄가 없고 흠이 없다는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지난 번에 이야기 한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여기서 흙이라는 것은 ‘깨지기 쉬운, 넘어지기 쉬운, 부서지기 쉬운’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흙으로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을 만나게 하셨고 우리가 죄를 범했다고 해서 바로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성경은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자비와 인애와 긍휼이 충만하신 분”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죄를 범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거부할 때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이죠? 왜 다윗은 위대한 신앙인이죠? 어떠한 죄도 범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다윗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죄를 범한 사람입니다. 다윗이 위대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다윗과 그 이후에 이스라엘에 등장했던 왕들을 비교해 보십시오. 매시대마다 예언자들이 왕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회개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었습니다. 이때 대부분의 왕들은 자신들의 죄를 질타하는 예언자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예언자들을 감옥에 쳐 넣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자가 끝가지 입바른 얘기를 하게 되면 예언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위대함은 회개의 기회를 붙잡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죄가 폭로될 때,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자기의 죄를 질타할 때 다윗은 기꺼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질타하는 나단을 나단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단의 질타 앞에서 무릎을 꿇고 회개의 기회를 붙잡았다는 것에 다윗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그다음 중요한 것 본문이 사무엘하 23장입니다. 23장 8~39절을 보시면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이 엄청나게 나옵니다. 성경에서 한 절만 쓰여도 대단한 겁니다. 그런데 30절 이상 이름도 낯선 사람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가장 위대한 시대, 최고의 시대로 꼽히는 것이 다윗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국기를 보시면 다윗의 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다윗 왕국은 다윗이라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 위대한 다윗 왕국은 누가 세운 겁니까? 사무엘하 23장에 나와 있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고 헌신했던 사람들로 인해서 위대한 다윗 왕국이 세워졌다는 겁니다. 성경은 다윗 한 사람을 부각시키지 않고 다윗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수고하고 헌신했던 무수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성경은 한 인간에 대한 우상화를 경계합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경전을 비교해보십시오. 믿음의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잘한 것만 기록하고 있나요?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죽음의 위협에 처했을 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두 번이나 거짓말 한 것을 그대로 기록합니다. 다윗은 얼마나 대단한 신앙의 인물입니까? 그런데도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인 것을 그대로 기록합니다. 베드로는 또 얼마나 위대한 사도입니까? 그 베드로도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를 일구는 일에 가장 헌신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울입니다. 그 바울이 분별력이 없을 때 얼마나 많은 초대 교회인들을 괴롭히고 죽였는지를 성경은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아브라함교가 안 나왔습니다. 바울교가 안 나왔습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성경에 나오는 그 위대한 인물들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와 능력이 달라서 그들이 위대한 믿음의 길을 걸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와 같이 그들도 잘할 때도 있었지만 잘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위대한 신앙의 길을 내딛게 된 것은 그들의 탁월함과 능력에 기반한 것이 아닙니다. 주의 성령이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자 할 때 하나님이 그들을 도우신 겁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한 인물에 대해서 지나치게 높인다거나 우상화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과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무엘하 23장은 이름도 너무 낯선 그 무수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면서 위대한 다윗 왕국은 다윗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다윗을 도와서 아름다운 이스라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헌신했던 무수한 사람들의 땀과 헌신이 모인 열매이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신앙 공동체는 한 인간을 지나치게 우상화하는 것에 대해서 조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다음 열왕기를 보겠습니다. 열왕기 상하는 다윗 통치 말기에서 시작해서 남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여호야긴 이라는 왕이 감옥에 있다가 석방되는 약 400년 정도의 기간, 그때 일어났던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 열왕기입니다. 이 열왕기 상하에서 3분의 1정도의 분량이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가 가장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오므리와 아합 시대에 사역한 사람들입니다. 열왕기 상하는 신명기 역사서입니다. 신명기 역사서는 바벨론 포로기에 기록되었습니다. 목적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이 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나를 이야기하는 것이 열왕기 상하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우상숭배에 가장 몰두하고 하나님을 저버리고 바알 숭배에 몰두했던 때가 언제입니까? 오므리와 아합 때입니다. 그 시대의 잘못된 우상숭배 문화를 막기 위해서 혈혈단신 애를 썼던 예언자가 누구입니까? 엘리야와 엘리사입니다. 열왕기 상하는 400년의 기록을 다루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중심에 엘리야와 엘리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저버리고 바알 숭배에 몰두했던 이스라엘 공동체,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열왕기 상하의 목적입니다.
이번에는 사무엘상 26장 19절을 보겠습니다. 사울이 계속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닐 때 도리어 역전이 되어 다윗이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 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고 내가 당신을 죽일 수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물을 확보합니다. 예를 들면 옷자락을 조금 베어내거나 사울의 물병과 창을 빼앗거나 증거물을 확보합니다. 그리고 안전거리가 확보되었을 때 다윗은 사울을 부릅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나는 당신을 죽일 수 있었으나 죽이지 않았다”고 증거를 제출하고 그리고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입니까”라고 사울을 책망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다윗이 사울을 책망할 때마다 사울은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미안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않습니다. 다윗과 완전히 화해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26장 19절 말씀이 나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 하면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원하건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길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사람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여기의 그들이 누구냐면 사울의 신하들입니다. 사울의 지지자들입니다. 이들이 다윗에게 뭐라고 하냐면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사울과 그의 지지자들은 다윗을 가나안 땅 밖으로 몰아내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본 겁니까?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가나안 땅을 벗어나면 다른 신을 섬길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나를 쫓아내서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려 한다, 이런 얘기를 다윗이 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26장 19절이 왜 중요하냐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었던 신학적 인식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고대 근동사회에서는 크게 3가지의 신앙 양태가 있습니다. 유일신교, 일신교, 다신교입니다. 유일신교는 신은 한 분밖에 없다고 고백하고 그 한분을 섬기는 것이 유일신교입니다. 일신교는 여러 신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한 신만 섬기겠다는 겁니다. 다신교는 여러 신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여러 신을 섬기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는 다신교 내지는 일신교였습니다. 이스라엘만 유일신교 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만이 신이시다, 그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겠다고 다짐하고 결단했습니다. 사무엘상 26장 19절은 우리에게 뭘 알려주냐면 이스라엘이 머리와 입술로는 유일신교를 고백했지만 실제 이스라엘이 갖고 있었던 신앙적인 사고는 다신교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의 지지자들은 사울에게 빨리 다윗을 가나안 땅 밖으로 쫓아내라고 말합니다. 가나안 땅 밖으로 다윗이 쫓겨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다른 신을 섬길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겁니다. 여기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떤 신앙적 사고가 반영되고 있죠? 하나님은 가나안 땅만 다스리는 신, 가나안 땅에 있을 때는 다윗은 하나님과 소통하고 도우심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을 벗어나면 다윗과 하나님의 관계는 단절된다고 보는 겁니다. 이게 전형적인 다신교적인 사고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다신교에서의 신은 특정한 지역을 다스리거나 특정한 영역을 주관하니다. 예를 들어 산의 신, 바다의 신, 학문의 신이 있죠. 이런 식으로 특정한 지역과 영역을 주관하는 신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유일신 하나님을 섬긴다고 고백했음에도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가나안 땅으로 한정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지지자들은 사울에게 빨리 다윗을 가나안 땅 밖으로 쫓아내자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다윗에게는 다른 곳에서 다른 신을 섬기라고 명합니다. 이것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었던 신학적 사고입니다. 이게 요나서에도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니느웨 백성들에게 심판을 경고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니느웨로 가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니느웨에 가지 않고 이스라엘 땅에 계속 머물러 있어도 될 텐데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을 치려 합니다. 왜 그 땅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치려 했을까요? 가나안 땅에 머물러 있는 한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다고 본 겁니다. 하나님의 힘이 미치지 않는 이방 땅으로 도망쳐서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자유하기를 기대한 겁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입으로는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다, 하나님은 천하를 다스리시는 유일한 신이라고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가나안 땅으로 한정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신앙인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고백을 할 때는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자이고 세계 역사의 주관자라 고백하면서도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은 교회만을 다스리는 신인 것처럼 착각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학적인 인식 때문에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갈 때 너무나 괴로워 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떠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때, 포로로 끌려가는 사람들의 가장 큰 괴로움은 이제 하나님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그러니까 포로로 끌려가는 사람들의 사고 속에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가나안 땅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으로부터 1000km 이상 떨어진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 갑니다. 그 부정한 이방 땅에 가서 더이상 하나님과 소통될 수 없음에 대해 그들은 너무 안타까워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갖고 있었던 이 신학적 사고를 뒤집어 엎는 사건이 에스겔 1장에 나옵니다.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 있을 때 하나님이 불 병거를 타고 그발 강가에 있는 에스겔을 찾아 오십니다. 여기서 에스겔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가나안 땅을 벗어나면 하나님과의 소통,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올 때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이 가장 큰 슬픔이었는데 이방 땅 그발 강가에서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했죠. 이때부터 이스라엘은 이방 땅에 회당을 세웠습니다. 이방 땅에서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함을 증거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26장 19절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갖고 있었던 신앙적 인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유일 신앙을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다신교적인 이해를 갖고 있었다, 이것이 뒤집어 진 것이 바벨론 포로기입니다. 특히 에스겔 1장이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방 땅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회당이라는 것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본문이 사무엘하 11~12장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그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우리야를 죽입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밧세바와 다윗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때 나단이라는 선지자가 다윗을 찾아옵니다. 나단이 다윗의 죄를 질타합니다. 이때 다윗은 그 어떤 핑계도 대지 않고 무릎을 꿇습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그가 죄가 없고 흠이 없다는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지난 번에 이야기 한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여기서 흙이라는 것은 ‘깨지기 쉬운, 넘어지기 쉬운, 부서지기 쉬운’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흙으로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을 만나게 하셨고 우리가 죄를 범했다고 해서 바로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성경은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자비와 인애와 긍휼이 충만하신 분”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죄를 범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거부할 때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이죠? 왜 다윗은 위대한 신앙인이죠? 어떠한 죄도 범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다윗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죄를 범한 사람입니다. 다윗이 위대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다윗과 그 이후에 이스라엘에 등장했던 왕들을 비교해 보십시오. 매시대마다 예언자들이 왕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회개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었습니다. 이때 대부분의 왕들은 자신들의 죄를 질타하는 예언자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예언자들을 감옥에 쳐 넣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자가 끝가지 입바른 얘기를 하게 되면 예언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위대함은 회개의 기회를 붙잡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죄가 폭로될 때,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자기의 죄를 질타할 때 다윗은 기꺼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질타하는 나단을 나단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단의 질타 앞에서 무릎을 꿇고 회개의 기회를 붙잡았다는 것에 다윗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그다음 중요한 것 본문이 사무엘하 23장입니다. 23장 8~39절을 보시면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이 엄청나게 나옵니다. 성경에서 한 절만 쓰여도 대단한 겁니다. 그런데 30절 이상 이름도 낯선 사람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가장 위대한 시대, 최고의 시대로 꼽히는 것이 다윗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국기를 보시면 다윗의 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다윗 왕국은 다윗이라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 위대한 다윗 왕국은 누가 세운 겁니까? 사무엘하 23장에 나와 있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고 헌신했던 사람들로 인해서 위대한 다윗 왕국이 세워졌다는 겁니다. 성경은 다윗 한 사람을 부각시키지 않고 다윗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수고하고 헌신했던 무수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성경은 한 인간에 대한 우상화를 경계합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경전을 비교해보십시오. 믿음의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잘한 것만 기록하고 있나요?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죽음의 위협에 처했을 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두 번이나 거짓말 한 것을 그대로 기록합니다. 다윗은 얼마나 대단한 신앙의 인물입니까? 그런데도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인 것을 그대로 기록합니다. 베드로는 또 얼마나 위대한 사도입니까? 그 베드로도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를 일구는 일에 가장 헌신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울입니다. 그 바울이 분별력이 없을 때 얼마나 많은 초대 교회인들을 괴롭히고 죽였는지를 성경은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아브라함교가 안 나왔습니다. 바울교가 안 나왔습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성경에 나오는 그 위대한 인물들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와 능력이 달라서 그들이 위대한 믿음의 길을 걸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와 같이 그들도 잘할 때도 있었지만 잘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위대한 신앙의 길을 내딛게 된 것은 그들의 탁월함과 능력에 기반한 것이 아닙니다. 주의 성령이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자 할 때 하나님이 그들을 도우신 겁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한 인물에 대해서 지나치게 높인다거나 우상화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과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무엘하 23장은 이름도 너무 낯선 그 무수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면서 위대한 다윗 왕국은 다윗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다윗을 도와서 아름다운 이스라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헌신했던 무수한 사람들의 땀과 헌신이 모인 열매이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신앙 공동체는 한 인간을 지나치게 우상화하는 것에 대해서 조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다음 열왕기를 보겠습니다. 열왕기 상하는 다윗 통치 말기에서 시작해서 남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여호야긴 이라는 왕이 감옥에 있다가 석방되는 약 400년 정도의 기간, 그때 일어났던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 열왕기입니다. 이 열왕기 상하에서 3분의 1정도의 분량이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가 가장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오므리와 아합 시대에 사역한 사람들입니다. 열왕기 상하는 신명기 역사서입니다. 신명기 역사서는 바벨론 포로기에 기록되었습니다. 목적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이 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나를 이야기하는 것이 열왕기 상하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우상숭배에 가장 몰두하고 하나님을 저버리고 바알 숭배에 몰두했던 때가 언제입니까? 오므리와 아합 때입니다. 그 시대의 잘못된 우상숭배 문화를 막기 위해서 혈혈단신 애를 썼던 예언자가 누구입니까? 엘리야와 엘리사입니다. 열왕기 상하는 400년의 기록을 다루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중심에 엘리야와 엘리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저버리고 바알 숭배에 몰두했던 이스라엘 공동체,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열왕기 상하의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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