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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역사서 녹취 6

by 【고동엽】 2021. 12. 7.
사사기 21장 25절을 보겠습니다. 사사기를 보시면 여러 번에 걸쳐서 이 말씀이 반복됩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이 왕이 없었다는 말씀에서 사사기를 쓰고 있는 시점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사기는 왕정 시대 이후에 기록된 겁니다. 왕이 없으니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다, 엄밀히 말해 여기 나오는 사람은 남자를 가리킵니다. 남자들이 자기가 옳다고 믿는 대로 행했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하나님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25절을 다시 풀게 되면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자기가 자기 인생에 왕이 된 겁니다. 내가 한 행동에 대해 스스로 진단하고 판단을 내립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시내산 언약부터 하나님만을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만을 믿겠다고 다짐하고 결단한 신앙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왕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니까 각자 자신이 자기 인생의 왕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은 시대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사사기입니다.


사사기 앞부분에 보면 사사기의 전형적인 패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고, 백성이 회개하고 그러고 나면 하나님이 다시 사사를 세우셔서 구원해주십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 하나님의 심판, 이스라엘의 회개, 하나님의 구원, 이 패턴이 반복됩니다. 사사기에 대사사가 6명, 소사사가 6명 나오는데, 대사사를 보면 옷니엘, 에훗, 드보라, 기드온, 입다, 삼손입니다. 여기서 뭘 볼 수 있냐면 초기 사사였던 옷니엘이나 에훗에 비해서 나중의 사사인 입다나 삼손은 수준이 떨어집니다. 입다는 하나님이 가장 가증하게 여기는 일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했습니다. 레위기나 신명기를 보시면 하나님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그런데 입다는 자기의 딸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칩니다. 마지막 사사인 삼손에게 본 받을만한 신앙적인 유산이 뭐가 있죠? 거의 없습니다. 사사 시대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하향 평준화 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사기는 이 패턴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일한 반복은 아니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하향 평준화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은 그 시대에 이스라엘이 어떤 삶을 살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사사기입니다. 뜻 있는 많은 사람들은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이 사사기와 동일하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우리가 사사기를 보면서 우리가 돌이키고 회개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하나님을 진정 왕으로 삼는 삶은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사기에서는 한 구절만 보겠습니다. 19장 2절입니다. 한 레위인이 첩이 두고 있었습니다.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서 유다 베들레햄 그의 아버지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달을 지냈다”는 말이 나옵니다. 결과적으로 나중에 이 여인을 남편이 데리고 오다가 결국 여인이 성푹행을 당하고 죽습니다. 그리고 레위인이 죽은 여인의 시체를 12조각으로 잘라서 이스라엘 12지파에게 보내고, 그 결과 베냐민 지파와 이스라엘 11지파가 전쟁을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 19장 2절에 보면 “그 첩이 행음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친정 아버지의 집에 가서 넉달을 거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레위인 남편이 그 첩을 찾으러 갑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토라를 보면 결혼한 여인이 행음을 하면 불태워 죽이거나 돌아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행음한 여인이 자기 친정 아버지 집에 갑니까? 그리고 행음한 아내를 레위인은 찾으러 갑니까? 이상하죠. 여기 ‘행음했다’는 히브리어 원어가 ‘자나’라는 동사입니다. 원래 ‘자나’라는 동사 다음에 ‘알’이라는 전치사가 나오면 이것은 ‘행음했다’가 아니라 누구에게 ‘화가 났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본문을 보면 ‘자나’ 다음에 ‘알’이 나오고 그다음에 레위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레위인의 첩인데 자나, 알, 레위인이 나오면 ‘그 레위인과 행음했다’ 라고 할 수는 없겠죠. 이때는 행음했다고 번역하면 안 되고 ‘화가 났다, 분노했다’고 해야 합니다. 레위인의 첩은 레위인에 대해서 너무 화가난 겁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친정 아버지 집으로 간 겁니다. 그래서 자기 때문에 화가 난 여인을 찾으러 레위인은 그녀의 친정으로 간 겁니다. 이 집에 가서 이 여인을 데리고 올라가던 중에 베냐민 땅에서 자신의 첩이 성폭행을 당해 죽었고 그래서 성폭행 당한 이 여인을 12조각으로 나눠서 이스라엘 지파에게 택배를 보내서 베냐민 지파와 전쟁하는 이야기가 사사기 마지막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정리하자면, 한글 개역 개정에는 19장 2절에 그 첩이 행음했다고 되어 있지만 이것은 행음했다고 번역하면 안 되고 그 첩이 레위인에게 화가 나서 친정집에 갔다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다음 본문은 룻기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을 보시면 일반 사회와 전혀 다른 신앙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이 나옵니다. 일반 사회는 나와 너 사이에 끊임없이 담을 세우려 하고, 비슷한 사람끼리 유유상종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일반 사회에 작동되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유대인은 유대인끼리, 이방인은 이방인끼리, 주인은 주인끼리, 종은 종끼리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나와 너 사이에 담을 세우고 차별을 하고 하대를 하고 이것이 일반 사회의 방식인데, 갈라디아서 3장 28절을 보면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유일한 주인, 아버지로 모시는 신앙 공동체는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주인과 종들 사이의 사회적인 담들이 다 허물어지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서 입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됨을 누리는 곳이 신앙 공동체입니다. 룻기는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말씀이 구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룻기를 보면 보아스라는 유대인 남자가 있습니다. 보아스는 거대한 재력을 가지고 있는 주인입니다. 룻이라는 여인은 모압 여인입니다. 너무 가난해서 보아스라는 사람의 밭에서 일을 합니다. 일반적인 맥락에서는 유대인과 모압 이방인은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주인 보아스와 종 룻은 하나 될 수 없습니다. 남자인 보아스와 여자인 룻은 하나될 수 없습니다. 원래 유대교는 철저하게 남성 중심 공동체입니다. 회당만 하더라도 메인 예배당에는 남자들만 입장할 수 있습니다. 여인들은 커튼 뒤에 있거나 2층에 올라가야 합니다. 심지어 유대교에서는 여성들은 말씀을 직접 배울 수도 없었습니다. 랍비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은 오직 남자였습니다.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유대인이라고 해도 여성인 경우 여인들의 뜰에만 머물러야 합니다. 이를 벗어나서 남성들의 예배 공간에 가면 돌 맞아 죽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철저히 남성이 머물 공간과 여성이 머물 공간을 구분하고 하나님의 말씀조차 남성만 배울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 유대교입니다. 그런데 룻기는 주인과 종,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담을 넘어서 하나님의 품 안에서 두 사람이 하나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룻기는 갈라디아서 3장 28절을 미리 예시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룻기가 우리에게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룻기가 언제 기록되었는지에 대한 여러 의견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에스라, 느헤미야가 종교 개혁 운동을 일으킬 때 룻기가 기록되었을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에스라, 느헤미야는 주전 5세기 중반 사람입니다. 에스라는 주전 458년에 이스라엘 땅으로 파송되었던 페르시아의 관료였고 느헤미야는 주전 445년에 이스라엘 땅으로 파송된 페르시아의 관료입니다. 이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통해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납니다. 에스라, 느헤미야가 일으켰던 종교개혁 운동의 핵심을 이해하려면 그 당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많은 남유다 사람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진 성전이 주전 515년에 학개와 스가랴와 스룹바벨에 의해서 재건 됩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종교인들이 리더십을 확보하게 됩니다. 당시 가장 중요한 정치 권력을 쥐고 있던 곳은 사마리아였습니다. 종교권력은 예루살렘이 쥐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대부분 이방인이 많았습니다. 예루살렘은 정통 유대인이 많았습니다. 이때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예루살렘의 종교 권력자의 아들과 사마리아에 있는 정치 권력자의 딸들이 결혼을 많이 했습니다. 요즘도 그런 사람들이 있지만 결혼을 통해서 사회, 경제적인 신분 상승을 기대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 권력자의 아들과 사마리아 정치 권력자의 딸들이 통혼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 종교 권력자들은 사마리아 정치 권력자들이 갖고 있는 사회 경제적인 신분의 격상을 기대했고 사마리아 정치 권력자들은 예루살렘 종교 권력자들과의 통혼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엄청난 헌금, 십일조에 눈독을 들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라,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땅에 파송된 겁니다. 이들이 이스라엘에 파송되어 와서 본 이스라엘의 현실은 조상들이 하나님께 심판 받기 전의 모습과 너무나 유사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지금 이스라엘이 선조들처럼 우상숭배에 몰두하고 있다 라고 진단하면서 이 모든 문제의 핵심이 정통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통혼을 하는 것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들이 통흔을 하면서 5가지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첫째는 남편은 하나님을 믿는데 아내는 다른 신을 섬기는 겁니다. 그러면 집안이 신앙 때문에 끊임없이 갈등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아내의 종교에 따라 남편이 개종하는 경우가 발생했습니다. 통혼을 반대한 중요한 이유는 통혼의 결과 야훼 하나님을 믿던 사람들이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요즘도 대부분 그렇지만 나이 든 남편과 나이가 적은 아내가 결혼하면 남편이 보통 일찍 죽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 권력자들이 일찍 죽으면 남자가 남긴 유산 가운데 일부를 아내가 차지하게 됩니다. 토라를 보면 “지계석을 옮기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남편이 먼저 죽으면 이방 여인들이 남편이 남긴 유산 중 일부를 가져가게 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전체의 부가 감소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는 이스라엘 남성과 이방 여인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아이는 어머니가 양육합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를 보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 자녀들이 히브리어는 모르고 어머니의 언어만을 모국어로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녀는 신앙의 계승자인데 아이가 태어났는데 신앙이 계승되지 않는 겁니다. 네 번째는 예루살렘 종교 권력자들이 사마리아 정치 권력자들과 결혼하기 위해서 자신의 본 부인을 버리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정이 많이 파괴되었습니다. 다섯 번째 사마리아 정치 권력자들과 통혼한 사람들이 대부분 예루살렘 종교 권력자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 하자면 이스라엘 상층부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회 경제적인 지위 상승을 기대하면서 사마리아 정치 권력자들과 통혼을 한 겁니다. 이것을 보면서 대다수 이스라엘 백성들도 부러워하기 시작합니다. 자신들도 저렇게 결혼하여서 사회 경제적인 신분 상승을 꿈꾸고 싶었던 겁니다.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의 그런 행동이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겁니다. 통혼이 문제가 된 이 다섯 가지 이유, 첫째 통혼을 통해 신앙을 상실할 가능성이 있었다, 두 번째 남편이 먼저 죽으면 남편 재산의 일부가 이방 아내에게 넘어가 이스라엘 전체의 부가 감소하는 경제적 이유가 있었고, 세 번째 자녀가 태어났는데 아버지의 신앙과 언어는 모르고 어머니의 신앙과 언어만 전수 받게 된다, 즉 자녀가 태어났지만 신앙이 계승되지 않았습니다. 네 번째 이방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본처를 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섯 번째 이 일을 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행하면서 이스라엘 백성 대다수가 이를 보며 부러워 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겁니다. 에스라,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땅에 와서 이런 모습을 본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을 숭배하던 자들을 심판하시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고 가셨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끝나나 싶었는데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다시 기회를 주신 것 아닙니까? 그 은혜 가운데 돌아왔으면 조상들처럼 하나님과 다른 신을 겸하여 섬기는 우상숭배 말고 하나님만을 온전히 잘 섬겨야 할텐데, 에스라 느헤미야가 볼 때 너무 안타까운 겁니다. 돌아온지 얼마나 되었다고 사마리아 정치 권력자와 손 맞잡고 그들의 종교와 문화에 동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에스라, 느헤미야가 굉장히 단호하게 종교개혁 운동을 펼친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이방 여인과 결혼한 사람들에게 이방 여인과의 만남을 끊고 그 여인과 그 사이에 태어난 혼혈 자녀들을 이방으로 돌려 보낼 것을 명했습니다. 너무나 단호한 회개 운동을 펼친 것입니다. 이 회개 운동이 정점에 도달했을 때 이상한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집니다. 이스라엘이 온전한 신앙 공동체가 되지 못하는 이유와 원인이 무엇에 있느냐 하면서 이방인들과의 섞임, 통혼, 즉 이방인들 때문에 이스라엘이 온전한 신앙 공동체가 되지 못한다 라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마치 순수한 신앙을 위해서는 순수한 혈통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순수 신앙은 순수 혈통으로 만들어진다는 이데올로기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등장한 본문이 룻기입니다. 룻기는 이런 질문을 하는 겁니다. “당신들이 가장 존경하는 신앙인의 모델이 누구냐”라고 하면 대다수 이스라엘 백성은 “다윗”이라고 답합니다. 지금 순수 신앙은 순수 혈통을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이데올로기가 퍼져 있는 상태에서, “다윗의 부모님은 유대인이겠지”라고 질문하면 “당연하지”라는 답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할아버지, 증조, 고조 할아버지 모두 다 정통 유대인이겠지”라고 질문을 해도 “당연하지”라는 대답이 나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다윗의 아버지는 이새입니다. 이새의 아버지는 오벳이고 오벳의 아버지는 보아스입니다. 보아스는 여리고의 기생이었던 라합의 아들입니다. 보아스의 아내는 룻입니다. 룻은 모압 여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다윗의 몸 안에 여리고 여인이었던 라합, 모압의 여인인 룻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다윗이 그 위대한 신앙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순수 혈통이기 때문인가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룻기는 에스라, 느헤미야의 개혁 운동이 정점에 달했을 때 이스라엘 안에 생긴 순수 혈통이 순수 신앙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주장에 대한 반대 본문으로 나온 겁니다. 룻기의 말씀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 2장 28~29절에서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고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다, 그래서 룻기는 오늘날 다문화 사회에 가장 적합한 책입니다. 모압 여인이라 하더라도 그가 하나님을 믿길 원한다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이방인 포용적, 개방적 본문이 룻기입니다. 그 사람 혈통이 어떻든, 인종이 어떻든 그가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오길 원한다면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이 룻기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보고 다음 시간에는 사무엘 상하와 열왕기 상하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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