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역사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여호수아부터 보겠습니다. 여호수아서는 가나안 땅 정복에 대한 이야기인데 가나안 땅 정복을 이해하려면 모세5경 공부했을 때 이야기 했던 땅 신학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땅신학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발 딛고 살아가는 모든 땅의 주인은 하나님 이시다, 하나님은 그 땅을 특정 민족과 공동체에게 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그 땅에 거주하는 사람은 주인이 아니라 임차인으로 거주하는 것이다, 그 땅에 계속 거주하기 위해서는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성실하게 임대료를 납부해야 한다, 그 임대료가 미쉬파트와 체다카라고 했습니다. 미쉬파트는 사법적 정의가 구현되는 것이고 체다카는 서로가 서로를 형제로 대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사법적 정의가 구현되고 서로가 서로를 형제로 대하는 아름다운 사회가 건설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 거주하는 임차인들이 자신에게 성실하게 임대료를 납부하는 것으로 이해해 주십니다. 그러면 그들을 그 땅에 계속 거주하도록 허용해 주십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특정한 민족과 공동체에게 어느 땅에 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는데, 그들이 그 땅에서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고 착취하여 약자들의 울부짖음과 신음소리가 난무하는 사회를 만들게 되면 땅신학의 맥락에서 보자면 이것은 성실하게 임대료를 납부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임대료가 체납되어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그런데 예언자의 경고를 듣고도 임대료를 낼 마음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땅의 임차인을 교체하십니다. 창세기를 보시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했는데, 지금이 아니라 400년 이후입니다. 이유가 아모리 사람들의 죄악이 아직 가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5장 16절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때로부터 400년이 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모리 사람들에게 가나안 땅에 거주할 수있는 기회를 주셨는데 그들이 하나님께 성실하게 임대료를 납부하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임차인을 그곳에 들이시고 아모리 사람들을 내어쫓으신 겁니다. 그 이야기가 여호수아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호수아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땅신학의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을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시려고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내어쫓으신 것이 아닙니다. 아모리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서 내어 쫓김을 당한 이유는 성실하게 하나님께 임대료를 납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도 가나안 땅에 주인으로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도 임차인의 자격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스라엘도 그 땅에 계속 거주하기 위해서는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성실하게 임대료를 납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언자를 통해서 끊임없이 경고를 받습니다. 그런 경고를 받고도 돌이키지 않으면 이스라엘도 그 땅에서 내어쫓김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실제 이스라엘 역사를 보시면 주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서, 주전 586년에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그 땅으로부터 내어쫓김을 당합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역사를 보시면 AD 135년에는 모든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내어쫓김을 당하고 그때부터 유대인들이 2천년 동안 전세계를 유랑했습니다. 그리고 1948년에 다시 그 땅 위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건설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도 땅신학의 맥락에서 똑같은 조건 가운데 그 땅으로부터 내어 쫓김을 당한 것이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다는 것은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시작되는 겁니다. 출애굽에 3단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1단계가 애굽에서 나오는 겁니다. 나올 때 중요한 것이 몸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심과 가치관과 세계관도 탈출해야 합니다. 두 번째가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용기를 내어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가나안 땅 위에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되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출애굽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다고 끝이 아니라 이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인가를 살아내야 합니다. 이를 통하여 이방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곳이라는 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방 백성들을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초대해야 합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거주토록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것은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호수아서를 읽을 때 조심하셔야 할 것이 뭐냐면 신학자들의 표현으로 하자면 여호수아 착각 증후군 환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여호수아 착각 증후군 환자입니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가 가나안에 있는 사람들과 싸우는 것에 근거하여 나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이고, 내가 대적하는 상대는 가나안 원주민이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실제 누가 그렇게 이해했습니까? 십자군들, 서구 제국주의 정복 전쟁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우리는 이스라엘 군대이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있는 사람들은 가나안 원주민들이다 라는 식으로 주장했습니다. 또한 모세와 바로가 만났을 때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자기를 누구와 동일시합니까? 모세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에서는 다윗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을 보면 항상 성경에 나와 있는 믿음의 인물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가 항상 다윗이 아닐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을 가지고 연약한 사람을 억압하고 누르고 있다면 내가 바로이고 골리앗인 겁니다. 우리가 항상 이스라엘 군대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심판받아야 할 가나안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볼 때 우리가 믿음의 인물들과 항상 동일하고, 믿음의 인물들과 맞선 대상들이 나의 원수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모세와 바로을 보면서 나에게 있는 모세의 모습은 어떤 것이 있고, 나에게서 극복해야 할 바로의 모습이 무엇인지 그 두 인물 속에서 스스로를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지, 항상 믿음의 인물들과 위대한 위인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는 것은 건강한 성경 읽기의 모습이 아닙니다. 여호수아 5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을 만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묻습니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아니면 우리 대적자를 위하느냐”라고 했을 때 그 존재가 뭐라 하냐면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여호와의 군대 장관은 항상 이스라엘 편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이스라엘을 편들 때는 언제 입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편에 서 있을 때입니다. 이스라엘은 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은 늘 이스라엘 편이다,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군대장관의 도움을 받으려면 이스라엘이 먼저 하나님의 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우리 편에서 도와주기를 갈구하는데, 이것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겁니다. 그러지 못했을 때 이스라엘이 승리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편에 서 있지 않을 때 이스라엘은 패배합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이 버림받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동일시하거나, 오늘날 교회와 하나님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답지 못한 교회는 하나님이 친히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 되기를 갈구하기 보다는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되기를 간절히 구하는 그런 신앙의 자세를 갖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여러분, 여호수아서는 내용을 보면 가나안 땅 정복이 1장부터 12장이고, 가나안 땅을 분배하는 이야기가 13장부터 22장이고, 여호수아의 고별설교가 23~24장입니다. 몇 가지 살펴봐야 될 내용을 본문을 통하여 보겠습니다. 먼저, 여호수아 12장 24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수아 12장 17절 위에 보시면 소제목에 이런 것이 나옵니다. ‘여호수아가 정복한 왕들’이라고 나옵니다. 24절 마지막에 “하나는 디르사 왕이라 모두 서른한 왕이었더라”라고 나옵니다. 여호수아 12장은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이스라엘 군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복한 왕의 수가 31명의 왕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 땅에는 하나의 왕국이 아니라 무수한 도시 국가들이 있었습니다. 고대 사회는 다 도시 국가입니다. 도시 국가는 작은 성 하나가 국가입니다. 그 성을 통치하는 왕이 있습니다. 나중에 한 사람이 거대한 땅을 통치하는 것은 후대의 일입니다. 처음에는 여리고라는 하나의 성이 하나의 국가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많은 도시 국가가 있었는데 이스라엘 군대가 31명의 왕들을 정복했다, 즉 31개의 도시 국가를 정복했다고 말합니다. 24절만 읽으면 이스라엘이 굉장히 많은 곳을 정복했다는 생각을 갖기 쉬운데 여호수아서는 우리에게 어떤 정보를 알려주지 않냐면 그 당시 가나안에 몇 개의 도시 국가가 있었는지를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그 당시 가나안 땅에 한 50개 정도의 도시국가가 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군대가 정복한 것이 31개라고 한다면 62% 정도의 도시국가를 정복한 겁니다. 그런데 만약 그 당시 가나안 땅에 도시 국가가 300개 정도 있었다, 그런데 정복한 것이 31개라고 한다면 약 10% 정도만 정복한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 31명의 왕을 정복했다고 하면 굉장히 많이 정복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당시 가나안 땅에 몇 개의 도시국가가 있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어느 정도 정복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서를 자세히 보시면 이스라엘이 많은 땅을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가 뭡니까? 원래 살던 원주민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동거하게 됩니다. 함께 살면서 가나안 사람들의 종교 문화에 이스라엘이 영향을 받고 동화되어 버립니다. 그게 여호수아와 사사기의 주된 내용입니다. 실제 이스라엘이 정복하지 못한 가나안 땅이 훨씬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유다지파나 에브라임 지파 정도가 용기를 내서 가나안 원주민들과 싸워서 그 땅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지파들은 가나안 원주민들과 싸우는 것에 대해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18장 이하를 보시면 너무 이스라엘의 지파가 땅을 정복하는 일에 힘을 내지 못하니까 여호수아가 특단의 조치를 취합니다. 아직까지 자기 땅을 소유하지 못한 지파별로 대표 3명씩 뽑으라고 합니다. 이때 7지파가 땅을 차지하지 못했는데, 그렇게 3명씩 21명으로 하여금 너희 지파가 갖기를 원하는 땅을 지도상으로 그려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실로라는 성소에 모여서 지파들끼리 땅을 분배하는데, 이때의 분배는 지도상으로 땅을 분배한 것입니다. 여호수아서를 이해하실 때 이것을 잘 보셔야 합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여러 지파에게 땅이 분배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냐면 이 땅을 이스라엘이 차지했는데 차지한 그 땅을 스불론 지파에게 주었구나, 르우벤 지파에게 주었구나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용기 내어 싸워서 그 땅을 차지한 지파는 몇 지파가 되지 않습니다. 요단 동편 땅을 차지했던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 그리고 용기 내어 요단 서편 땅을 차지했던 유다, 에브라임 지파 정도가 가나안 원주민들과 싸워서 그 땅을 차지한 것이고 대부분의 지파들은 지도상으로 그 땅을 분배받은 겁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여기는 단 지파의 땅이라고 했을 때 그곳이 이스라엘이 차지한 그 땅을 단지파에게 분배해준 것이 아니라 단지파는 지도상으로 분배받은 겁니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도상으로 분배받은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용기내어 그 땅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지파들이 지도상으로 분배받은 그 땅을 온전히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과 동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 동거의 결과 금방 가나안 종교 문화에 동화된 이야기가 여호수아와 사사기입니다.
19장 47절을 보시면 “그런데 단 자손의 경계는 더욱 확장되었으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 자손이 올라가서 레셈과 싸워 그것을 점령하여 칼날로 치고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 거주하였음이라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레셈을 단이라 하였다” 라고 합니다. 단 지파도 지도상으로 땅을 분배받은 지파입니다. 단 지파가 분배받은 땅이 가나안 중부 지방입니다. 분배받은 후에 가서 보니까 중부 지방의 원주민들이 만만한 사람들이 아닌 겁니다. 더 위험한 것은 뭐냐면 단 지파가 분배받은 그 땅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족속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블레셋 족속입니다. 세계 역사를 보시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블레셋도 비슷한 시기에 들어옵니다. 블레셋은 해양 민족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중해 해변가를 중심으로 거주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왔습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는데 블레셋은 이집트에 들렀다가 지중해 해변가를 중심으로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에돔, 모압, 압몬, 요단 동편 땅을 쭉 거쳐서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됩니다. 처음에는 블레셋과 이스라엘 모두 인구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각자 자기의 땅에서 거주했습니다. 나중에 사무엘 시대가 되면 블레셋과 이스라엘 모두 인구가 늘어납니다. 인구가 늘어나니까 그들이 거주할 땅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진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무엘 시대에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 지속적인 전쟁이 있던 겁니다. 참고로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비슷한 시기 가나안 땅에 들어왔는데 블레셋은 해양민족이고 이스라엘은 유목 민족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할례를 받지 않았고 이스라엘은 받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었고 이스라엘은 먹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고고학자들이 가나안 땅을 파다가 돼지 뼈가 나오면 블레셋 사람들의 거주지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너무 단순한 생각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인데도 몰래 먹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돼지의 뼈가 나오면 블레셋 사람의 거주지라고 너무 쉽게 규정을 합니다. 단 지파는 지도 상으로 가나안 중부지방을 분배 받았습니다. 그 땅을 차지하려면 그 땅의 원주민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싸워서 그 땅을 정복했다고 합시다. 바로 옆에는 블레셋이 있습니다. 그 당시 블레셋은 이스라엘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당시 청동기 문명이었고 블레셋은 이미 철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청동기가 어떻게 철기를 이깁니까?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단지파는 원래 지도상으로 가나안 땅 중부 지방을 분배받았는데 그 땅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과 싸울 용기가 나지 않았고, 이긴다 하더라도 블레셋 사람들과 경계를 맞닿고 사는 것이 너무나 두려워서 그 땅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올라 갑니다. 그렇게 올라가다가 일어난 사건이 사사기 17장과 18장에 나옵니다. 올라가다가 제일 북쪽 지방에 만만한 사람들과 싸워 그 땅을 차지하고 여기가 단 지파의 땅이라고 주장합니다. 실제는 지도상으로 분배받은 그 땅을 버리고 북쪽으로 올라가서 거주하게 된 것인데, 한글성경 여호수아서 19장 47절에는 “단 자손의 경계가 더욱 확장되었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더라도 “그 땅을 차지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은 확장이 아닙니다. 확장은 자신들이 차지할 땅을 차지하고 추가로 새로운 땅을 차지할 때 확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 지파는 확장이 아니라 지도상으로 분배받은 땅을 저버리고 북쪽으로 올라가서 만만한 상대를 무찌르고 단 지파의 땅이라고 선언한 겁니다. 확장이 아니라 이동입니다. 이스라엘 영토를 이야기 할 때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제일 북단이 단입니다. 남단인 브엘세바는 1년에 강수가 200미리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물의 양이 1년에 200미리입니다. 생존의 극지점, 그곳이 바로 브엘세바입니다. 이스라엘 영토의 제일 남단이 브엘세바이고 제일 북단이 단입니다. 그런데 원래 단 지파는 거기에 살도록 부여받은 지파가 아닙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백성들을 몰아내는 일에 열심을 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장 47절의 말씀은 그래서 확장이 아니라 이동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다는 것은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시작되는 겁니다. 출애굽에 3단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1단계가 애굽에서 나오는 겁니다. 나올 때 중요한 것이 몸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심과 가치관과 세계관도 탈출해야 합니다. 두 번째가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용기를 내어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가나안 땅 위에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되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출애굽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다고 끝이 아니라 이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인가를 살아내야 합니다. 이를 통하여 이방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곳이라는 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방 백성들을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초대해야 합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거주토록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것은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호수아서를 읽을 때 조심하셔야 할 것이 뭐냐면 신학자들의 표현으로 하자면 여호수아 착각 증후군 환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여호수아 착각 증후군 환자입니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가 가나안에 있는 사람들과 싸우는 것에 근거하여 나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이고, 내가 대적하는 상대는 가나안 원주민이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실제 누가 그렇게 이해했습니까? 십자군들, 서구 제국주의 정복 전쟁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우리는 이스라엘 군대이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있는 사람들은 가나안 원주민들이다 라는 식으로 주장했습니다. 또한 모세와 바로가 만났을 때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자기를 누구와 동일시합니까? 모세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에서는 다윗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을 보면 항상 성경에 나와 있는 믿음의 인물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가 항상 다윗이 아닐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을 가지고 연약한 사람을 억압하고 누르고 있다면 내가 바로이고 골리앗인 겁니다. 우리가 항상 이스라엘 군대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심판받아야 할 가나안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볼 때 우리가 믿음의 인물들과 항상 동일하고, 믿음의 인물들과 맞선 대상들이 나의 원수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모세와 바로을 보면서 나에게 있는 모세의 모습은 어떤 것이 있고, 나에게서 극복해야 할 바로의 모습이 무엇인지 그 두 인물 속에서 스스로를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지, 항상 믿음의 인물들과 위대한 위인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는 것은 건강한 성경 읽기의 모습이 아닙니다. 여호수아 5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을 만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묻습니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아니면 우리 대적자를 위하느냐”라고 했을 때 그 존재가 뭐라 하냐면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여호와의 군대 장관은 항상 이스라엘 편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이스라엘을 편들 때는 언제 입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편에 서 있을 때입니다. 이스라엘은 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은 늘 이스라엘 편이다,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군대장관의 도움을 받으려면 이스라엘이 먼저 하나님의 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우리 편에서 도와주기를 갈구하는데, 이것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겁니다. 그러지 못했을 때 이스라엘이 승리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편에 서 있지 않을 때 이스라엘은 패배합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이 버림받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동일시하거나, 오늘날 교회와 하나님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답지 못한 교회는 하나님이 친히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 되기를 갈구하기 보다는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되기를 간절히 구하는 그런 신앙의 자세를 갖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여러분, 여호수아서는 내용을 보면 가나안 땅 정복이 1장부터 12장이고, 가나안 땅을 분배하는 이야기가 13장부터 22장이고, 여호수아의 고별설교가 23~24장입니다. 몇 가지 살펴봐야 될 내용을 본문을 통하여 보겠습니다. 먼저, 여호수아 12장 24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수아 12장 17절 위에 보시면 소제목에 이런 것이 나옵니다. ‘여호수아가 정복한 왕들’이라고 나옵니다. 24절 마지막에 “하나는 디르사 왕이라 모두 서른한 왕이었더라”라고 나옵니다. 여호수아 12장은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이스라엘 군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복한 왕의 수가 31명의 왕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 땅에는 하나의 왕국이 아니라 무수한 도시 국가들이 있었습니다. 고대 사회는 다 도시 국가입니다. 도시 국가는 작은 성 하나가 국가입니다. 그 성을 통치하는 왕이 있습니다. 나중에 한 사람이 거대한 땅을 통치하는 것은 후대의 일입니다. 처음에는 여리고라는 하나의 성이 하나의 국가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많은 도시 국가가 있었는데 이스라엘 군대가 31명의 왕들을 정복했다, 즉 31개의 도시 국가를 정복했다고 말합니다. 24절만 읽으면 이스라엘이 굉장히 많은 곳을 정복했다는 생각을 갖기 쉬운데 여호수아서는 우리에게 어떤 정보를 알려주지 않냐면 그 당시 가나안에 몇 개의 도시 국가가 있었는지를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그 당시 가나안 땅에 한 50개 정도의 도시국가가 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군대가 정복한 것이 31개라고 한다면 62% 정도의 도시국가를 정복한 겁니다. 그런데 만약 그 당시 가나안 땅에 도시 국가가 300개 정도 있었다, 그런데 정복한 것이 31개라고 한다면 약 10% 정도만 정복한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 31명의 왕을 정복했다고 하면 굉장히 많이 정복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당시 가나안 땅에 몇 개의 도시국가가 있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어느 정도 정복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서를 자세히 보시면 이스라엘이 많은 땅을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가 뭡니까? 원래 살던 원주민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동거하게 됩니다. 함께 살면서 가나안 사람들의 종교 문화에 이스라엘이 영향을 받고 동화되어 버립니다. 그게 여호수아와 사사기의 주된 내용입니다. 실제 이스라엘이 정복하지 못한 가나안 땅이 훨씬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유다지파나 에브라임 지파 정도가 용기를 내서 가나안 원주민들과 싸워서 그 땅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지파들은 가나안 원주민들과 싸우는 것에 대해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18장 이하를 보시면 너무 이스라엘의 지파가 땅을 정복하는 일에 힘을 내지 못하니까 여호수아가 특단의 조치를 취합니다. 아직까지 자기 땅을 소유하지 못한 지파별로 대표 3명씩 뽑으라고 합니다. 이때 7지파가 땅을 차지하지 못했는데, 그렇게 3명씩 21명으로 하여금 너희 지파가 갖기를 원하는 땅을 지도상으로 그려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실로라는 성소에 모여서 지파들끼리 땅을 분배하는데, 이때의 분배는 지도상으로 땅을 분배한 것입니다. 여호수아서를 이해하실 때 이것을 잘 보셔야 합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여러 지파에게 땅이 분배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냐면 이 땅을 이스라엘이 차지했는데 차지한 그 땅을 스불론 지파에게 주었구나, 르우벤 지파에게 주었구나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용기 내어 싸워서 그 땅을 차지한 지파는 몇 지파가 되지 않습니다. 요단 동편 땅을 차지했던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 그리고 용기 내어 요단 서편 땅을 차지했던 유다, 에브라임 지파 정도가 가나안 원주민들과 싸워서 그 땅을 차지한 것이고 대부분의 지파들은 지도상으로 그 땅을 분배받은 겁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여기는 단 지파의 땅이라고 했을 때 그곳이 이스라엘이 차지한 그 땅을 단지파에게 분배해준 것이 아니라 단지파는 지도상으로 분배받은 겁니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도상으로 분배받은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용기내어 그 땅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지파들이 지도상으로 분배받은 그 땅을 온전히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과 동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 동거의 결과 금방 가나안 종교 문화에 동화된 이야기가 여호수아와 사사기입니다.
19장 47절을 보시면 “그런데 단 자손의 경계는 더욱 확장되었으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 자손이 올라가서 레셈과 싸워 그것을 점령하여 칼날로 치고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 거주하였음이라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레셈을 단이라 하였다” 라고 합니다. 단 지파도 지도상으로 땅을 분배받은 지파입니다. 단 지파가 분배받은 땅이 가나안 중부 지방입니다. 분배받은 후에 가서 보니까 중부 지방의 원주민들이 만만한 사람들이 아닌 겁니다. 더 위험한 것은 뭐냐면 단 지파가 분배받은 그 땅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족속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블레셋 족속입니다. 세계 역사를 보시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블레셋도 비슷한 시기에 들어옵니다. 블레셋은 해양 민족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중해 해변가를 중심으로 거주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왔습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는데 블레셋은 이집트에 들렀다가 지중해 해변가를 중심으로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에돔, 모압, 압몬, 요단 동편 땅을 쭉 거쳐서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됩니다. 처음에는 블레셋과 이스라엘 모두 인구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각자 자기의 땅에서 거주했습니다. 나중에 사무엘 시대가 되면 블레셋과 이스라엘 모두 인구가 늘어납니다. 인구가 늘어나니까 그들이 거주할 땅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진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무엘 시대에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 지속적인 전쟁이 있던 겁니다. 참고로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비슷한 시기 가나안 땅에 들어왔는데 블레셋은 해양민족이고 이스라엘은 유목 민족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할례를 받지 않았고 이스라엘은 받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었고 이스라엘은 먹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고고학자들이 가나안 땅을 파다가 돼지 뼈가 나오면 블레셋 사람들의 거주지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너무 단순한 생각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인데도 몰래 먹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돼지의 뼈가 나오면 블레셋 사람의 거주지라고 너무 쉽게 규정을 합니다. 단 지파는 지도 상으로 가나안 중부지방을 분배 받았습니다. 그 땅을 차지하려면 그 땅의 원주민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싸워서 그 땅을 정복했다고 합시다. 바로 옆에는 블레셋이 있습니다. 그 당시 블레셋은 이스라엘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당시 청동기 문명이었고 블레셋은 이미 철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청동기가 어떻게 철기를 이깁니까?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단지파는 원래 지도상으로 가나안 땅 중부 지방을 분배받았는데 그 땅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과 싸울 용기가 나지 않았고, 이긴다 하더라도 블레셋 사람들과 경계를 맞닿고 사는 것이 너무나 두려워서 그 땅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올라 갑니다. 그렇게 올라가다가 일어난 사건이 사사기 17장과 18장에 나옵니다. 올라가다가 제일 북쪽 지방에 만만한 사람들과 싸워 그 땅을 차지하고 여기가 단 지파의 땅이라고 주장합니다. 실제는 지도상으로 분배받은 그 땅을 버리고 북쪽으로 올라가서 거주하게 된 것인데, 한글성경 여호수아서 19장 47절에는 “단 자손의 경계가 더욱 확장되었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더라도 “그 땅을 차지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은 확장이 아닙니다. 확장은 자신들이 차지할 땅을 차지하고 추가로 새로운 땅을 차지할 때 확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 지파는 확장이 아니라 지도상으로 분배받은 땅을 저버리고 북쪽으로 올라가서 만만한 상대를 무찌르고 단 지파의 땅이라고 선언한 겁니다. 확장이 아니라 이동입니다. 이스라엘 영토를 이야기 할 때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제일 북단이 단입니다. 남단인 브엘세바는 1년에 강수가 200미리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물의 양이 1년에 200미리입니다. 생존의 극지점, 그곳이 바로 브엘세바입니다. 이스라엘 영토의 제일 남단이 브엘세바이고 제일 북단이 단입니다. 그런데 원래 단 지파는 거기에 살도록 부여받은 지파가 아닙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백성들을 몰아내는 일에 열심을 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장 47절의 말씀은 그래서 확장이 아니라 이동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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