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부터 에스더를 역사서라 하는데 이것은 두 개로 나뉩니다. 하나가 신명기 역사서이고 또 하나가 역대기 역사서입니다. 신명기 역사서는 4권인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입니다. 역대기 역사서는 3권인데, 역대기 에스라, 느헤미야입니다. 똑같은 이스라엘 역사를 기술하는데 왜 두 개가 필요한가, 그 역사를 기술하는 시점과 목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하나 역대기상하를 보시면 똑같은 이스라엘 왕조사 아닙니까, 그런데 왜 두 개의 본문이 필요했죠? 그 역사를 기술하는 목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열왕기는 과거 반성이 목적입니다. 역대기는 미래 건설이 목적입니다.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는 바벨론 포로기에 기술되기 시작했고 이때 최종 완성이 됩니다. 바벨론 포로기는 이스라엘에게 심판의 때입니다. 이때 이스라엘이 왜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가,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 기술한 역사가 신명기 역사입니다. 신명기 역사서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의 매를 맞을 수 밖에 없었던 죄와 얼룩과 잘못이 있는 그대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인 것 다 나옵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우상숭배 한 것은 열왕기에 다 나옵니다. 그런데 역대기는 이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이스라엘이 끝날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통하여 다시 한 번 이스라엘 땅에 거주할 기회를 주신 겁니다. 그리고 뜻 있는 많은 사람들이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 사람들이 돌아올 때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조상들은 실패했지만 이를 재현하지 말고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이스라엘을 건설하자는 마음으로 돌아왔겠죠. 그러면서 이제 우리가 어떤 이스라엘을 건설할 것인가, 그런 이스라엘을 건설하기 위해 어떤 사람이 지도자가 되야 할 것인가, 이스라엘 백성의 자세와 태도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이런 목적 가운데 과거의 이스라엘이 본받을 만한 긍정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재기술 한 것이 역대기 역사서입니다. 열왕기 역사서는 바벨론 포로기에 쓰여 졌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의 매를 맞았는가 과거를 반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열왕기를 썼습니다. 역대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기회를 허락하신 겁니다. 가나안 땅에 이를 악물고 돌아온 사람들이 이제 어떤 이스라엘을 건설할 것인가 라고 하면서 과거의 역사에서 자신들이 본받을 만한 정면교사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재기술한 겁니다. 역대기는 미래 건설이 목적이고 열왕기는 과거 반성이 목적입니다. 이를 비교하여 읽어보면 역대기에는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솔로몬이 이방의 신전들을 건축한 이야기 나오지 않습니다. 역대기는 그 목적이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기술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본받을 만한 정면교사가 무엇인지 제시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역사는 일어난 모든 일을 쓰는 것이 아니라 역사는 그것을 쓰는 목적이 있습니다. 신명기 역사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과거 반성이 목적이고 역대기 역사서는 건강한 이스라엘을 건설하기 위해서 본받을 만한 긍정적인 모델을 제시함으로 아름다운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만을 섬기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다른 신을 겸하여 섬기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역사 내내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그 잘못을 예수님이 한 문장으로 정리한 것이 마태복음 6장 24절입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맘몬이라고 하는 것으로 대표되는 구약의 신이 바알입니다. 너희가 바알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해주신, 이스라엘의 실패를 재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재밌는 것은 우상숭배를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고 전혀 인지하지 못합니다. 우상숭배 하면서 자신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뭐가 우상입니까?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 놓는 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과 그 어떤 것도 존재론적으로 동일시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들은 상대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 순종해야 될 대상인 것이지,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대다수의 신앙인들은 하나님만을 잘 섬기겠다는 마음으로 우상숭배를 많이 합니다.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 자리에 올려 놓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했던 성전신학, 왕조신학, 시온신학 입니다. 성전신학은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겁니다. 그랬을 때 성전이 무너지면 곧 무엇이 무너지는 겁니까? 하나님이 무너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이 무너질 수 있습니까? 없죠. 따라서 성전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이게 성전신학 입니다. 성전과 하나님을 동일시 한 겁니다. 시온신학은 시온은 예루살렘의 별칭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무너진다는 것은 하나님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무너질 수 없죠.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예루살렘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 시온 신학입니다. 왕조신학, 왕정신학이라는 것은 다윗 왕조는 하나님의 지상 대리자라는 겁니다. 다윗 왕조를 통해 하나님은 세계를 통치한다는 겁니다. 다윗 왕조가 무너지면 하나님의 세계 통치도 끝나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통치틑 끝날 수 없죠. 따라서 북이스라엘은 멸망한다고 하더라도 다윗 왕조가 다스리는 남유다는 절대 멸망하지 않는다, 이게 바로 왕정 신학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바벨론이라고 하는 막대기를 사용하셔서 다윗 왕조도 무너뜨리고 예루살렘도 무너뜨리시고 성전도 무너뜨리셨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성전이 무너지는 것이 곧 하나님의 무너짐,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는 것이 하나님이 무너짐, 다윗 왕조가 몰락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세계통치 종결 이렇게 이해했거든요. 하나님이 천만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도리어 성전은 무너졌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이어집니다. 예루살렘은 무너졌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지속됩니다. 다윗 왕조는 무너졌지만 하나님의 세계 통치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성전을 무너뜨림으로 성전과 하나님을 동일시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우상숭배를 무너뜨려 주신 겁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행하는 우상 가운데 하나가 기독교 우상입니다. 기독교와 하나님이 동일시 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역사 위에 존재했던 기독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하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가리는 매개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현실 기독교가 하나님과 동일시 될 수 있습니까? 교회와 하나님이 동일시 될 수 있습니까? 교회가 무너지면 하나님이 무너지는 겁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교회도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대상입니다. 또 하나의 우상이 목사 우상입니다. 교회 목사가 무너지면 하나님이 무너지는 건가요? 그래서 목사님이 여러 죄를 범해도 그 목사를 지켜야 하는 건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목사가 무너진다고 해서 하나님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좋은 마음으로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과 예루살렘과 다윗 왕조와 하나님을 동일시 했고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라는 종교와 하나님을, 속한 교회와 하나님을, 존경하는 목사를 하나님과 동일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 놓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우리가 믿고 섬겨야 할 분은 하나님 외에는 없고 우리가 만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종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갖고 있던 잘못된 성전 신학과 왕정 신학과 시온 신학을 친히 무너뜨리십니다. 그래서 성전과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은 무너졌지만 하나님의 세계 통치는 변함이 없고 하나님은 여전히 만군의 주로 세계 역사를 통치하고 계심을 이스라엘에게 보여주고 계신다는 겁니다. 오늘 이야기 한 것을 정리하겠습니다. 여호수아부터 에스더까지를 성경의 역사서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이를 전기 예언서라고 합니다. 예언자의 관점으로 기록된 이스라엘 역사가 역사서입니다.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썼느냐 어떤 관점이냐가 중요합니다. 성경의 역사서는 예언자의 관점으로 기술되었습니다. 예언자는 왕들을 평가할 때도 일반 사가들과 달랐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에 얼마나 신실했는지, 하나님과 얼마나 신실하게 동행했는지, 미쉬파트와 체다카를 구현했는지 이런 것들을 중심으로 예언자들은 왕들에 대한 평가를 했습니다. 역사서는 크게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가 신명기 역사서 이고 하나는 역대기 역사서입니다. 신명기 역사서는 바벨론 포로기에 기술되었습니다. 바벨론 포로기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심판의 매를 맞을 때입니다. 신명기 역사서에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의 매를 맞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 가서 이렇게 끝나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다시 한번 가나안 땅에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때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어떤 이스라엘을 건설할 것인가, 미래 이스라엘 건설의 맥락에서 과거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자기들이 본 받을 만한 긍정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재기술 합니다. 이게 역대기 역사서입니다. 신명기 역사서가 과거 반성에 목적이 있다면 역대기 역사서는 미래 건설에 목적이 있습니다. 우상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왜 이렇게 오랜 세월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이방의 신전들이 그대로 존속되었는가, 왜 이스라엘은 과감히 이방의 신전들을 무너뜨리지 못했는가, 하면서 제가 고대 사회의 신전의 네가지 기능, 예배장소, 세무서, 은행, 보물창고의 역할 그 다음에 특정한 민족이 섬기는 신의 신전이 다른 이방지역에 세워지면 대사관의 역할을 한다고 했죠. 그래서 왜 이스라엘 왕들이 예루살렘에 세워진 이방의 신전을 박살내지 못했냐면 그것을 건드리는 순간 이방과의 외교관계 단절, 경제교류 협력관계 중단, 그리고 경제적 힘듦, 백성의 아우성 이것을 왕들이 견디기 어려웠던 겁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 우상숭배를 한 왕일수록 오랜 세월 통치를 했고 하나님께만 돌아가고자 했던 히스기야와 요시아는 그 다음 시대에 백성들이 다시 우상숭배로 회기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했던 우상이 이방의 신을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는 우상도 있지만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았던 우상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성전신학, 왕정신학, 시온신학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우상들을 과감히 무너뜨리면서 이것들이 무너진다고 하여서 하나님의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서 세계 역사를 주관하고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리에 하나님 아닌 어떤 것도 올려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셨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부터 여호수아부터 에스더 본문을 공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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