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모세 5경을 4주 동안 하고 이번에는 역사서를 4주 동안 합니다. 그전에 모세 5경 4주 강의 들으신 분들은 연속성을 가지고 들으실 수 있을 것 같고, 보지 못하신 분들은 먼저 보시고 나서 참여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4주 동안 여호수아부터 에스더까지 역사서의 중요한 내용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역사서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히브리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을 보면 성경이 3개의 장르로 되어 있습니다.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세 가지 장르의 말씀을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지만 가장 거룩한 말씀으로 토라, 그 다음은 예언서, 그 다음은 성문서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성경을 배치할 때 가장 거룩한 말씀을 앞 부분에 배치했습니다. 토라가 제일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예언서, 제일 마지막에 성문서가 나옵니다. 히브리 성경을 보시면 제일 처음 본문이 창세기이고 제일 마지막 본문이 역대기입니다. 제가 질문 하나 드려볼게요. 유대인들은 역대기를 어떤 장르로 이해했을까요? 맞습니다. 성문서로 이해했습니다. 토라, 예언서, 성문서의 순서로 성경을 배치했고, 역대기가 히브리 성경의 제일 마지막인 것을 보면 유대인들은 역대기를 성문서로 이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설명을 들으시면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성경 구분법에는 역사서라는 장르가 없네요? 맞습니다. 없습니다. 율법서, 예언서가 있고 성문서가 있는데 유대인들의 성경 구분법에는 역사서가 없습니다. 저희가 4주 동안 역사서를 공부하는데, 그렇다면 역사서 라는 장르는 언제부터 생긴 장르일까요? 70인경 때부터 생긴 장르가 역사서입니다. 70인경은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을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한 최초의 번역 성경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겁니다. 70인경으로 번역하면서 두 가지 중요한 수정이 가해졌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의 성경에는 책의 제목이 없었습니다. 옛날에는 양피지나 두루마리에 글을 쓰고 나서 그것을 둘둘 말아 다녔는데 책의 제목이 없으면 찾을 때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두루마리를 폈을 때 가장 앞에 나오는 단어나 앞 부분에 있는 단어 중에 중요한 단어를 책의 제목으로 붙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창세기라는 두루마리를 펴게 되면 제일 먼저 나오는 단어가 브레시트인데 그러면 브레시트라고 불렀습니다. 레위기라는 두루마리를 펴게 되면 제일 처음 나오는 단어가 바이크라인데 그래서 바이크라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식으로 유대인들은 책의 제목을 붙였는데, 지금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처럼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라는 책의 제목이 만들어진 것은 70인경부터 입니다. 두 번째 수정사항은 유대인들은 더 중요한 본문들을 앞에 배치하면서 토라, 예언서, 성문서의 순서로 성경을 배치했는데 70인경으로 번역하면서 태초의 창조부터 주전 400년경의 말라기까지 시간적 순서에 따라 성경을 재배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글 번역성경은 히브리어 성경을 따랐습니까? 70인경의 순서를 따랐습니까? 70인경의 순서를 따른거죠. 한글 성경에는 특이한 점이 있는데, 안에 있는 본문을 번역할 때는 히브리어 성경을 번역하였고, 책을 배치할 때는 70인경의 순서에 따라 배치했습니다. 70인경 번역 성경은 장르를 네 개로 나누었습니다.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를 토라, 여호수아부터 에스더까지를 역사서, 욥기부터 아가까지를 시가서,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를 예언서라고 구분합니다. 원래 3개의 장르였던 히브리어 성경이 70인경으로 번역되면서 네 개의 장르로 확장된 겁니다. 저희가 공부할 역사서는 여호수아부터 에스더까지입니다.
역사는 누가 썼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해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역사 전쟁의 현장이라고 할 만큼 이념적 갈등이 심합니다. 그래서 어떤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합의된 의견이 없고, 진보와 보수의 입장에 따라 첨예한 해석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친인척들이 추석이나 설날에 만났을 때 불문율 가운데 하나가 무엇입니까? 절대 정치 얘기하지 않는 겁니다. 정치 얘기만 나오면 싸웁니다. 자신들의 주장을 고집스럽게 펼치는 경우가 많고 잔치를 누리기 위해 모였는데 정치 얘기 하다 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이승만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도 사람들마다 자기의 입장이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이 충돌하고 있기에 사람들은 대한민국이 역사 전쟁의 현장이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이런 일들이 지속되다 보니까 사람들에게는 이런 열망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수용하고 받아들일 만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역사는 없을까?. 안타깝게도 그런 역사는 없습니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사가의 관점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가마다 그 역사를 기술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라고 할 때 누가 쓴역사인가가 중요합니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썼느냐가 중요합니다. 예를 들자면 옛날에 저희가 세계사 공부할 때 1492년 그러면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한 해라고 배웠습니다. 그렇게 규정했는데 이런 식의 관점은 누구의 관점이죠?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하기 전에 그 땅은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였나요? 아닙니다. 오랜 세월 그 땅에 정착하여 살던 원주민들이 있었습니다. 콜럼버스의 입장, 아니면 콜럼버스를 파견한 스페인의 입장에서는 1492년은 미대륙을 발견한 해이지만 오랜 세월 거기에 살던 원주민의 입장에서는 1492년은 침략이 시작된 해입니다. 똑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누구의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이렇게 해석이 달라집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역사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서는 일어난 모든 사건을 숨김없이 기록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가의 관점에 따라 역사를 기록하는 목적에 따라서 어떤 자료는 선택되고 어떤 자료는 선택되지 않습니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발생했던 모든 사건들을 숨김없이 다 기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역사를 기록하는 사가가 어떤 관점과 목적 가운데 그 역사를 기술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성경의 역사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부터 에스더까지를 역사서라고 하는데 이 역사는 누구의 관점으로 기록된 것인가?. 성경의 역사서는 예언자의 관점으로 기술되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서라고 부르는 이 본문들을 유대인들은 예언서라고 불렀습니다. 참고로 유대인들은 성경을 세 개의 장르로 나눈다고 했죠. 토라는 다섯 권입니다. 창세기부터 신명기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언서를 8권으로 봅니다. 그 8권의 예언서를 두 개로 나눕니다. 전기, 후기 예언서가 있습니다. 전기가 4권이고 후기가 4권입니다. 전기 예언서에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가 들어갑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기술인데 누구의 관점으로 기술된 것입니까? 예언자의 관점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전기 예언서라고 부르고 우리는 역사서라고 부릅니다. 후기 예언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그 다음에 호세아부터 말라기를 유대인들은 한 권으로 이해했습니다. 후기 예언서는 또 두 개로 나뉩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을 대예언서라고 하고 호세아부터 말라기까지를 소예언서로 구분합니다. 여기서 대와 소라고 하는 것은 질적인 차이가 아닌 분량의 차이입니다. 이사야 66장, 예레미야 52장으로 분량이 길죠. 그런데 호세아부터 말라기를 보면 제일 긴 본문이 14장입니다. 어떤 본문은 1장의 분량도 있습니다. 분량에 따라 분량이 긴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은 대예언서라고 하고 분량이 작은 호세아부터 말라기까지는 한 권으로 묶어서 소예언서라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언서를 8권으로 봅니다. 전기 4권, 후기 4권입니다. 전기 예언서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역사서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기록이지만 예언자의 관점으로 기술된 이스라엘 역사 구나 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두 번째로 넘어가면 사무엘과 열왕기를 보면 이스라엘 공동체에 등장했던 42명의 왕이 나옵니다. 우리도 옛날에 고려시대, 조선시대 왕 그러면 이 사람은 좋은 왕, 나쁜 왕으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보통 역사가들이 어떤 왕에 대해서 이 왕이 좋은 왕이냐, 나쁜 왕이냐 평가를 할 때 평가의 기준이 있겠죠? 보통 역사가들이 세 가지 기준으로 평가합니다. 정치, 경제, 군사적 기준입니다. 그 왕이 통치할 때 얼마나 정치가 안정적이었는지, 경제가 부강해졌는지, 전쟁에서 많이 승리했고 영토가 확장되었는지 이것이 보통 왕을 평가하는 기준입니다. 어떤 왕이 좋은 왕입니까? 그 왕이 통치할 때 정치가 안정적이고, 경제가 부강해지고, 이방민족과 전쟁을 하면 승승장구하며 많은 영토를 확장한 왕이 좋은 왕이 되는 겁니다. 반대의 왕은 나쁜 왕이 됩니다. 예를 들자면 광개토대왕은 좋은 왕입니까 나쁜 왕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개토대왕 하면 좋은 이미지가 있습니다. 왜 그렇죠? 영토를 많이 확장했기 때문입니다. 그 광개토대왕이 당시 백성을 얼마나 억압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잘 모릅니다. 그런데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확장했다는 하나만으로 광개토대왕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이 일반 역사가들이 왕을 평가하는 기준입니다. 이런 판단 기준을 가지고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한 42명의 왕을 평가하면 6명 정도가 A+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주전 10세기에 2명, 주전 9세기에 2명, 주전 8세기에 2명이 있습니다. 주전 10세기에 다윗과 솔로몬, 주전 9세기에 오므리와 아합, 주전 8세기에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와 남유다의 웃시야라는 왕입니다. 이 6명의 왕 때 이스라엘은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일반 역사가의 관점으로 기록했다면 이 6명의 왕을 최고의 왕으로 극찬했을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와 있는 역사서는 예언자의 관점으로 기술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언자들이 왕에 대해서 좋은 왕과 나쁜 왕을 평가할 때 예언자들은 어떤 잣대로 평가했을까요? 일반 역사가들이 정치, 경제, 군사라는 잣대로 판단했다면 예언자들은 이 세 가지의 잣대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언자들이 왕을 평가할 때 중요한 것은 이 왕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얼마나 신실했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했다는 것은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는 신앙을 견지했는가, 아니면 하나님도 믿고 다른 신도 섬기는 우상숭배에 몰두했는가를 가장 중요하게 본 것입니다. 그 왕이 통치할 때 하나님만을 믿는 일편단심의 신앙을 드러냈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다음에 하나님과 얼마나 신실하게 동행했는가 이것도 중요하고 그 왕이 통치할 때 얼마나 연약한 백성들의 삶을 보듬어 주었는가, 한 마디로 체다카와 미쉬파트를 구현했는가가 중요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아까 일반 역사가의 관점으로 A+를 받을 왕이 6명이 있다고 했죠? 예언자들이 볼 때 이 왕들 가운데 그나마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왕은 다윗밖에 없습니다. 놀랍게도 솔로몬, 오므리, 아합, 여로보암 2세, 웃시야는 예언자의 관점으로는 낙제입니다. 저희가 나중에 공부하겠지만 한국 교인들은 솔로몬을 좋아합니다. 열왕기상을 자세히 보시면 솔로몬 때문에 이스라엘은 분열됩니다. 솔로몬 때 이방의 우상들이 합법적으로 도입됩니다. 이스라엘 42명의 왕 가운데 최악의 왕이 솔로몬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솔로몬에 대해서 우호적인 이미지가 많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아서입니다. 아니면 열왕기상 3장까지만 읽어서 그런 겁니다. 열왕기상 4장부터 11장을 읽으면 솔로몬의 폭정이 나오고 솔로몬의 몰락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반 역사가의 관점으로 A+를 받을 수 있는 왕이 6명이 있다고 했는데, 예언자들이 바라볼 때 그나마 좋은 평가를 받을 왕은 다윗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낙제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100년 주기로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다윗, 솔로몬은 주전 10세기, 오므리와 아합은 주전 9세기, 여로보암 2세와 웃시야는 주전 8세기입니다. 이스라엘은 100년 주기로 어깨에 힘 팍 주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잘 나갈때마다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이방의 우상들을 많이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로와 긴밀한 동맹을 맺었을 때 잘 나갔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바늘과 실처럼 한 짝인데 두로와 시돈이 뭐의 본산이죠? 바알 숭배의 본산입니다. 이스라엘이 제일 잘 나갈 때 두로와 긴밀한 동맹을 맺었습니다. 두로와 시돈이 바알 숭배의 본산인데 그 시기에 이스라엘 공동체에 바알 숭배 문화가 대규모로 유입됩니다. 이럴 때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잘 나갔습니다. 부유해진 겁니다. 그런데 예언자들은 왕을 평가할 때 정치, 경제, 군사적인 업적을 중요하지 보지 않았습니다. 그 왕이 얼마나 하나님과 신실하게 동행했는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신실하게 준수했는가, 백성들을 통치할 때 사법적인 정의인 미쉬파트와 서로를 형제로 대하는 체다카를 잘 구현했는가 이것을 중심으로 예언자들은 왕을 평가했습니다. 그래서 일반 역사가들이 볼 때 최고의 왕이라 일컬어지는 6명 가운데 예언자들은 다윗 빼놓고 5명에게 낙제점을 줍니다. 그렇다면 예언자는 어떤 왕에게 A+를 줍니까? 히스기야와 요시아입니다. 이들은 일반 역사가의 관점으로 보면은 별 볼 일 없는 왕입니다. 내세울 만한 업적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요시아는 전쟁 중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예언자들은 이들을 최고의 왕으로 추앙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히스기야와 요시아가 통치할 때 이스라엘에 만연한 우상숭배 문화를 척결했습니다. 우상의 제단을 허물었습니다. 하나님과 이방의 신들을 겸하여 섬기던 우상숭배에서 하나님만을 섬기는 유일신앙으로 다시 돌아온 겁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히스기야와 요시아를 최고의 왕으로 인정한 겁니다.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원래 이스라엘 공동체의 출발은 출애굽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 땅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종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울부짖은 겁니다. 그 신음을 기도로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이 출애굽 사건 이후에 시내산에서 출애굽 했던 사람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합니다. 이제는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겠습니다 라고 다짐하고 결단한 겁니다. 그들이 하나님만 믿고 섬기겠다고 결단하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것이다 라고 알려주신 것이 십계명과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살면서 하나님만을 믿는 신앙을 드러내 보이지 못했습니다. 구약을 읽어 보시면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하나님과 다른 신을 겸하여 섬겼습니다. 이를 우상숭배라 합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 종교 공동체 아닙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왕들도 하나님만 믿지 못하고 이방의 우상들을 겸하여 섬겼고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만 믿지 못하고 이방의 우상들을 겸하여 섬겼습니다. 히스기야와 요시아 정도만 이스라엘에 만연했던 이방의 우상들을 타파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처럼 다종교 사회도 아니고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만 믿겠다고 다짐하고 결단한 신앙 공동체인데 어떻게 이스라엘 안에 이렇게 많은 이방의 우상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이방의 우상들이 존재함에도 히스기야나 요시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왕이 왜 이방의 우상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는지, 쉽게 얘기하자면 우상을 타파하고 척결하는 것이 어려웠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게 역사서를 이해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역사는 누가 썼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해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역사 전쟁의 현장이라고 할 만큼 이념적 갈등이 심합니다. 그래서 어떤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합의된 의견이 없고, 진보와 보수의 입장에 따라 첨예한 해석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친인척들이 추석이나 설날에 만났을 때 불문율 가운데 하나가 무엇입니까? 절대 정치 얘기하지 않는 겁니다. 정치 얘기만 나오면 싸웁니다. 자신들의 주장을 고집스럽게 펼치는 경우가 많고 잔치를 누리기 위해 모였는데 정치 얘기 하다 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이승만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도 사람들마다 자기의 입장이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이 충돌하고 있기에 사람들은 대한민국이 역사 전쟁의 현장이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이런 일들이 지속되다 보니까 사람들에게는 이런 열망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수용하고 받아들일 만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역사는 없을까?. 안타깝게도 그런 역사는 없습니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사가의 관점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가마다 그 역사를 기술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라고 할 때 누가 쓴역사인가가 중요합니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썼느냐가 중요합니다. 예를 들자면 옛날에 저희가 세계사 공부할 때 1492년 그러면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한 해라고 배웠습니다. 그렇게 규정했는데 이런 식의 관점은 누구의 관점이죠?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하기 전에 그 땅은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였나요? 아닙니다. 오랜 세월 그 땅에 정착하여 살던 원주민들이 있었습니다. 콜럼버스의 입장, 아니면 콜럼버스를 파견한 스페인의 입장에서는 1492년은 미대륙을 발견한 해이지만 오랜 세월 거기에 살던 원주민의 입장에서는 1492년은 침략이 시작된 해입니다. 똑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누구의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이렇게 해석이 달라집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역사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서는 일어난 모든 사건을 숨김없이 기록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가의 관점에 따라 역사를 기록하는 목적에 따라서 어떤 자료는 선택되고 어떤 자료는 선택되지 않습니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발생했던 모든 사건들을 숨김없이 다 기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역사를 기록하는 사가가 어떤 관점과 목적 가운데 그 역사를 기술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성경의 역사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부터 에스더까지를 역사서라고 하는데 이 역사는 누구의 관점으로 기록된 것인가?. 성경의 역사서는 예언자의 관점으로 기술되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서라고 부르는 이 본문들을 유대인들은 예언서라고 불렀습니다. 참고로 유대인들은 성경을 세 개의 장르로 나눈다고 했죠. 토라는 다섯 권입니다. 창세기부터 신명기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언서를 8권으로 봅니다. 그 8권의 예언서를 두 개로 나눕니다. 전기, 후기 예언서가 있습니다. 전기가 4권이고 후기가 4권입니다. 전기 예언서에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가 들어갑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기술인데 누구의 관점으로 기술된 것입니까? 예언자의 관점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전기 예언서라고 부르고 우리는 역사서라고 부릅니다. 후기 예언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그 다음에 호세아부터 말라기를 유대인들은 한 권으로 이해했습니다. 후기 예언서는 또 두 개로 나뉩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을 대예언서라고 하고 호세아부터 말라기까지를 소예언서로 구분합니다. 여기서 대와 소라고 하는 것은 질적인 차이가 아닌 분량의 차이입니다. 이사야 66장, 예레미야 52장으로 분량이 길죠. 그런데 호세아부터 말라기를 보면 제일 긴 본문이 14장입니다. 어떤 본문은 1장의 분량도 있습니다. 분량에 따라 분량이 긴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은 대예언서라고 하고 분량이 작은 호세아부터 말라기까지는 한 권으로 묶어서 소예언서라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언서를 8권으로 봅니다. 전기 4권, 후기 4권입니다. 전기 예언서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역사서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기록이지만 예언자의 관점으로 기술된 이스라엘 역사 구나 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두 번째로 넘어가면 사무엘과 열왕기를 보면 이스라엘 공동체에 등장했던 42명의 왕이 나옵니다. 우리도 옛날에 고려시대, 조선시대 왕 그러면 이 사람은 좋은 왕, 나쁜 왕으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보통 역사가들이 어떤 왕에 대해서 이 왕이 좋은 왕이냐, 나쁜 왕이냐 평가를 할 때 평가의 기준이 있겠죠? 보통 역사가들이 세 가지 기준으로 평가합니다. 정치, 경제, 군사적 기준입니다. 그 왕이 통치할 때 얼마나 정치가 안정적이었는지, 경제가 부강해졌는지, 전쟁에서 많이 승리했고 영토가 확장되었는지 이것이 보통 왕을 평가하는 기준입니다. 어떤 왕이 좋은 왕입니까? 그 왕이 통치할 때 정치가 안정적이고, 경제가 부강해지고, 이방민족과 전쟁을 하면 승승장구하며 많은 영토를 확장한 왕이 좋은 왕이 되는 겁니다. 반대의 왕은 나쁜 왕이 됩니다. 예를 들자면 광개토대왕은 좋은 왕입니까 나쁜 왕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개토대왕 하면 좋은 이미지가 있습니다. 왜 그렇죠? 영토를 많이 확장했기 때문입니다. 그 광개토대왕이 당시 백성을 얼마나 억압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잘 모릅니다. 그런데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확장했다는 하나만으로 광개토대왕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이 일반 역사가들이 왕을 평가하는 기준입니다. 이런 판단 기준을 가지고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한 42명의 왕을 평가하면 6명 정도가 A+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주전 10세기에 2명, 주전 9세기에 2명, 주전 8세기에 2명이 있습니다. 주전 10세기에 다윗과 솔로몬, 주전 9세기에 오므리와 아합, 주전 8세기에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와 남유다의 웃시야라는 왕입니다. 이 6명의 왕 때 이스라엘은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일반 역사가의 관점으로 기록했다면 이 6명의 왕을 최고의 왕으로 극찬했을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와 있는 역사서는 예언자의 관점으로 기술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언자들이 왕에 대해서 좋은 왕과 나쁜 왕을 평가할 때 예언자들은 어떤 잣대로 평가했을까요? 일반 역사가들이 정치, 경제, 군사라는 잣대로 판단했다면 예언자들은 이 세 가지의 잣대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언자들이 왕을 평가할 때 중요한 것은 이 왕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얼마나 신실했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했다는 것은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는 신앙을 견지했는가, 아니면 하나님도 믿고 다른 신도 섬기는 우상숭배에 몰두했는가를 가장 중요하게 본 것입니다. 그 왕이 통치할 때 하나님만을 믿는 일편단심의 신앙을 드러냈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다음에 하나님과 얼마나 신실하게 동행했는가 이것도 중요하고 그 왕이 통치할 때 얼마나 연약한 백성들의 삶을 보듬어 주었는가, 한 마디로 체다카와 미쉬파트를 구현했는가가 중요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아까 일반 역사가의 관점으로 A+를 받을 왕이 6명이 있다고 했죠? 예언자들이 볼 때 이 왕들 가운데 그나마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왕은 다윗밖에 없습니다. 놀랍게도 솔로몬, 오므리, 아합, 여로보암 2세, 웃시야는 예언자의 관점으로는 낙제입니다. 저희가 나중에 공부하겠지만 한국 교인들은 솔로몬을 좋아합니다. 열왕기상을 자세히 보시면 솔로몬 때문에 이스라엘은 분열됩니다. 솔로몬 때 이방의 우상들이 합법적으로 도입됩니다. 이스라엘 42명의 왕 가운데 최악의 왕이 솔로몬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솔로몬에 대해서 우호적인 이미지가 많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아서입니다. 아니면 열왕기상 3장까지만 읽어서 그런 겁니다. 열왕기상 4장부터 11장을 읽으면 솔로몬의 폭정이 나오고 솔로몬의 몰락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반 역사가의 관점으로 A+를 받을 수 있는 왕이 6명이 있다고 했는데, 예언자들이 바라볼 때 그나마 좋은 평가를 받을 왕은 다윗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낙제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100년 주기로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다윗, 솔로몬은 주전 10세기, 오므리와 아합은 주전 9세기, 여로보암 2세와 웃시야는 주전 8세기입니다. 이스라엘은 100년 주기로 어깨에 힘 팍 주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잘 나갈때마다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이방의 우상들을 많이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로와 긴밀한 동맹을 맺었을 때 잘 나갔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바늘과 실처럼 한 짝인데 두로와 시돈이 뭐의 본산이죠? 바알 숭배의 본산입니다. 이스라엘이 제일 잘 나갈 때 두로와 긴밀한 동맹을 맺었습니다. 두로와 시돈이 바알 숭배의 본산인데 그 시기에 이스라엘 공동체에 바알 숭배 문화가 대규모로 유입됩니다. 이럴 때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잘 나갔습니다. 부유해진 겁니다. 그런데 예언자들은 왕을 평가할 때 정치, 경제, 군사적인 업적을 중요하지 보지 않았습니다. 그 왕이 얼마나 하나님과 신실하게 동행했는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신실하게 준수했는가, 백성들을 통치할 때 사법적인 정의인 미쉬파트와 서로를 형제로 대하는 체다카를 잘 구현했는가 이것을 중심으로 예언자들은 왕을 평가했습니다. 그래서 일반 역사가들이 볼 때 최고의 왕이라 일컬어지는 6명 가운데 예언자들은 다윗 빼놓고 5명에게 낙제점을 줍니다. 그렇다면 예언자는 어떤 왕에게 A+를 줍니까? 히스기야와 요시아입니다. 이들은 일반 역사가의 관점으로 보면은 별 볼 일 없는 왕입니다. 내세울 만한 업적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요시아는 전쟁 중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예언자들은 이들을 최고의 왕으로 추앙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히스기야와 요시아가 통치할 때 이스라엘에 만연한 우상숭배 문화를 척결했습니다. 우상의 제단을 허물었습니다. 하나님과 이방의 신들을 겸하여 섬기던 우상숭배에서 하나님만을 섬기는 유일신앙으로 다시 돌아온 겁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히스기야와 요시아를 최고의 왕으로 인정한 겁니다.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원래 이스라엘 공동체의 출발은 출애굽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 땅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종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울부짖은 겁니다. 그 신음을 기도로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이 출애굽 사건 이후에 시내산에서 출애굽 했던 사람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합니다. 이제는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겠습니다 라고 다짐하고 결단한 겁니다. 그들이 하나님만 믿고 섬기겠다고 결단하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것이다 라고 알려주신 것이 십계명과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살면서 하나님만을 믿는 신앙을 드러내 보이지 못했습니다. 구약을 읽어 보시면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하나님과 다른 신을 겸하여 섬겼습니다. 이를 우상숭배라 합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 종교 공동체 아닙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왕들도 하나님만 믿지 못하고 이방의 우상들을 겸하여 섬겼고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만 믿지 못하고 이방의 우상들을 겸하여 섬겼습니다. 히스기야와 요시아 정도만 이스라엘에 만연했던 이방의 우상들을 타파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처럼 다종교 사회도 아니고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만 믿겠다고 다짐하고 결단한 신앙 공동체인데 어떻게 이스라엘 안에 이렇게 많은 이방의 우상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이방의 우상들이 존재함에도 히스기야나 요시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왕이 왜 이방의 우상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는지, 쉽게 얘기하자면 우상을 타파하고 척결하는 것이 어려웠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게 역사서를 이해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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