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설교자료 18,185편 ◑/설교및자료 16,731편

역사서 녹취 9

by 【고동엽】 2021. 12. 7.
열왕기 상하에 솔로몬이라는 왕이 등극합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과 비교가 되는 인물입니다. 다윗이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최정상까지 올라간 자수성가형 인물이라면 솔로몬은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몇 개씩 입에 물고 나온 아들입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누렸는데 이 중에 솔로몬이 획득하거나 성취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나중에 왕이 되고 엄청난 권력을 독점했을 때 솔로몬은 이것을 지켜내기 위해서 하나의 묘책을 실행합니다. 바로 이방의 공주들과 결혼하는 통혼입니다. 다윗이라는 사람이 평생 싸움을 했던 전사라면 솔로몬은 이름 자체가 ‘샬롬’ 즉 평화입니다. 그래서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무수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스라엘에 대적이 될 만한 이방 나라들과 사돈관계를 맺습니다. 그런데 이방의 공주가 이스라엘의 왕비가 되었을 때 그 공주만 오겠습니까? 그 공주를 보필하기 위해 이방의 신하들, 궁녀들도 옵니다. 그리고 자기 아내가 된 이방 공주를 위해서 솔로몬은 무엇을 합니까? 그들의 신앙생활을 보장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이방의 신전들을 건축합니다. 한국 교회가 설명하지 않는 것 가운데 하나가 여기 있습니다. 보통 솔로몬 하면 야훼 하나님을 위한 성전을 건축했다는 사실만을 많이 강조하는데 열왕기상 11장을 보시면 솔로몬은 사실 수십 개의 신전을 지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와 그모스와 밀곰과 다곤 등의 무수한 신들을 위한 신전을 지었는데 그 무수하게 많이 지은 신전 가운데 하나가 야훼 하나님을 위한 성전이었던 겁니다. 솔로몬이 이방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방의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공동체 안으로 유입되고, 이방의 공주가 아내가 되는 순간 이방의 종교도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방 사람들의 종교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이방의 신전을 건축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방의 우상들이 합법적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에 밀려온 때가 솔로몬 때입니다. 한국 교인들은 대다수 솔로몬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가 있습니다. 솔로몬 하면 지혜를 떠올립니다. 그래서 ‘솔로몬 논술학원’ 이런 것들이 많습니다. 부모님들도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 솔로몬처럼 지혜를 가진 아이가 되게 해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부모들이 생각하는 지혜는 문제를 잘 푸는, 많은 지식을 누적하고 축적하는 이런 겁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구했던 지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듣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음성과 백성들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게 바로 지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열왕기상 3장까지 솔로몬이 좋습니다. 4장부터 11장까지는 솔로몬의 몰락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은 초지일관하지 못한 왕입니다. 처음에는 좋았지만 마지막이 좋지 못했던 사사 가운데 기드온과 비슷합니다. 기드온도 처음에는 좋았지만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을 우상숭배에 빠뜨렸습니다. 신명기 17장에 보면 왕이 해서는 안 될 세 가지 규례가 나오는데 이것을 모두 어긴 왕이 솔로몬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려고 할 때 이 세 가지를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첫째, 왕이 많은 아내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솔로몬은 많은 아내와 첩들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은, 금을 왕들이 많이 축적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 말을 사기 위해서 애굽에 내려가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애굽의 왕 바로의 사위였을 뿐 아니라, 애굽으로부터 많은 말을 사서 북쪽에 있는 아람이나 헷에 팔았습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무기 중개업을 한 겁니다. 여기 말이라는 것은 군사 무기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신명기 17장에 보면 이스라엘 왕이 해서는 안 되는 세 가지, 즉 왕이라는 권력을 이용해서 많은 아내를 소유하면 안 되고, 왕이라는 권력을 이용해서 은, 금을 많이 축적하면 안 되고, 그리고 애굽과 손 맞잡고 애굽의 무기를 사들이면 안 된다고 하나님이 금하셨는데 이 세 가지 모두를 위반한 3관왕이 바로 솔로몬입니다. 처음에는 좋았지만 마지막이 좋지 못했던 솔로몬이 특히 잘못한 것이 뭐냐면 솔로몬이 유다지파입니다. 솔로몬은 40년 동안 정치를 하면서 계속해서 토목 공사에 집중합니다. 그래서 수십 개의 신전을 짓습니다. 그다음에 자기의 왕궁도 짓습니다. 그다음에 국고성, 병거성, 마병성을 짓습니다. 국고성, 병거성, 마병성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를 군사 요새화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무엇에 대한 위반입니까? 이스라엘이 이방과 전쟁할 때 이기고 지는 것이 어디에 달려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도움입니다. 여호와의 전쟁이 이스라엘 전쟁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이스라엘 모든 땅에 군사 요새를 세웁니다. 사람들의 병력을 의지하고 군사 요새를 의지하고 애굽으로부터 무기를 사오면서 무기를 의지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도우심보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에 더 많은 주목을 한 겁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40년 통치 내내 대규모 토목공사를 했습니다. 그 공사를 할 때 백성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했습니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솔로몬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 대다수는 농사에 종사했습니다. 농사라는 것은 타이밍 싸움입니다. 땅을 갈아야 할 때 갈고 씨를 뿌려야 할 때 뿌리고 수확을 해야 할 때 해야 합니다. 지금 수확을 해야 하는데 한 달 있다가 하게 되면 농사는 망칩니다. 농사는 타이밍 싸움인데 시시때때로 솔로몬이 백성을 차출해서 강제 노역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고고학자들이 가나안 땅을 발굴한 결과 이것을 밝혀냈습니다. 솔로몬이 통치한 때가 주전 10세기입니다. 그때만 해도 이스라엘 가옥이 비슷비슷합니다. 그런데 9세기, 8세기가 될수록 부유한 사람들의 가옥과 가난한 사람들의 가옥이 차이가 나기 시작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주전 10세기 까지만 해도 이스라엘 공동체의 경제 생활에 엄청난 빈부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빈부의 양극화가 발생한 겁니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솔로몬은 40년 내내 왕궁 짓고 신전 짓고, 국고성과 병거성과 마병성을 짓는 것에 사람들을 강제 동원 했습니다. 농사를 지어야 할 사람들이 시시때때로 차출되는 겁니다. 그래서 강제 노역을 하다 보면 씨를 뿌릴 때 뿌리지 못하고 수확을 할 때 수확을 못하는 겁니다. 그렇게 농사를 망치는 겁니다.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돈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 땅이나 집을 담보로 내걸고 돈을 빌리겠죠? 그것으로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할 것 아닙니까? 그리고 정해진 기한에 빌린 것을 갚아야 하는데 또 노동력으로 차출됩니다. 그리고 다음 농사도 망합니다. 그러면 담보로 걸었던 땅과 집을 빼앗깁니다.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자기의 몸을 담보로 잡고 또 돈을 빌립니다. 그런데 또 갚지 못하면 담보로 걸었던 몸이 구속되어 그 집에 종과 노예가 되는 겁니다. 여호수아서를 보시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지파별, 그리고 지파 안에서는 가문별, 그리고 가문 안에서는 가족별로 하나님이 땅을 균등하게 인구수에 맞추어서 허락해 주십니다. 그리고 지계표를 움직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부유한 삶은 아니더라도 각자가 자급자족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시대에 강제노역으로 인해 사람들이 농사를 망칩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땅과 집을 담보로 내걸고 돈을 빌렸는데 갚지 못합니다. 담보로 내걸었던 땅과 집, 자신의 몸도 인신 구속됩니다. 솔로몬 시대에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땅을 빼앗기는 자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솔로몬 시대에 빈부의 양극화의 씨앗이 뿌려지기 시작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나중에 주전 8세기 예언자였던 아모스, 호세아 시대를 보시면 부자들은 흥청망청 쾌락을 즐기는 것에 정신이 팔려있고 가난한 자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빈궁한 삶에 허덕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솔로몬 시대부터 발생한 겁니다. 강제 노역이 장기화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토대가 붕괴됩니다. 한국 교회는 솔로몬을 긍정적으로 이해하지만 솔로몬은 가나안 땅에 등장한 또 하나의 바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출애굽 했습니까? 바로에게 강제 노역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신음과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출애굽 시켜 주셨죠. 그런데 가나안 땅에 왔는데 솔로몬이라는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당한 노동의 대가도 주지 않고 강제 노역을 시킨 겁니다. 이것 때문에 솔로몬 말기가 되면 하닷, 르손, 여로보암 이런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을 때 국민 대표단들이 르호보암과 협상을 합니다. “당신이 아버지처럼 통치하면 우리는 당신의 통치를 받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3일의 기간을 줄테니까 아버지처럼 통치할 것인지, 이제는 백성을 사랑하는 통치를 할 것인지 가부를 알려달라”고 합니다. 그때 솔로몬 때의 신하였던 노인들은 르호보암에게 “이제 아버지처럼 통치하지 말고 백성을 사랑하는 통치를 하라”고 조언합니다. 그러나 르호보암과 어렸을 적부터 같이 자란 친구들은 “더 강력한 힘으로 눌러버리라”고 조언합니다. 안타깝게도 르호보암은 친구들의 조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국민 대표단과 만났을 때 르호보암은 자신이 아버지보다 더 강력하게 백성들을 통치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10지파 플러스 일부 베냐민 지파가 르호보암의 통치를 거부하고 북이스라엘을 세웁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죽은 후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으로 분열됩니다. 여기 남유다라는 이름에서 남쪽은 유다지파만 남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부 베냐민이 붙었습니다. 북쪽은 10지파와 일부 베냐민이 함께 했습니다. 규모로 보면 비교가 안 됩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뉘었지만 우리 민족의 분단과는 다릅니다. 남북한과 같이 거의 5대5 정도의 분단이 아니라 한 지파와 나머지 지파가 갈라서게 된 겁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공동체를 분열로 이끈 장본인이 솔로몬입니다. 그 외에도 열왕기상 4장에 보면 솔로몬은 유다 지파의 땅을 제외하고 11지파의 땅을 12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눕니다. 전통적인 지파의 경계를 허물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1년에 한 달씩 왕실이 소모하는 모든 것을 바치도록 만듭니다. 여기서 유다 지파만 제외시킵니다. 솔로몬은 유다지파에 대해서 일종의 세금 면제라는 혜택을 제공한 것입니다. 이후에 유다 지파는 르호보암에게 반기를 들지 않는 것을 보면 강제 노역에도 유다 지파는 면제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솔로몬은 이후에 국가 재정이 바닥을 치자 북이스라엘 땅을 국토 매각합니다. 여러분이 당시 북이스라엘 땅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어떤 마음이시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솔로몬에 대한 북 이스라엘 지파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그 결과 르호보암 때 더 이상 르호보암의 통치를 받지 않고 북이스라엘이 남유다를 떠나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전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전에는 성막이 있었습니다. 성전과 성막의 가장 큰 차이는 성막은 이동식 성소, 성전은 고정식 건물입니다. 성막은 그의 백성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성전이 만들어지고 나서부터 사람들을 지배했던 생각이 탄생합니다. 성전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집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성전을 가야 한다는 생각이 만들어집니다. 이 생각은 자연스럽게 성전이 아닌 곳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이처럼 성전이 건축된 이후부터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이원론적인 신앙이 강화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성전에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성전은 하나님의 활동 공간을 성전이라는 좁은 공간 안에 제한시켜 버립니다. 좋게 말하면 하나님을 그 안에 모시고 있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하나님을 그 안에 유폐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성전 안에 가두어질 수 있는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성전보다 훨씬 크신 분입니다. 그러나 성전 건축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 속에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성전에 가야 된다, 따라서 성전이 아닌 곳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라고 하는 이원론적인 신앙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횡횡하게 됩니다.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도망칠 때 하룻밤 루스라는 곳에서 노숙을 합니다. 자다가 눈을 떠보니까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사닥다리에서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야곱이 잠에서 깬 후에 뭐라고 고백합니까? “여기에 하나님이 계셨거늘 내가 알지 못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는 ‘벧엘’이라고 명명합니다. 이게 원래 이스라엘 공동체가 가진 신앙입니다. 특정한 어느 곳만 하나님의 집입니까? 어느 곳을 가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의 백성이 있는 모든 곳에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찾아 오십니다. 우리가 깨어 있다면 우리를 심방 오시는 하나님을 언제 어디에서건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게 원래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성전을 만들고 나서부터 그 고정식 건물인 성전 안에만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열왕기상 8장을 보시면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 이런 얘기를 합니다. 8장 27절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이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성전을 직접 지은 솔로몬조차 성전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다고 말 한 적이 없습니다. 솔로몬은 끊임없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솔로몬은 무엇을 간절히 구합니까? “하늘에 계신 하나님, 당신의 이름만이라도 이 성전에 있게 해달라”는 것이 솔로몬의 간구였지 솔로몬은 한 번도 성전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고 말 한 적이 없습니다. 27절에 보면 솔로몬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도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작은 건물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고백하는데 막상 성전이 지어지고 나니까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성전에 가야 한다는 신학적인 사고가 유행합니다. 이원론적인 신앙이 강조되기 시작합니다. 비극적인 것이 사도행전 7장을 보시면 스데반이 순교당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7장 47절부터입니다.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라고 하면서 이렇게 얘기 합니다. 이것 때문에 스데반이 성전에 대하여 참람한 말을 했다고 해서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솔로몬이 한 겁니다. 무엇입니까? “성전에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고 했습니다. 스데반은 솔로몬과 같은 이야기를 한 것인데 스데반은 죽임을 당합니다. 무슨 차이를 알 수 있습니까? 천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이원론적인 신앙이 강조된 것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 있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강조했는데 성전이 건축된 이후 이원론 신앙이 강화된 것입니다. 이원론적인 신앙의 내용은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고 성전에 가야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강화되었고 그래서 솔로몬과 같은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은 순교를 당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만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교회에 가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하나님을 만나고 신앙의 지체들도 만나지만 일상의 삶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활동 공간, 하나님과 만남의 공간을 제한시키지 말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시공간 속에서 하나님과 신실하게 동행하는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 열왕기 상하 본문도 보고 에스더까지 역사서 공부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 설교자료 18,185편 ◑ > 설교및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서 녹취 11  (0) 2021.12.07
역사서 녹취 10  (0) 2021.12.07
역사서 녹취 8  (0) 2021.12.07
역사서 녹취 7  (0) 2021.12.07
역사서 녹취 6  (0) 2021.12.0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