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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מַעֲשֵׂר-마아쉘】이해

 

 초강추  (מַעֲשֵׂר -마아쉘) 이해  
 

 초강추 】( מַעֲשֵׂר -마아쉘) 이해                                                     

 

인간은 어리석게도 가시적이고 시간적인것만을 붙잡기 때문에 불가시의적이고 영원한것을 놓치므로서 하나님의 역사는 침묵하게 되었고(시83:1),  세상적인 모든 온갖것들이 무가치의 법칙 아래로 들어오게 되었다(사2:22). 현 시대의 세상속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특히 종교면에서 한국교회의 율법적인 신앙관이 더욱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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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인간들이야말로 하나같이 하나님의 거룩성을 낚아채 자신들의 척도에 알맞게 치수를 맞추고(시42:2),  온갖 심혈을 기울여 보이지 않는 기념비를 세우며 자신들의 치적에 날개를 단다(고전1:29).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성은 모든 시간성의 원천이라는것을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인간은 자기 시간의 유한성을 언젠가는 죽음으로서 필히 경험한다(히9:27). 죽음은 유한한 인간 생명의 시간성의 끝이면서도 박탈이다.

 

죽음에서 인간이 만나는 것은 죽음자체가 아니라 죽음자체를 넘어 삶과 죽음의 主인이시요 시간의 주이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 할 것은  죽음에서 우리를 만나시는 하나님이시다(요5:45).

 

허지만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고 확신하고 무한히 기뻐해야 할 것은 유한한 인간이 생의 종말을 맞이한 이후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영원한 시간 속으로 받아주시고 새로운 시간성으로 덧입혀주시는 그 은혜로운 초청 때문이다(요14:3). 이 초청에 내 영혼은 벅찬감격과 전률함이다 사 61:10  . 

 

.인간은 어느 누구나 할것없이 생의 애착가운데 영원의 연장을 갈구한다. 그러면서 인간은 이 세계의 권좌에 하나님을 높이 올려 놓은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자기 자신을 염두에 두고 있고 인간 자신을 정당화하고 즐기고 숭배하고 있다(살후2:4) . 교회의 부흥이라는 명목도 이것에서  배제할수 없다. 하늘을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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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겉모습이란 있을 수가 없고 하나님은 가면도 보지도 않으시며 하나님은 여기에 속지도 않으시며, 그리고 또 그리스도는 연출의 대상도 될수도 없다. 하늘과 땅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이 일단 입을 열면 하늘이  갈라지고, 무덤들이 입을 벌리고(마27:52), 태양은 기베아에 머무르고, 달은 아얄론 골짜기에 머무른다(수10:12).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세상 안에서의 구원, 심판가운데서의 무죄선고, 시간속에서의 영원, 죽음 가운데에서의 새생명, 이 모든것들에 대한 복음의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터(고후3:11) 닦아져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복음으로서 이미 오래전에 선포되어졌던 것이며, 역사의 의미로서 무르익은 수확이며, 영원의 씨앗으로써 성취된 예언이다(렘33:2). 한방울의 영원이라고 하는것은 시간의 지배아래있는 사물들의 망망대해보다 더 무게가 있다(단7:18).

 

은혜는 하나님과 인간이 갈라진 사이를 연결시키는 그리스도의 선물로써 존재한다(엡2:8). 이 복음은 다른 진리들과 나란히 병존하는 또 하나의 진리가 아니라 자칭 다른 모든 진리라고 하는 것들을 질문대 앞에 이끌어 세워 놓는다(계2:2). 예수 구원자로부터 소외된자 모든 인간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세워진다.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향해진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에게 향해진 질문이면서, 하나님의 대답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삶의 한계를 넘어서는 발걸음이요, 우리 삶이 갖고 있는 의미의 전도이고, 새롭게 참된 우리 자신의 현실성의 표출이다. 아담이 서 있는 그 곳은 그리스도의 빛에 관한 증언이기 때문이다(행20:21).

 

인간이 제시하는 선과악 저편에 하나님의 팔이 움직이고 있기에 하나님이 우리편에 서 계시지 않으면 온갖 것들이 우리를 대항한다. 그래서 우리의 생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골3:3).

 

부활은 계시이며 그리스도 예수의 발견이고 하나님의 현현이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 앎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필연성의 등장이고 예수 안에서 알려지지 않은자, 예수를 시간의 끝으로서, 그리고 승리자로서 인정하는 것이다(요11:25). 부활 가운데서 성령의 새 세계는 육의 옛 세계와 접촉한다.마지막 심판후 부활의 그 날은, 인간의 새로운날, 곧 이 빛을 가져다 주는 그리스도 예수의 날이다(막13:19).

 

그날은 모든 시간으로 하여금 영원으로 전환하게 하며, 인간의 감취어진것을 드러내고,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들여다 보여졌다는 것을 계시하는 날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의 끝이지 또 하나의 새로운 두번째 역사의 시작이 아니다

 

십자가앞에서 율법의 행위는 인간에게 그 어떤 안전 보장도, 평안도, 변명도,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가 이를 증언한다. 율법은 바로 그 율법 아래 있는 있는 자들을  창조주와 피조물사이에, 영과 육 사이에 입을 벌리고 있는 심연앞에 이끌어 내고 있을뿐이다(갈5:4).

 

이 신비롭고도 최초인 창조적인 발걸음,  곧 아브라함이 힘 있게 내디뎠던 그 발걸음, 하나님만이 할수있는 그 믿음의 발걸음은, 저 심연을 넘어 옛 창조로부터 새로운 창조로의 발걸음으로 대딛게 한다. 그리스도 바로 그가, 새로운 인간인 우리 곧 우리가 서 있을수 있는 그 곳으로 자신의 발걸음을 옮겨 놓으셨다(골3:10).

 

율법안에 사로잡힌 너 한국교회여!  '너는 어디에 나의 가시면류관과 십자가와 못과 채찍을 갖고 있느냐?' 하나님은 오늘도 질문하신다.

 

십자가를 우회하며  비켜가면서까지 옛 언약인 율법안의 십일조를 통한 더 많은것, 더 높은것, 더 나은 물질적 풍요로운 축복만을 갈망 한다면 결국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지나치게 될것이고, 지금 누리고 있는 그 은혜도 지나쳐 버리고 하나님까지도 지나쳐 버리게 될것이다. 하나님은 흥정의 대상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오로지 율법은 계시 자체가 아니라 단지 세상적으로 제약된 부정적인 계시의 각인(הרושם)일 뿐이다. 그래서 일찌기 예수 십자가를 통한 율법완성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초대교회도, 그리고 또 아래의 표시에서 보듯이 제시된 세계의 모든 교회들도,  또 더군다나 생명의 법으로 절대 고수해 왔던  그 유대교까지도 완전히  그 율법의 십일조를 다 버렸음이 이를 증명한다.

 

십일조제도를 이미 폐지한 세계 교회들의 아래의 목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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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완성으로 세계 모든교회가 일찌기  일절 폐지시킨 그 율법의 십일조(히7:18)!  그러나 그것이 한국교회에서 만큼은,  그 율법의 십일조가 성도들의 전반적인 신앙생활에 깊숙히 개입해서 프리즘안에서 굴절되고 채색된채 하나의 계시의 빛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율법의 십일조는 한국교회에서 많큼은 감히 누구도 넘볼수 없는 상위 최고의 법으로써 동시에 해소불가한 대립이요, 신앙생활의 지울수없는 표지이며, 믿음의 현존과 상존이 지니고있는 수수께끼의 본질이요 총체이기도하다.

 

이 십일조의  굴절된 믿음의 착시현상 때문에 교회성장은 이미 발목 잡혔고, 특정세력에서나 볼수있는  부동산투기, 돈세탁,  성적타락등 이러한 부정행위들은 세상의 눈총과 질타속 온 몸에 상처만 남기고 있다(골3:5).

 

십일조로 과거 어둠의 암흑 시대를 장식했던 중세교회가 지금은 그것을 버림으로서 클린 이미지로 현 시대에 어필되고 있지만,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는 거꾸로 그것을 도저히 포기 할 수 없는 자본주의적 맘몬 웰빙복음으로 심한 중병이 들어있다(대하21:15).

 

이 십일조 제도는 처음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복음과 함께 한국 교회에 들어와서 이것을 통한 더 많은 복을 받을 것이라는 집단 유혹과 기복적 혼혈주의가 가파른 편향성으로 내리 달리면서 지금 한국교회는 심한 동맥경화를 앓고 있다.

 

이것은 순수했던 교회의 본래적 거룩성과 십자가를 근본적으로 무력화시키면서 비판없는 성역화로 하나님의 말씀은 왜곡되고 타락의 길로 접어 들게 했다(히6:6). 아담안에 둥지를 튼  그 인간의 죄의 본성이 역사를 통하여 지금도 계속 반복되고 재생되고 있는 셈이다(롬5:12).

 

한국교회는 이 커튼 넘어 자신들을 숨기운채, 기복(祈福)과 율법의 굴레라는 덫으로 성도들의 영혼을 옥죄며, 실존의 자유를 속박하며, 순수 신앙을 이데올로기로 변질시키고 있다(애4:1). 영혼의 숨결이 하나의 종교적 의식으로 대체되어가는 서곡이다 .

 

허지만 율법안에서 죽은 우리, 예수 십자가를 통한 새롭게 창조된 우리 인간은 그러한 죄의 쇠사슬에 묶여있음이 아니라 그 자체에서 해방되어 무한한 자유를 만끽한다(롬8:2).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의 바로 저편 곧 율법이 지시하는 성전, 안식일, 제사장, 할례, 제물, 레위인등  여러 다양한 옛것들의 모든 것 저편에서 시작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골2:14). 예수의 발걸음은 본질적으로 이 모든 옛 것들을 사열하며 지나가는 발걸음이고, 근본적으로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곧 죽음이라고 하는 관점아래 전방배치된 모든 몽학 선생인것들의 열병이다(히 7:18.19).

 

예수는 이 땅에 여러 모든 가능성들 가운데 있는 가능성이며, 불가능한것들의 모든 징후들를 자신안에 운반하고 있다. 옛 인간과 새로운 인간의 동일성은 역사적인 십자가 사건에서 성취되었고, 그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우리는 피할수없이 그의 그늘밑에서, 그의 세계를 접촉하는 창조의 힘, 구속의 힘으로서  하나님나라를 소유한다(딛3:5).

 

이유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본질이요 총수이시며 창조자와 구속자로서 우리의 모든 각개질문에 대한 완전한 답변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안에 계시로 인해서,  유대인에게는 꺼리낌이 되셨고, 헨라인에게는 미련한것 처럼 보이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안에서  영원히 침묵하는자로서  말씀하시는 분,  어제 듣게 되었던 그  말씀을 오늘도 새롭게 듣게되며, 내일 또 다시 새롭게 듣는다.(고전1:23)

 

믿음은 항상 최초의 것 곧 유대인나 헬라인, 남녀노소, 설교자나 설교듣는자, 많이 배운자나 못배운자, 누구든지 공동의것으로서  종교, 도덕,  삶의 경험,  견식과 사회적위치, 이 모든 것들의 차이를 가로질러 뚫고 나간다. 오직 믿음으로서만이 우리는 하나님의 가능성안에 놓여 있다(행13:1).

 

원래 이 십일조 제도는 중동지방 전역에서 행해졌던 고대 관습인 일종의 세금형태로써 당시 모든 국민은 누구나 납세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고고학의 여러 자료등에서 잘 나타나 있다.

 

[말라기 3장 10절]"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아래 말라기 3장10절 원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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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기독교인구 22억 7천만명의 그 모든교회가 '이 십일조제도'는 분명히 옛 언약의 율법의 일부로서 신앙의 바른 진리가 아니기에 일찌기 모두 폐지시켰음이 위의 표이다. 허지만 세계속 유독 한국교회 만큼은 신본주의적에서 벗어난 물질만능 적자생존의 자본 주의적 정서를 추구하면서 그 검은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있다(딤전6:10). 이 일로인해 한국교회는 결국 73% 의 샤머니즘과 신비주의, 기복주의, 율법주의만을 양산해 내고야 말았다(시119:37).

 

 이 십일조 제도의 무리한 자충수와 민낯 노출로 그 본질의 빛은 바랬다. 이런 일그러진 트라우마가 교회의 성장 발목을 잡히면서 왜곡된길로 기울어져  있고,  망원경적 진리를 특징적인 몇 구절의 현미경적 시야가 프리즘 안에서 굴절되고 채색된 착시 현상에, 지금도 네모난 바퀴로 계속 힘들게 굴러가고 있다.

 

처음 이 십일조 제도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그들의 신앙행위 표현으로 삼었다.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 지방의 많은 나라 즉 로마, 그리이스, 시리아, 카르타고, 우가리트 셈족 등에서 노동이나 전쟁 전리품으로 10분의 1은 문화적 관습속에서 이미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종교적 뿐만 아니라 세상의 통치자들도 일종의 세금 형태로 강제적으로 수탈했었다. 삼우엘상 8장 5절에서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달라고 사무엘에게 강한 요구를한다. 그 때 사무엘은 '만일 너희에게 왕을 세우면 너희들이 왕이나 궁정관리에게 십일조를 내야 된다(삼상8장 15절)' 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미 당시에 십일조가 성전만이 아니고 왕에게도 십일조를 바치고 있었슴을 알수 있다.

 

고대 세속 종교에서 그들의 신에게 10분의 1을 바치는 의미는 땅은 신의 소유이며, 인간은 그 땅을 빌어서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라는 사상이 깊게 자리 하면서 십일조 기원을 삼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왕을 하늘이 내린 신의 아들이라고 인정하고, 신으로 숭배 했기 때문에 왕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이다. 창세기 47장 24절에는 애급인들은 바로왕에게 10분의 2를 바쳤다는 기록도 나온다. 이 같이 이 십일조 제도는 성경 구약율법에 정식으로 명시하기 이전에도 모든 나라에서 보편적인 세금형태로서 미신적 행위를 실시 하고 있었다.

 

다음은 구약성경에서 십일조가 등장하는 구절들이다.

 창 14:18-20
십일조가 성경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이다. 살렘왕 멜기세댁이 빵과 포도주를 갖고 나와서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오는 아브라함에게 축복한다. 이에 대해아브라함은 전쟁에서 취한 전리품 중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댁에게 드린다. 그래서 어떤이는 이 십일조 제도는 이미 율법이 있기 전부터 존재했다 라고 하면서 십일조 존재 필요성을 강조하지만, 이곳의 십일조는 멜기세댁의 제사장 직분이 레위지파가 아닌 유다 지파로서 영원한 대제사장, 즉 장차 오실 메시야의 모형,  멜기세댁이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것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기에 십일조 적용대상이 아니다.

 

오직 십일조는 땅의 소출과 가축에만 한정하고 있어 여기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으로써 이러한 전리품들은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말씀하신 정당한 십일조가  될 수 없다. 마치 몸 파는 창녀가 몸값으로 받은 수입으로 십일조 드릴수 없음과 같다(신23:18).십일조 이야기는 당대 이웃나라 단지 보편화된 문화적인 관습일뿐이다. 율법 전에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십일조가 있었다고 하는 주장은 역시 맞지 않다.

 

창28:20-22
이곳 십일조 내용도 야곱이 자기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피난해 도망가는중 하나님께서 자신을 끝까지 보호하시고 또 나중에 아버지집에 돌아오기 까지 인도해 주신다면 자신의 모든 것 중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하는 조건적 약속이지만,  그 후 야곱이 맹세한 대로 십일조를 바쳤다는 것도 없거니와 그리고 또 하나님은 인간들 같이 조건적 값싼 흥정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이 또한 하나님이 직접 지시한 내용도 아니다.

 

위의 두 아브라함과 야곱의 십일조 이야기는 당대 셈족 이외의 문화권에서도 널리 시행되던 제도일뿐이다.

 

* 오랜세월이 지난후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정확한 십일조를 완전히 명문화 시키신다(레 27:34).그때 하나님은 십일조에 대해서 '모세 율법'에 따라 시행하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레27장30-33, 신12장5-12).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의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또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십일조를 무르려면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할 것이요,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렘33:13, 겔20:37).

 

그 우열을 가리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무르지 못하리라(레27:33). 이것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 확실히 정하신 법률안에 명하신 십일조 내용이다."그 율법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왕상2장3절)라고 말씀 하셨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곧 율법에 정한 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에 쌓으라"(느12장44절). 십일조 제도가 정식 규범과 율례으로서 모세 율법에 등장하고, 많은 지파들중에서 땅의 소산을 얻을수 없는 레위 지파의 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의식법이나 시민법과 함께 십일조제도가 주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핵심은 '오직 땅의 곡식과 가축에' 만 한정한다는데 가장 큰 의미가 담겨있다. 또 바치는 자들의 의지대로 함부로 하지 못하기 위해 막대기 밑을 통과하는 가축의 열번째를 드리도록 했다. 그것을 어기는 사람에겐 벌금으로 20% 더 내도록도 하였다. 오늘의 교회에서 돈으로 내는것과는 거리가 멀다.

 

다음은 십일조 종류면에서이다.

제1의 십일조는 십일조의 십일조이다(민수기 18:26). 십일조를 받는 레위인도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아론 제사장에게 바쳤다(민18:26-29). 그런데 이것 역시 돈이 아니고 농산물이다(민18:27).

 

제2의 십일조는 축제의 십일조이다(신명기 12:4-19, 신명기 14:22-29, 26:12-15). 하나님이 택하신 그 어떤 장소로 십일조를 가지고 가서 그것으로 잔치를 베푸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인 나그네, 고아, 과부, 자기친족, 종들이 그 십일조를 나누어 함께 즐기는 것이다.

 

또 제3년차와 제6년차(안식년을 기준해서)십일조는 자기가 사는 이웃을 위한 구제금으로 사용하는 십일조이다.

구제면에서 살펴보면 한국에는 세계 OECD 국가중 11위라는 화려한 착시효과 탓에 모두들 선진국 수준의 삶을 누리고 있는것 같지만 고개를 조금만 돌려 보면, 출구 없는 세상 속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연봉 1억원이 넘는 근로자가 80만명을 넘어섰다지만 사실상 전체 실업자 수가 124만명 에 달한다. 종합부동산세를 부담하는 미성년자가 1000명이 넘고있는 반면 지금도 점심 끼니를 거르는 결식아동 초.중.고학생이 40여만명에 달하는 것이 또한 우리 사회다.

 

기초수급자만 해도 174만명이다. 그런데 여기 기초수급자조차 들지못하는 빈민층이 93만명이나 된다.   또한 건강보험료조차 내지못해 병원에도 갈수 없는자들이 210만가구 이다. 그리고 그외 절대 빈곤층이 61.7%인 487여만명이다. 이들중 이 절대빈곤 때문에 자살 하는자들이 하루에 40여명이나 된다는 이것이 현 한국사회이다. 심지어 이 자살수가 지난 5년( 2007-2011)동안 7만1916명이나 된다. 이라크 전쟁당시 사망자 3만8625명 거의 두배에 가깝다.

 

불명예 자살국가라는 세계 제1위' 자리를 10년간이나 계속 고수하고 있다. 통계청의 시뮬레이션조차 감당 못할 빛의 속도로 음지의 빈곤화가 진행 중이다. 하나님은 이런이들과 서로 함께 나누라는 것이 제3년차와 제6년차 구제금인 십일조이다(레14:28). 이것은 곧 사회보장 복지의 혜택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엔 율법에 명시한 십일조제도를 잘 지켜나갔다. 그렇지만 이스라엘도 많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점차적으로 변질 되어갔다. 결국 아모스 시대에 가서는 형식적인 예배와 십일조가 오늘날의 현대교회가 주장하고 시행하고 있는 하나의 복의 등식으로 생각하기까지 이르렀다.

 

십일조를 적극적으로 잘하면 큰복 받아 부자 되고, 집안 모두 건강하고, 모든일들이 만사형통 한다고 믿고 또 그렇게 가르쳤다. 그러나 이 때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께 그 백성들의 망령된 부패신앙 배역행위를 진술하면서 그들의 벧엘제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들을 즐겁기 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책망했다.

 

(아모스 4:4)에'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심지어 '너희 만일 십일조를 복의 등식개념으로 생각한다면 더 큰 복을 받기 위하여 '매 3년마다 드렸던 그 십일조를 이제는 그 기간을 크게 앞땡겨서 3일에 한 번씩 드려보라. 그러면 더 큰 돈복을 받을것이 아니냐? 하면서 그들의 비신앙적 행위를 실랄하게 비판했다.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오늘의 한국교회에서 십일조를 제일 정확하게 하는자는 모든교회의 목사들일것이다. 헌데 한국교회의 목사들의 생활은 왜 그리 어려운가? 왜 또 십일조 잘 내는 신자들은 왜 부자들이 못 되는가? 2,800년전의 아모스 선지자가 오늘의 십일조 주의자들에게 잘 대변해 주고 있는것 같다. 

 

그들이 아무리 특심하게 더 많은 십일조를 바친다 할지라도 성경에 기록된 율법 대로가 아니면 그것이 허사라는것이다. 원래 구약이 말하는 십일조는 성전 제사를 맡은 레위인이나, 과부들, 어려운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었다. 그리고 십일조 내용물은 반드시 '밭의 소출과 가축' 만으로 한정 되어야 한다것이 율법의 강한 주장이다(레27:30, 신12:17, 14:23, 느13:5,12).

 

성전이 너무 먼 경우에는 그것들을 일단 돈으로 바꾸었다가 성전에 가서 다시 음식물로 바꾸어 십일조를 드리게 했다(신14:24-26). 그래서 십일조는 당연히 '먹거리'를 생산해 내는 '농민과 목축업자'들만이 한정 된다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 당시 다른 직업인들은 모두 십일조가 면제되었다. 그래서 목수였던 예수님, 어부였던 제자들도 이 십일조는 해당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성전세는 십일조와는 달리 모든 백성이 납부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출30:12-15) 당시 통용되는 돈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납부 했다(마17:27).

 

십일조는 구약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족인 제사장들의 생계수단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 꼭 필요했었다. 그러나 성전과 제사장이 없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들이나 신약의 초대교회들은 이 십일조를 일절 시행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시행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십자가로서 십일조인 그 율법을 완성하셨기때문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는 십일조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이 없는것이 그 이유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단번에 드린 제사로서 십일조를 폐지시키신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십일조가 성립 되려면 반드시 '성전과 제사장'이 필수적이기때문이다. 십일조는 오직 성전에서만 드려야 되고 그리고 또 제사장만을 통해서만 드릴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지난후 .......
주후 4세기 이후 교회가 구체적으로 조직화 되면서, 결국 인간들의 탐심(탐심은 우상숭배<골3:5>)으로 다시 십일조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해서 중세 거의 1000년 동안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허지만 이때까지도 십일조는 '돈' 많큼은 제외시키고 오직 '토지소출과 가축'에만 거둬들였다. 성경에서 십일조는 언제나 먹거리로 한정 했기 때문이다. 결국 13세기에 이르러서는 교회의 부패와 타락으로 변질 되다보니 이 십일조가 먹거리를 포함해서 '모든 소득' 으로 확대 되기도 했다.  

 

그때부터 교회는 적극적으로 돈의 꿀맛을 알게 되었고 그후 시도때도 없이 각종 집회를 열어 돈을 거둬들였다. 그래서 이젠 교회마다 돈이 넘쳐 심지어 십일조를 보관하는 '십일조 금고' 까지 생기게 되었다. 교회는 돈이 넘쳐 교회건물들은 너무 화려했고 돈이 넘치니(대하24:11) 사치에도 여념이 없고, 교회 지도자들의 주택은 초호화판 이었다(약5:5). 그리고 그렇게 화려하다못해 교회담임자는 교회 직분까지 매매하기에 이르렀다(막11:15).

 

이에대해서 개혁운동이 종종 일어나기는 했지만 실패하고......
결국 1079년도에 청렴한 힐데브란트 그레고리 7세가 교황으로 등극 되자마자 부패 방지책으로 사제 결혼금지인 독신제도와 성직매매금지를 만들었다(대하31:1). 그래서 그때부터 오늘날까지도 카톨릭에서는 신부가 독신으로 살고 있는것이 그 이유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후 초대교회에서도 전혀 시행되지 않았던 그 십일조 제도가 중세 교회 시대에 다시 활개를 쳐 특혜와 특권, 기름진 음식, 그리고 위선이라는 거대한 뱃살을 부풀렸다.

 

허지만 종교개혁 특히 프랑스 대 혁명 1789년과 1848년 이후 교회는 국가와 분리 되면서  한국교회만 제외한 대부분 세계 모든 교회가 이 십일조 제도를 공식적으로 완전 폐지시켰다(위의 표를 보듯이).더 이상 그 십일조 가지고 교회가 교인들에게 성경을 그릇치게 가르칠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 기독교인은 불과 967만명이다(2016년 12월20일 정부 통계청 발표). 세계 기독교 인구 22억7000만명의 263분의 1 이다. 그나마 기독교 인구 967만명 가운데에서도 교회의 무리한 헌금요구 및 교회 지도자들의 윤리 도덕적 개인비리 때문에 교회를 등지고 교회에 나가지 않은 숫자가 현재 23%인 223만명 이나 된다고 한다. 곧 교회에 나가지 않고 가정에서 예배하는자들이(곧 가나안성도) 223만명이나 넘는다는것은 그만큼 성도들이 교회의 도덕적 진실에 목마르고 또 경제적 압박에 너무 큰 부담이라는 반증이다.

 

사실 한국교회는 사회적 약자들을 외면하고, 강단에서는‘물질만능'만을 추구하면서부터, 이들은 큰 부담을 안고 교회를 떠났다. 그러나 아직까지 남은 교회마저도 장로, 권사, 안수집사 직분 가진자만들의 영역화 돼 버렸다(마21:12). 과거 조선시대 왜적과 싸우면 양반으로 올려주니 전국에서 의병이 모여들었다. 중세때 교회에 돈을 많이 내면 '연옥에서 천국으로 직행' 한다는 티첼 신부의 능란한 웅변술에 속죄표는 순식간에 동이 났다.

 

교회 장로로 피택해 준다하니 거금 1,000만원도 아깝지 않다. 권사 안수집사 직임주니 500만원~ 1000만원을 거침없이 바로 응답한다. 디자인 마음에 들고 가격 대비 품질이 괜찮다 싶으니 그들은 자연스레이 지갑을 연다. 교회지도자들은 이런 소비자 심리를 본능적으로 직감적으로 꿰뚫고 있다. 조건적 반사이익이다. 교직매매 인상적 세례를 받는다. -

 

그들의 직분에 날개를 달아 주니 신분 수직상승  교회계급 서열에 화려한 팡파래를 울리며 떳떳이 진입한다. 

그래서 이들은 바람이 불기도 전에 먼저 눕는 풀잎이 되어 나중에 목회세습이나 퇴직금등을 결정할때 1등공신 된다. 권력의 지평은 변할 수 없는 그들의 생명 다 할때까지 콘크리트화가 되어진다(출18:21).

 

한국기독교가 돈을 너무나 중시하다보니 돈있는자와 권력을 가진자들의 잘못을 정당화 해주는 이념적 정치종교로 변질됐다. 성도들의 믿음의 척도를 ‘헌금의 액수’로 결정하면서 돈이 중심이 되는 집단이 되었다. 교회마다 도처에 진실이라고 외치는 목소리는 넘쳐나는데  진리는 어디 숨었는지 모르겠다(호4:1). 나 같은 시력2.0의 눈에는 한국교회의 풍경이 거꾸로 서 있는듯하다. 로마제국은 흔들리면서 1000년을 갔다. 한국교회는 거꾸로 서서 얼마나 갈지 궁금하다.

 

우리 한국교회는 윤리,도덕,양심지수는 세계최하위수준이다. 한국교회의 신학자들이나 교수들은 대부분 서구나 미국 등지에서 신학 공부할 당시 그 각 나라들의 교회예배 참석을 통해서 그 곳 교회들은 '십일조 제도'가 없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생계형 유학파 학자들은 지금 한국교회 십일조 제도 부조리에 대해 입에 자물쇠를 채운채 묵언수행으로 이미지 관리만 하고 있을 뿐이다. 자기 자신들의 파격 대우는 혹시 어딘지”에 이곳 저곳만 기웃거린다. 자기의 굳은 신념을 버린다. 

 

지금 현재 한국교회에서는 교파와 교단을 초월한 모든 교회가 이 십일조 제도를 초교파적으로 정착시키고 있다. 교단과 교단, 교파와 교파 사이에는 교리적으로 조그만 차이가 있어도 싸워댄다. 내가속한 장로교만 하드래도 300개이상으로 갈라져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십일조 제도많큼은 모두가 단합하여 한 목소리가 되어 합장하고 있다. 여기엔 어떤 이의가 없다.

 

이러한 현상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성경 구절이 바로 구약의 말라기 3장8절-10절의 잘못된 해석이다. 본인도 과거 50년대 혹은 60년대에 부흥집회를 통해서 수없이 들었던 말씀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 말씀이 기록될 당시의 사회적인 배경과 그 말씀 전후의 유기적인 문맥관계를 고려해야한다.

 

말라기 3장8절-9절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덕질 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 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라는 구절이다. 이 내용에서 그들은 성도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한것으로 심하게 매도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의 바른 해석은 느혜미아서 13장이 자세히 설명한다. 왜냐하면 말라기와 느혜미야는 동시대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내용중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십일조 도둑은 백성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아서 도둑이 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제사장들이 십일조를 몰래 훔쳐 빼돌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둑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바벨론포로에서 돌아온 느혜미야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에게 명령했다. 백성들이 십일조와 헌물을 가져오면 제사장들은 그것들을 받아서 성전 창고에 거둬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당시 제사장인 엘리야십과 도비야는 서로 공모해서 백성들이 십일조 가져오면 그것들을 성전 창고에 넣는 것이 아니라 성전창고 옆에 또 하나의 자기들의 개인 창고를 만들고 그리로 계속 빼 돌렸던 것이다.

느혜미아 13장을 보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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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느 13:4- 제사장 엘리야십과 도비야가 서로 연락 공모해서
.
느 13:5- 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만들었으니
(성전창고 옆 별도로 도비야의 개인 방을 만들었으니).


느 13:7- 하나님의 전 뜰에 방을 만든 사실에 대해 악한 일을 알고
(엘리야십과 도비야가 십일조 빼돌리기 위한 따로 방을 만든 악한 사실에 대해 알고).


느 13:8-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들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니
(빼돌린 십일조와 헌물등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니라)

 

위의 느혜미야서 13장에 기록된 내용과 같이 제사장인 엘리야십과 도비야가 백성들이 가져온 십일조들을 자기들의 개인 창고에 계속 빼 돌렸기 때문에, 결국 그 성전창고에는 식량이 바닥 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성전 일을 버리고 자기들의 먹고 살길을 찾아 도망가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것이 최초로 제사장에 의한 십일조 도둑 사건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성도들이 십일조를 한번이라도 못내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했다고 한다. 십일조를 못내서 도둑이 된이 아니라 제사장 엘리야십과 도비야가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를 자기들의 개인 창고로 빼돌렸기 때문에 도둑 사건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하게도 엘리야쉽과 도비야가 도둑이라고 지목하는데 교회는 그것을 바꾸어 성도들의 가슴에 도둑이라고 주홍글씨를 달아맨다

 

마치 교회가 1229년 둘러스 대회때 교인들이 성경지식에 대해 무지하도록 성경을 보지 못하게 한것과 같다. 오직 진실에 대한 목마름만 있을 뿐이다. 중세시대에 막대한 십일조 수입을 가지고 갖은 비리를 저질렀던 카톨릭조차도 이제는 바로잡고 그 십일조 제도를 버렸는데(히6:1), 카톨릭을 개혁한 루터와 칼빈의 교리를 따른다는 한국의 개신교가 이제와서 오희려 그 비성경적인 십일조 강조 하고있다(렘6:13).

 

한국교회의 현 상황을 들여다 보면 십일조와 막대한 헌금수입으로 교회는 돈이 넘쳐난다. 미국.영국.유럽교회는 교인 250명 정도만 돼도 교회담임은 일반 직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들은 또 시골목회를 자원한다. 공기좋고 물좋고 독서하기에 안성 맞춤이고 심방도 자유롭게 한다. 자동차는 거의 없다. 자전거로 모든 교통을 해결한다.

 

월급도 150만원 정도이다. 더군다나 그것도 그들이 받는 월급도 가정 식구따라 다르다. 담임목사 식구가 3명이고 전도사가 4명이명 나이어린 전도사가 더 받는다. 본래적 하나님 말씀 성경적구조제도를 제대로 잘 지킨다. 그들에겐 검소가 몸에 베여 돈쓴일이 없으니 교인들에게 헌금도 강조하는일이 없거니와 그래서  십일조제도 같은것은 아예없다.

 

신부는 아무리 큰 교회에 몸담고 있을지라도 월평균 사례비가 지금도 70만원정도이다. 카톨릭의 프란체스코 교황은 '교회는 가난해야 된다'라고 했다. 가난은 결코 미덕이 될수는 없지만 '맑은가난'을 내세우는 것은 탐욕을 멀리하기 위해서다(엡5:3). 왜냐하면 돈은 언제나 혼자 오지 않고 어두운 그림자를 데려오기 때문입니다.

 

아모스때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은 모두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크게 번영했다. 남쪽엔 10대 웃시야왕 북쪽엔 13대 여로보암2세때이다. 오늘의 한국이 세계 OECD국가중 11위 GDP 30,000 달러정도때와 같다.

그래서 외적인 번영으로 북 이스라엘은 오직 자신들의 일신상의 안일만을 위하여

 

사치와 방탕을 일삼고(암6:4-6),
세법을 악용하여(암5;11),
가난한자를 착취하며(암2;6),
의인 학대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유례없는 성공 신화는 대단했지만 그러나 너무 빠르다보니 속도의 빠름은 자극적일지라도 공허만 남기는법이다. 이유는 깊은 울림과 긴 여운을 줄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성장이나 보람은 항상 느리면서 차분한 성찰과 준비를 필요로 했어야 했다. 어차피 교회가 나아가는 목표는 속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의 방향이기 때문이다(엡6:6).

 

한국교회는 세계 모든교회가 그렇게 부러워 하는 세계 10대 교회중 1등에서 5등 까지 모두 다 있다.전체 부동산이 80조원, 연간 헌금 총액이 4조8천억원이나 되는 세계 최고의 메머드급 수준이다(눅21:5).

 

청년실업자가 101만명이 넘치는 불황에도 수천억원을 쏟아 호화 메가 예배당을 만들기도하고, 자기 신앙에도 투철하지 못하면서 남의 믿음을 업신여기는 근본주의자들, 신앙을 이념으로 변질시킨 많은 정치종교지도자들 때문에 교회는 어지럽다(욥29:10).

 

국가에서는 국회의원 300명중 120명(19대)이 자칭 크리스챤이라고 자부하고 있지만 어찌 국가 청렴도 면에서 OECD 국가중 최하위를 면치 못하는가(사28:8)?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당 밖에서도 자신의 삶과 직업을 성직(칼빈의 말과 같이)으로 수행한다면 예를들어 청소미화원이 자기가 쓸고 있는 어느곳이든지간에 하나님  집 앞마당을 쓸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국회의원이 모든 백성들  앞에서 양심있게 겸손히 타인을 위한 정치를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목사들이 구원받은 백성들을 예수님과 천국을 사심없이 진실로 믿고 소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세상은 기독교인들로 인해 반디불이 살아가는 청정지대가 될 것이다(요14:4).

 

그러나 교회 안에서만 하나님을 찾는이들 때문에 이 세상은 어둠속에 그대로 갇혀있다.
그것은 가장 자기중심적이고 독선적이기 쉬운, 모든 가치체계가 전도된 자신을 스스로 가두기 때문이다.

셀 교육, 전도폭발, 심령대부흥회, 수험생 100일기도회, 제자훈련, 여리고성기도회 등 수많은 기도회가 무슨 열매를 맺었다는 말인가? 

 

한국교회는 물질 만능 불랙홀 같은  수 많은 헌금종류들~. 성경에는 우리가 돈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헌신한다고 하는 것을 가르치는 구절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 같은 수 많은 헌금들로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큰 부담을 주고 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라고 하는데도 엉뚱하게 세례요한의 가리키는 손가락만을 물끄럼이 쳐다보고 있다.  산상수훈의 설교들은 넘치도록 쏟아 내면서도 산상수훈의 삶은 왜 그리 보여 주지 못하고 있는가? 성도들의 가슴속에 울림과 감동으로 맑은 공기 한 모금이라도 그렇게 마시게 할수 없단 말인가? 교회 본질의 생명은 나 아닌 그 누구에게라도 연탄 한 장 되어 따스함의 온기를 주는것에 있는데 말이다.

 

교회개혁자 칼빈은 말했다. 예배는 손상되고, 부정한 기복신앙들로 왜곡됨에 따라, 하나님의 거룩한 위엄이 모욕당하고 그의 거룩한 이름과 영광이 발아래 짓밟혀 있고 교회들은 자기들의 헛된 돈만을 숭배하고 있다고 했다. 교회 지도자들은 율법의 해석자로서 모세의 자리에 앉아 권위만 주장하며, 무리한 실천을 강요하고 스스로 본을 보이지 않으면서 지식만 팔고 있다고 했다. 

 

교회의 예배가 이벤트화 되어  축제화의 현상이 넘쳐나고 있다(출32:19). 예배를 드려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내겠다는 기복적 결심들도 야심차다. 그러나 결국은 그것이 잘 안될 때 그들은 서슴없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단계로 들어간다. 이같이 예배가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기호 맞추느라 정신이 없고, 또 예배의 본질이 사실상 헌금으로 이동하여 수많은 헌금들만 발생케 하고 심지어 비성경적인 일천번제나 기복적 감사 헌금들을 범람케 하면서 한국교회의 위험 수위를 넘나들게 하고 있다.

 

신앙은 점이 아니라 선이 되어야 한다. 점을 아무리 많이 찍어도 연결이 되지 않으면 선이 되지 못한다. 주일날 아무리 예배를 많이 드려도 형식화 된 예배, 목적이 바르지 못한 예배, 신령과 진리로 삶이 연결이 되지 않으면 점이 되고 만다. 허울 좋은 그리스도 종교인으로만 끝나고 만다.

 

따라서 이제 교회는 이 비성경적인 십일조를 통한 막대한 돈을 거둬들이는 것을 중단하고 연보개념으로만 이뤄나가야 한다(고전 9장5절).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 10장8절에 '제사와 예물과 전제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라고 하였다. 이는 다 자기이익 목적을 따라 드리는것' 이기 때문이다.

 

현재 십일조를 적극적으로 시행하는 교파들을 보면 '한국엔 초 교파적으로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특히 성결교는 교인 의무적으로 되어 있고, 오순절 교단, 여호와 증인, 몰몬교, 제7일 안식일교 등이 십일조 매우 열성적이다. 모든 종파가 이 십일조 앞에서는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낸다. 물론 세계적으로 십일조를 폐지한 나라들의 교회들도 재정적 어려움이 있기는 마찬가지이지이다. 그러나 십일조는 분명하게도 성경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서슴없이 폐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십일조는 교회의 재정적, 현실적인 문제이기전에 신약에서 성경적으로도 근거가 없고, 세계 기독교 추세와도 역행하는 제도이다. 아니 확실한 신약성경적 근거가 있다면 처음부터 이런 폐지론이 나올 수도 없었고 전 세계 국가들 역시 아직도 십일조를 시행하고 있었을 것이다.

 

말라기 3장7절-12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실상은 이 '쌓을' 이 단어도 성경 원문에는 없다).

 

본문은 십일조 지지자들과 특히 한국교회 부흥사들에 의해 백배, 천배, 만배, 복의 근거 까지 제시하는 최상의 성경 구절이다. 그들은 이 십일조를 이야기 할 때마다 항상 등장하는 메뉴가 있는데, 그것은 십일조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물질의 복을 쌓을곳이 없을만치 넘치도록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넘치도록 돈 복을 주시나 아니주시나 하나님을 시험까지 해 보라고 한다.

 

그렇게 십일조를 다하는 거의 많은 한국교회들이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 그렇게 백배, 천배, 만배 하나님이 돌려 주신다면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가난한 목사들이 없어야 되고 십일조하는 교인들은 왜 부자가 못되는가? 다시한번 되묻지 않을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도 십일조를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 몇군데 있다. (마23:23, 눅11:42, 18:12) '너희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그러나이것들을 행하고 저것들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내용이다.

 

이 말씀도 십일조 열성 지지자들에 의해서 신약시대에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구약에서와 같이 십일조 실행을 주장하려고 하신 의도가 아닐 뿐더러 역시 제자나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여기에 해당 되지 않고, 오직 형식만을 일삼는 바리새인들을 교훈 하려는데 초점이 있는것이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남에게 나타내고 자랑하고 보이기 위해서 보통 사용할 수 없는 조그만 땅에 음식의 향료로 사용하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를 심어 얻었는데 그들은 그것까지 세밀하게 구분해서 십일조를 했다.

 

그들은 이렇게 조그만한것, 별 가치 없는것, 세부적인 것 까지도 십일조는 하였지만 종교적면에서 가장 중요한 의(義)=공의(公義)[미쉬파트 משפט], 인(仁)=자비(慈悲)[헤쎄드 חסד], 신(信)=(信仰)[에문 אמנ] 즉 바로 신앙의 본질을 버렸다는 그 모든 외식을 향해 예수님은 책망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 전까지도 예수님도 다른 율법인 할례, 안식일, 규례들도 다 지키셨다(갈4장4절).
이 때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아직 완성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구약의 율법들이 유효한 시기이며, 십일조에 대해 충실 해야함은 마땅하다.

 

이 때엔 성전 예배도 진행 중이었으며, 제사장들과 레위인은 그들의 생활 유지를 위해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 십일조에 필요로 한 시기였다. 당연히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십일조를 강조하셔야 마땅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바로 바로 시기와 때이다.

 

십자가 사건이후엔 십일조를 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성전이 헐리고 제사장이 없어 졌기 때문이다. 십일조가 성립되려면 분명하게 성전과 제사장이 필수 요건이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리라' 이 말씀은 십일조 드리는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스스로 없애 버리신다는 의미이다.

 

성전이 없으면 레위지파의 제사장 임무도 종결 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구약의 성전이 신약의 교회이고 구약의 제사장이 오늘날의 목사이기 때문에 그래서 신약에서도 십일조가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무서운 소리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십일조 뿐만 아니라 성전도, 안식일도, 제사장도, 할례도, 제물도, 레위인도 모두 끝난버렸다. 여기의 사흘만에 다시 일으킬 성전은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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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지금 현재는 성전도, 안식일도, 제사장도, 할례도, 제물도, 레위인도 율법에 속한것들이 하나도 없는것이다. 초대교회를 보드래도 일반 연보에 대한것은 언급되어 있지만 십일조 했다는 기록은 전혀 찾아 볼수가 없다. 그래서 바울도 역시 자비량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기(롬10:4) 때문에 제자들도 사도들도 초대교회 성도들도 십일조 제도가 유대교의 다른 율법과 함께 폐지 된 것이 당연시 하였다. 그래서 신약의 모든이가 침묵하고 있다.

 

율법은 다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스도에게서 성취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함께 십일조가 바로 멈췄다. 율법은 그 자체로는 완결되지 않고, 늘 쉼이 없고, 늘 불안해서 참 안식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향해서 달리고 결국은 그리스도에게 와서 구약의 모든 약속들이 다 성취 되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동일한 하나님이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의를 이루셨다. 그래서 십일조(율법)는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과 함께 종지부를 찍었다. 그래서 지금도 유대교의 유대인 조차 생활의 법으로 삼았던 그 율법의 십일조를 시행하지도 않고 있고 또 시행 할수도 없다.

 

그러나 어떤이들은 신약에도 율법이 존재해야 한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예를 들면 일요일을 기독교의 안식일이라 해서 주일 성수를 강조하는것이나, 십일조와 헌금과 각종 절기 헌금을 거두어들이기 위해서 율법에 기록된 말씀을 지키도록 요구하는 행위등은 그리스도인들을 율법의 종이 되게 하는것이다.

 

마 5장 17~18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케하러 왔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율법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이루어지리라”. 했는데 이 이야기는 예수자신이 율법의 요구를 완전하게 완성하셨다는 뜻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8장8절에서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라는 말씀을 예레미야 31장31절을 인용해 말씀하셨고, 또 히브리서와 바울 서신의 전체에서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육체로 율법을 완성하심으로써 율법을 폐지하시고 새 언약을 세웠다고 하셨다(엡 2:14~15, 골 2:14, 히 7:18, 히 8:7~13, 히 10:9). 아래는 율법폐지 구절들이다.

 

엡2: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시니 자기의 육체로 둘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이시느니라. 그분은 중간에 막힌 담, 곧 원수된 것을 헐어 내셨고 엡2:15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느니라. 골2:14  히7:18 전에 있던 계명은 약하고 효력이 없어 폐지됐느니라. 

 

히8:13【히10:9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폐기하신 것은 두 번째 것을 세우기 위함이었느니라.

(히10:1 , 요5:46, 골 2:17, 히 10:1).

 

2:17 이런 것들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요, 그 실체는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

10:1 율법은 다가올 좋은 것들의 그림자일 뿐 그것이 실체의 형상 그 자체는 아니다.  롬10:4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기점으로 구약의 안식일은 완성되는 순간에 폐지되고 새 언약 아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의 실체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다. 영원한 안식은 안식일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에 따라 들어 올려 바치는 제물(민 18:24)이었던 십일조(민 18:21~24, 레 27:30~33)역시 완전히 폐지된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것을 완성하심으로써 폐지하셨기 때문이다(엡 2:15, 골 2:14).

 

율법적인 성전과 제사장이 사라졌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 반드시 성전(또는 성막)에 가서 제사장에게 가축이나 토지소산물로 바쳤던 들어 올려 바치는 제물(예물)이었던 십일조(tithe)가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열리는 절기 행사를 위해 땅의 소산 중 바치는 십일조(신 14:22-27)는 완전히 사라진것이다. 이런 것들은 제사와 관련되는 제물(예물)이기 때문에 성전과 제사장이 사라지면 제물(예물)에 속하는 십일조가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히 10:8).

 

율법에 규정된 제물과 번제물과 속제제물들도 미래에 나타날 그리스도의 그림자이고(히 10:1), 제사와 관련되는 십일조역시 율법에 따라 들어 올려 바치는 제물로서(민 18:24),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친히 제물(예물)과 번제물과 속죄제물이 되셔서 오직 한 번으로 영원히 유효한 제사를 드렸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십일조와 제물들은 율법에 따라 바치는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바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히10:5~12).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돌판에 문자로 새긴 율법(십계명)을 완성하심으로써 폐지하시고 새 언약을 세우셨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 바쳤던 3종류의 십일조((tithe)와 안식일도 완성됨으로써 폐지된 것이다.

스데반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에 거주하지 않으신다고 했고(행 7:48~49, 17:24), 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어떤교회들은 성도들에게 성전(예배당)을 지어서 바치라는것과 또 각종 헌금 제도를 만들고 이를 시행하고 있다.

 

137가지 헌금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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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돈이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건물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부족한 것이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돈이나 물질이 필요한 분이 아니다. 따라서 봉헌기도(하나님께 헌금을 바치는 기도)나 헌당예배(하나님께 예배당을 바치는 예배)는 정당화 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에 따라  복음 선교하는 데 물질을 사용해야 한다.

새 언약 교회의 구성원이었던 사도들과 그의 동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헌금(獻金 : 돈을 바치는 것)한 것이 아니라 극심한 흉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돕기 위해 연보(捐補 : 자기의 재물을 내어서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했다(행 11:27~30, 롬 15:25~31 고전 16:1~4, 고후 9:1~15).

 

사도 요한이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받았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났다"(요 1:17)고 했듯이, 새 언약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며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이다. 따라서 돌판에 문자로 새긴 율법(십계명)과 613 조문으로 된 십계명의 시행령(규례)이 분명히 폐지된 것이다.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준 것이지 이방 민족에게 준 것이 아니다. 이방 민족은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명령을 받은 적이 없다. 율법에 있는 모든 말씀은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다(롬 3:19).

우리는 우리를 옭아맸던 것에 대하여 죽어서, 율법에서 벗어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자를 따르는 낡은 것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롬 7:6).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시켜주셔서 자유하게 하셨으므로 다시는 굳게 서서 율법의 멍에를 매지 말아야 한다(갈 5:1). 이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섬겨야 한다(갈 5:13).

 

그런데도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으로 이미 끝내버렸는데  오늘의 한국교회들은 다른 제도들은 그대로 놔두고 유독 십일조만을 끄집어 내서 꼭 그것만을 계속 시행 한단 말인가? 따라서 한국교회가 유대교의 율법의 하나였던 그 십일조를 다시 강요하는 행위는  다시 구약으로 돌아가서 돌성전도 세우고, 안식일도 지키고, 제사도 지내고, 할례도 지키고, 절기도 지키려고 하는 의도이다. 

 

교회 운영에 대한 돈은 수단이 되어야 하는데도 목적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수단을 정당화 해서 가르치는 교회 때문에 오늘의 교회가 바로 서지 못하는 이유중에 하나이다. 인간의 생명과 영혼은 보이지 않고 집회 참석 인원 머릿수에만 관심두고 있다.

 

교회는 사람들의 머릿수가 아니라 성도들의 가슴속 심장 박동수를 세어야 된다. 막대한 십일조와 헌금에 눈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사람들의 머리 숫자만 계산하고, 정부에서조차도 동네 구멍가게를 살리기 위해 대형마트 버스 돌리는 것을 폐지 시콌는데, 더 모범을 보여야 할 교회가 대형 버스를 이용해 이 동네 저 동네 돌아 다니면서 작은 교회교인들까지 끌어오고, 또 대형 교회들은 지방 곳곳에 지성전을 만들어 놓고 목회자 개인 목회 성공의 자랑거리로 박수의 향기에 취하고 자신들의 능력과 치적에 날개를 단다.

 

어느 동네에 대형마트가 들어서면 그 주위의 자그만 가게 40여개가 타격받지만, 그러나 기업형 대형교회가 들어서면 그 주위의 작은교회 수백개가 문을 닫는다. 그래서 한국에 자그만 교회들은 그 동네에 대형교회들이 들어 설때마다 공포감과 비명소리만 가득하다. 지금 한국교회는 르네쌍스가 필요하다. 애초 성도들이 생각하는 교회의 희망은 교회가 성도들의 안식처였다. 그래서 성도들의 가슴은 뛰었고, 성도들의 교회사랑 열정은 폭발하듯해서 비바람과 폭풍이 몰아칠때엔 교회는 언제나 우산이 되어주곤 했다.

 

목회자는 목회를 자기의 생명과도 같은 도덕성과 자기 신앙의 인격을 나이테처럼 쌓아 소중한 가치를 끝까지 지켜야 한다. 화장을 고친다고해서 달라지는건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한국교회는 부활을 꾀해야 한다. 제도적인 시스템에 새로운 모니터링과 정비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디자인 하신 성경적 교회 본질이 회복 되어야 한다. 순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돈에 대해서 부자가 천국가는 것이 밧줄(καμιλον -칼빈해석)이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바울도 돈은 일만악의 뿌리라고 말했다. 이사야서에서는 오히려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바치는 제물을 역겨워하며 내치시는 하나님의 분노를 볼 수 있기도 한다(사1:12).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깨끗해지려면 우선 돈의 방향부터 바꿔야 할것이다. 그래서 천주교는 지금도 연보라고 한다. 연보는 자기 재물을 내어 남을 도와주는 것으로 일종의 구제금이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은 연보를 거둬서 바울에게 내 놓았다.


이 연보들을 생활이 어려운 가난한 성도들(롬15:26),흉년든 형제들(행11:28,29)등 일에 썼던 것이다.

한국에는 5만7천개의 교회, 15만명의 목사, 967만명의 성도중 교회 출석교인 500만명이다.어떤이는 한국교인 숫자가 1200만명이라지만 이 숫자는 환상의 신기루일 뿐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 1만명 이상 모이는 교회가 19개이다. 새 언약의 완성이신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포함해서 모든 율법을 완성 하셨다. 은혜 받은 자는 그 은혜를 나누는 차원에서 사랑의 연보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십일조를  잘 내서 백배 천배 만배 복받기 위해  십일조 영웅 록펠러를 들어 말한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신앙이라고 볼수가 없다.

 

그가 그렇게 신앙이좋고 십일조 잘해서 세계의 최고의 부자, 철강왕, 호텔왕, 기부자왕이 되었다던  그 록펠러 알고 봤더니  나뿐 기업주였고, 무수한 중소기업들을 희생시키고 노동자를 착취하여 부를 이룬 인물로써 미국정부에서 조차도 불법자로 낙인찍혔던 인물이었다.

 

록펠러의 비리악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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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가장 큰 위기는 물량 팽창주의적 메가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빚어낸 역사적 진화물이기도 하다.
이 신 자본주의 물결에 젖은 교회정체성은 가장 무게를 두어야 할 신앙도 십자가도 저물어 버린지 오래다.

교회는 사람들의 목마름을 채워줘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예배는 마음과 영적 예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진리 보다는 종교적인것들을 붙들고 있다. 성도들은 종교적 교회 제도에 목마른 것이 아니라 ‘진리’에 목마른 것이다.


교회가 덩치가 커질수록 권력화되고, 부패하고, 타락하는 속성이 있다. 세상의 권력 중에서도 가장 권력이 아닌 것처럼 위장하는 게 바로 이러한 교회이다. 이러한 교회는 끊임없이 부패하고 타락한다.이러한 교회는 결국 진정성 없는 도그마가 되고 만다. 그래서 오로지 교인들을 관리하는데만 집중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지도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대형화만를 추구한다.


한국교회를 구원할 힘은 대형의 힘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 작고 약한 것들을 택해서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것을 알아야 할것이다. 세상에서 제멋대로 살더라도, 부모 친척이 돈없어 굶어가도, 이웃이 배고파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교회에 아낌없이 무조건 십일조만 하면 하나님이 축복해주실 것이라는 고르반 사상때문에 한국교회는 전반적인 사회의 부패요인으로 심한 배척과 질시의 융단폭격을 받고 있다.


지난 과거 50년대 60년대 70년대 한국교회 성도들의 순수 신앙열정은 많은 기적을 가져왔다. 하나님의 도우심의 필사적인 기도, 성경공부, 전도 그리고 또 한국교회는 대부분 새벽 기도회 뿐만 아니라 매주 1회 이상 철야 기도를 실시했다. 또 성도들은 기도원을 찾아가 특별 작정 기도와 금식 기도를 함으로써 계속적인 영적 갱신을 소생시켰고,  하나님의 백성을위해, 교회를위해, 나라를 세우나가기 위해 기도에 매진했다.


모든 성도들은 밤마다 산과 골짜기 찾아가 추운 겨울 밤공기를 가르며 울부짖는 기도소리로 밤의 정막을 깼다.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는 긴 여운을 남겼고 국가를 위해 무릎을 꿇었다. 하룻밤에 한 아름 되는 나무를 택하여 밤새도록 안고 몸부림치며 딩굴면서 통회자복하며 국가를 위해서 많은 기도를 했다. 그들이 드리는 기도는 교회와 국가의 큰 발전의 물결을 일으켰다. 한국 교회는 열정적으로 각종 순수 대형집회들로 매진 하기도 했다.

73년 빌리 그래함 대전도대회,
74년 엑스폴로대회,
77년 민족성회,



80년 세계복음화대회,
84년 선교100주년대성회,
88년 복음화성회 등 수시로 열렸고 부흥의 원리와 선포는 성경중심이었다.

세계 제2위의 해외 선교사 파송국이 되었다.


 나 역시 군 36개월동안 많은 전도와 성경공부에 심혈을 기울인 나머지, 우리나라 국군 창설이래 1971년도
최초로 198명 합동 세례식을 거행했다.


찬란히 거행했던 합동 세례식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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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군 생활에 있을때에  그리고 세례식에 참예했던 모든 전우님들  먼길을 돌면서 외모는 모두들 서서히 변해있겠죠?    
봄 여름 가을 겨울 다 가고              
또 다시 오는 이 봄에 초록의 변화 흐름처럼                  
삶의 흐름 속에 흘러온 시간만큼 평온 함속                   

조금씩 비우고
결국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을 때 까지....                  

 

 그래도 
 그리웠던 곳에서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마주보면 마음이 마냥 포근해지기 마련인것은                   
 또 사람이 행복한 것은                  
 그리운 곳과 보고 싶은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진들은 1970년 3월~1973년 2월 까지 21사단 66연대,   1군사령관 한신 장군의 '장병전원 신자화' 란 지시아래       또 휘하부대인 9252부대(66연대) 연대장의 적극 지원으로  각 중대까지 군종사병들을 추출된  군종사병들과  그 업무    인 세례식 사진들이다. 46년전 광경이 감개 무량하다.   
                                                                       

세월은 기다려주지 않기에 난 가끔 혼자 있는 시간이면 이 눈부신 과거 추억억들을  떠올려 음미하고, 또 찬란하게 비춰보기도 하고, 닦으며 녹이슬까 괞히 걱정하기도 한다.
단지                          
                 

신비의 상자속에 잘 보관하여 내 인생의 소중한 보배로, 또 가끔 원할 때 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열어 꺼내어, 거기에 도취되기도 하곤한다. 나의 46년전 이 추억은  나만의 향기로운 예술이다.
 
이때 본인이 남긴 무엇보다 획기적인 업적가은데 하나는 제1대대 군종으로 전출가기전;3중대 소속이었을때 군종업무로서 매일 밤마다.  하나님께 예배와 성경공부였다.나는 예배 모임을 위해서 중대장님께 건의했고 중대장님은 주번사관에게 전달하고 주번사관은 다시 주번하사에게 하달했다. 
  "전달! 전달! 제1내무반 병사들은 제2내무반으로 5분내로 집합!"집합 구령을 마치자마자 모든 병사들은 재빠르게 한자리에 모였다. 집합끝......! 
함과 동시에  '내 주를 가까이 하게함은...! 찬송가를 힘차게 부른다 그 다음 나는 거의 30여분쯤 설교를 했다.
          
 이렇게 매일 밤마다 6개월동안 예배와 성경공부를 함으로서 군 사상 처음으로 198명 합동세례식도
거행하게 됐는데 이 계기로 후에 우리 연대장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부대가 동면에 있을때는 대대장님께 빈막사 요구해서 잘 개량해 작고 소박한 아름다운 교회를 세웠고, 6개월후에 TOC 전방으로 병력 이동했을때도 또 다시 대대장님께  부탁드려서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또한 부대 곳곳 처처에 다니면서 병사들과 상담도 했다.

 그래서 당시 장병들이 생각하는 교회의 희망은 장병들의 안식처였고,
 장병들의 가슴은 뛰었고, 
 장병들의 교회사랑 열정은 폭발하듯해서

 장병들의 가슴속에 비바람과 폭풍이 몰아칠때엔 
 교회는 언제나 우산이 되어주곤 했었다. 
               

                                                   

                                        1중대   3중대   4중대   11중대 군종들  휴식가지는 시간에 찰칵.



  당시 3중대에서는 중대 전원이(150명정도) 밤마다 예배의 시간을 가졌다. 
  이 사진은 설교 준비하는 시간이다.

                                            부대 가정통신을 쓰다가 잠시 휴식시간에 책을 들여다 본다.
                                                        TOC에서 펀치볼을 바라보면서..................!




   그러나 과거 나의 아름다운 젊음은 우연한 자연의 현상이었지만, 
  오늘의 이 노년은 위대한 예술작품이다.

  어제는 역사이고 내일은 희망이며
  그리고 오늘은 선물이다.   

                                             2019년 10월09일 군 전우 모임에서 찍었던 사진입니다.                                           
                                        과거 팽팽했던 젊은이가 요로콤  변해버렸네요
                                        고동엽1970년 03월입대-66연대-03중대군종                           

그리움에도 나이가 있는가 봅니다. 내가 그리움의 나이를 먹은만큼 그 때의그리움이 자주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47년전(1970.3월~1973.2월 꼬박 36개월동안) 그 당시 사단장 박찬긍 준장님.66연대 유정목 연대장님.
그리고 198명의 세례받은 장병들.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그분들도 나를 이만큼 그리워하고 있을까요? 그사람들도 그리움의 나이테를  동글동글 끌어안고 있겠지요?
스쳐가는 바람의 소맷자락에 내소식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잘 있어요 지금73세 되도 이렇게 그들을 그리워 합니다.   
나는 추억의 시간을 그리며 불현듯이 보고픔에 말없이 찾아가고 싶어지는 곳이 있어 동갑내기 친구  고00(66연대 의무중대 1168120* 즉 논산 아르바시 군번)씨를 불러  2005년도 지금으로부터 12년전  그러니가 제대후 32년만에 지금은 46년이지만  66연대를 방문하면서 찍어두었던 사진들이다.

걸어온 길에는 그립게  찍혀진 발자국들도 소중하고 영원한 추억이기에 살아갈 날 보다 살아온 날이 많아지면서부터
얼마나 소중한 것들을 잊고 살았는지 인생의 나이를 90으로 잡는다면 50년은 새로움 찾아 떠나는 탐험이고,  나머지 40년은 지금껏 경험한 것을 기리고 추억하는 여행   아직도 젊었던 꿈을 꾸는 우리 지나간 것들을 추억하며 사는  아직 희망하는 그 무엇이 있어 아름다운 추억은 녹쓸고 병들지 아니한 찬란한 감정의 순수를 보여주고 있는 탓에 그래서 우리의 지난 날들은 아름답고 아름다웠다라고 할수 있겠다.                                                                                                                        
           


그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기도를 들으셔서 이 거지의 나라를 높이 올려 놓으셨다. 1948년 정부수립당시 한국은 GDP(국민총생산) 50달러로 117개국중 최빈국이었다. 식민지로부터 독립 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또 6.25 전쟁으로 폐허속 빈민 가마니 촌 국가였던 것이다. 그렇게도 가난한 그러한 나라를 하나님께서는 이제 눈부신 경제발전을 일으켜 결국 지금 2018년에는 국민총생산이 30,000 달러가 넘어 600배가 넘도록 증가시킨것이다.

특히 86아시안게임에는 제2위.
88서울 하계 올리픽 참가국 160개국중에는 제4위,
2002년 월드컵도 역시 제4위케 하셨다.



그 때의 과거 순수 열심 신앙 열매로 세계 모든 나라가 그렇게 놀라고 부러워하는 오늘의 엄청난 대한민국이 되게 하셨다.


 그 놀라운 경제발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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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아~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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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대한민국♡
ℒℴνℰ*࿐⚪꙰🎋˚ྀ

중앙아메리카 쿠바는 자국 지폐에 한국 국기를 그려 넣어 기념 화폐를 만들겠다고 합니다. 코로나 백신과 의료제품을 지원해 주어 위기를 극복하도록 도와준 은혜를 갚기 위해 한국 방산무기를 대량 구매하겠다고 합니다.

칠레의 보리치 대통령은 한국 K팝 팬들의 지지를 받아 권좌에 오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보리치 자신도 케이팝 팬이라는군요. 그는 한국이 자기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찌 한국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유럽에서도 한국의 인지도는 대단합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속되면서 나토 회원국들이 우크라아나에 엄청난 무기를 지원하면서 자신들의 한계를 느꼈는지 계속 한국과 협력을 요청하면서 힌국도 나토 무기 지원을 도와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인접해 있는 동유럽 북부의 폴란드는 아예 한국 방산무기를 모조리 다 사겠다고 수십 조 원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한국 무기만이 자기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폴란드가 원하는 무기를 차질 없이 공급할 수 있는 나라가 없다고 판단한 탓입니다. 가격 대비 성능이 탁월하고 공급망이 잘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정비창까지 세워 부품 조달과 정비에 차질이 없게 하고, 공군 조종사 훈련센터까지 세워 훈련시키겠다는 조건을 협의했기 때문입니다.

폴란드를 보고 유럽 전체가 놀라고 있습니다. 튀르키예 공화국(옛 터키)의 땅은 대부분이 아시아에 속하지만 EU가 튀르키예에게 유럽 연합 가입자격을 부여했습니다. EU가 제시한 가입 조건을 튀르키예가 충족시켜 유럽 연합에 가입이 되면 튀르키예는 유럽이 됩니다.

튀르키예는 6.25 전쟁 당시 1개 보병 여단을 파병하여 미국, 영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보낸 고마운 나라입니다. 그들의 희생은 엄청났습니다. 전사자 721명, 부상자 2,147명, 실종자 175명, 포로 346명의 손실을 입고도 전쟁의 잿더미를 딛고 일어나 세계 10위권 강대국이 된 한국의 눈부신 발전에 경탄하며 대한민국을 가리켜 형제국이라며 한국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한국 건설사와 튀르키예 건설사가 합작하여 세계 최장 현수교를 만든 것이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현수교 총 길이는 3,563m, 주탑과 주탑 사이는 2,023m로 다들 불가능할 것이라던 어려운 공법을 한국이 착안하여 무사히 완성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이 현수교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유일한 다리가 되었으니 한국의 위상이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일로 튀르키예는 거대 도시 건설 인프라도 한국에 맡기겠다고 서두르고 있습니다.

인도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한 남아시아 섬나라 스리랑카는 반정부군이 대통령궁을 점령한 뒤 인구 2,192만, 면적 65,610 m2 스리랑카를 한국에 편입하겠다며 모든 통치를 한국에 맡기겠다고 하였습니다. 일대일로 사업에 13조 원의 돈을 빌려준 중국은 난감한 처지에 빠졌습니다.

아시아인들도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며 세계 패권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강대국들이 집결해 있는 극동 아시아 중에서도 세계를 선도할 나라는 일본이나 중국이 아닌 한국이 되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침략만 받았지 한 번도 남의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는 나라로 근본이 선량한 국민이라는 인식이 있는데다 어떻게 해서든 남의 나라를 도와주려고 애쓰는 모습을 다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이제 세계 강대국 틈바니구니에 끼어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작은 나라가 아닙니다. 더 이상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가 아니라고 세계적 석학들이 나서서 강변합니다. 영국 킹스칼리지런던(KCL) 국제관계학 교수 <라몬 파체코 파르도> 박사의 책 "새우에서 고래로: 잊힌 전쟁에서 K팝까지" 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난 1,000년 동안 열강들 사이에서 숨 죽이고 살던 대한민국이 이제는 고래 싸움에서 등 터지고 사는 새우가 아니라, 반도체, 자동차, 선박, 배터리, 휴대폰 등을 발판으로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되었고, 지난 10년 동안 방탄소년단을 앞세운 K팝 음악과 '기생충'을 필두로 한 오징어게임, 트라마 등의 문화 콘텐츠로 세계를 지배하였고, 소프터 파워, 군사력을 키워 어느 나라도 건드릴 수 없는 강대국 고래가 되었다.
한국에는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이 외에 한국을 높이 평가한 사람들의 말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역사학자 <토인비>는 한국의 홍익사상에 대한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21세기는 한국이 지배한다"고 예언했다.

◇ 미국의 <마크 피터슨> 교수는 한국이 세계 최고가 된다고 했다.

◇ 세상에 나도는 말 중에는 한국이 G2라는 이야기도 있다. 러시아는 한국과 G2를 원하고, 미국은 한국과 G2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UN은 세계질서 유지군 창설 때 한국군에 아시아 질서유지군 직함을 주겠다고 했다.

◇ 세계 경제 문명의 중심지로 알고 중국으로 모여든 글로벌 인재들이 중국을 떠나 한국으로 모여들고 있다. 동북 아시아의 허브는 일본이나 홍콩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것이다.
 
◇중국 대도시를 대체할 도시는 서울이라고 뉴욕 타임지가 밝혔다. 현재 중국은 전 세계인들에게 피해를 주는 나라로 인식되어 있다. 금년 77차 UN 총회는 중국에 대한 제재안을 통과시켰는데 일대일로 사업에서 피해를 본 나라들이 대부분 제재안에 찬성했다고 한다. 중국은 각종 제재를 받으며 앞으로 국제 금융 은행들에 접근할 수 없어 상임이사국 지위가 위태롭게 되었다.

◇ 세계 경제기구의 세계은행은 아시아의 긴급의료기구 국가를 한국으로 지정하여 한국에서 치료받겠다고 하였다.

◇ UN의 유네스코는 연구개발(R&D)비 순위에서 한국을 5위로 지정하였는데, 여기에 GDP를 대비시키면 한국이 신기술 투자 세계 1위라고 하였다.

◇ 세계 반도체 장비 1~4위 기업이 한국에 연구개발(R&D) 센터를 설립하겠다며 이미 부지를 마련하여 짓고 있는 곳도 있다.

◇ 미국의 <샘 리처드> 교수는 학생들에게 "세계의 일부가 되고 싶으면 한국으로 가라"고 말했다.

◇ 세계 여러 나라 공항에는 입출국 심사 과정에서 여권 검사 없이 한국인만이 프리패스 할 수 있는 곳이 여러 곳 있다고 한다. 푸른색 한국 여권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 국적을 바꾸는 사람들도 있다.

◇ 한국어를 제2국어로 삼는 나라가 늘고 있으며, 조만간에 UN에서 한국어가 공용어가 된다고 한다. 미국 택사스 주정부는 이미 한국어를 공용으로 쓰고 있으며 다른 주에서도 한국어를 공용어로 채택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 시카고에서는 2,000명의 아이들이 "얼씨구 좋다"며 아리랑을 합창했다고 한다.

◇ 하버드대 <조셉 나이> 교수는 중국은 죽었다 깨어나도 한국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였다. 소프트 파워 면에서 중국은 절대로 한국을 따라올 수 없다는 것이다.

얼마나 빛나게 하셨는가? "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신28:1).


허지만 지금 한국교회는 영적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목회자의 영성회복을 위하여 하나님께 엎드리는 시간이 희미해져 과거 추억으로만 안고 있다. 하나님을 마치  종교적 안개와 신적 구름 너울 신기루 같은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130여년전 이 땅의 교회들은 호화로운 대형 건물이 아니라 불타 버린 47개 예배당의 폐허에서 '빛과 소금' 의 자리를 지켰음을 알아야 할것이다. 그래서 당시 성도들이 생각하는 교회는 구원의 생명줄이었다.


허지만 오늘의 한국교회는  임박한 예수 재림의 9회말과 같다. 자신의 마지막 타석의 무리한 스윙으로 자신들의 목회게임을 승부처로 뒤집으려는 그런 부담스런 행동을 거침없이 하고있다.  교회건물 짓는데 제1,2 금융권 은행 빚 10조원, 한달 이자만도 600억원. 아프리카 전체 인구 6억8천만명의 절반인 3억4천만명이 한달간 먹을양식을 생명없는 흙속에 던진다. 


초대교회는 결코 모이는 장소나 건물자체를 교회로 여기지 않았으며 ‘거룩한 장소’의 개념도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손으로 지은 건물에 계시지 않는다는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행7:48),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배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적합한 곳에서 언제나 영적인 예배를 드렸다(히 9:11).


그들은 구약시대의 성전 개념과 신약시대의 교회개념에 대한 차이점도 익히 알고 있었다. 죤 갈빈도 기독교 강요 제3권 20장 30절에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신자들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신자유주의의 화려한 수사(修辭)에 현혹된 우리의 불행한 선택이 부메랑이 되어 현대교회의 성도들의 목을 옥죄고 있다. 좀더 긴 호홉을 가질 필요가 있다. 개혁은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개혁은 진리의 혁명이다. 진리는 신앙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한국교회는 진리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채색된 창문을 통해 보면서도 자기들의 삶은 맑은 눈을 갖고 보는 식으로 말한다. “내 자신은 깨끗하다”고 우겨대겠지만, 이는 손과 발이 진흙투성일진데 얼굴에 진흙이 없다고 깨끗할수 있겠는가? 


요시야왕은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 애통하며 자기 옷을 찟고 유대민족의 죄과를 통회 했던 것처럼 한국교회에서도 하나님의 진리의 생명의 말씀을 찾아야 한다. 교주적인 레토릭 설교만을 되풀이하는데서 벗어나 이젠 예수 가르침의 이행을 냉정한 본질로서 짚어봐야 한다.


나침반은 아무리 돌려도  언제나 북극성을 향하고 있다. 반딧불이 짙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이유가 자기 안에 빛을 간직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온전히 따뜻하게 할 수는 없지만 마음의 눈으로 세상에 온기를 나눌수 있게 해야 한다. 걸레는 다른 사물에 묻어 있는 더러움을 닦아내게 위해 자신의 살을 헌다. 목회자는 그 비인간화의 속살을 고민 해야된다. 원래의 성직자라는 직업은 땅도, 아파트도, 직장 의자도 없었다. 신부와 승려에겐 가족도 없다. 스님은 쇠고기도 먹지 않는다. 버릴 것도 없는데 그나마 남은 육신마저 고행으로 가볍게 만든다. 역사적으로 순수 성직자들은 가벼운 몸과 강한 정신으로 세속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 넘곤 했다.


로마의 사자밥이 되면서도 굴하지 않았다. 카톨릭 신자들은 대원군의 칼날에 목을 바쳤다.
그래서 성경은 순교라는 뜻과 사도행전 1장8절의 증인(μαρτυσ-말투스)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성직자가 그렇게 강하기 때문에 그들이 움직이면 세속이 긴장하고 떤다. 세상이 얼마나 흔들릴지 세상 사람들은 숨 죽인다. 심장이 두근 거린다. 


마5:18 에서 예수님께서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하셨고,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그것을 다 이루시었고, 다 성취 하셨다(요19:30).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뤄셨기 때문에 십자가 이후에는 구원의 길로서 그 율법의 십일조 기능은 완전히 종결 되었다.


종말론적인 성취와 폐지,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것이 성취되므로 구약의 모든 제도들이 폐지된 것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영화에서 실제가 됐다. 옛 언약의 약속과 선지자의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고 종말론적으로 성취됐다. 옛 질서는 해소되고 제거되고 없어져 버려서 전혀 새로운것이 생긴 것이다.


모든 율법(십일조)이 종결되고 그 세력이 파괴 돼서 더 이상 그것이 나에게 구속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완전 무력화 돼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도 받을 필요가 없고, 안식일도 지킬필요가 없고, 절기도 지킬 필요가 없고, 성전도 있을 필요가 없고, 제사장도 존재할 필요가 없고, 십일조까지 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십일조)의 마침이고(롬10장4절) 완성인데도, 그래도 옛 언약의 백성들은 제사 제도와 오늘의 한국교회처럼 율법의 십일조등을 계속 할까봐, 하나님은 성전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찟고 자신의 심장을 내 보이시면서 물리적 방법으로 성전제사를 완전히 폐지 하셨던 것이다.


성전이 있는한 레위 제사를 계속 지키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예수의 십자가로 율법성취 때문에 지켜서는 안된다는 이방인 그리스도인과의 갈등으로 예루살렘 총회를 열었으나(행15장) 그것으로도 해결이 되지 아니하니 하나님은 아예 AD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을 들어 성전을 옹호하고 예수의 십자가 완성을 무시하는 유대인 110만명을 몰살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아주 깔끔하게 훼파시켜 버렸던 것이다.


그 후 성전 재건은 아직도 이뤄지지 못했고 또 시온주의 결과로 유대인들이 2차 대전후 팔레스틴에 귀환하여 이스라엘을 세웠어도(1948년) 그러나 아직도 성전많큼은 세울수가 없다. 성전이 있으면 율법과 율법의 십일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전만 아니라 제사장 가문을 완전히 허물어 버리심으로 지금까지도 사독의 뒤를 이은 제사장의 후예를 확인해 낼 길이 없다. 그들의 성씨가 코헨(כהן) 이란 사람을 찾아 제사장으로 세울 수도 있다. 왜냐하면 코헨은(כהן)히브리어로 제사장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헨(כהן)이라는 성씨를 가진 자도 찾을 길이 없다. 이 십자가 완성 때문에 한국교회만 제외한 세계 모든 교회가 이 사실을 깨닫고 십일조를 오래전에 완전 폐지하였다. 한국 교회는 속히 개혁과 회복이 필요하다. 가장 시급한 일이 이 십일조 제도를 중단 해야 한다. 십일조가 복의 근거라는 믿는 그 믿음의 신기루에서 속히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맘몬 우상을 배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단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한 교회 공동체를 바로 세워나아가기 위해서는 의무적이고 율법적인 십일조 개념이 아니라 예수님의 온전케 하심을 따라 각자가 모든 힘과 열심을 다해 풍성한 연보(고후8:2), 후한 연보(고후9:13)로  교회가 넉넉하게 함은 당연하다.


'과거란 항상 미래에 의해 밀려나고 미래는 항상 과거를 뒤쫒지만, 과거와 미래는 둘 다 영원한 현재(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창조되고 흐른다. 어둠이 아무리 길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아침이 온다. 아무리 높은 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도 강물은 저 혼자 길을 만들어 바다에 이른다.


복수초는 혹한을 뚫고 땅 위로 올라와 눕고 서기를 반복하면서 스스로 체열을 발산해 주변의 눈과 얼음을 녹이며 꽃을 피운다.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열을 내고, 태양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따뜻한 암술 주변으로 곤충들을 모으고 혼신의 힘을 다해 수정한다. 신비한 생명력을 간직한다. 꽃 향기는 주머니에 싸도 퍼지는 법이다. 단단한 얼음은 작은 송곳에 쪼개지고, 두터운 눈은 한 줄기 봄바람에 녹아내린다. 생명의 신비가 있고, 우주의 문은 열린다. 거센 폭풍이 몰아칠 때 다른 새들은 처마 밑에 숨지만 독수리는 강한 양 날개로 비행을 즐긴다. 사람의 영혼을 천상의 세계로 비상하게 하는 양 날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하심이다.


이제 우울한 그늘에도 따뜻한 배려의 시선을 담고, 숲과 도시, 빛과 그늘을 두루 살피는 한국교회의 순혈주의를 끝까지 바램은 모든이의 소망이어야 한다. 푸근한 모습으로 향기를 품고 신비로운 색깔로 사랑의 느낌을 물씬 풍겨주는 한국교회가 되어야 한다. 비록 지금껏 한국교회는 가시밭에 휩쌓여 상처투성 일지라도 필히 개혁을 이뤄내야 한다.


과거 종교 개혁자들에게도 가시가 있었기에, 그 가시가 종교개혁을 이뤄냈다. 가시에 찔리면 고통스럽지만 그럴수록 교회는 든든히 바르게 서 갔다. 동풍이 불면 서쪽 가시에 찔리고, 서풍이 불면 동쪽 가시에 찔리고, 찔리울수록 진리의 빛은 더 발했다. 개혁이라는 치료약이 우리 영혼에 흘러 들어오게 해야 한다.  훗날 이 세상의 아름다운 소풍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돌아갔을때 '그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웠어' 라고 우리 모두 자신있게 말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아멘- 고동엽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