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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누가복음 2장1-7 / 예수님의 탄생 시기와 탄생 장소

by 【고동엽】 2022. 11. 18.
■2022년 10월11일(화)■
 
(누가복음 2장)
 
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묵상/눅 2:1-7)


◆ 예수님의 탄생 시기


(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예수님의 탄생일은 언제일까?
오늘 설명이 장황하니 바쁜 분은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도 되겠다. 그러나 읽으면 분명히 유익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일을 기준으로 AD와 BC를 나누었다. AD란 라틴어 Anno Domini의 약자다.  Anno는 해(year)이고 Domini는 주님(Lord)이란 뜻인데 전체적으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해 안에 (in the year of our Lord)'라는 의미에서 나왔다고 한다. AD 500년에 로마의 수도원장 디오니시우스가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서기, 또는 기원후라고 말한다.


BC는 Before Christ 즉 '그리스도 이전'이란 뜻에서 나왔는데, 이것은 라틴어에서 나오지 않고 영어에서 나왔다. 17세기부터 유럽에서 사용했다고 한다. 어떤 분은 AD를 AC(After Christ)라고 쓰면 어떠하겠냐고 하는데 그것은 마치 BC와 어울리는 듯 하나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 이후에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통치 시대(in the year of our Lord)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왕조들을 보면 왕이 치세하면서 다시 연호가 정해졌다. 가령 세종 25년에 한글이 창제되었다는 식이다. 그런데 현대는 지구의 모든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예수님의 탄생일을 기준으로 잡은 연호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참으로 왕 중의 왕이심을 실감한다. 올해가 2022년인데 이것을 과거식으로 표현하자면 예수 2022년이라고 해야 한다.


예수님의 탄생일을 기준으로 AD(기원후, 서기)와 BC(기원전)를 나눈 만큼 예수님의 탄생시기는 매우 의미가 깊은데, 아쉽게도 이것이 정확하지 못하다. 예수님은 기원 1년에 태어나시지 않고 기원전 4년 이전에 태어나셨다.


어떻게 이런 오류가 생겼을까?
개인적인 견해로는 애초에 탄생일을 계산한 사람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을 때(AD 33)의 나이를 33세로 계산하는 바람에 기원 1년이 잘못 잡힌 듯하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이 덕분에 예수께서 돌아가신 해는 AD 33년이 정설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의 탄생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날이다. 왜냐하면 그날이 다니엘서에 69 이레라는 예언(단 9:25-26)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당시의 수많은 유대인과 예수님을 처형한 로마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이 몇 년 며칠인지 정확하게 알았겠지만, 태어나신 날은 예수님의 가족 외에는 아무도 정확히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는 감사하게도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짐작할 만한 중요한 자료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은 가이사 아구스도 시대에 태어나셨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황제 옥타비아누스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카이사르(시이저)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는데, 그의 치세는 BC 27년부터 AD 14년까지다. 예수님은 이 시기에 태어나셨다. 그런데 시기의 범위가 너무 넓다.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다시 시기를 좁히는데, 곧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 처음 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수리아가 총독이 된 시기가 AD 6년부터 9년까지라고 한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긴다. 마태복음에서는 헤롯 치하에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는데, 헤롯은 BC 4년에 사망했다. 구레뇨와 헤롯은 시기가 겹치지 않는다. 대단히 혼란스럽다. 무엇이 오류일까?


일단 가이사 아우구스투스와 헤롯의 치세는 역사적으로 고정되었다. 문제는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된 해다. 어떤 성경 사본에는 '두 번째'라는 말이 추가되어 있다고 한다. 즉 구레뇨가 두 번 수리아 총독이 되었는데 첫 번째 총독시기에 한 것이라고 기록한 사본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이 난제를 해결할 단서를 제공한다.


즉 구레뇨는 BC 4년부터 AD 1년까지, 그리고 AD 6년부터 9년까지 두 차례 수리아 총독을 했는데, 그중 BC 4년과 AD 6년 두 차례에 걸쳐 인구조사를 했던 것이다. 그 중 오늘 본문은 BC 4년에 내린 명령이다.


사실 이런 사본이 발견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아는 우리들은 이런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의 어떤 역사책보다도 성경의 역사가 더 진실하고 정확함을 알기 때문이다.


누가가 이것을 기록할 때는 구레뇨가 호적할 당시의 사람들이 꽤 살아있었을 시기이기 때문에 헷갈리거나 혼동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더구나 누가의 편지를 받는 대상이 꽤 높은 지체의 데오빌로라는 사람인데, 그에게 엉터리 사실을 써서 보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생각해보라. 육이오 전쟁을 겪은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살아있는 이 시기에 소위 지체 높은 사람에게 어떤 사실을 기록하여 보낸다는 사람이 육이오 전쟁이 박정희 정권 시대 때인지 이승만 정권 시대 때인지 헷갈린다는 게 말이 되는가?


사람들은 역사책을 가지고 성경을 판단하려고 하지만, 잘못되었다. 오히려 성경을 가지고 역사책을 판단해야 한다. 역사책은 수백 년 지나서 기록한 것이 많고, 역사학자들이 제멋대로 첨삭을 한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성경은 당대의 사람들이 쓴 것일뿐더러 아주 조심스럽게 복사되었고, 진실한 사람들에 의해서 아주 철저하게 보존된 책이다. 그리고 고고학은 언제나 역사책보다 성경이 옳았음을 증명해왔다.




◆ 예수님의 탄생 장소


(4-5)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요셉과 마리아의 베들레헴 이동은 대단히 의미 깊다.
왜냐하면 선지자들이 말하길, 메시아 곧 그리스도께서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을 예언하기 때문이다.


구약의 선지자 미가는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이 아닌 다른 곳에서 태어나신다면 그는 구약에서 말하는 그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께서 태어나실 즈음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 조상의 고향에 가서 호적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이것은 인권을 완전히 무시하고 모든 것을 강제화하던 시기에나 가능한 명령이다. 오늘날 같으면 말도 안 되는 명령이다.


이 명령에 따라 요셉과 마리아는 움직였고, 결국 베들레헴에서 아기를 낳게 되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인가?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구글 지도의 거리를 기준으로 보면 145km이다. 이 거리는 잠실 롯데타워에서 세종시청까지의 거리(149km)다. 아마도 나귀 타고 가거나 빠른 걸음으로 하루에 50km씩 걷는다면, 대략 3일 정도 걸리는 거리다.


마리아는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만삭이었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아기를 낳았으리라 추측하지만, 본문을 보면 '거기에 있을 그 때에'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진즉에 도착했고, 아마도 공동 숙소나 야영했을 가능성이 크다. 표준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되었다."


마리아가 아기를 낳을 시기가 되자 낳을 곳이 마땅치가 않았던 것 같다. 수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이나 야외에서 아기를 낳을 수는 없지 않은가? 조용한 방을 찾았지만, 끝내 없어서 마굿간을 택했고, 조용한 그 밤에 예수님은 태어나셨다.


우리 구주께서 구유(말 먹이통)에 누이시다니!
나는 이 대목에서 언제나 깊은 감동과 함께 눈물이 난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면 얼마든지 여관을 비울 수 있으셨다. 꿈에서 하나님께서 여관주인에게 지시만 하셨어도 여관 전체를 비우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신가? 그런데 하지 않으셨다. 그냥 모든 것을 양보하신 채로 말구유를 택하셨다. 놀라운 은혜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취하신 겸손이며 우리를 향하신 사랑이다.


주 예수님,
주님께서 이 땅에 구주로 오심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믿음 안에서 주님의 그 겸손과 사랑을 배우게 해주십시오.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Dob/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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