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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만한 제자(마태복음 10장 24절~28절)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 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사람들이랴.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 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 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형만한 아우 없다'라고 하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다는 아니겠지만 대체로 아우가 형보다 키도 더 크고 몸집도 더 실하고 성격도 더 활발한 것을 많이 봅니다. 형 없이 자라는 사람과 형이 있는 사람은 그 심리적 발달 상태가 같지 않은 모양입니다. 어린아이들이 밖에서 노는 것을 관찰해보더라도 형이 없는 아이들과 형이 있는 아이들은 벌써 기질 면에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형이 있는 아이들은 형하고 같이 나가게 되면 기세부터가 자못 당당합니다. 또래들에 대하여 '내 형'을 믿는 배짱이 있어서입니다. 집안에서도 형보다는 동생 쪽이 비교적 고집스럽고 응석이 더 심합니다. 한 번 울기 시작하면 누가 '줄 항복'을 하기 전에는 그칠 줄 모르는 경향이 있는 것도 그 같은 심리적 현상의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형만 못한 것이 됩니다. 형을 의지하는 잠재심리에서 그같이 아우 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니까요. 아우가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결국 형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우리 집에서도 형제를 키우면서 보니까 큰아이한테 처음으로 "하나 둘 셋……"하고 '열'까지 세는 것을 가르치는 데 열흘 남짓 걸렸습니다. 그런데 둘째는 아예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딱지치기하느라고 다 배웠어요. 형하고 놀면서 어깨너머로 익힌 것입니다. 말하자면 형은 '개척자'인 셈이고 동생은 그러한 형을 뒤쫓아가기 때문에 모든 것이 쉬운 셈입니다. 그러므로 아우에게는 형에 비해서 파이오니어(Pioneer)기질이 부족합니다. 결국 '형만한 아우 없다'는 말은 심리학적으로도 맞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형 만한 아우 없다고 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체계적으로 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형은 아우보다 경험을 더 가졌습니다. '경험'이라는 것이 만만찮은 것이어서 어렸을 때에는 불과 한 달 터울도 여간 큰 차이가 아닌 것입니다. 황차 일이 년 터울로 경험이 앞섰다면 더더욱 대단한 격차를 보일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흔히들 말하는대로 나이가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 하고 쉽게 말해버릴 수가 없습니다. 경험이야말로 하루가 다른 것입니다.
둘째, 장자(長子)는 언제나 책임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형이면 아우보다도 책임감이 더 투철합니다. 부모에 대한 책임도 느낍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사람들은 형제가 있어 그들에게 유산을 나누어주게 되면 형에게 동생의 두 배 몫을 나누어줍니다. 두 몫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유산을 세 몫으로 나누어 형에게 두 몫을 주고 나머지 한 몫을 동생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는 그만큼 형에게는 가문적(家門的)인 책임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세째는 리더십(Leadership)입니다. 작은 관계이지만 형은 동생을 지도하면서 자랍니다. 동생을 업어주기도 하고 붙잡고 다니기도 합니다.
물론 일률적으로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저러한 여러 가지 근거에서 '형 만한 아우 없다'고 하는 속담도 생겨났다고 하겠습니다. 그런가하면 성경에는 이상하게도 에서 같은 형에 야곱 같은 동생이 있고, 가인 같은 형에 아벨 같은 동생이 있습니다. 형이 동생만 못한 케이스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우리는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잠언말씀을 봅니다. 얼마나 당연하고도 알기 쉬운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듯 언제나 범상하고도 평이합니다. 그런데도 그 깊이가 무궁무진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알아듣기 어려운 소리로 깊이 없는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는 사람들의 말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라 하겠습니다.
제자가 아무리 높아보아야 선생보다 높지 못하고 종이 아무리 교만해보아야 상전보다 높지 못하다고 하신 이 말씀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가 그 선생같고 종이 그 상전같으면 족하도다"하셨습니다. 제자가 선생 만큼에만 이를 수 있으면 성공이요 종이 상전 만큼 이나마 컸다면 그것으로 훌륭한 것이다 --'형 보니 아우'라고 한 우리네 속담을 생각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슨 마음,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그 복음성(福音性)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자'란 헬라어로 '마데테스'인데 이는 랍비의 제자 곧 학생을 가리킵니다. 영어로는 스튜던트(student)가 아니라 디사이플(disciple)로, 조금 더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선생'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디다스칼로스'로, '랍비'에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일반적인 학교에서 가르치는 '선생'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새는 선생과 학생의 관계가 참 어려워졌습니다. 학생은 선생한테서 백화점에서 돈 내고 물건 사듯이 지식만 사면되는 것쯤으로 되어버려서 선생님을 스승으로 존경하는 제자로서의 참모습을 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제가 한 30년 넘게 신학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오고 있기 때문에 저에게 배운 사람이 참 많습니다. 주로 목사님들이 저와 사제의 관계에 있는데, 이런 분들이 저를 누구에게 소개할 때에 보면 "제가 곽목사님으로부터 배웠습니다."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분은 "이 곽목사님이 제 스승이고 제가 그 제자입니다"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뜻을 가지고 이렇게들 말하는지 그 개념은 잘 모르겠지만 제가 듣기에는 "제가 이분의 제자입니다"라고 하는 말이 한결 좋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지식만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서울에 있는 목사님으로 목회 잘하시는 분이 있는데 이분은 만날 때마다 "이거 신통한 제자가 못돼서 죄송합니다"라고 인사를 하는데, 그 때마다 좀 지나치다 싶고 좀 미안하다 싶습니다. 신통한 제자 하긴 그분이 이상하게도 저와 관계가 많아서 여러 해 동안 교분을 이어오고 있는 교수입니다. 대학 때부터 대학원까지 제가 논문을 지도했고, 그밖에도 여러 모로 관계가 많았습니다마는 그렇더라도 스승 만한 제자가 못되어서 미안하다고 하는 겸손 앞에서 저는 늘 거북함을 느끼면서도 일리가 없지는 않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여러분, 세상이 황폐해지다보니 스승과 제자의 관계도 엉망으로 무너지고 사제의 윤리가 실종되었다고들 개탄을 합니다마는, 어디까지나 제자는 제자요 스승은 엄연히 스승입니다. 제자가 나중에 아무리 훌륭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 바탕에는 스승의 가르침이 깔려 있는 법입니다.
적어도 그러한 의식은 있어야 합니다. 나는 제자다, 나에게는 스승이 있다 --이러한 의식은 없이 '내가 잘나서'라고, '내 힘으로'라고, 유아독존적(有我獨尊的)으로 생각하고 산다면 잘못입니다. 일반적인 뜻으로는 우선 스승은 가르치는 자요 제자는 가르침을 받는 자입니다.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 받는 자가 얼마나 깊은 관계를 가집니까? 제자는 스승을 존경하든 안 하든 스승에게서 배웁니다. 배우게 되어 있습니다. 존경하면서도 배우고 미워하면서도 배웁니다.
사람이란 듣는 대로 달라지고 보는 대로됩니다. 보는 대로 듣는 대로되는 것 --도리 없습니다. 문화인류학적으로 말한다면 사람의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다 배운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두 발로 걸어다니는 것도 배운 것입니다. 태어나서 사람을 못보고 짐승들과 함께 짐승처럼 자라난 사람이 있는데, 걷지를 않고 엎드려서 기더라고 합니다. 말이라고는 한 마디도 못하고 짐승의 소리를 내더랍니다. 듣지 못하고 보지 못했으니 그렇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무릇 우리의 사는 모습은 모든 것이 배워서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각, 철학, 신앙까지도 배운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배우지 않고는 속에 아무리 귀중한 보화가 있다 해도 계발되지 않습니다. 뚜껑을 열어주지 않으면 발전을 못합니다. 천재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마는 그들의 천재가 결코 혼자서 된 천재가 아닙니다. 천재 되게 하는 계기가 있어야 천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가르침 받았다고 하는 자기 입장을 항상 겸비하여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는 스승을 따르고 스승으로부터 배우고 스승을 닮는 법입니다.
지식, 경험, 능력, 지도력, 그리고 특별히 책임감 --이런 것이 다 스승의 것입니다. 스승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랍비의 교훈에, 제자는 적어도 하루에 세 번은 스승의 얼굴을 뵈어야 제자요, 스승의 교훈을 평생토록 착실하게 따라야 참제자요, 스승이 죽는 일이 있을 때에는 함께 죽어야 참제자라고 하는 교훈이 있습니다. 어느 부분만, 몇 과목만 공부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그로부터 배우고, 일생을 따르고, 같이 죽는 것이 제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제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잘 읽어보면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네 복음서에서는 '제자'라고 하는 낱말 '마데테스'가 12제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부터 서신(書信)으로 가면서는 이야기가 달라져서 '제자'라고 하면 '믿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입니다. 똑같은 낱말을 썼는데도 개념이 이렇듯 다릅니다. 복음서에서는 12제자가 '제자'이지만 사도행전 이후로는 무릇 믿는 사람을 '제자'로 지칭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모름지기 이 점을 잊지 말 것입니다.
제자가 그러할진대 '종'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종은 주인의 소유요, 주인의 명령에 절대복종 합니다. 주인이 죽으라 하면 죽어야 합니다. 심지어는 주인이 종을 죽였을 때에는 살인죄가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주인이 마음대로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인도적으로 생각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만약에 제자가 스승보다 못한 것이라면 세상에 발전이란 있을 수 없을 것이 아닙니까? 제자가 스승보다 나아야 발전이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겠고, 또한 종이 주인만 못하다면 '인권'이 문제되는 것 아니냐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문제를 놓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나 종에 대하여 그 '영웅심'을 허락치 않으십니다. 교만을 용납치 않으십니다. 제자는 아무리 커도 제자임을 잊지 말라, 좋은 그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종임을 잊지 말라 하심입니다. 종이 가진 능력은 종의 것이 아닙니다. 종의 기술도 주인의 것이요 종이 번 돈도 주인의 소유입니다. 종이 유능하다고 해서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니고 수당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너희는 제자요 너희는 종이다, 그것을 잊지 말라' --예수님께서 분명히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이러한 의식을 똑바로 가지고 살 것입니다. 아무리 컷다 해도 나는 어디까지나 제자입니다. 제자가 아무리 잘났다 해도 스승 앞에서는 어디까지나 제자일 뿐입니다. 여전히 제자일 뿐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는 제자에 대하여 종에 대하여 큰 위로가 있고 경고가 있고 특권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새겨보십시다. 먼저 위로의 말씀이 있는데, 놀라운 위로입니다. 제자의 한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는 어디까지나 제자라고, 제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제자의 영역, 제자 됨의 한계(limitation)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어떤 경우에 있든지 그것은 내가 다 가르친 것이다, 내게 배운 것이다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오늘의 본문으로 말씀하시게 되는 것은 12제자를 임명하고 파송 하시면서 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앞으로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을 내다보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10:17)." 그리고 22절을 보면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내 제자이기 때문에 너희는 미움을 받을 것이다, 많은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어라, 배신하지 말아라, 끝까지 제자로서만 살아가면 마침내 구원을 얻을 것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여기서 하시는 말씀은 이렇습니다. 환난도 당하겠고 숱한 어려움도 당하겠지마는 염려할 것 없다, 내가 스승이요 내가 가르쳤으니 그 책임은 내가 진다, 내가 가르친 바대로 행하면서 고난 당하는 것 내가 책임진다, 내가 가르친 대로해서 죽음을 당한다면 내가 살린다, 내가 가르친 대로, 스승이 가르친 그대로 해서 제자 된 너희가 어려움을 당하고 손해를 보았다면 스승인 내가 갚는다 --이 말씀입니다. 위대한 참스승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시는 한편으로 14장 12절에 가서 보면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고도 말씀하십니다. '내 제자는 나와 같은 일을 할 것이요, 내가 한 것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이 말씀인데 혹자들 가운데는 이 말씀을 교만스럽게 해석하여 경망을 떠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에 5천 명을 앞에 놓고 설교하셨는데, 나는 오늘날 1만 명을 앞에 놓고 설교한다"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씩 병을 고치셨지만 나는 일시에 수백 수천 명의 병도 고친다" 이렇게 방정을 떠는 것입니다. 참으로 위험한 교만입니다. 내가 비록 수만 명을 앞에 놓고 설교한다 하더라도, 내가 비록 수백 수천 명의 병을 고쳐주었다 하더라도, 언제나 잊지 말 것은 '나는 제자'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본을 보이셨습니다. 먼저 행하셨습니다. 가르쳐주셨습니다. 내가 지금 아무리 큰일을 한다 해도 나는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충직하게 겸손하게 살아가는 데 있어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큰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까? '배우고 따르고 부지런히 좇으라, 내가 걸은 길대로 가고 내가 하던 일 너희도 하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 너희도 사랑할 것이니라, 내가 가르친 대로만 하라, 귀신도 좇고 병자도 고치고 나가서 전도하고 핍박을 받아도 견디고 하라, 내가 보여 준 대로만 하라, 내가 책임지니 아무 걱정하지 마라, 순종만 하라, 가라 했으니 가고 오라 했으니 오면 된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는 절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참으로 귀한 위로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5절을 보십시다. 도마가 주님께 여쭙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어디로 갈까요?' '어떻게 갈까요?' 하고 여쭙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디로 가느냐는 왜 물어보느냐? 그건 알아서 무엇 하느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I am the way." 그러니 물을 것 없지 않느냐 -No question! 그냥 따르면 그만입니다. 구구하게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과연 옳은 말인지 그른 말인지, 이렇게 가면 이익이 올 것인지 손해가 올 것인지,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 따위로 쓸데없는 생각은 할 것 없습니다. 제자들은 그런 것을 묻는 법이 아닙니다. 묵묵히 따라갈 뿐입니다. 종은 그런 것을 묻는 게 아닙니다. 주인이 하라는 대로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쓸데없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를 마라, 내가 간 길을 따라오기만 하면 천당 갈 것 아니냐, 내가 한 대로만 행하면 내가 가는 데로 너희도 갈 것이요, 내가 가르친 대로 순종만 하면 내가 가 있는 데로 너희도 갈 것이다, 내가 부활한 것처럼 너희도 부활할 것이다' --확실한 약속입니다. 이처럼 좋은 약속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제자는 스승에게 아무 것이나 묻는 것이 아닙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면 겪는 일입니다 마는 질문도 조심해야 되고 질문에 대한 교수의 대답도 조심해야 됩니다. 아는 것이면 대답하고 모르는 것이면 모르겠다 하고 넘겨버리고 말면 좋은데, 어떤 때에 보면 어떤 학생들은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 골탕먹이려고 묻는 일이 있습니다. 마치 염소와도 같은 제자라 할까요? 그런 질문은 하는 법이 아닌 것입니다. 순수한 제자의 도리로, 아주 깨끗한 마음으로 따라가는 것이 옳습니다. 사제간에는 적어도 이만큼은 인격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마땅합니다. 다 알아보고 비판하면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스승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참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스승이 하는 말이니 옳을 것이라고, 스승이 권위자이니 그분의 이야기가 옳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스승의 권세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공부는 되지 않습니다.
저는 강의를 할 때에 조금 고집을 부립니다. "이 강의가 다 끝날 때까지는 질문을 받지 않는다"고 단서를 붙여둡니다. 한창 정신을 집중해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불쑥 일어서서 김을 빼는 학생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맥을 끊어놓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질문할 사람 있으면 질문하라고 말할 때까지는 의심도 하지 말고 다 옳은 줄 알고 끝까지 들어보고, 들어두었다가 생각을 하고, 집에 돌아가 깊이 생각하고, 그리고 돌아와 다시 잘 생각해보고, 그래도 잘 모르겠다고 한다면 이야기가 됩니다마는,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다 끝나기도 전에 이야기의 중턱을 자르고 들어와 이렇고 저렇고 질문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학생이 취할 바른 자세가 아닌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고 연구해본 연후에 질문할 것입니다.
예수님 하시는 말씀을 어떻게 다 이해하겠느냐, 어떻게 다 알겠느냐고들 회의를 합니다마는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요 14:7)"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우리들은 천당 못 가 보았지만 주님께서 보셨으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가본 것이나 진배없이 믿어야 합니다. 지금 살아 있는 우리는 죽어본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천당도 못 보았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면 믿고 신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참 제자요 편안한 제자입니다.
비판할 것 없고 의심할 것 없습니다. 그야말로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습니까?
제가 북경에 갔을 때, 어떤 가정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데 한 시간 설교를 했지요. 그런데 더 하라고 하기에 한 번 더 했습니다. 그랬더니 거듭해서 하라고 해요. "그만 합시다"하고 끝냈지요. 그러자 한 분이 벌떡 일어서더니 "오늘 교양 전폭적으로 접수합니다"해요. 이런 말은 북한에서나 쓰는 말이지마는, 아무튼 전폭적으로 '접수'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가 선생만하겠느냐 하시고 묵묵히 따라오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길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스승이 제자의 발 씻기는 본을 당신께서 보이셨으니, 우리도 서로서로 발 씻겨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 : 14, 15)." 엄청난 위로의 말씀입니다. 제자인고로 아무 염려하지 말라,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운명도 내가 책임진다, 하나씩하나씩 배우고 따르는 충실한 제자만 되면 된다, 스스로의 운명까지 책임지려고 하지 말아라, 세상일 혼자 다 하는 것처럼 하지 말고 조용히 배우라, 내가 네게 말해주는 것만 순종하면서 따라오면 생명의 길을 갈 것이다 --이렇게 위로하십니다.
두 번째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스승이자 주인 되시는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십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예수님의 생애 전부가 고난의 생애입니다. 그렇다면 그 제자가 고난 당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주인이 고난을 당하는데 제자가 어떻게 고난 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 제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음으로 해서 고난 당하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 당하신 것 다 당해야 합니다. 우선 오해를 받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오해 많이 받고 삽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하고 예수님께서도 오해를 받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도 오해를 받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은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하는 오해도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피를 마시는 사람들이라고 오해받는 일도 있었습니다. 성찬식 할 때에 '이것은 내 피요, 내 살이요'하니까 뒷전에서 듣고 '아, 저 사람들은 사람의 피를 먹고 마시는구나'하고 오해한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기독교인들은 여자와 종과 상전이 한자리에 모여서 예배드리고 더욱이 서로 '형제요 자매요'하니 '저런 상놈들이 어디 있냐,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가 상놈이요 부도덕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로마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가리켜 비종교인(非宗敎人)이라고 욕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우상이 없지 않습니까? 우상이 없으니 저들이 볼 때에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신이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오해라는 것은 참 엄청난 것입니다.
모략중상도 당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도 있듯이 예수님을 귀신들린 자로, 바알세불로 몰아붙입니다. 이단이라고 하는 말도 많이 들었습니다. 안식일 때문에도 비방을 당합니다. "예수는 죄인의 친구다"라고까지 저들은 비방했습니다. 세리네 집에 가서 식사를 했더니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했던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예수는 먹고 마시는 자다, 먹기를 탐하는 자다"라고 헐뜯는가 하면 세속주의자로 격하시킵니다. 이런저런 숱한 핍박을 당하시다가 마침내는 십자가를 지시는 고난을 당하십니다. 굴욕을 당하십니다. 저주를 당하십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그토록 고난을 당하셨으니 그 제자들이 어찌 고난 당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한가지 짚고 나갈 것이 있습니다. 정말로 스승을 사랑하는 자는 스승이 고난 당할 때에 내가 고난 당하는 것 같고, 내가 당할 고난을 스승이 대신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픔을 그대로 느낍니다. 그러므로 내가 고난 당하는 것은 아프지 않습니다. 스승이 고난 당하는데 내가 당하는 고난쯤이야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다 불타버린 다음에 랍비들이 준 교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버린 이 마당에 우리가 불행한 것에 대해서 무슨 슬픔이 있을 수 있습니까?' --개인적인 슬픔은 슬픔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고난 당하셨고 죄 없는 분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 고난의 의미를 깊이 아는 자라면 나 같은 죄인이 고난 당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까짓 욕 좀 먹는 게 대수이겠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데 내 어찌 예수님과 똑같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 있겠는가!"해서 자신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라고 청했습니다. 바로 그런 마음입니다. 거꾸로 매달리면 고통이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그러나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아플 것이 없습니다. 스승이 고난 당하십니다. 주인이 고난 당합니다. 그런데 종과 제자가 뭐 그리 아픈 게 많아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깨끗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허물 많은 우리 인간이 욕 좀 먹고 비난 좀 받는다 해서 대수이겠습니까? 우리가 걱정하고 근심하고 억울해하고 분해하고 하는 것, 다 신앙이 없는 소이(所以)입니다. 한번 더 십자가를 쳐다보십시다. 내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십니다. 그리고 스승의 고난을 한번 생각해보면 오늘 내가 당하는 고난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을 보십시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걱정을 하지 말아라, 내가 먼저 가노라, 다 이겨놓았고, 따라오는 너희의 그 고난을 다 내가 책임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배신하지 말 것입니다. 끝까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야 합니다. 끝까지 예수님의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동시에 오늘의 본문은 특권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환난 당할 때에 영광을 얻습니다. 제자로서 고난을 당할 때에 제자로서 영광을 누립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자랑삼고 예수님의 종이 된 것을 항상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제자 중에도 최우수 제자가 있습니다. 바로 순교자가 그렇습니다. 평안하게 죽어 가지고는 상급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어떤 분은 평생의 기도 제목이 병원에서 죽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주사 맞아가면서 죽게 하지 말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뜻 있는 자리에서 뜻 있게 죽도록 해달라고, 가능하면 순교가 좋다고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죽음에 대한 문제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저렇듯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셨는데, 제자인 나는 그저 안 죽으려고만 바둥바둥한다면 되겠습니까? 제자답지 못하지요. 요리조리 피하다가 할 수 없이 죽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제자 된 영광, 종 된 영광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순교자의 길입니다. 그 길을 갈 때에 하나님께서 가장 큰 영광으로 은혜를 더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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