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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장 31절~38절)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소아과 의사가 한 어린이를 진찰하고 나서 진단을 내립니다.
"이 아이의 병은 내가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이 병은 사랑을 받지 못해서 생긴 병입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뜻밖의 진단에 화들짝 놀랐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 아이의 아버지와 제가 이 아이를 얼마나 정성껏 사랑하는데요." "바로 그 사랑의 질(質)이 문제입니다."
미국 샌 디에이고(San Diego)라 하면 경관이 좋고 기후 조건이 뛰어나 살기 좋기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샌 디에이고 외곽에는 어머 어마한 저택들이 많습니다. 이곳 어느 집에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대낮입니다. 안주인이 전화를 받습니다. 한국전쟁에 참가했던 아들이 귀향(歸鄕)을 알리는 전화였습니다. 어머니는 너무도 기뻐서 목소리를 높입니다. "얘야, 당장 집으로 돌아올 일이지 전화는 왜 거느냐? 우리 모두가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속히 들어오거라." "알았습니다, 어머니. 그런데 집으로 가기 전에 청원이 하나 있습니다. 저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친구 하나를 데려가고 싶습니다." "아, 그래? 데려오려무나." "그런데, 이 친구에게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전쟁에서 부상을 당해 눈 하나와 팔다리 한 짝씩이 없습니다. 오갈 데가 없는 친구라 제가 데리고 살까 합니다." "아무튼 데리고 들어오너라. 한 달쯤 같이 살자꾸나." "아니예요, 좀더 오래 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럼 일 년쯤 같이 살도록 하자. 천천히 돌려보내지 뭐." "아닙니다. 일생동안 같이 있고 싶은데요." 어머니는 대답했습니다. "얘야, 네가 전쟁터에 나가 있더니 꽤 감상적인 사람이 되었구나. 냉정히 생각해야지. 그런 불구자와 평생을 같이 지내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란다. 처음에야 불쌍하고 측은한 마음에 성심껏 대해줄 수 있겠지만 얼마 지나다보면 거추장스러워질 때가 온단다. 무거운 짐이 되는 거지. 그러니 일생을 함께 지낼 생각일랑 말아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덜커덕하고 전화가 끊겼습니다. 몇 시간 뒤, 해군본부로부터 한 장의 전보가 날아들었습니다. "귀댁의 아들이 유감스럽게도 샌 디에이고 호텔 12층에서 투신하였음을 통보합니다." 부상을 당했다는 친구는 바로 그 아들 자신이었습니다. '우리 집에서 나를 어떻게 맞아줄까? 이런 내가 집에 돌아가도 되는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전화를 걸어본 이 아들은 어머니의 대답을 듣고는 '그럴 줄 알았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엄연한 실화입니다.
여러분, 사랑한다는 것이 정녕 무엇입니까? 나를 위하여 남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애(自己愛)의 일부일 뿐이요, 이기적인 감정일 따름입니다. 욕망과 욕정이 만나는 사랑은 동물적인 본능에 불과합니다. 적어도,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당신에게 나 자신을 드리리다, 하는 것에서부터 사랑은 시작됩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정확한 통계자료가 없기 때문에 미국의 통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미국사람의 3분의 2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합니다. 전 인구의 10분의 1이 정신병치료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18세부터 24세에 이르는 청년들의 사망 원인 중 세 번째가 자살입니다. 이 모든 질병과 문제의 근원은 사랑의 결핍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함으로 인한 발작적 증세가 우울증이요 자폐증이요 자살에 이르게 되는 심리적 불안입니다.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이 변질되었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처럼 흔한 것도 없지만, 이 사랑이 모두 병들었다는 것입니다. 사회의 제반 문제는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학원 문제, 노사(勞使) 문제, 민생 치안 문제…… 하나같이 사랑 받지 못한 사람들의 몸부림입니다. 받아 마땅한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정신질환자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노사간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을 때, 한 노동자가 이야기했습니다. "노사 문제는 절대로 임금을 에워싼 문제가 아닙니다. 인권 문제입니다. 사람 대접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월급을 좀 적게 주어도 괜찮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해주십시오." 돈으로 해결될 문제라면야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뿌리깊이 박혀 도통 해결될 줄 모르는 근본 문제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육체의 질병, 정신적인 질환, 사회적인 병, 도덕적인 병--이 모든 것이 다 정당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의 병리적 정신현상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야(前夜), 내일 아침이면 십자가를 지셔야 할 바로 그 순간에, 성만찬 예식을 거행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유언 삼아 교훈을 주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34절)"---어떠한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이 사랑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사랑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아가파테 알렐루스)"---'아가페'라고 하는 사랑을 사전적(辭典的)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역사(役事) 그대로가 사랑의 의미요 사랑의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 계명을 지킬 때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이 사랑을 깨달음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며, 이 사랑을 실천함으로 그리스도의 인격을 체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격하며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요, 외적으로는 이 그리스도적 사랑을 실천하면서 그 사랑의 신비로운 능력과 오묘한 행복을 확증하며 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생각해봅시다. 기막힌 순간입니다. 내일 아침이면 십자가를 지셔야 합니다. 그러한 시간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 그 사랑, 그 사랑 안에 있는 신비로운 행복---이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유사(有史) 이래 사랑이라는 말처럼 흔하게 쓰인 말이 또 있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이것이 새롭다는 말씀입니까? 그 목적이, 그 동기가, 그 뜻이 근본적으로 새롭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기에 특별한 사랑입니다. 철학적 이론이 아닙니다.
세상 어디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질(質)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설명하시는 사랑이기에 새 계명이요, 십자가의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새 계명이요, 보상을 받자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께로서 받은 바 엄청난 사랑에 대한 진실한 응답이기 때문에 새로운 뜻의 사랑인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알면서부터 인격을 거론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깊이를 깨닫는 정도만큼 인격의 성장이 병행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전혀 모른다던가, 사랑을 할 이유가 없다든지 하는 사람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철이 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사랑을 안다는 뜻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랑을 준다는 것은 최대의 위선(僞善)입니다. 받은 사랑이 없는 자가 사랑한다고 할 때, 자기 사랑으로 남을 억압하게 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을 괴롭히며 남에게 고통을 더하여줍니까? 스스로 속지 마십시다. 사랑은 괴로움이 아닙니다. 그렇게 값싼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사랑의 뜻 자체가 중생하여야 합니다. 사랑을 말하기 전에 그 뜻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사랑의 의미를 다시 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동기와 뜻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미국의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e)」에서 사랑을 다섯 가지로 특징짓고 있습니다. '첫째는 관심을 가지는 것이요, 둘째는 책임을 지는 것이요, 셋째는 존중하는 것이요, 넷째는 이해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주는 것이다'---정확한 분석이라고 생각합니다마는, 문제는 이러한 마음이 어느 때에 생기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랑해야 될 줄은 압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보니, '당신의 아내를 사랑하십시오'라는 문구가 적힌 광고판이 있습디다. '사람들 참, 별소릴 다하는구먼.
제 아내 사랑해야 할 줄을 누가 모르나?'하고 실소(失笑)했습니다마는, 꼭 사랑해야 할 사람인데 사랑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을 어찌합니까? 당연히 사랑해야 할 사람인데 마음으로부터 사랑이 우러나지 않는 것---이것이 참으로 문제입니다. 사랑이 좋은 줄을 모릅니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문제는 철학적 지식의 결여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마음, 사랑의 동인(動因), 사랑의 동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힘, 사랑의 마음---이것이 은사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사랑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은사를 주셔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야 합니다. 사랑의 영을 주셔야만 내가 당연히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일생동안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깊은 사랑의 뜻을 아는 순간, 우리는 자기희생과 순교로써 응답을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사랑에 대한 응답은 순교입니다. 이것은 조금도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13-14절)"---미치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딱해도 당사자는 마냥 행복합니다. 사랑에 미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랑에 미쳐서 내 일생을 다 바쳐버리고 순교의 죽음을 죽으면서도 감사하고 기뻐하고 주를 찬양하는 것---이것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받은 사랑은 어떠한 사랑입니까? 우리가 지금 받고 있는 사랑이 어떠한 종류의 사랑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어떠한 사랑입니까?
첫째는 사랑을 모르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 즉 이해 받기를 기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할 때 상대방의 이해를 먼저 요구합니다. 그 이해에 의존하여 사랑하려 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다가도 상대방의 이해가 부족하다고 낙심하고 좌절해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은 그런 유의 사랑이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특별히 13장 1절을 읽어봅시다.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제자들이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내일 아침이면 십자가를 지시리라는 예수님의 마음에는 아랑곳없이, 이들은 자리다툼에 여념이 없습니다. '네가 우편에 앉을 것이냐, 내가 좌편에 앉을 것이냐?' 치열한 명예 다툼입니다. 시기와 질투로 마음이 어지럽습니다. 생각하면 기가 찰 노릇이 아닙니까? '이런 인간들을 제자라고……' 우리 같았으면 이렇게 탄식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교부 크리소스톰(Chrysostomos, I.)은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의 발부터 먼저 씻기셨다고 전합니다. 차례차례 열두 제자의 발을 모두 씻기십니다. 왜 씻기시는지도 모르는 이 답답한 사람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끝까지 사랑하심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7절)."
요새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사랑한다고 하면서 너무 얄팍합니다. 당장에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아내가 저녁 식탁에 맛있는 음식이라도 한 접시 정성껏 해 올렸다고 합시다. 그것을 알아달라는 마음으로 먹기도 전에 "맛있어요?"라고 묻습니다. 툭하면 기자회견부터 먼저 하려고 드는 세태입니다. 소문부터, 말부터 요란해야 성에 찹니다. 좀 은근한 구석이 없습니다. 세월이 지나서 문득 '아, 내가 그때 그런 사랑을 받았던가? 그분이 나에게 그렇게 은혜를 베푸셨던가?'하고 절감하게 되는 멋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을 모르는 자,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둘째로, 원수를 사랑하셨습니다. 원수 사랑이라고 하면 이것이 무슨 사랑의 극치인 양 낯설게 생각하지 마십시다. 우리가 매일같이 받고 있는 사랑, 바로 이 사랑이 '원수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 10절에서 이 사랑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내가 하나님 앞에 원수 노릇을 하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이미 내가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움을 받고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의 사랑을 받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 사랑, 바로 그 사랑을 우리가 먼저 받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의롭다 하는 사랑입니다. 'justification, justifying love'입니다. 사랑 중 최고의 사랑이 바로 명예를 주는 것이요, 의(義)를 주는 것입니다. 죄인을 의로 대하는 것입니다. 내 의를 덧씌워서 그를 의인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더러운 자를 더럽다고 하지 않습니다. 내 의를 덧입히고 대신 죄인이 되어서 그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죄인의 누명을 썼으며, 세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죄인의 친구라는 비난을 들었으며 죄인을 사랑해서 죄인의 모습으로 죽어갔기 때문에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이름을 얻으셔야 했습니다. 죄인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의인을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오늘까지 받고 살아왔습니다. 우리의 의를 보고 사랑하신다면 벌써 저버린 지 오래였을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넷째로, 대속적인 사랑입니다. 대신 죽으시는 사랑입니다. 죄인을 살리기 위하여 의인이 죽습니다. 일부를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의 도덕, 예수의 성현됨, 예수의 자비한 마음----다 이해하다가 마지막에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왜 서른 세 살에 죽었어야 하는가? 33세에 죽는대서야 어떻게 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로마의 정권 아래서 그대로 죽음을 받아들이셨는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당시의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이렇게 그리스도를 평합니다. '예수는 비겁하였다.
그처럼 큰 능력을 가지고도 어째서 그렇게 조용히 죽어갔단 말인가?' 예수는 인기를 이용하여 혁명을 일으켰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한다면 그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로마에 대항하여 일어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사람들까지 사랑한다는 것이,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어갔다는 것이 못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참사랑은 자기희생에 있습니다. 생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 대속적인 사랑, 그 사랑이 있었기에 내가 오늘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은 영광된 사랑입니다.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증거하고 계십니다. 가룟 유다가 밖으로 나간 후에 예수께서는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라고 말씀하십니다(31절). 요한복음 12장 23-24절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희생하시는 그 사랑 안에서 엄청난 영광과 기쁨을 누리십니다. 사랑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기쁨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눈물로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에는 언제나 기쁨만이 넘칩니다. 자녀들의 시중을 들면서 기쁜 마음으로 하지 못하고 지겨워하는 마음이 있다고 해봅시다. '아이는 뭣하러 낳아서 이 고생이람!'한다면 이것이 무슨 사랑입니까? 사랑에는 기쁨만이 있습니다. '너를 위해서 수고하는 것은 나의 으뜸가는 기쁨이란다. 너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나의 자랑이란다. 네가 자라 유익한 사람이 되었을 때에 내 수고는 영광이 될 것이다. 너 때문에 나는 행복하단다'---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이 이 사랑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4절)."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만큼 수고했다고 해서 다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그 수고와 함께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자식을 키우면서 '십자가 운운'하는 것이 과연 사랑하는 것입니까? 여기에서 사랑의 응답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받은 사랑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거룩한 희생을 지불하시고, 여기에서 승리와 자유와 소망과 충만한 기쁨을 누리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사랑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의 질, 사랑의 성격----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됨과 직결됩니다. 우리 나라에는 시각(視覺) 장애자가 무려 15만 명에 이르고 있는데 이중 이식(移植)수술로 시력 회복이 가능한 사람이 2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안구를 기증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죽은 후 24시간 안에 안구를 이식해야 하는데 이것을 제공하려 하지 않습니다. 일본에는 안구 기증을 약속한 사람이 60만이며, 미국에는 수백만이나 된다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겨우 3천 명이 이 일을 약속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모두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라 사후(死後) 24시간 안에 수술이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어차피 썩어버릴 눈 하나를 기증하지 못하면서 사랑을 운위합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주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자신은 다 써버린 후에 남에게 주자는 것인데도 호응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사랑에 진실성이 있겠습니까? 지금 기독교인이 천만을 헤아린다고 합니다마는 이 운동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신비로운 동화력(同化力)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을 받으면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합니다. 우리가 받은 사랑이 크다면 마땅히 사랑해야 합니다. 대상을 묻지 마십시다. 결과가 어떠할 것인지에 연연하지도 마십시다. 다만 사랑할 뿐입니다. 보답하는 것뿐입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을 스스로 진단해보십시다. 사랑을 느끼십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섭섭함, 원망, 불평이 있습니까? 자기 욕망의 노예입니다. 증오심과 절망만이 가득합니까? 사단의 자녀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합니까? 그가 예수의 제자입니다. 여러분, 사랑한다고 하면서 피곤합니까? 낙심이 됩니까? 결과를 걱정하십니까?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까? 섭섭함을 느끼지는 않습니까?---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병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솔직히 시인하고 새로이 시작하십시다. 이 세상의 많은 문제가 사랑의 결핍 사랑의 변질이라는 것을 깨달읍시다. 병든 사랑의 문제임을 인식하십시다.
이것이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을 때에, 다시 한번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적 사랑 안에서 자신을 보고, 그리고 이웃을 보십시다. 그제야 엄청난 행복과 신비로운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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