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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제자(요 1:35~43)
예수님의 전도 생활의 시작(공생활의 시작)은 세례 받으시는 순간부터라고 복음서 기자들은 한결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실제적인 전도 생활의 시작은 이 본문에서 보는 대로 제자를 택하시는 순간부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도 예수께서 바닷가에 나가셔서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부르시는 것이 전도 사업의 시작이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말씀하신 교훈의 약 2/3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날처럼 전파를 타고 동시에 수천 명, 수만 명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기에 직접적으로 몇 사람의 제자들에게 집중적으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5천 명을 놓고 말씀하셨다는 장면이 있지만, 실제적으로 생각하면 넓은 들판에서 예수님의 육성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앞에 앉아 있는 몇 십 명 정도가 겨우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나 석가모니는 자신들이 직접 남긴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고 무슨 건물을 지어 놓은 것은 더욱 아닙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행적은 없지만 제자들을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역사를 이루셨고, 실제적으로 교회를 세운 것은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현대 신학자들 중에는 교회를 예수님이 세운 것이냐, 제자들이 세운 것이냐, 또는 예수의 기독교냐, 바울의 기독교냐고 따지는 파들이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의 역사에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제자를 키웠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나 혼자서 무엇인가 이루어 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만, 나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일하게끔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후계자를 잘 키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큰 일을 보다 효과적으로 하는 방법으로써 소위 승법적 작전이라고도 합니다. 사실, 나 혼자서 한 사람, 두 사람 만나 전도하면 과연 몇 사람이나 전도하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한 사람 만나서 전도하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전도하게 하고 또다시 전도 받은 자가 전도하게 하면 잠깐 동안 기하급수적으로 전도할 수 있습니다. 교회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역자 몇 사람이 전도한다면 몇 사람이나 전도하겠습니까? 문제는 성도 여러분들입니다. 성도들이 열심히 생활 현장에서 전도하고 심방 하면 교회는 급성장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 훈련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의 제자들을 상대로 해서 말씀하셨고, 3년 동안 그들을 키우시는 데 시간을 바쳤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그 제자들에 의해서 놀라운 역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일 처음으로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얻는 장면입니다. 유명한 주석학자 벵겔은 이 부분을 기독교 역사의 시작이다.
즉 예수께서 두 제자를 얻는 이 순간이 기독교의 기원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동감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처음 두 제자를 얻고, 그 시간부터 차차 늘어나 열 두 제자가 되고, 70명이 되고 큰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면, 세례 요한이 자기의 제자를 예수님께 양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요 1:35-36).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의 기록과는 다소 차이를 느끼는 내용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바닷가에 나가셔서, 기물을 깁고 있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니 그들이 그물을 버리고 따랐다고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낯선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자기를 따르라는 한 마디에 그들이 돌변하여 따라나섰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마가복음의 내용과 요한복음의 이 본문과 연결해서 살펴보면 바닷가에 있던 어부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부름을 받기 전에 이미 몇 번 주님과 만났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생활을 전도 사업에 바치지 못하고 언젠가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준비를 하고 있던 차에 지금 예수께서 오셔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자신들의 개인 생활을 모두 버리고 따랐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세례 요한은 본문에서 자기의 제자를 예수님께 양보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감히 흉내낼 수 없는 그의 위대한 일면입니다. 물론, 그가 예수를 증거하고 그 분을 높이기 위해 세상에 왔다고 하지만, 처음 생각을 끝까지 지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속담에도 갈 때 마음과 올 때 마음이 다르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은 예외였습니다. 그는 시종일관 자기의 모든 것을 예수님을 증거 하는 데 바쳤습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훈련시켜 놓았던 제자까지 양보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드니 요한의 제자들이 질투하여 말하기를 "선생님, 우리에게 오던 자들도 모두 저쪽으로만 갑니다"라고 불평하자, 요한은 태연하게 "그 분은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요 3:30)고 정말 멋있는 대답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형제간에도 형을 칭찬하면 아우가 싫어하고, 아우를 칭찬하면 형이 질투하며, 심지어는 부부 사이에서도 서로 칭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본래의 사명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명예, 소유, 제자까지 다 바쳐서 후세들에게 좋은 신앙의 표본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제자의 기본 요건 몇 가지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누군가로부터 증거를 받는 일입니다. 제자가 제자 되는 동기는 처음부터 하늘로서 계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선가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는 자는 선지자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위대한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위대한 크리스천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들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예수님을 먼저 만나서 크리스천이 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전도를 받고, 그리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 책 서두에서 이미 말씀드린 대로 빌립이 사마리아 근방에서 전도할 때 이디오피아의 내시를 만나서 이사야를 설명하는 극적인 장면은 좋은 예화입니다. 누군가를 통해서 전도를 하고, 그렇게 전해지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요한으로부터 인도함을 받고, 안드레는 시몬을 인도하며, 또 빌립은 나다나엘을 인도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객관적 말씀의 전달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반드시 인식해야 합니다.
둘째로 제자의 기본 요건은, 듣고 좇아가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의 어린양이며,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지다"라고 말했을 때, 그의 제자들은 두 번 다시 묻지 않고 그대로 따랐습니다. 따랐다는 것은 움직임을 말하는 것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네 멍에를 메고 내게 와서 배우라고 말씀하셨듯이, 배운다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따르면서 배워야 실제적이고 귀한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무슨 이유로 그분이 어린양이냐고 질문할 수도 있었지만, 스승의 말을 그대로 믿고 따랐습니다. 따랐다고 하는 그 자체는 순종이며 신앙으로서 대단히 중요한 제자의 자세입니다.
셋째로 제자의 기본 자세는 주님을 따르는 근본적인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왜 따르는지, 즉 무엇을 구하느냐고 묻고 계십니다(요 1:38). 만일에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무엇을 구하러 교회에 나오는가라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옛날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너는 나에게 구하라. 무엇을 줄까?" 하고 물으셨고, 그는 지혜를 달라고 구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도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좋은 시간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라고 대답했다 합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구할 것입니까? 중요한 것이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궁극적으로 구할 것이 무엇인가는 분명해야 합니다. 기대가 바로 되지 않으면 결과도 바로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구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지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기본적인 욕망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이 기본적인 욕망이 잘 설명되고 있는 곳은, 예수께서 시험 당하신 사건입니다.
첫째 욕망은, 무엇인가 얻고자 하는 것으로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소유욕입니다. 둘째는 천하만국을 얻어 왕이 되라는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며, 셋째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으로 보이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그러면, 지금 나는 무엇을 얻고자 하며, 무엇이 되고자 하며, 무엇을 바라기에 교회에 나옵니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지식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무엇인가 얻기를 바라서 나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좀 화끈한 것을 원하기도 하고 혹은 위로를 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고자 하는 자와 받고자 하는 자의 채널이 맞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인가 준비된 상태에서 너희들이 원하는 것과 내가 주고자 하는 것이 맞는가를 묻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구하러 주님 앞에 나오는가를 진지하게 물음으로써 출발하고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이 질문을 물어야 합니다.
필자는 가끔 결혼 생활의 어려움을 상담해 오는 분들에게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왜 결혼을 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의외로 많은 분들이 이 질문에 당황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내가 왜 결혼을 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되 계속적으로 물어야 합니다. 한 번만 묻고 지나가면 도중에 목적이 바뀌어지기 쉽고 목적이 변경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처음에는 순수하게 무조건 주고 싶기만 했고 희생하리라고 결심했던 마음이 중간에 자주 바뀌며, 나중에는 상대편이 희생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 출발할 때와는 달리 중간에 마음이 변했습니다. 그들은 점점 높아 가는 예수님의 인기를 빌어서 정치적으로 출세해 볼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일을 말씀하실 때에 "주님,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런 일은 하지 마십시오"라고 자기의 입장에서 말렸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단호하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수제자 베드로에게 너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엄하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네 번째 제자의 기본 요건은, 나의 요구를 주님께 내어놓기보다는 주님이 어디 계시는가에 대한 관심의 초점입니다. 본문에서 무엇을 구하느냐고 예수께서 물으실 때 제자들은 "랍비여, 어디 계십니까?"(요1: 38)라고 내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는 주님이 어디 계시는가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의 도리입니다. 다시 강조하면, 제자란 예수를 통해서 내가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지혜로운 반려자는 상대방이 무엇을 생각하고, 그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무엇인가 달라고 내가 필요한 것에만 관심을 두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로지 나만을 이해하지 않는다고 불평과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랍비"라고 하는 말은 "나의 위대한 자"라는 뜻으로서 선생님이라는 말보다는 격이 높은 말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언젠가는 우리도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함께 있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 12:26에 보면 "너희가 나를 섬기려면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으리라"고 함께 있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바다에 계시면 우리도 바다에 있어야 하고, 겟세마네 동산이나 골고다 언덕에 계시면 우리도 그 곳에 있어야만 제자다운 제자라는 말입니다.
내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 앞에서 이루려는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으며,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 어디인가에 관심을 두고 나도 주님이 계신 곳에 있어야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 시쯤 되었더라"(요 1:39). 이 말씀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 하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와서 보라"는 아주 간결하면서도 함축성 있는 말씀입니다. 원문의 뜻을 그대로 옮기면, "오면 보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며, 문법적으로 보면 온다는 것은 원인이요 보게 되는 것은 결과입니다. 언제든지 와서 보라는 주님의 공개된 초청입니다. 우리가 가끔 경험하는 일로써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로 초청할 때, 어떤 이들은 아무것도 몰라서 나갈 수가 없다고 대답합니다. 순서적으로, 우선 나오는 것이 먼저요 그 후에 라야 무엇인가 알게 될 터인데, 나오지는 않고 가만히 앉아서 교회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필자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경험한 좋은 추억이 생각납니다. 교수님들이 보통 한 학기에 두세 번 정도 자기 집을 공개하는 소위 오픈 하우스라는 행사가 있는데, 제자이며 누구든지 와서 구경하고 사모님과 아이들과도 대화하며 간단한 차와 과일을 대접받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교수님의 많은 책 중에서 마음대로 한 권만을 선택해서 가질 수 있는 기회도 주었습니다. 그 댁을 방문하면 교수님께서 공부하시는 분위기라든지 어떠한 책을 주로 보시는 지 등 여러 가지를 알게 되어 참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는 훌륭한 서재는 없었지만 직접 보게 되면 하나도 숨김없이 그 분의 삶의 모습을 진실 그대로 볼 수 있는 공개된 초청으로 논리보다 체험을 위주로 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논리나 지식이 우선이 아니라, 체험이나 의지가 먼저입니다. 와서 보라고 하신 말씀에는 행동과 관찰을 겸한 배움의 자세를 뜻하기도 합니다. 관찰이나 행동 중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해서는 참된 배움의 자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비교한다면, 베드로는 행동적인 데 비해 요한은 관찰파로서 조금 소극적인 사람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오라" 하실 때, 곧 따르는 데는 자기 부정이 함께 해야 만이 갈 수 있고, 가는 자만이 볼 수 있으므로 결국은 적극적인 자라야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보이는 자로 나타나셨으므로 보는 자만이 보게 됩니다.
여기에는 자기 부정과 순종의 적극성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따르는 자에게만 열려 있는 귀한 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가 거하신 곳에서 함께 유한 시간이 제 십 시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시간은 이스라엘의 시간으로써 우리 시간으로는 오후 4시쯤입니다.
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안드레가 예수님과 하룻밤을 지낸 뒤 바로 다음날 자기 형님께 찾아가서 전도를 했다는 사실입니다*요 1:41).
교회에 한 번 나왔다가 바로 전도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깨닫는 바로 그 시간에 전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내일이나 다음 기회로 미루고 나면 벌써 생각이 달라지고 첫 감격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안드레는 곧장 형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냥 우연히 형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형님을 찾아서 헤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형님을 찾아 만났다는 것은 제일 가까운 사람, 제일 사랑하는 사람부터 찾아서 전도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만나기 어려운 사람을 찾아서 헤매지 말고 가장 가깝고 사랑하고 만날 만한 사람부터 만나서 전도하는 것이 전도자의 순서입니다. 자신이 은혜로 충만해진 후에 라야 전도하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잘못된 사람입니다. 혹은 내가 확신이 선 다음에 전도하겠다고 미루기도 하는데, 이런 사람은 전도할 수 없습니다. 전도함으로 충만해지고 전도함으로써 확신을 얻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40절에 보면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요 1:40)고 두 제자를 가리키고 있는데, 여기서 이름이 나오지 않는 제자는 사도 요한입니다.
자신이 요한복음을 쓰고 있으므로 자신의 좋은 이야기를 쓸 때에는 이름을 숨기며, 꼭 필요하다고 느낄 때는 그저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라고만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자세는 동양의 미덕으로써 앞으로 이 복음서를 공부하면서 계속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서 제일 처음 부름 받은 제자였지만, 안드레만 기록하고 자기 이름은 쓰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겸손입니까? 사도 요한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첫 제자로서의 여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흔히 잘못된 일에서는 서로 자신의 이름을 빼고 잘한 일에는 먼저 자기 이름부터 알리려 하는 우리들의 사정과는 반대입니다. 다시 한 번 사도 요 한의 미덕을 생각하면서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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