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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1권 <내가 얻은 황홀한 구원> 305쪽에 있는 글입니다.
16. 당신은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로마서 5장 1~11절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십니다. 그가 우리에게 바라시는 생활 스타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 우리가 펴 놓은 말씀을 보면 그는 우리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항상 기뻐하는 모습을 가지고 사는 것을 원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은 자기 자녀가 원망과 탄식으로 일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우리가 기쁘게 사는 것을 하나님이 얼마나 원하시는가 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들려 주신 말씀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달리실 운명의 순간이 임박해 오자 제자들은 깊은 슬픔 속에 빠졌습니다. 그때 주님은 제자들을 위로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 14:1, 2).
주님이 이렇게 위로하신 까닭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요한복음 15장 11절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1).
주님이 갖고 계신 기쁨이 제자들의 마음에도 넘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선생님이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처형당할 위기를 만났는데 어떻게 제자들이 기뻐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여 있는 분의 마음에 어떻게 기쁨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마음에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죽음을 앞에 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 기쁨을 전하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우리를 향해 똑같은 소원을 가지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이 말을 바꾸어서 다시 이렇게 읽어 봅시다. "나는 이 세상을 살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해야 한다." 옳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의 스타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란다'는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영광 중에 계시는 우리 주님을 만나 뵙기를 고대하는 소망을 가리킵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누리고 싶어하는 소원을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란다'의 두 가지 의미
영광 중에 계시는 주님 뵙기를 고대함
첫째로 영광 중에 계시는 우리 주님을 만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십자가에서 승리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주님을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볼 수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성경을 펼 때마다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여기저기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기록된 말씀 안에서 살아 계시는 주님의 영광을 보며, 경배하고 기뻐할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장차 우리 눈으로 직접 주의 영광을 보는 것과는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이 독특한 방법을 허락하실 때도 있습니다. 스데반은 육신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는 돌에 맞아 순교하기 직전,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과 그 곁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올려다보는 엄청난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때 그는 너무 좋아서 소리쳤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6).
하나님 보시기에 필요하다면 우리도 스데반처럼 특별한 은총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비하고 독특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잘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자신의 영광을 보여 주기 위해 다시 한 번 호렙 산에 강림하지 않으신 것과 같습니다. 지금은 성경을 보면서 그의 영광을 바라고 기뻐하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은 우리 앞에 남아 있는 큰 소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고대하고 사모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누리고 싶어 함
둘째로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누리는 자가 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고 함께 사는 영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직접 대면하시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자신을 우리 모습으로 바꾸어 만나는 방법과 우리를 자기처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바꾸어 만나는 방법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아브라함을 만나러 오신 하나님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찾아 오셨습니다. 그래서 얼굴과 눈을 마주 대고 쳐다보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역시 우리를 만나러 오실 때 초라한 우리의 모습 그대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앞으로도 하나님이 그런 방법을 쓰시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낮아지셔서 우리처럼 초라한 모습으로 찾아오시는 일은 한 번으로 끝났습니다. 우리 앞에 다른 방법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변화되어서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인간은 범죄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우리가 범죄한 다음부터 흙으로 빚어진 우리의 육체도 영혼과 함께 부패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몸이 아무리 건강하다고 할지라도 원래 우리의 몸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범죄한 다음부터 우리의 몸이 얼마나 쇠약해졌는지 감기만 걸려도 맥을 못추고 조금만 아파도 민망한 몰골이 되기 쉽습니다. 노동의 수고, 해산의 고통, 그리고 온갖 풍상을 겪으며 살기 때문에 그렇게 아름답고 싱싱하던 청춘남녀의 영광도 낙엽처럼 시들어버리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의 육체에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미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부패의 씨앗이 숨어 있어서 우리 몸을 반드시 시들게 하고 추하게 만듭니다. 사람이 점점 나이를 먹으면 그 몸은 저절로 늙고 병들며 종국에는 썩게 됩니다. 성경은 이것 때문에 삼라만상이 함께 탄식하며 고통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22, 23).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와 같이 부패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우리 육체가 하나님을 만나 뵙는 순간에 그분처럼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광을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비록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믿음의 눈으로 장차 예수님의 모습처럼 변화될 우리 자신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을 누릴 우리 모습을 미리 내다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또 빌립보서 3장 21절을 보세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1).
이 말씀 또한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기막힌 영광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이 하나님 앞에 변화받는 이것을 놓고 성경에는 '양자가 된다', '복을 받는다', '영화롭게 된다', '하늘의 처소를 덧입는다' 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영광은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흙으로 빚어진 육신의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다시 지음받은 새 몸의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란다'는 말에는 하나님을 직접 뵈옵는다는 소망이 있으며, 흠과 티가 없는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을 고대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내 영광이 되는 날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
캐나다의 록키 산맥을 구경하기 위해서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정경을 마음속에 그리며 그곳에 갈 날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친구가 그곳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하면서 록키 산맥의 절경이 담긴 사진첩을 갖다 주었습니다. 그 학생은 사진첩을 받고 무척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한 장 한 장 들추어 보면서 그곳의 정경을 마음에 담아두었습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아 그곳을 찾아 하나하나 구경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한층 들뜨게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성경 말씀이 마치 천국의 영광을 찍어 놓은 사진첩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진첩, 즉 성경을 펴고 천국의 영광을 보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야! 멋있다!" 하는 탄성이 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이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진짜 크리스천입니다. 만약 당신에게 이 기쁨이 없다면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어두워져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즐거워하다'는 매우 강도가 높은 말입니다. 이 말은 '기뻐 날뛰다', '으스대며 자랑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기쁨의 정도가 얼마나 대단했으면 이렇게 강한 표현을 하고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17장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주님을 따라 헐몬 산에 올라간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에 주님은 복음을 전하시느라 시달리고 지쳐서 몹시 초췌한 모습이었습니다. 비록 30대 초반의 나이라 해도 평소에 영양분이 많은 음식을 잡수시지도 못하고, 인생의 온갖 불행을 목격하며 매일 지치도록 전도 여행을 하셨고 옷도 단벌이었기 때문에 그 차림이 항상 초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와 같이 초췌한 예수님이 산으로 올라가시면서 갑자기 제자들 앞에서 모습이 변했습니다.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났습니다. 그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모습을 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앉아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그 모습을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보았습니다. 천국의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이 헐몬 산 꼭대기에 내려온 것을 본 것입니다. 장차 그 나라에서 누리게 될 그 아름다운 영광이 그들의 눈앞에 실현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너무 좋아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베드로는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마 17:4).
자신들의 모습은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주의 영광을 직접 보자 정신을 잃을 정도로 그들은 환호했습니다. 장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면 우리 모습도 예수님처럼 변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처럼 영광스러운 모습이 된다면 그 기쁨이 얼마나 클까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리지 않습니까?
환란 중에 즐거워하라
3절의 '이뿐 아니라'라는 말은 그 기쁨의 정도가 보통이 넘는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어느 정도입니까? 환난을 받으면서 즐거워할 정도의 것입니다. 환난이란 예수 믿기 때문에 받아야 하는 고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을 살면서 당하는 역경, 핍박, 가난, 질병, 실패 등 모든 곤고와 고통을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의인이 된 사람이라고 해서 인생의 고통을 면제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어떤 어려운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병이 안 납니까? 교회를 다녀도 병들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경제적으로 다 풍족합니까? 아닙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도 사업에 실패해서 재산을 날릴 수 있습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보내는 비극을 당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불행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또 배우자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가족 모두가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잘 믿는 사람에게는 어떤 고통도 당하지 않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고통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형태의 환난도 두려워하며 피하려고 합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히 12:11).
정말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떤 형태의 고난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 중에 늙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있나요? 허약해져서 고통당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있나요?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저는 가끔 연세가 많으신 선배 목사님을 찾아 뵙고 인사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한평생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사셨지만 노년이 되어 허약해지신 모습을 보면 참 가슴이 아픕니다. "목사님,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하고 인사를 여쭈면 목사님은 활짝 웃으시면서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습니다. '저분 마음에 정말 천국이 있나?' 하고 어리둥절할 정도로 좋아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솔직하고 꾸밈 없는 인간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목사님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기대감이 충만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죽는 것을 싫어합니다. 죽는 것을 기피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만약에 어떤 분이 저에게 "목사님, 장기간 병으로 고생하고 계시니 보기에 딱해요. 차라리 빨리 천국에 가셨으면 해요"하고 인사를 한다면 제 마음이 어떨까요? 제가 위선을 한다면 "예,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매우 섭섭하고 못마땅하게 여길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고통 중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이처럼 환난은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비록 환난을 당하나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주의 자녀가 당하는 환난에는 프리미엄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가가치가 대단히 크다는 말입니다.
주의 자녀가 환난을 당하면 인내하게 되고, 인내하다 보면 연단을 받게 되고, 연단을 받다가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이 더 커지게 됩니다. 환난을 모르고 지내던 평소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더 크게 보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더 밝아지기 때문에 환난을 당하지 않는 사람들이 맛볼 수 없는 독특한 기쁨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환난당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프리미엄입니다.
우리가 어떤 때는 가난해서 몹시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면 자연히 돈에 대해 점점 애착이 줄어들게 됩니다. "이 놈의 세상, 돈이 있다고 행복한 게 아니야. 돈이 너무 많아도 근심 덩어리가 될 수 있어. 적당히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살면 돼." 이렇게 생각이 바뀌니까 욕심이 서서히 누그러지는 것입니다. 가난이라는 연단을 통해서 마음속에 있는 불순물이 점차로 제거되기 때문입니다. 부자로 살 때는 믿음의 눈이 침침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잘 안 보였지만 환난을 통해서 마음이 깨끗해지고 영안이 밝아지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더 크게, 더 가까이, 더 분명히 보이게 된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 괴롭기는 하지만 그 대신 하나님이 프리미엄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욕심을 하나하나 거둬내 주시고 점점 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밝히 볼 수 있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기쁨의 생수가 터지는 영적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과거 학창시절에 병이 나서 한 5년을 앓아 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 들어 또 몸이 신통치 않아 2년이 넘도록 고생하고 있습니다. 가끔 네다섯 가지 증상이 한꺼번에 나타나서 고통스러울 때는 정말 살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그럴 때는 기도도 안 나올 정도로 괴롭습니다.
그런데 제가 병을 앓으면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내 영혼이 연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잡된 욕심이 사라지고 아웅다웅 다투던 마음이 깨끗이 정리되는 것을 느낍니다. 점점 내 영의 눈이 밝아지고 멀리 보이던 하나님이 가까이 보이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환난 중에서 연단을 받는 것입니다. 병들어 고생이 되지만 그 대신 신비스러운 기쁨이 찾아오는 것을 느낍니다. 주님이 주시는 새 몸을 입고 그 분을 만나 뵐 그 날을 마음속에 그려 보면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울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세상이 모르는 기쁨을 넘치도록 부어 주시려고 병이라는 환난을 주셨는데 저는 그 기회를 너무 많이 불평하면서 흘려 보낸 것 같아서입니다. 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성도는 고통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족에게, 교우들에게, 이웃 사람들에게 증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만족할 만큼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는 가책이 제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이미 2년이란 세월이 흘러가버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너무나 좋은 기회를 놓쳤네요. 좀더 연단받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좀더 가까이 보고 좋아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놓쳐버렸네요" 하고 생각하니까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혹시 가난해서 고생하고 있습니까? 병들어 고통하고 있습니까?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프리미엄이 따라옵니다. 대학 입시에 실패해서 고통스럽나요? 남편을 잃었나요? 아내를 잃었나요? 자식을 잃었나요? 가정에 남 모르는 우환이 있나요? 거기에 따라오는 하나님의 축복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에게 있어서 너무나 괴롭고 불행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내하게 하시고, 연단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소망의 눈을 활짝 열어 주시려고 허락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루마니아가 공산 치하에서 한참 어려움을 당할 때 리처드 범브란트 목사님은 14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죄수가 독방에서 혼자 견디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말을 어떤 분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범브란트 목사님은 14년을 버틸 수 있었다니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자연히 일어납니다.
그가 출옥을 한 뒤에 저술한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비결이 무엇이었는가를 아름답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감옥에서 보낸 햇수가 제게 길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은 홀로 독방에 갇혀 있으면서도 믿음이나 사랑을 넘어선 어떤 기쁨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이란 이 세상 어느 것에도 견줄 수 없는 아주 깊고도 특이한 황홀경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감옥에서 나왔을 때는 마치 수십 리에 뻗쳐 있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골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산정에서 갑자기 평지로 내려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감옥 밖에서 지낸 사람들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환난을 통해 그 누구보다도 더 가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단을 통해서 그의 마음이 깨끗해지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범브란트의 고백은 환난 중에서 연단을 받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따라온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쁨의 비밀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환난을 당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으면서 천국을 바라고 기뻐하면 세상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오죽 답답하면 저렇게 위선을 할까? 오죽 궁하면 저렇게 히죽히죽 웃을까?' 하며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떤 환난을 만나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환경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 기쁨의 비밀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절).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자기의 사랑을 넘치도록 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나는 너를 사랑해.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니?" 하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환난 중에서는 이 속삭임이 더 진하게 들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무엇에 근거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6~8절).
우리가 연약할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가끔 있을 수 있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도 가끔 있을 수 있지만 경건하지 못한 자, 죄인 된 사람을 위하여 죽을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버리고 대신 약한 우리를 품에 안으셨습니다. 이것이 그의 사랑입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다는 말은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나서 이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가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 마음에 사무쳐 오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 기뻐하는 것이 절대로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이토록 큰 사랑을 받은 이상 우리가 바라는 영광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중도에 약속을 파기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하면서 훗날 그분 앞에 서면 "내 아들아, 세상에 있을 동안 고생했다. 내 영광에 참여해라. 내 모든 것을 너에게 주마" 하고 다정하게 맞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큰 사랑을 주셨고, 우리에게 천국의 영광을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 이상 더 좋고 소중한 것이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사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환난 중에서도 기뻐하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해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병으로 고생하고 있을지라도 비관하지 않습니다. 세상 일이 뜻대로 안 풀려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환난을 통해서 우리가 연단받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더 가까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반드시 그 영광을 안겨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병을 앓으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기뻐하면 그 기쁨이 능력이 되어 종종 병마가 물러가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비록 가난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면 환경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자연히 부지런히 일하게 되고 일하다 보면 가난이 물러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학에 낙방해서 쓰라린 고통을 안고 있는 학생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기뻐하면 그것이 재기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가정이 불행한 사람이 그 불행을 비관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면 그것이 그 가정을 행복하게 만드는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비결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유명한 기독교 변증가였던 C.S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기쁨은 대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삶이다. 또한 진정으로 신뢰할 만한 기독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세상을 흔들어 놓는 기독교는 그 중심에 기쁨을 갖고 있다." 왜 성도에게 있어서 기쁨은 대문자로 표시됩니까? 대문자는, 주목하게 할 때, 강조하고 싶을 때, 중요성을 나타내고 싶을 때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이 세상 앞에 특별히 표나게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쁨이어야 합니다. 세상 것으로 좋아하는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기뻐하는 그런 것이어야 합니다. "자, 보라. 나는 가난해도 즐거워한다. 나는 병들어도 하나님 앞에 기뻐하고 감사한다. 나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해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왜? 우리 주님의 영광이 내 앞에 있기 때문에..." 이것이 세상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는 우리 삶의 대문자입니다. 우리 삶에 기쁨이 있는 한, 어두운 우리 주변을 환하게 밝힐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을 안고 사는 크리스천이 많을수록 이 사회는 점차 밝아질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기쁨을 소유하도록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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