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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고난, 탄식, 영광

by 【고동엽】 2022.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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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2권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의 구원> 135쪽에 있는 글입니다.

 

 

25. 고난, 탄식, 영광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로마서 8장 18~25절

 

 

 

 

 미국 오페라계에 힐리니 할버튼이라는 유명한 가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기 아들이 이웃집 아이와 놀면서 주고받는 대화를 집안에서 살짝 엿듣게 되었나 봅니다. 이웃 아이가 자기 아들을 보고 "우리 아빠는 시장을 잘 아신다" 하고 자랑하니까 그 말을 들은 자기 아들이 "우리 아빠는 하나님을 잘 아셔" 하고 대꾸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의 대답을 듣는 순간 그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해서 서재로 달려 들어가 실컷 울었다는 고백을 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무엇 때문에 아들의 말을 듣는 순간 그렇게 감격했을까요? 그 눈물의 의미가 어디에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을 잘 아는 아빠를 떳떳하게 자랑할 줄 아는 모습이 너무 자랑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자랑할 수 있습니까? 얼마만큼 그분이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 때문에 감격하고 있습니까?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는데 그 하나님을 얼마나 잘 알고 자랑스러워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황홀하고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악한 세상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 일이요 매력을 주지 못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시장을 잘 아는 것이 훨씬 돋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송한 이야기지만 세상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 된 마귀의 자식들이어서 그런 것입니다. 마귀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을 절대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자녀들과 섞여서 세상을 삽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히 그만한 값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 값을 치를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다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값을 치르지 못하면 마귀의 자녀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 된 자가 세상에서 꼭 치러야 할 대가가 어떤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를 바로 치를 때에 누릴 수 있는 축복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세 마디로 이야기한다면 고난, 탄식, 영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자녀의 고난
 
 첫째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릅니다.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는 고난입니다. 17, 18절 말씀을 우리가 다시 보아야 되겠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17, 18절).
 
 두 구절에서 고난이라는 말이 반복해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고난의 특징은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이요 현재의 고난이라는 데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동안 끊임없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가 고난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그는 퍽 초라해 보였습니다. 배경도 신통치 않았습니다. 가문도 보잘것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를 멸시하고 천대했습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죽을 때에도 그 이유는 하나뿐이었습니다.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골고다 언덕에 모여 있던 유대 사람들은 그를 향해 고개를 흔들면서 이렇게 빈정거렸습니다.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이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잖아. 그랬으니 죽어 마땅하지"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고난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 때문에 당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이 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난받지 아니하고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받은 고난을 우리도 똑같이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고난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한 번 주목해 보십시오.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우리의 고난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투로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고난을 받는데 종이 안 받습니까? 맏형이 고난을 받는데 동생들이 피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 20절에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요 15:20).
 
 바울이 한때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엄청나게 핍박했습니다. 한참 열이 나서 다메섹으로 달려갈 때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첫마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아마 그는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자기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지 예수님을 핍박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서 자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 성도의 고난을 바로 자기 자신의 고난으로 보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고난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세상은 그동안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아직도 세상 신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악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을 싫어하기 때문에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자들을 싫어합니다. 겉으로는 별로 표를 내지 않지만 속으로는 정말 싫어합니다. 만일 예수 믿는 사람을 다 죽여라 하는 시대가 온다면 그들은 금방 우리를 향해 욕하고 죽이려고 달려들 것입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받은 고난을 우리가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현실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샅샅이 뒤져 보십시오. 특별히 마태복음부터 시작하여 요한계시록까지 예수 믿는 우리를 향해 고난을 피하라고 권면하는 말씀이 나오는지 찾아보십시오. 놀랍게도 고난을 받으라고 하는 말씀만 점점이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지 않도록 전능하신 하나님의 품에 안아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은 없습니다. 고난받지 않고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있다고 하는 언질은 하고 있지 않습니다.
 거꾸로 고난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환난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베드로전서 4장 13절은 대표적인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참 기가 막힌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피하라고 하기는커녕 즐거워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만큼 성도의 고난은 하나님 보시기에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현재의 고난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하고 나옵니다. 어떻게 보면 이 현재라는 말이 잠깐 스쳐 지나가는 기간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라는 말은 주님이 부활하신 그때부터 시작하여 재림하시기까지 그 가운데 끼인, 소위 말세라고 부르는 시대를 전부 포괄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천 년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개인으로 말하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를 말합니다. 그동안 받을 수 있는 고난이 현재의 고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일생 동안 고난당할 각오를 하고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아직 고난이라고 할 만한 어려운 일을 별로 모르고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한 가지 이유로 남 모르게 고난을 당하는 형제 자매들이 적지 않습니다. 남편으로부터 학대를 당하고 정신적인 고문을 당하는 아내들, 직장에서 술자리에 함께 앉지 않는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고 나중에는 진급마저 잘 안 되어 만년 계장 노릇 하는 가장들, 남들이 다 하는 땅 투기 나 몰라라 하고, 했더라면 그런 대로 한 재산 모았을 텐데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럴 수 없다고 고집하다 이제는 자녀들이 크면서 더 빠듯해진 살림을 꾸려야 하는 주부들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입니다. 나이가 차서 시집은 가야 되겠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결혼할 수 없다는 고집, 그것 꺾지 못해서 혼기를 놓친 채 아직도 결혼하지 못하고 있는 자매들, 그렇다고 해서 믿는 것 따지지 말고 아무하고라도 결혼하자니 신앙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 부모들로부터 이 눈치 저 눈치 받아가면서 지금까지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는 아름다운 우리 딸들은 모두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을 위해서 자주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양들은 모두 다 십자가로 낙인이 찍혀 있다. 털에만 찍힌 것이 아니라 살 속에까지 깊이 찍혀 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낙인을 찍어 놓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 낙인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현재의 고난입니다. 우리만이 아는 고난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려면 절대로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되는 고난입니다.
 가정에서 핍박을 당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사회에서 멸시를 받는 형제 자매들이여, 예수 때문에 가난해야 되는 형제 자매들이여,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 형제 자매들이여, 한시도 잊지 마십시오.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이 고난을 기쁘게 받아야 한다는 것을.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자녀의 탄식
 
 두 번째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는 탄식이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23절).
 
 이 본문은 우리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십니까? 성령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첫 열매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중생시키신 것, 믿게 하신 것,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내신 것,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 것 등등. 이 모든 것이 성령께서 주신 첫 열매들입니다. 이와 같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죄와 죽음의 감옥에 갇혀 신음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열매라 하지 않고 첫 열매라고 한 것을 보면 둘째 셋째 열매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열매가 있으면 중간 열매가 있고 끝 열매가 있지 않겠습니까? 성령은 우리에게 첫 열매만 주시지 않고 뒤따라올 다음 열매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본문 말씀에는 양자 될 것, 다시 말해서 우리 몸의 구속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먼저 성령의 처음 열매를 받은 우리가 탄식하고 있다는 말씀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탄식은 우리만 아는 탄식이요 우리만 할 수 있는 탄식입니다. '탄식한다'는 이 말은 해산하는 산모가 비명을 지르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단순히 비통해서 터지는 한숨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산모가 아기를 낳으면서 지르는 비명은 절망의 탄식이 아닙니다. 3대 독자 옥동자를 분만하는 산모는 새 생명을 품에 안을 수 있다는 희망에 차서 비명을 지르는 것입니다. 새 생명을 얻는다는 기쁨을 안고 비명을 지르는 것입니다.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그야말로 곁에서 듣기가 민망할 정도로 고통하는 모습이지만 그 마음에는 희망과 기쁨이 솟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탄식의 의미입니다. 어떤 산모는 너무 아프고 괴로운데 아기는 나오지를 않고 시간은 끌고 견딜 수가 없으니까 옆에 서 있는 남편의 뺨을 때린 일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뺨을 맞아도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새 생명을 얻는다는 희망을 함께 나누는 고통이요 괴로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가진 사람으로서 하는 탄식은 바로 이런 성격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몸처럼 변화될 날을 기다리는 탄식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고후 5:2).
 
 지금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썩을 몸을 입고 힘들게 살고 있지만 주님이 오시면 우리의 죽을 몸이 새 몸을 입고 영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탄식은 일종의 기다림의 탄식, 사모하는 탄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몸이 병들면 신음하고 고통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멸시를 받을 때 탄식합니다. 사랑하는 자가 땅에 묻히는 것을 보고 통곡합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절망의 탄식이 아닙니다.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더 기다려지는 것이 있기 때문에 속에서부터 터지는 탄식입니다. 무엇이든지 안달이 나도록 기다려지는 일이 있으면 기다리는 그 자체가 탄식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해서 잘 알지 않습니까? 간절히 얻고 싶어 하는 것이 있다든지, 못 견디게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든지, 한시 바삐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 있을 때 기다린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일종의 탄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부목사 중에 지난 몇 달 동안 가족을 캐나다로 보내고 혼자 사느라 고생을 한 형제가 있습니다. 제가 곁에서 그를 지켜보면서 기다리는 일은 정말 탄식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쪽에서 날마다 편지를 써 보냅니다. 캐나다에서는 그쪽대로 매일 편지가 날아옵니다. 어떤 때는 어린 딸아이가 아빠 얼굴을 큼직하게 그리고 "아빠, 보고 싶어요" 라고 지렁이 글씨로 쓴 편지를 보내어 목사님이 엉엉 울기도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가족을 보낸 이후에는 아침에 집을 나오면 저녁 늦게까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집이 싫었나 봅니다. 날마다 달력을 보면서 '이제 겨우 일주일 지나갔구나. 아직도 두 달이 남았으니 그동안 어떻게 기다리지?' 하는 생각을 자주 했을 것입니다. 그의 기다림은 탄식 그 자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탄식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는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그날을 너무 기다리고 사모하다 보니 하루하루 사는 것이 탄식이 되는 것입니다.
 한편 본문 말씀을 보면 참 희한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는 탄식을 피조물이 같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22절).
 
 이 피조물이 누굴까요? 원래 피조물 하면 하늘의 천군 천사를 위시해서 삼라만상을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늘에 있는 영물들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20절에 보면 이 피조물은 지금 허무한 데 굴복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21절에 보면 썩어짐의 종 노릇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천군 천사와 사탄의 무리인 영계의 영물들은 허무나 부패의 법칙 아래 묶여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늙거나 죽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가리키지 않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19절에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이런 희망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도 아닙니다.
 결국 여기서 말하는 피조물은 비이성적인 자연 만물, 즉 하늘의 해와 달,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 땅에 피는 아름다운 화초, 나무 그리고 바다에 있는 고기 등 모든 자연 만물을 가리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탄식합니까? 우리가 창세기를 통해서 아는 바와 같이 자연 만물은 창조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람과 함께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죄를 범하자마자 하나님께서 만물까지 인간과 똑같은 저주의 자리에다 던져 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피조물은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허무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21절에서는 썩어짐의 종 노릇을 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피조물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부패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늘의 해와 달도 썩느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과학자들은 일월성신도 나고 죽는 과정을 겪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천하만상은 모두 부패의 씨앗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지금 피조물들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들이 탄식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탄식하는 진짜 이유가 될 것입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19절).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나타나는 날을 피조물이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대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고개를 쑥 빼서 오나 안 오나 하고 앞을 열심히 내다보는 태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일월성신, 삼라만상이 고개를 쑥 빼고 우리가 영광 중에 나타날 날을 고대하고 있다니 정말 안 믿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봄이면 아름다운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물어 보십시오. "너도 탄식하고 있니? 너 지금 내가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로서 새 몸을 입고 나타나는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니?" 라고 말입니다. 틀림없이 고개를 까딱까딱 하면서 그렇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찮은 꽃 한 송이지만 거짓말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를 만드신 분이 말씀하신 것을 '아니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만일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다면 우리의 귀가 어두운 탓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나타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21절을 봅시다. 모든 피조물은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다시는 썩고 죽는 운명을 겪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와 함께 저 아름다운 나라에서 영원토록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모든 피조물이 그날의 영광을 사모하며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가슴이 뛰는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탄식하고 피조물이 탄식하면서 영광의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의 탄식은 범사에 감사하는 찬송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의 영광
 
 마지막으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는 영광이 있습니다. 이 영광은 바로 우리가 피조물과 함께 탄식하며 기다리는 소망을 말합니다. 17절을 보면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하고 영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18절에도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 이라고 나옵니다. 21절에도 영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영광은 전부 다 23절에서 언급하는 우리 몸의 구속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 몸의 구속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11절로 잠깐 돌아가 봅시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새것으로 바꾸어 다시 살아나게 하십니다. 영원히 살게 될 새 몸을 입고 부활하게 됩니다. 이것을 여기서 몸의 구속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영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죄와 그 비참한 결과에서 완전히 자유하게 됩니다. 그때가 되면 아픈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썩는 것이나 죽는 것이 다시 우리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그때가 되면 예수님처럼 흠과 티가 없는 신령한 존재가 됩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5절의 말씀대로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모든 천사들이 우리 앞에 무릎을 꿇고 수종들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광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가 새 몸을 입었으니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도 새로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새 몸을 입고 부활했다 할지라도 더럽고 악한 세상에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한다면 이것은 영광이 아니라 더 큰 고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새것으로 바꾸었으니 집도 새것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새롭게 만든다고 하십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계 21:5).
 
 하나님께서는 신천 신지를 우리를 위해 만드시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 신천 신지는 모든 피조물이 고대하는 이상향입니다. 거기에서는 우리가 더 이상 썩어짐의 종 노릇을 하지 않습니다. 그 신천 신지에서는 구속받은 우리가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신천 신지의 삶이 얼마나 평화롭고 행복한가를 이사야처럼 환상적으로 묘사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사 11:6).
 
 얼마나 환상적입니까? 그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합니다. 그때에는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면서 뒹굽니다. 그때에는 송아지와 사자와 살진 짐승이 어린아이에게 끌려 다닙니다. 그때에는 암소와 함께 곰이 풀을 뜯습니다.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립니다. 그때에는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습니다. 그때에는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 손을 넣고 장난합니다. 그때에는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해를 당하지 않습니다. 그 거룩한 산, 그 영광스러운 신천 신지에는 해하는 일도 없고 해를 받는 일도 없습니다. 영원토록 우리 주님을 모시고 평화와 자유를 누리며 영광 중에 살 것입니다. 그 영광이 지금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광이 언제 나타납니까?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이 영광이 현실로 드러날 것입니다. 이것을 바라보고 우리가 속으로 탄식하고 피조물도 탄식하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 믿는 우리만이 아는 영광입니다.
 
 어떻게 악한 현실을 이길까?
 
 이제 우리에게 남은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우리만이 아는 고난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만이 아는 탄식도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만이 아는 영광도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고난과 탄식과 영광의 소망을 가지고 이 악한 현실을 대처할 수 있습니까?
 첫째로는 고난과 영광을 열심히 비교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18절).
 
 바울은 비교의 명수였습니다. 정확히 비교할 줄 알았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때마다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하면서 사는 법을 익히고 있었습니다. 비교했더니 결과가 어떻게 나왔습니까?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비교가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은 무서운 태장을 여러 번 맞았습니다. 감옥에서 수 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헐벗고 배고프면서 몸에 병까지 안고 씨름하는 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고난을 다 묶어서 장래의 영광과 비교해 보았더니 상대가 안 되었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상대가 안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살았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7절에서는 비교를 해보니 지금의 고난은 오히려 가벼운 것이라는 말까지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비교하면서 살아아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핍박당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비교하면서 사십시오. 예수님 때문에 가난을 견뎌야 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비교하십시오. 당신의 가난과 영광을 비교해 보십시오. 날마다 비교해 보십시오. 시시때때로 비교하십시오. 그러면 그때마다 성령께서 "상대가 안 돼. 너 아무리 힘들어도 네 고난은 앞에 있는 영광에 비해서 가벼워" 라고 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큰 위로와 힘을 얻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둘로스라는 선교선이 있습니다. 350명의 선교사들을 태우고 세계 곳곳을 누비면서 선교를 하는 배입니다. 한번은 필리핀 잠보앙가라고 하는 곳에 선교사들이 내려서 전도 집회를 했습니다. 그때 회교도인 젊은이가 나타나서 수류탄을 던져서 선교사 두 명이 즉사하고 32명이 부상을 입은 사건이 터졌습니다. 죽은 선교사는 18세의 소피아라는 스웨덴 출신 여성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19세의 카렌이란 선교사인데 뉴질랜드에서 왔습니다. 이 꽃다운 젊은이들이 죽은 것입니다.
 자기 자녀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부모들은 배에다 전보를 쳤습니다. 뭐라고 쳤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이 비참한 일에 잘 대처하고 있습니다. 더 열심히 복음 전하는 일을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 팩스를 직접 읽었습니다.
 부모들이 어떻게 이처럼 대범할 수 있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비교한 것입니다. 자기 딸이 죽은 것하고 장차 주님이 약속한 영광하고 비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내 딸이 피지 못하고 꺾였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당한 것이니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의 비교를 한 것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딸을 잃은 슬픔을 가누기 어려웠겠지만 이 슬픔은 장차 주님이 나타날 때 주실 영광하고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복음을 열심히 전하십시오" 라고 격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헛된 부귀와 하늘의 영광을 매일매일 비교하십시오. 이 부귀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돈과 장차 나타날 영광을 매일 비교하십시오. 돈, 그것은 마음 쓸 것도 아니고 마음 줄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가난과 영광을 비교하십시오. 내 몸에 있는 질병과 영광을 비교하십시오. 핍박과 영광을 비교하십시오. 그리고 매일 이렇게 소리치십시오. "상대가 안 돼!"
 
 참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둘째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24, 25절).
 
 아무리 힘들어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맙시다. 포기하지 맙시다. 참음으로 기다립시다. 참고 기다리면 멀지 않은 그날 주님이 오실 것이요, 그가 오시면 우리는 썩을 몸을 훌훌 벗고 하늘로부터 오는 새 몸을 입고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더럽고 오염된 세계는 사라지고 천하 만상이 새롭게 단장을 하고 우리 앞에 신부처럼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준비하신 새 집에서 영원토록 살 것입니다. 이 날을 참고 기다립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날마다 취해야 할 태도입니다. 소망에 눈을 뜨십시오. 세상으로부터 눈을 하늘을 향해 돌리십시오. 세상 사람들처럼 아웅다웅하지 마십시오. 우리 앞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십시오. 그 영광을 바라보면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하는 어려움이라면 가벼운 것이요 비교가 안 되는 것임을 발견하면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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