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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료 18,185편 ◑/곽선희목사 설교 1,910편

네게 무슨 상관이냐(요 21:18-23)

by 【고동엽】 2024.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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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 무슨 상관이냐(21:18-2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베드로를 위시하여 여섯 제자가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서 처량하게 물고기를 잡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생각하면 허무하고 무상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갈릴리까지 따라가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찾아가시어 만나주지 않으셨다면. 저들은 다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부름이 있습니다. 나는 잠깐 주를 떠날찌라도 주는 나와 함께 하시고, 내가 주를 모른다고 할 때에도 주는 나를 안다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한 사건 때문에 체면이 없고 용기가 없어서 물고기를 잡으러 낙향했는데, 그대로 버려 두었다면 그는 아마도 어부로서 인생을 끝마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한번 더 그를 권면했던 이 결정적인 순간이 그로 하여금 다시 용기를 갖게 했고, 사도가 되어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입장을 한번 뒤돌아본다면, 과거에 내가 당한 그 어려운 처지에서 그 때에 주님께서 나를 만나 주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여기에 낙심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 번만 더 찾아가서 권면하면 그가 구원받을 수 있었을 터인데, 그 마지막 한 번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못하는 그러한 일이 없는지 두려운 마음으로 주위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바닷가에 오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조반을 대접하고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바로 앞장에서 사랑한다는 그 의미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이 더욱 중요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실 때,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는 베드로의 대답에는 어떤 대답도 없으시고 일방적으로 "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맡기십니다. 어찌 생각하면 베드로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습니다. 사실,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해 할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만 워낙 큰 실수를 했고, 비겁한 사람이어서 어찌 주님을 따르겠습니까?" 라고 사양하고 변명할 말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그대로 "내 양을 먹이라", 바꾸어 말하면 "내 양을 먹일 자격을 준다"는 일방적인 통고였습니다. 양을 먹이라는 것만이 아니라, 양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로 구속한 양을 맡기는 것입니다. 또 동시에 목자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양을 먹이라 하는 말씀은 곧 사명이요, 자격과 그의 사도 됨을 그대로 재임명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이야말로 거창하고 얼마나 놀라운 은총적인 시간인지 모릅니다. 오직 하나의 조건을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하면 그 사랑이 지혜되고, 힘되고, 능력되고, 사랑의 권세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느냐? 그럼 내 양을 먹이라."

지난날의 실수를 다시 회상하지 않으십니다. 가령, 노파심에서 "지난번과 같은 실수는 다시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베드로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현재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합니다" "내 양을 먹이라." 현재를 물으시고 일을 맡기십니다. 일방적으로 통보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4:12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이제 가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모세는 기가 막혔습니다. 말도 잘할 줄 모르는 자기에게 갑자기 어떤 기술이나 능력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옛부터 들고 다니던 말라빠진 지팡이 하나뿐입니다. 이렇게도 형편없는 자기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일방적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는 말을 못합니다.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변명을 많이 했지만, 하나님은 그 변명을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이제 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전부였습니다. 오늘 현재의 나의 사정을 알고 말씀하시는 주님이기에, 주의 말씀 앞에 다시는 변명을 늘어놓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이제 가라"고 하시는 말씀 앞에, "" 하고 대답할 뿐입니다. "" 외에 다른 대답은 통하질 않습니다. 모세가 변명을 하다가 책망을 들었습니다. 모세는 "나는 말을 할 줄 모릅니다. 입술이 둔합니다"라고 변명하자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고 책망하시며 전혀 여유를 주지 않으십니다.

다음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님을 따르는 일에 대해 경고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21:18) 부자유한 때가 와서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갈 때가 있을 것을 예고하시며 비상한 결심을 요구하십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평탄한 길이 아니고 많은 고생을 해야 하겠으니 각오하고 따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간혹 예수를 믿어서 많은 복을 받아 편안히 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무엇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예수를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따르면서 어찌 평안하고 복받기만 바라겠습니까? 만에 하나라도 "주님, 십자가는 제가 지겠습니다" 하는 각오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만일, 주님께서 지금 여기에 계시다면, "주님, 십자가는 제게 주십시오. 영광은 주께서 받으시옵소서"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기는 했지만 핍박을 각오하지 못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죽을 결심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좁은 길이요, 험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핍박과 환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미, 앞에서 공부했습니다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핍박했는데 너희들은 핍박하지 않겠느냐? 나를 죽였는데 너희들은 죽이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러한 부자유한 때가 을 것을 경고하신 이 말씀에 대해 이제 사도 요한이 해석을 합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라."(21: 19) 우리는 혹시 내가 잘 되어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내가 출세해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때로는 내가 손해봄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 수 있고, 내가 죽어야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받는 환난 내가 받는 핍박,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 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내가 건강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병들어서 영광 돌리는 일은 더욱 많습니다. 내가 성공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아가는 일도 있지만, 내가 실패함으로 더 큰 영광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이 있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처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기를 바라는 뜻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잘되어서 하나님께 영광된다면 잘되게 해주시고, 건강해서 하나님께 영광 된다면 건강하게 해주시고, 가난해서 하나님께 영광 된다면 가난하게 해 주시고,병들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아갈 수 있다면 병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 그런 믿음으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의도가 바로 이것이라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로마에서 죽었습니다. 유명한 쿼바디스 영화를 보면, 베드로는 마지막 죽을 때도 좀 비겁한 면을 보이고 있습니다.

로마에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있자, 그는 로마에서 도망해 나옵니다.

도망가는 길에서 뜻밖에 주님을 만납니다. 물론, 베드로가 도망간 것은 목숨이 아까와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의 수제자로서 살아 있어야 복음을 전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영화에서 보면 여러 사람들이 길을 알선해 주고 도망가는 일에 협력을 해줍니다. 다른 사람들은 순교를 당하더라도 베드로 선생은 살아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 일을 바로 지도해야 된다는 것이 많은 성도들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밖을 빠져나가는데, 의외로 주님께서 길을 가로막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유명한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은 "네가 버리고 나온 로마로 돌아가서 너를 위하여 다시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다"고 끔직한 대답을 하십니다. 너무 놀란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로마로 되돌아가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합니다. 안드레는 옆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알고 지나가야 할 것은 예수님의 열 한 제자가 모두가 핍박을 당하고 순교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왜 이렇게 했겠습니까? 그래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각오하는 바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내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찬송을 부르는데, 사실 쉽게 부를 수 있는 찬송이 아닙니다. "내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했으면, 살면 사는 대로 죽으면 죽는 대로, 핍박받으면 받는 대로 불평 없이 "아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 뜻대로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도 바로 이것 아닙니까?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기도하시고 십자가를 수락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는 잘 생각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어느 성도가 고백하기를 자기는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의 찬송을 부를 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라는 구절에서 언제나 막힌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은 없어도 좋지만 이름과 빛은 내면서 일하고 싶다는 솔직한 표현입니다. 죽어서까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깊은 뜻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내가 성공해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고 내 중심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죄 때문에 죽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의로 인하여 죽어야 하고, 자원적으로 죽어야 합니다. 자원적으로 도망가다가 붙들려서 죽으면 안 됩니다. 도망갈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기다리다가 의로 말미암아 죽어야 합니다. 옛날에 이북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815 해방 후로부터 625때까지 이북에는 교회가 많았습니다. 교회가 부흥되는데도 교역자들은 수난을 많이 당했습니다. 어느날은 갑자기 목사님이 보이지 않고, 어느날은 장로님이 보이지 않는 등 예고 없이 많은 분들이 붙들려 가서 수난을 당했습니다. 목사님들은 얼마든지 남한으로 도망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주변에서도 여러 번 남하할 것을 권했지만, 양들을 두고는 갈 수 없다는 한결같은 대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곳에 남아 있던 목사님들은 그대로 순교하셨습니다. 충분히 도망갈 수 있었지만, 자원적으로 양들을 지키기 위해 버티다가 돌아가신 것입니다. 자원적인 십자가였기에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또한 이것은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증인은 죽음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을 믿기 때문에 죽음 앞에 비굴하지 않고 어느 때나 떳떳하게 가는 것입니다.

어느 때 부르시더라도 "네 가겠습니다" 하는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원수를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스데반처럼 나를 죽이는 자를 용서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정말, 잘 죽어야 합니다. 나의 인생의 마지막을 잘 정리하여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면 더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다음 19절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상한 데에 신경을 씁니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21:20-23) 베드로는 요한을 가리키면서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신경을 쓰자, 예수님은 한 마디로 자르셨습니다.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살려둘찌언정 너와 무슨 상관이냐?" 베드로가 멀쑥해졌을 것이 상상이 됩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맙시다. 저 사람이 천당 갈까 못 갈까 하고 남의 신앙까지 걱정하는데, 그것은 그 사람의 일입니다.

남의 일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사람은 자기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남편도 내가 아닙니다. 남편의 신앙은 남편 것, 내가 할 일만 열심히 합시다. 좋은 남편되고 안 되고는 불편해도 참으시고 내 할 일만 열심히 해서 좋은 아내가 되면 됩니다.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십시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 비판하다가 나의 신앙 그르치기가 쉽습니다. 베드로가 요한에게 신경 쓰는 데는 그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고 사도 요한은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생각에는 자기는 비참하게 죽을 것이고, 요한은 어떻게 될까 하고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의 가책 때문에 이런 질문이 나온 것 같습니다. 둘째로는, 약간의 질투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요한과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서로 네가 크냐 내가 크냐로 신경이 곤두섰던 사이로 짐작이 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썼다는 좋지 못한 태도입니다. 비교를 하다 보면 엉뚱한 결론이 나오기가 쉽습니다.

물론, 감사한 마음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원망하는 마음이 더 많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조차도 비교하는 것은 아주 싫어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언제나 직선적 관계, 절대적 관계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내용이 대단히 가혹합니다.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둘찌라도 너와 무슨 상관이냐?" 비교해서 생각하지도 말고 너 할 일만 하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 있는 포도원 비유가 생각납니다. 일꾼들을 아침 9시에 보내고, 12시에 보내고 3시에 보내며, 그리고 5시에 보냈습니다. 마지막에 온 일꾼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똑같은 품삯을 지불하여, 먼저 온 사람들이 불평을 했습니다. 이때, 주인은 대답하기를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20:13-14) 고 분명하게 자기가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은혜를 받든 받지 않았든, 예수를 잘 믿든 믿지 않든 내가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니 나의 믿음이 어떠한가만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절대적인 관계로써 은총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베드로는 유대 사람에게, 요한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바울은 이방 사람에게 각각 맡은 바가 다릅니다. 야고보는 교회가 설립되자마자 벌써 목베임을 당하여 첫번째로 순교했습니다. 죄가 많아서 먼저 죽었다고 말하겠습니까? 제자 중에서 순교 제1호라는 영예를 오히려 얻었습니다. 사실은, 다 일리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다른 사람들의 일에 대해 간섭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남의 일에 신경 쓰다 보면 내가 해야 할 일의 중심을 잃어버립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사님은 집사대로 할 일이 있고, 장로님은 장로님대로 할 일이 있습니다. 자기 할 일만 충실히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다보면, 다른 사람의 일을 생각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존경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다양한 일을 시키시고, 여러 가지 환경 속에서 기능적으로 수고하게 하여 그들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어떤 사람은 지식을 쌓아서 영광 돌리며, 어떤 사람은 음악을 통하여 또는 봉사를 통하여, 이렇게 여러 가지로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이 더 복된 일이고, 어느 것이 더 복을 받지 못한 일이라고 말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사명이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내 형편대로 주님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요한 웨슬리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일을 다하기까지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무슨 뜻입니까? 어느 때라도 나에게 죽음이 왔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의 기한이 다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시는 시간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살만큼 살게 하여 주실 것이고 일할 만큼 일하도록 하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문자 그대로 "내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오직 영광만 받으옵소서" 하는 마음이 요한 웨슬리의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입니다. "너는 내 양을 먹이라", "나를 따르라", "저가 너와 무슨 상관이냐?" 오늘도 나를 부르시는 이 부름에 바로 응답해야 합니다. "주님, 나는 주를 따릅니다.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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