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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고린도전서 15장 12-19절]

by 【고동엽】 2022. 4. 9.
 
부활 목차 돌아가기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고린도전서 15장 12-19절]

 

약 20여 년 전에 제가 미국의 시카고에서 살고 있던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매우 흥미로운 신학 토론이 벌어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쪽은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달라스 신학교의 교장이었으며 다른 한쪽은 어느 일반 대학교에 속한 신학교수였습니다.
  전자는 보수주의 기독교를, 후자는 자유주의 기독교를 각각 대변하면서 '성경무오설' 등에 대한 신학 논쟁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논쟁의 주제가 '부활'로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자유주의 신학교수는"기독교의 부활을 현대에 와서는 더 이상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아니 되고 어떤 다른 새로운 차원의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달라스 신학교 교장은"육체적 부활을 믿지 않으면 참된 기독교가 아니다."라고 강조하면서 성경 말씀 한 절을 인용했는데, 그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5장 14절의"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라는 구절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그런 논쟁을 들으면서 정말 놀란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그 토론의 진행을 맡은 사회자가"나는 육체적 부활을 믿지 않는다."라는 그 자유주의 신학교수의 말을 듣고는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놀랐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회자는 그 교수에게"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정말로 믿지 않습니까?"라고 거듭 다짐하듯이 물었습니다.
  그 사회자도 분명히 기독신자였을 텐데, 그는 명색이 신학교수라는 사람이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믿지 않는다고 자기 입으로 말하는 것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부활을 믿지 아니하는 '이단 기독교'는 오늘날의 현대교회에 와서야 비로소 나타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이미 사도 바울 시대, 즉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 실제로 일어난 후 채 반 세기가 지나가기도 전에 벌써부터 초대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즉 부활은 불신자에게 있어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을 뿐 아니라 초대교회 시절 때부터 바로 기독교 내부에서부터 집중적으로 도전을 받은 신앙의 쟁점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겠습니까?
  이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을 빼 버려도 여전히 존속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과연 '부활 신앙' 없이도 기독신자가 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성령께서는 사도 바울의 영감을 통하여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단언하고 계십니다.
  오늘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저와 여러분은 이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과 '기독신자의 영생부활'이 왜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것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부활은 기독신자에게 있어서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기독교 신자들이 믿는 복음에서 만일 부활이 빠진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알맹이 빠진 빈 껍질'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문 12절부터 15절의 말씀에"12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4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고 했습니다.

  12절 상반절을 좀 더 의미가 분명해지도록 번역하자면 '그리스도가 전파될 때에는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파되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전한다.'는 것과 동격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부활이란 사도들이 제일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때부터 그 내용의 핵심 중의 핵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라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바깥 불신 세계로 나갈 것도 없이 바로 고린도교회 안에 있던 교인들 중에서 이 부활을 불신하고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부류는 크게 둘로 나뉘었는데, 한쪽은 당시의 헬라 철학에 깊이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로서, 사람의 영혼은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육체 속에 갇혀 지내다가 죽으면 이제 그것이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육체의 부활이란 것은 이제 자유롭게 된 영혼을 또다시 부자유스럽게 구속하는 것이니 오히려 인간에게 불행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 다른 한 부류는, 부활이란 예수를 믿고 나서 새롭게 시작되는 이 세상의 생활을 두고 하는 말이지 결코 죽었던 육체가 다시 살아난다는 뜻은 아니라고 주장했던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오늘날의 자유주의 기독교에서 소위 '재해석'하는 부활의 의미와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는 13절 말씀은 기독신자의 영생부활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과 철저하게 직결되어 있음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모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부활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이 있었기 때문에 신자의 부활도 가능하게 된 것이며, 반면에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당연히 다른 그 어떤 사람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없을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4절과 15절 역시 부활이야말로 기독교 복음의 핵심임을 다시금 반복강조하고 있습니다.
  14절에서"우리의 전파하는 것"이란 말은 '사도들이 전도하고 설교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전도와 설교의 내용' 즉 복음 그 자체를 두고 한 말입니다.
  또한 14절 하반절에서 두 번 반복되는"헛것"이란 '속이 텅 비어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기독교가"전파하는" 복음이란 다 '헛소리'에 불과한 것이 되며 기독교인들의"믿음"이라는 것도 아무 '알맹이 없는 빈껍데기'밖에 남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이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그 출발에서부터 희대의 사기극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문 15절에서 사도 바울이 자기 입으로"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라고 말하고 있는 대로, 그런 예수 부활의 복음을 전파한 사도들은 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한 사기꾼 집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사도들은 단 한순간이라도 그런 '속 빈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15절 하반절에서"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는 말씀은 아까 13절의 말씀에서"하나님이"라는 말만 더해진 내용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목적은 바로 그 '첫 부활'을 통하여 다른 모든 '죽은 자'들까지도 다시 살리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며, 사도들은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시종일관"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부활신앙은 그것을 전파하는 자에게 있어서도 '복음의 알맹이 중의 알맹이'이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며 믿게 되는 신자에게 있어서도 '믿음의 핵심'입니다.
  부활이 빠진 복음이라는 것은 아무리 다른 미사여구로 치장되어도 다 '속 빈 강정'이며, 부활이 제외된 신앙이라는 것은 제아무리 나름대로 진실하고 양심적이라고 주장해도 어디까지나 '구름 잡는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소위 신학자라는 사람들이 이 예수님의 부활을 '다른 각도로 해석하는' 새로운 복음이란 것을 만들어 내고 있으며, 기독교인이라고 자칭하면서도 자신의 영생부활은 믿지 않고 신앙이라는 것을 그저 무슨 윤리와 도덕에만 직결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슨 인생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만한 상담이나 충고를 해 주면서 그것을 믿으라고 합니다.
  그들은 이 인간사회의 모순이나 부조리를 개조해 낼 수 있는데 도움이 될 만한 어떤 '좋은 말씀' 한 두 구절을 성경에서 인용하여 설교하면서 그것을 복음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렇게 전파하는 것은 다 거짓말이요 그렇게 믿는 것은 다 헛수고다.'라고 이처럼 똑똑히 선포하고 있는 이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이 도대체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전해 듣고 믿는 복음은 '무언가 실제로 일어났던 기쁜 소식' 즉 '하나님께서 죄인 구원을 위하여 이루어 놓으신 특별한 사건을 전파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물론 그 '기쁜 소식'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입니다.
  그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이 있어야 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영생부활'도 믿을 수 있는 약속이며 실현 가능한 소망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의 정점을 빼 놓으면 다른 아무리 듣기 좋은 말, 그럴듯한 교훈을 전한다 해도, 그것은 오로지 '헛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의 출발점인 복음이 속 빈 껍질만 남게 되며 자연히 우리의 신앙이란 것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반드시 '부활을 믿는 신앙'을 지키고 '부활이 있는 복음'을 전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부활은 기독신자에게 있어서 '삶의 결승점'이기 때문입니다.

 

  기독신자의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는 바로 천국의 영생에 있는데, 이것은 오직 '부활'이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16절 이하 19절에 기록하기를"16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7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했습니다.

  16절에서 사도 바울은"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즉 '신자에게 부활이 없다면'"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즉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것도 아예 필요 없었을 것이라.'고, 이 양자 사이의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이 본문에서만 해도 벌써 세 번째로 반복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 기독신자들의"믿음"도 헛것이 될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우리가"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천명했습니다.
  원래 사람은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가운데'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죄의 값'은 사망이므로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자는 예외가 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만일"이라는 가정이 사실이라면, 즉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던 것이라면 엄청난 비극이 따라오게 되는데, 바로"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란 바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죽은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네들을 다시 살려 주실 것, 즉 부활을 믿고 무덤에서 '잠자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던 것이라면 이들은 여전히 '죄의 값인 사망의 저주'에 꼼짝없이 붙잡힌 상태로 죽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렇게 기대했던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도 절대로 그들에게 벌어지지 않을 것이며, 그 결과는 사도 바울이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는 그대로 '폭삭 망한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정말이지 망해도 철저히 망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부활이 없으면 십자가를 통해서 죄 용서 받는다는 것부터가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망은 '죄의 삯'으로 주어진 것이니, 우리가 정말 죄 사함을 받았다면 그것은 어떤 '마음의 위로'나 '양심의 자유'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사망까지 벗어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말씀까지도 무의미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사도 바울은 '만일 부활이 없다고 가정할 때' 생기는 비극적인 결과를 이어지는 19절에서 더욱 처절하게 표현하기를"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딱 까놓고 하는' 말입니까?
  만일 기독신자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얻게 되는 은혜와 축복이라는 것이"다만 이생뿐"이라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하여 받는 것이 고작 이 현세의 인생에서 약간의 기쁨이나 보람이나 행복이나 만족 따위에 그치는 것이라면, 세상에서 우리 기독신자들보다도 더 불쌍한 인생은 없다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초대교회 당시 주위의 이교도들은 '죽음은 모든 것의 종말'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사망을 정복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나아가서 바울같이"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까지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부활을 부인한다면 당시"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가 되었던 초대교회 성도들이 공유하고 있던 최대의 소망은 산산조각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이 기독교에 내세의 부활이 없다면 그것을 믿는 기독신자란 그야말로 이 세상의"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자"들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수를 믿음으로써 무슨 인생의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것이라면 주일예배 시간에 차라리 어디 놀러나가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입니다.
  신자가 됨으로써 좀 더 착하게 살고 자기 삶에 대하여 스스로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을 만한' 만족을 얻고자 하는 것이라면 굳이 교회에 헌금할 필요 없이 그저 가난한 이웃들이나 좀 돕고 자선단체에 직접 기부하는 편이 백번 더 효과적일 것 아니겠습니까?
  폐일언하고, 만약 부활이 없다면 정말이지 그저 불신자처럼 '내일 죽으리니 오늘 먹고 마시자.'하면서 멋대로 사는 것이 훨씬 더 간단하고 편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고린도교회 안에도 바로 그런 이단의 유혹에 속아 넘어간 교인들이 꽤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런 자들을 가리켜 아예"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고전 15:34)라고 못 박았습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교인이란 바로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나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종교도 기독교처럼 인간을 '죄 가운데' 사망의 저주를 받은 존재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또한 그 어떤 종교도 기독교처럼 그런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사망에서 부활에 이르는' 이런 놀라운 구원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궁극적인 소망이 있는 까닭에 기독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그 예수 신앙 때문에 당하는 모든 모욕을 이겨내고 모든 고난을 감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 목적, 내 삶 수단'이라는 이 멋진 인생 공식을 깨닫고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런 부활 소망 없이 신자라고 자처하는 자들은 그저 이 '이생에서' 자기가 잘 되는 것만이 자신의 신앙생활이란 것의 최종 목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내 인생이라는 목적을 위하여 예수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무례한 철면피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교인들에게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도무지 이해될 수 없는 소리가 됩니다.
  '봉사하고 헌금하라'는 목사의 '바른 교훈'의 설교는 그처럼 '자기 사욕을 좇을 스승'만을 좋아하는 교인들의 '가려운 귀'에는 그저 거슬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일 죽으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 교인에게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부활의 주님'이란 자기네들이 '오늘 마음대로 먹고 마시는' 일에 제일 귀찮은 방해물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부활을 믿고 소망해야만 합니까?
  바로 그것만이 기독신자 생활의 마지막 종착점이요 진짜 영광스러운 결승 테이프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 부지런히 모이기를 힘쓰는 예배생활이나 선한 일에 부요하게 섬기는 봉사나 평화시대에도 순교의 각오로 충성하는 이 '특이한 삶'이 결코 '공든 탑이 무너지는' 실패로 끝나지 않을 것은, 바로 '죽은 자의 부활'이 엄연히 실존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부활이라는 이 최고의 소망이 없으면, 기독신자라 하면서도 그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결국에 가서는 '닭 쫓던 개'의 신세, 아니 '완전히 망하는 인생'이요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영생부활이라는 이 멋진 결승점을 반드시 통과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아까 서론에서 말씀드린 그 토론은 그날에 거론된 모든 의제에 대하여 쌍방 간에 그 어떤 합의점도 찾지 못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논쟁으로만 일관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방송을 보면서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같은 기독교라 해도 그처럼 '성경의 무오설'이나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믿지 아니하는 자유주의 기독교란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 그 진짜 정체를 그런 사회자처럼 순진한 미국의 평신도 신자들에게 여실히 드러내 보여 준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디 비단 미국뿐이겠습니까?
  지금 기독교는 세계적으로 가장 신자 수가 많은 종교가 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처럼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아니하고 그 자유주의 신학교수처럼 무슨 '부활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조명' 운운하는 목사나 신학자나 교인들이 수두룩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똑같은 상황을 고린도교회 안에서 보고 있었기 때문에"너희 중에서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라고 한탄했습니다.
  불신자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소위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 중에서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정말 기가 찰 노릇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 자체가 결코 성립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을 영접하는 신앙이 우리 기독신자의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입니다.
  이 육신 생명의 죽음이 우리 기독신자 생명의 끝이 절대로 아닙니다.
  죽도록 충성한 자에게 약속된 '생명의 면류관' 즉 영생부활이 우리가 반드시 도달해야 할 결승점입니다.
  이 부활이 없으면, 이 부활을 믿지 않으면, 이 부활을 소망하지 않으면, 기독신자로서의 출발과 끝이 동시에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탈선'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예 '다른 길'에 서 있는 신앙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이 없는 기독교'란 실상은 오로지 이단일 뿐인 것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는 말은 적어도 기독교 신앙생활에는 절대로 통할 수 없는 말입니다.
  왜냐하면"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하신 이 예수님을 믿어야만 영생부활의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선포하신 이 그리스도 외에 '모로 가는 구원의 길'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이토록 진실하고도 힘 있게 전파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신앙'을 지킴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이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하시는 날에 저 영광스러운 영생부활의 천국 결승점에서 꼭 함께 만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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