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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12:3-13
제목: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많은 지체, 교회의 위력
여러분, 오늘 본문은 교회 생활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을까를 예상하게 만드는 본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코로나 때문에 2년 이상 대면 접촉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련회도 못했고요, 교제하는 장소도, 교제하는 나들이도 못했습니다. 아무것도 못했죠. 그러니까 대면적 접촉, 살가운 교제의 기쁨이 뭔가를 서서히 우리가 망각해 가고 있는 중이거든요. 그래서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가 전반적으로 활력이 약해졌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생활이 격려받기 힘든 시대에 믿음의 정절을 지키고 하나님에 대한 뜨거움을 유지하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코로나가 앞으로 1년 더 갈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어려운 때 고립되고 비대면의, 비접촉의 격리 장소에서도 유배지에서도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했던 장로 요한처럼 우리 교우들이 홀로 있을 때 뜨거워지는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여럿이 모일 때, 함께 모일 때 신앙을 뜨겁게 폭발시키기에 아주 적합한 그런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말해 코로나는 우리에게 부정적인 것만이 아니고, 교회의 활력을 앗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진짜 신앙의 위력을 맛본 사람들이 많아지므로 대면 접촉과 대면 만남의 의미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거죠.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 그다음에 개별적인 지체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다른 지체의 관점, 다른 지체의 활동을 존중하는 다원적 관용성 이것을 이제 가르쳐줍니다. 이 다원적 관용성이라는 말은 내가 하는 일은 귀하고 다른 지체가 하는 일은 귀하지 않다 라고 생각하는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의 그 분란, 다시 말해서 서로 경쟁하는 은사의 분란을 지금 생각하는 겁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충만한 사람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자랑이 심했고, 너무 과활력적이었습니다. 에너지가 넘쳤습니다. 에너지가 넘쳤다 보니까 너무너무 각자 교우들의 목소리가 커서 사도 바울을 override하는 사도 바울까지도 그냥 override하는, 도발하는 그런 정도까지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은사와 재능이 넘쳤습니다.
그런데 오늘 로마서 12장에는 그런 부정적인 양상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오로지 교회 안에는 두 가지만 잘 지키면 된다. 그러면 교회 생활이 너무나 행복하다. 첫째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는 이 훈련을 해야 한다. 여기서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라는 말이 참 중요한데 그 말뜻은 신실함, 자기가 하나님께 바치는 신신함에 빗대어 자기가 하나님께 바치는 신실함을, 책임감을 전제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특정 교회에 바쳤던 신실함이 크지 않는데 크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냐면 교회 안에서 높게 생각할 사람과 높게 생각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는데 그 기준은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예수님과 하나님께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께 바치는 충성심이 높게 생각하는 사람과 높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구분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여러분 교회의 장로, 여러분 당회가 우리 예수교 장로회 당회 보세요. 54조의 당회 규정 보세요. 그 54조 당회 규정이 얼마나 당회를 힘 있는 기관, 엄청난 기관으로 만들어 놓았는지 모릅니다. 그 당회는 인사, 재정, 선교, 정책 모든 것을 당회가 다 결정합니다. 그런데 그 당회가 그렇게 교인들을 대표해서 이렇게 엄청난 결정을 해도 되는 그 당시 당회가 구성될 때 유일한 조건은 당회원이 될 사람들은 압도적으로 신실한 사람들, 압도적으로 충성심이 많은 사람들, 목숨과 재산을 다 바친 사람들이 당회를 구성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말합니다. ‘저렇게 예수님 때문에 저렇게 치열한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들이 내리는 결정은 소수가 내리는 결정이지만 교회 전체의 유익이 되고 하나님 나라에 유익이 될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게 참 중요합니다. 여러분 목사님을 믿는 이유는 목사님은 우리 교인들 150명보다 숫자는 적지만 목사님이 하는 말은 한 명의 목사지만 담임 목사님, 당회장 이렇게 높아진 목사님들이 훨씬 더 하나님께 바치는 충성심이 크기 때문에 그 충성심의 크기에 비례하여 목사님의 생각에 중요도가 받아들여진다는 거죠.
오늘 본문에 보면은 믿음의 분량이 뭔가를 확 믿어버리는 그런 믿음 아닙니다. 그런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충성심의 분량대로 하나님께 바치는 충성심의 분량만큼 생각하라. 하나님에게 받는 신임의 분량만큼 여기서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신임해 주는 그 신임의 분량, 하나님께 내가 바치는 충성심의 분량, 이 두 가지 분량만큼 비례적으로 생각하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받은 신뢰, 하나님께 바치는 신실함이 큰 사람이 높게 생각하고 그것이 적은 사람은 높게 생각하지 말아야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아주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겁나죠? 교인은 한 300명이 되는데 한 5명 정도의 장로가 교회 앞날을 막 농단한다고 생각하면 두렵죠? 사실 두렵습니다. 그런데 그 5명의 장로님이라는 분이 진짜 신실하고 진짜 하나님께 받는 신뢰가 크고 신임이 크고 하나님께 신임받는다는 증거가 있고 또 이 장로님들이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 앞에서 바치는 충성심이 특심할 때 ‘아 저분들은 저렇게 신실함의 아이콘들이니까 하나님께 받는 신뢰가 크기 때문에 저분들의 결정은 그래도 우리 모두에게 유익하리라’는 믿음, 그것이 당회가 작동하는 원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실제로 신실함의 정도에 따라 높게 생각하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신임에 따라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는 신임도에 따라서 생각하라 그러니까 일종의 기독교는 영적 봉건주의입니다. 영적 봉건주의라는 말은 뭐냐 하냐면은 돈이 많은 사람이 지배하고 군사력이 많은 사람이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충성심을 바친 사람, 하나님께 그 충성심을 인정받은 신임도에 따라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봉건주의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천국은 봉건주의다”라고 그랬습니다. 왜? 하나님께 신임을 많이 받은 사람이 더 많은 고을을 다스리기 때문에요. 하나님께 더 많은 신뢰를 받은 사람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통치자가 되기 때문에요.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하나님 나라에 가면은 주와 함께 다스린다는 그런 말이 뭔가 실감 합니다. 하나님께 지금 신뢰를 많이 받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가면은 더 많이 다스린다는 말은 역할이나 책임이 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우리 교회 안에서 지속적으로 신뢰받는 사람, 몇 년째 계속 신뢰받는 사람, 모두에게 신뢰받는 사람 그런 사람이 당회를 구성하는 것을 우리는 대의제 교회 정치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여러분, 우리 교회 교우들을 잘 서로 관찰하셔야 합니다. 누구의 말이, 누구의 기도가 누구의 의견이 합당한가를 잘 판단해서 신뢰를 보여줘야 됩니다. 하나님의 신뢰를 받은 사람이 교회에게 영향력을 많이 끼치는 생각을 하는 것을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믿음의 분량대로 말하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신임도의 분량에 따라 하나님께 바치는 충성심의 그 분량에 따라 생각하라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충성심이 약한 사람들이 교회를 지배하는 생각을 드러내면 안 된다, 하나님께 신뢰를 적게 받는 사람이 교회를 좌우하는 그런 엄청난 결정을 농단하면 안 된다 이런 뜻입니다.
이 기준이 엄청 중요하고 두 번째로 다원적, 다원적 관용성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뿐만 아니라 다른 지체가 하고 있는 일도 또한 중요하다고 믿는 지체론입니다. 지체론. 그것이 뭐냐 하냐면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야~ 이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을 가만히 보면은 정말 한 몸에 붙은 지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서 말수는 적지만 조리 정연한 사람이 있고, 우리 교우들 중에서 문턱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이 있고, 우리 교우들 중에서 말없이 중보기도를 일삼는 사람이 있고, 우리 교우들 중에서 말없이 익명으로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우들 중에서 몸으로 봉사하는데 민첩한 사람이 있습니다. 언제든지 5분 기동타격대처럼 교회를 위해서 시간을 내고 재능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가향교회는 지금 교회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 교우들이 자기가 교우들에 대해서 바칠 사랑을 표현할 기회를 갖질 못했기 때문에 제가 알고 있는 가향 교우들은 묵직한 진심의 사람들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사람들은. 허영심에 떠 있거나, 거짓말을 일삼거나, 과장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저는 봅니다. 우리 교우들은. 이를 과소평가하면서 적게 평가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자기가 대단하다고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은 제가 볼 때 단 한 명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이, 여러분 서로에 대해서 얼마나 존귀한 자인가는 아직까지 발견할 기회가 없었죠? 그죠? 막 이제 알려고 하는 사이에 코로나가 덮쳐서 그죠? 잘 몰랐잖아요? 그죠? 앞으로 천천히 조금씩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으면 예수님의 몸에 붙어 있으면 반드시 지체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몸에 붙어 있는 만큼 지체랑 결속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한 몸에 많은 지체, 그래서 우리 하나님을 만나러 가지만 또한 사랑하는 교우들과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 교회 생활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만나러, 왕이신 하나님을 송축하는 그 감격 플러스 교회 예배를 마치고 사랑하는 성도들과 차를 마시는 기쁨, 그리고 담소를 나누는 기쁨, 남산에 산책하는 기쁨, 연극을 같이 보러 가는 기쁨, 동막 뻘밭에 가서 뻘 축제를 벌이는 기쁨, 이런 것들이 이제 교회 가면 싹 나오는 거거든요. 저도 2019년에 연구년 끝나면은 우리 아동 교우들을 동막 뻘밭에 초청해서 뻘 축제를 한 번 할 마음이 있었습니다. 제가 우리 몇몇 교우들에게 편지를 썼는데 어른들이 아동들을 데리고 숲속을 산책하는 것을 매주 토요일 날 하는 것을 보면서 너무 부러웠습니다. 너무 부러웠습니다. 아이들이 새처럼 지저귀는데 너무 행복한 아이들이 엄마, 아빠, 할머니와 함께 그 숲속을 짜~악 산책하는데 그 축제의 그 정도가 너무나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게 보여서 제가 우리 구교준 목사한테 영상을 보내줬습니다. 이렇게 토요일마다 한번 해보라고. 너무 아름다워서. 여러분 모두가 이렇게 살가운 접촉을 조만간에 하게 되면은 예수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이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내 인생을 부축하고 내 인생이 죄로 방황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천사들인가를 알게 됩니다. 이렇게 다른 지체들을 보십시오. 위로하는 지체, 다스리는 지체, 구제하는 지체, 긍휼을 베푸는 지체, 이런 사람들이 교회 중간에 박혀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위로하는 지체, 구제하는 지체, 다스리는 지체, 긍휼을 베푸는 지체가 아주 교회에 요소요소에 구역에 한 명씩만 박혀있어도 너무 좋지요. 그래서 10절입니다.
10 형제를 사랑하고 자매를 사랑하고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기만 하면은 이렇게 좋아집니다. 그러면 환난을 이길 힘이 나옵니다. 12절입니다.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이 세 가지가 가능합니다. 성도의 교제가 무르익으면은 이 세 가지가 쉽습니다. 첫째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는 능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그리고 가난한 성도들입니다. 이때 13절은 가난한 성도들입니다. 이때 성도들은 예루살렘 사람들로서 이스라엘 사람들로서 이방인의 땅에 와서 사는 이런 신자들을 성도라고 그랬습니다. 이 성도라는 말은 전문 용어입니다. 유대인 출신 기독교인들을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모든 이방인 신자를 성도라 부르지 않고 성도는 이스라엘 출신 신자들, 가난한 신자들 이들은 로마에 와 있는 해방 노예이었거나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성도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공급하며 손 대접, 신앙의 이웃 때문에 나그네가 된 사람들을 영접하기에 힘쓰라 이것이 교회의 위력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서로 초청하기를 즐거워하는 사람들이고 함께 손 대접하기를 즐거워하는데 우리 교회에는 표류하는 난민이 찾아올 수 있고, 우리 교회에는 소득이 약간 모자라서 우리 온 교우가 힘을 합해서 그의 자존심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은근히 도울 수 있는 사랑이 많이 축적되어 있습니다. 가향교회는 그런 교회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여러분 가향교회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이 모든 코로나 시국이 끝나고 다시 좋은 목양 체제를 갖추고 새로운 목사님이 오시고 구역도 활성화 되고 그러면은 아마 여러분 가향교회에 속한 것이 아마 굉장히 기분 좋을 겁니다. 아, 지금은 좀 과도기라서 ‘아~ 나는 이제 새 교회를 찾아가야 되겠다’ 그런 사람이 있고 또 페이스북에 ‘나는 이제 새 교회 찾겠다’ 막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있는 교회가 새로운 좋은 교회입니다. 코로나가 여러분을 위축시켜서 대면 접촉을 위축시켜서 지금 조금씩 다 영적 영양실조가 있는 것 맞습니다. 그런데 조만간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많은 지체들로 한 몸을 이루는 기쁨을 충분히 만끽하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소망 중에 참으며,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을 참으며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성도 여러분 모두에게 큰 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코로나 환난이 우리를 오래 참게 만들고 소망 중에 주를 즐거워하게 만듭니다. 하나님 이렇게 살가운 교회를, 가향교회를 만들어 주시옵시고 가향교회에 속해 있다는 기쁨이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을 하나님 나라 갈 때까지 부축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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